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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7 - 로마 3차례 포에니전쟁 중에 제1차 전쟁에서 해전으로 승리하다!
중국에 우공이산(愚公移山) 이라는 말이 있다면 서양에는 “인내와 근면은 산을 옮긴다” 는 말이 있으니
이런 경우가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이야기 1권의 제목을 쓴, 세르반테스가 처음 말했다는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Rome was not built in a day" 는 말이니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BC 270 년은 로마가 건국된 BC 753년 에서 483년이나 걸린 것이니 대기만성(大器晩成) 인가 합니다.
이탈리아 남부 그리스인의 도시 타렌툼을 지원한 에페이로스 왕국의 왕 피로스 1세를 12년간
전투 끝에 기원전 270년에 격퇴하고 이탈리아 남부마저 장악한 로마는 이제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세력이 되었고 시칠리아 섬과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는데.... 지중해 동쪽
페니키아(레바논) 의 티레인들이 이주해 세운 카르타고(튀니지) 는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계
그리고 에트루리아계 도시들과의 내분에 개입해서는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가 루비콘강 이남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지 5년이 지난 기원전 265년 로마 원로원은 시칠리아
최강국인 시라쿠사로 부터 공격을 받은 메시나가 구원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내오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메시나가 카르타고 대신 로마에 구원을 요청한건 메시나해협
맞은편에 자리한 나라로 로마의 세력권에 들어간 레기움(레조) 의 좋은 상황을 보았던게 이유 입니다.
레조는 시라쿠사나 메시나처럼 그리스인들이 이민해 세운 도시인데 로마는 메사나가 라틴
연합 동맹이 아닌데다가 군선은 몇척 있었지만 메시나 해협을 건널 해군과 수송
선단이 없었기 때문이니.... 정 급하면 로마 영토가 된 나폴리나 타란토에 해군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농경민족 로마는 바다를 건너 원정한다는게 탐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마가 지원을 거절하면 메시나는 카르타고에 의존할 것인데, 카르타고는 이때
시칠라의 절반인 서부를 차지하고 있었고 북쪽 사르데냐섬과 코르시카섬에
서쪽 스페인 해안지대도 카르타고가 차지하고 있었던지라 지중해 최고의 해운
국가인 카르타고가 메시나까지 차지하면 로마와 국경을 접하는게 부담스러웠습니다.
결국 원로원은 파병문제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민회에 회부하니 시민권 소유자 곧
병역 의무자들로 구성된 민회는 파병을 의결하는데 당시 로마인들은 이 결의로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1차만 해도 23년이나 이어질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로마인들의 생각은 “메시나를 카르타고에 넘겨줄수는 없다” 라는 정도였다고 보여집니다.
기원전 264년 명문 귀족 가문인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디우스의 로마군 2개군단은 3월 15일 로마를
출발해 걸어서 레기움에 도착하니 우방도시들이 제공한 함대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메시나
해협에는 카르타고배가 순찰하는게 보였는데 1만 7천명의 병력을 태운 함대는 아드리아해
쪽이 기온이 높다보니 매년 1.5m 높이의 바닷물이 증발하므로 자연히 조수는 티레니아해에서
아드리아해로 흐르니 물살이 세다고 하는데.... 빠른 물살 때문에 밀집 대형으로 바다를 건넜습니다.
로마가 메시나와 동맹을 맺자 그동안 서로 싸우던 그리스인인 시라쿠사와 페니키아
민족의 카르타고는 위협을 느껴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동맹을 맺고는....
남쪽과 서쪽에서 메시나로 진격하는데 클라우디우스는 적을 이간질하기 위해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에게 강화를 제의했으나 거절당하자 시라쿠사군을 공격합니다.
용병을 주축으로한 시라쿠사군은 숫자는 많았지만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시민군, 로마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으니 금방 격퇴당해 달아나자 여세를 몰아 서쪽 카르타고군을 공격하는데 역시 용병이 주축인
카르타고군도 간단하게 쳐부수고는 클라우디우스는 남쪽 시라쿠사로 진격해 수도의 성벽을 포위합니다.
하지만 겨울이 닥쳤고 지중해세계에서 겨울에는 전쟁중이더라도 휴전하는게 관례라 로마도 휴전에
들어가는데 1년 임기인 집정관 선거가 로마에서 치러지고 기원전 263년에 선출된 이는 명문인
마니우스 발레리우스와 처음 등장한 오타틸리우스 크라수스 였는데 크라수스는 삼니움족
평민으로 기원전 326년 부터 기원전 284년 까지 무려 40년간 로마와 전쟁을 벌였던 민족 입니다.
전쟁에 패해 항복한 이들 중에서도 평민 주제에 불과 20년만에 로마 집정관에 선출된게 놀라운데 2명
은 시칠리아에 파견되니 병력은 4개 군단으로 전년의 배가 되었는데 1개 군단은 로마 시민병이
보병 4,200명에 기병 300명이고 로마연합 도시 병사들은 이와 비슷하거나 조금 많았으니 1개군단은
1만명에 가까웠는데 지난해 집정관 클라우디우스는 2만에 가까운 자기 병사들을 거느리고 귀국합니다.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은 세습이 아니라 실력으로 지도자가 된 인물이니 통찰력이 뛰어난 현실주의자
였는데 시라쿠사 성벽은 난공불락이라 쉽게 함락당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가 로마와
싸우는 동안 예전의 적인 카르타고가 어부지리를 얻는게 걱정되는지라 그만 로마와 강활르 맺습니다.
강화조건은 동맹은 15년으로 하되 무한 경신할수 있으며 시라쿠사의 완전한 자치권과 독립은 존중되고
시라쿠사는 로마에 밀을 우선 판매할 의무를 지나 병력제공 의무는 없으며 로마에 배상금으로
100탈렌트를 지급한다는 아주 관대한 조건인데.... 로마는 여기서 전쟁을 끝내도 좋았을 것
이니 메시나는 로마 연합의 일원이 되었고 시라쿠사는 동맹국이 되었는지라 2개 군단을 철수합니다.
카르타고는 위기감을 느꼈으니 시칠리아에 대한 기득권이 침해될 위기에 놓이자 4만 대군을 시칠리아
남부 아그리겐툼(아그리젠토)에 상륙시키는데... 그 244년 전인 로마가 공화정으로 이행된 기원전
508년에 로마와 카르타고는 1차 협정을 맺었고 기원전 348년에 2차 협정을 맺었는데 지중해에서
카르타고 우위를 인정하는 불평등조약이지만 해상에 관심이 없던 로마로서는 개의할 필요가 없었다는!
1차 포에니전쟁 3년째인 기원전 262년에 카르타고가 인구 5만인 그리스계 도시 시칠리아 남부
아그리겐툼에 4만 대군을 상륙시켰다는 보고를 받은 로마는 집정관 2명이 이끄는 4개군단
4만명을 시칠리아에 파병해 아그리겐툼을 포위했는데 군량이 떨어져 위기에 처하자
시라쿠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났고 결정적으로 카르타고군 지휘관 무능으로 패배를 면합니다.
그해 12월 오랜 포위로 지친 카르타고 용병들이 밤에 도시를 벗어나 서쪽 마르살라로 도주하자 이제
민간인 뿐인 아그리겐툼은 로마군에 간단하게 함락됐으며 로마는 도실르 약탈하고 2만 5천명
주민을 모두 노에로 삼았으니 시라쿠사 시민들이 돈을 주고 사들여외상으로 하고는 도시로 돌려
보냈지만 1차 포에니전쟁을 기술한 아그리젠토의 필리누스와 다른 도시들도 로마에 등을 돌립니다.
이듬해인 BC 261년 새로 파견된 로마군이 내륙지방으로 진격하는 가운데 카르타고군의 보급을 차단
하기 위한 제해권 확보를 위해 함선을 건조하는데 당시 지중해를 제패하고 있던 카르타고 해군은
5단층 갤리선이 120척을 소유하고 있었던데 비해 로마는 동맹도시인 나폴리와 타렌토는 3단층
갤리선이 고작이었으니 3단층 갤리선 이란 노잡이가 갑판 아래 3층으로 된 단 위에서 노를 젓는
것으로 대략 100명의 노잡이를 필요로 하며 승무원과 전투원을 합쳐 80명을 승선시킬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때 조선의 판옥선이나 일본의 세키부네 등은 노가 한줄인 1단이니.... 세키부네는 노잡이
30명에 선원 10명, 전투원 30명등 70여명이 타는데 비해, 조선의 판옥선은 노잡이 60명에
선원 20명 전투원 70명등 150명 가량이 승선했으니 조선 배가 크고 높으며 소나무 평저선
으로 튼튼한지라 작고 약하며 낮은 세키부네에서 조선 배로 뛰어 오르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도시들인 나폴리와 타란토는 노가 3층인 3단선인데 노잡이는 선창에서 배를 저으니 노잡이
100명에 전투원 100명에 선원등 220명이 타는데 비해 카르타고의 배는 노가 5단층인 5단선으로
노잡이 300명에 전투원 120명 그리고 선원등 450명이 타니 로마 배에 비해 크고 높은데다가 카르타고
선원들이 더 숙달됐으니 높은 위치에서 낮은 로마 배를 내려다 보며 공격하는 카르타고가 우세했습니다.
훗날 지중해의 해운 강국 베네치아는 인구가 적은지라 육군은 외국인 용병을 쓰고 자국 시민은
해군으로 복무했는데 숫자가 적으니 노잡이는 크로아티아의 해안도시에서 계약으로 채용
하고 자국인은 선원과 전투원으로만 복무했지만 일단 유사시에 노잡이도 전투에 참가
하도록 하기 위해 노잡이가 선창이 아닌 갑판에서 노를 젓도록 고친 갤리선을 운용합니다.
5단층 갤리선을 150척을 소유한 카르타고는 지중해 해상강국이니 로마도 위에서 내려다 보며 활을 쏘는
5단층 갤리선이 필요한지라 처음 메시나 해협을 건널 때 나포했던 카르타고 5단층 배를 해체해 하나
하나 복원하는 방법으로 배를 모방해서 스스로 만들었지만 노잡이가 문제니 로마 하층민들을 소집해
나폴리 선원의 지도를 받아 육지에 설치된 모형 선박에서 구령에 맞추어 노를 젓는 훈련을 시작 합니다.
그리고 선원은 나폴리와 타란토등에서 지원을 받아 5단층 갤리선 100척과 3단층 갤리선 200척
으로 이루어진 대함대를 만들었으니 조선이 19세기 말까지도 1단층 갤리선(판옥선) 밖에
만들지 못한데 비해서는 놀라운 성과인데 지휘관은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이니 후세의 명장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할아버지이며 육군 지휘관은 두일리우스 입니다.
2명의 집정관은 시칠리아로 파병됐는데 육로로 남하한 군대는 걸어서 메시나에 도착했지만
해군은 각 선박들이 서로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바람에 소나기식으로 따로 떨어져서
도착하는데 스키피오는 후진이 도착할 때 까지 무작정 기다리지 못하고는 300척 중에
먼저 도착한 단 17척만 이끌고는 리파리섬을 점령하려 갔는데 작은 섬이라 쉽게 점령합니다.
그러자 팔레르모에 주둔한 카르타고는 20척 군선을 파견하니 카르타고 함대가 항구 출입구를 봉쇄한
지라 싸울수 없어 항복 위기에 처한 로마함대는 로마연합에 속한 선원들은 산으로 달아났지만
집정관 스키피오를 비롯한 로마군 변사들은 모두 포로가 됐으며 그후 포로교환으로 귀국하게
되는데 패장을 처벌하지 않는 로마 전통에 따라 6년후 다시 집정관에 선출돼 전선에 복귀하게 됩니다.
육군 지휘관 두일리우스는 해군까지 지휘하게 되자 자신이 해전에 대해 무지하니 해전으로는 카르타고군
을 당할수 없음을 인정하고는 기상천외한 짓을 하니 일찍이 어느나라 해군도 시도해 보지 못한 해괴한
방식이라.... 뱃머리와 가장 가까운 돛대에 로프로 고장된 잔교를 설치하니 이를 “까마귀”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해전이 시작되면 만남을 무릅쓰고 적의 함선에 최대한 접근해서는 밧줄을 끊으면 저
까마귀가 적의 배로 떨어져 갈고리 같은 날카로운 쇠가 적의 배에 박히면 사다리가 설치된
것이라 로마군은 저 사다리(잔교)를 타고 적의 배에 올라가 육박전을 벌이는 것이니 근접
전투에서는 오랜 전쟁으로 달련된 로마군에게 카르타고 용병들은 상대가 될수 없었습니다.
역설적으로 보자면 까마귀 같은 해괴한 신무기를 고안한건 로마가 해군에 대한 전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인데 해운국 전통이 있는 나라의 해군이라면 뱃사람들은 항해술에
자신이 있으니 저런 군색한 꾀를 낼수는 없기 때문이며 또 그들은 선박의 미관도
소중히 여기는 자존심이 있으니 배와 바다에 대한 모욕인지라 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원전 260년 5단층 갤리선 100척 카르타고 함대와 로마 함대는 메시나 서쪽 밀라초에서 조우
했으니 70척 로마 함대는 항해술에 서툴러 배를 횡으로 일렬로 늘어서지도 못하는지라
일치감치 진형을 갖춘 카르타고 선원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 가운데 서로 접근하자
로마 함선에 매달린 물체를 보고는.... 너무 우스꽝스러운지라 또 다시 배꼽을 쥐고 웃게 됩니다.
로마 군선들은 뱃머리가 부서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돌진해 까마귀가 카르타고 배에 떨어져 갈고리가
뱃머리에 꽃히자 로마군 중무장 보병이 저 잔교(사다리)를 타고 자기네 배로 넘어들어오니 카르타고
병사들은 혼비백산 하는데, 해전이 육전 처럼 치루어지니 침몰된 카르타고 전함은 15척에 노획된
배가 30척이고 전사자는 3천명이며 포로는 7천명이었으니 카르타고는 해군의 3분지 1을 잃었습니다.
승전보를 받은 로마는 “하늘에라도 오를듯한 기쁨” 이었으니 육군국이라 해전에는 무지했으니
바다에 나가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라 조심조심해서 출진했는데 놀라운 승전보라, 두일리우스
는 대리석 기둥 좌우에 노획한 카르타고 배의 뱃머리를 꽂은 승리 기념비를 로마로 보냈습니다.
3년후 기원전 257년 팔레르모해전에서 승리한 로마는 카르타고로 눈을 돌리니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와
나폴리, 레조 및 메시나에서는 조선공들이 배를 건조했으니 카르타고도 대응했고 다음해인 기원전
256년 로마는 230척의 5단층 군선을, 카르타고도 250척의 5단층 군선을 출항시켰으니 1척당 노잡이
300명, 전투원 120명에 선원 100명이니 5백명이 넘으니 230척이면 무려 12만명에 수송선이 추가됩니다.
로마 함대는 시칠리아 남쪽 리카타를 떠나 서남쪽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본국으로 향하자
시칠리아 서쪽 마르살라에 기항하던 카르타고 함대가 급히 출항해 앞을 가로막으니
카르타고 함대 250척은 우수한 항해술을 과시하면서 중앙과 양쪽 날개로
나뉘어 일직선으로 다가오는데...... 로마의 두 집정관은 원뿔 모양의 진형을 형성합니다.
집정관 레굴루스가 탄 배를 중심으로 80척이 원뿔의 한 변을 이루고 다른 집정관 불소의 80척이
비스듬히 늘어서서 원뿔의 다른 변을 이루며 원뿔의 밑바닥에는 속도도 떨어지고 전투원이
없는 수송선이 배치되었고 배후에는 저 수송선을 지키기 위한 70척 제3선단이 배치 되었습니다.
로마 1선단과 2선단이 카르타고 함대 중앙부를 향해 비스듬히 전진하면서 해전이 벌어졌는데 카르타고
함대 중앙부가 뒤로 물러서자 카르타고 좌익은 로마 수송선을 공격했으며 우익은 로마 제3선단을 공격
하는데 로마함대를 분리시켜 포위하는게 항해술에 능하고 숫적으로도 우세한 카르타고의 전술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1선단과 2선단의 공격은 격렬했으니.... 견디지 못한 카르타고 중앙군은 패주하기
시작하자 로마군은 추격하지 않고 방향을 돌려 제1선단은 로마 수송선을 공격하는
카르타고 좌익을 덮치고 로마군 제2선단은 로마군 3선단을 공격하는 카르타고군 뒷덜미
를 후려치니 졸지에 카르타고군 함대를 앞뒤에서 적을 만나 협공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탁트인 바다에서 싸우던 카르타고 우익은 도망쳤지만 육지(섬) 옆에서 싸우던 카르타고군 좌익
은 길이 막혀 도주하지도 못하고 전원 침몰되거나 나포되니 로마가 잃은 배가 24척인데 비해
카르타고가 잃은 배는 침몰 30척에 나포 63척이니 3차 해저ᅟᅡᆫ에서도 카르타고 해군이 대패한 것입니다.
카르타고는 도망쳐온 157척을 수도 앞바다에 배치하고 배수진을 치자 로마군은 카르타고만을 피해 곶을
돌아가서 동쪽 클리페아 해변에 상륙했으니 마을을 점령해 아프리카 교두보로 삼은 다음에 시칠리아
로 부터의 보급은 로마군 함대가 맡았는데 이미 몰타섬과 판탈레리아섬도 로마군이 점령한 상태였습니다.
해변에 상륙한 로마군은 반격해온 카르타고군을 쉽게 격퇴햇으니 이번 해전과 육전 양 전쟁
에서 잡아 로마로 보낸 포로는 무려 2만명에 달했는데.... 상황을 낙고나한 로마는 집정관
1명을 부하인 시민병과 함께 귀국시키니 임기 1년인 집정관을 선출하는 겨울철에 열리는
선거인 민회는 현직 집정관이 소집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니 몽골군이 칸이 죽으면
전쟁을 중지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새 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를 여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프리카 튀니스에서 겨울을 날 군대는 집정관 레굴루스가 지휘하는 1만 5천명의 보병과 500명의 기병
40척의 군선과 선원뿐이었는데 수도 코 앞에 숙영지를 설치한 로마군에 대해 위협을 느낀 카르타고는
강화 사절을 보내오자 레굴루스는 첫째 시칠리아섬과 사르데냐섬에서 철수할 것, 둘째 해군을 해산
하고 함대를 로마에 양도할 것을 제시하니 해운국가인 카르타고로서는 받아들일수 없는지라 거절합니다.
카르타고는 이듬해 봄에 재개될 전쟁에 대비해 스파르타 출신 용병대장으로 이집트와 시리아
에서 전투를 치러 보았던 크산티포스를 고용했는데 중대장까지만 용병에게 맡기고
대대장 이상 총사령관은 카르타고인이 맡을 생각이었으니 부대를 시찰한 크산티프스는
이런 군대라면 용병료를 한번 받아보기도 전에 죽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건의를 합니다.
“로마에 패한건 병사들 때문이 아니라 지휘관 때문이었다” 라고 말하니 자존심이 상한 카르타고
는 계속된 패배에 자신감을 상실했던 때문인지 그럼 네가 총사령관을 해보라고 말하니
코끼리 부대를 확보하고 누미디아 기병도 고용해 훈련에 들어가 이들을 활용하는 전술
까지 세웠으니...... 다음해 봄에 카르타고군이 도전하자 레굴루스는 혼자 응하는 실책을 범합니다.
아프리카 보다 로마가 봄이 늦게 찾아오니 레굴루스는 로마에서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그러니까
1년에 불과한 자기 임기중에 큰 전공을 세워 로마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할 꿈을 꾸었는데
전투에서 승리한다 쳐도 3월 15일을 넘기면 전공은 후임 집정관의 차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기원전 255년 봄 크산티포스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보병 1만 2천명에 기병 4천명 그리고 꼬끼리
100마리가 투입되었는데 레굴루스의 로마군은 중무장 정예 보병 1만명에 기병이 500명으로
코끼리는 목위에 올라탄 운전병외 등위 상자 안에 탄 전투원이 3명 정도니 오늘날 전차에 해당합니다.
레굴루스는 정정당당하게 정면전을 택했다가 중과부적으로 대패하고 해군이 있는 클리페아까지 도망친
로마군은 2천명에 불과하고 8천명이나 되는 로마군 병사들의 시체가 들판에 방치되었으며 집정관
레굴루스를 비롯 500명이 포로로 잡혔으니 1차 포에니전쟁 10년 만에 처음 당한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새 집정관 2명은 시라쿠사에서 로마군의 패배를 알았지만 클리페아에 있는 로마군 7천명
과 40척 함대를 방기할수 없는지라 예정대로 아프리카로 건너오자 육전 승리로
자신감을 회복한 카르타고 함대는 헤르마이움곶에서 해전을 벌이니 네 번째 해전
으로 카르타고는 114척이나 되는 함대를 잃었으니 이번에도 로마 해군의 승리였습니다.
지중해 세게 최강의 해운국이었던 카르타고는 경쟁상대인 그리스가 쇠퇴한 바람에 수십년간
해전다운 해전을 못해본지라 오랫동안 실전경험이 전무햇던 탓에 숱한 전쟁으로
단련된 전쟁 기계인 로마군을 당해낼수 없었으니.... 하지만 로마 집정관은 승리로
눈이 흐려지지는 않앗으니 클리페아에 있는 7천명 로마군을 태우고 시칠리아로 철수합니다.
로마 함대는 시칠리아해안에 거의 다왔을 때 엄청난 태풍을 만났는데 배의 키잡이들은
로마연합에 속한 선원들이었으니 태풍때는 암초가 많은 육지 해안선에 접근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바다에 익숙하지 않은 로마 장군들은 해안에
접근하라고 명했으며 게다가 풍랑에 흩어지지 않도록 무리를 지어 입항하라 명합니다.
육지가 잘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 태풍에 농락당하는 배에 탄 로마 장군들은 태풍의 공포를
견딜수 없었기에 내린 명령인데 230척 로마 함대는 해안으로 접근하다가 암초와 암벽
에 부딪히거나 배끼리 충돌해 시라쿠사까지 갈수 잇었던 배는 단 80척에 불과했으니
무려 6만명의 로마 병사들이 물귀신이 된 지중해 역사상 최대의 해난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해 겨울 카르타고는 이 유리한 국면을 활용하기 위해 로마에 강화 사절을 보내는데 사신
은 놀랍게도 포로로 잡은 로마 집정관 레굴루스였으니 시칠리아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요구였는데.... 레굴루스는 원로원에서 옆에 카르타고인 감시자가 지켜보는데도 불구
하고 카르타고의 바램과는 반대로 강화를 거부할 것을 설득했으니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여기서 강화를 맺는다면 지금까지 치른 희생이 헛된 것으로 된다는 뜻을 이해한 원로원은 거부
했고 사전에 약속한대로 카르타고로 되돌아간 레굴루스는 동그란 바구니속에 갇혀 코끼리들
이 축구공 처럼 발로 차는 방식으로 죽였는데 자기가 처참하게 죽을줄 알면서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카르타고로 되돌아간데서...... 로마인들이 얼마나 신의를 지키는 사람들인지 알수 있습니다.
사기가 올라 자신감을 회복한 카르타고는 경솔하게도 스파르타 출신 용병대장 크산티포스를 해고한후
다음해인 기원전 254년 봄에 14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시칠리아섬 서부 마르살라에 상륙시키니
로마도 2명의 집정관에 두명의 전직집정관등 네 부대를 파견하니 한명은 첫해 리파리섬에서 카르타고
에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으로 석방된 스키피오였으며 전직 집정관 2명은 해난사고때 지휘관입니다.
중국등 여러나라에서는 패장은 책임을 물어 죽이는게 보통인데 로마는 달랐으니.... 자부심이
강한 로마인이 패전으로 이미 굴욕을 맛보았으니 처벌을 그로 족하다는 생각에 다시
전공을 세워 설욕할 기회를 주는 것이니 해난사고 책임자인 전직 집정관 2명은 해군을
지휘했으며 로마는 단 3개월 만에 5단층 갤리선 220척을 진수하는 놀라운 저력을 보입니다.
현 집정관 2명은 4개 군단을 이끌고 메시나에서 육로로 출발했는데 로마군은 해군과 2인 3각 처럼 협조
체제로 팔레르모 중간쯤인 체팔루 점령에 성공해 메시나로부터 보급선을 확보했으며 동맹국 시라쿠사
로 부터의 보급은 시칠리아섬 중앙에 자리한 도시 엔나를 통해 받는데 팔레르모 공략은 쉽지 않았습니다.
해가 바뀌어 기원전 253년에 포위당해 농성전에 지친 팔레르모 주민들이 로마에 성문을 여니 입성한
로마군은 친카르타고파 시민 1만 4천명을 포로로 잡은후 몸값을 낸 1천명을 제외한 1만 3천명은
노예로 팔았으며 친로마파 시민 2만 5천명은 자유 몸으로 계속 팔레르모에서 사는게 허용되었습니다.
이 사태를 본 인근의 여러 도시들은 스스로 로마군에 성문을 열었으니 카르타고측에 남은 도시는
남해안의 헤라클레아, 서부에 셀리누스, 릴리바이움(마르셀라), 드레파눔(트라파니) 뿐이니
이 도시들은 남부와 서부에 있어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기대할수 있었던 도시들 입니다.
겨울 휴전기를 맞아 로마로 돌아가던 함대는 다시 바다에서 무시무시한 폭풍우를 만났으니 지휘관들이
육지에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선원들의 충고를 따랐으나 이 바다는 호메로스의 영웅 오디세우스
의 표류담에 나오는 바로 그 바다이니 로마는 150척의 배와 수많은 병사들이 물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두차례의 어마어마한 해난사고로 불굴의 기개를 가졌다는 로마인들도 기가 꺽여버려 다음 두해 동안
은 해군을 재건하자는 논의 자체가 없었는데.... 그러자 다시 기력을 회복한 카르타고는 150마리
꼬끼리를 앞세워 팔레르모 탈환작전에 나섰으니, 4년전 레굴루스때 8천명이 전사한 기억
으로 공포에 질린 로마군은 전투 의욕을 상실하니 옛 영광 따위는 잊은 초라한 신세로 전락합니다.
집정관 메텔루스는 코끼리에 대한 병사들의 공포심을 없애는게 급선무라고 생각하고는 팔레르모성
밖의 해자를 더 넓고 깊게 팠으며 바닥은 사람조차 걸어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게 만들고는 병사
들은 성벽 안쪽에 배치한후 경무장 보병을 내보내 꼬끼리부대가 강을 건너자 창을 사람이 아닌
꼬끼리떼를 향해 던지니 상처를 입고 성이난 코끼리들이 앞으로 돌진해 해자 안으로 빠져버립니다.
카르타고군이 상처입은 꼬끼리떼에 짓밟히자 중무장 로마군이 출동해 카르타고군을 공격
했고 경무장 로마군은 해자에 빠진 코끼리에 창을 던졌으니 팔레르모 공방전은 로마군
의 대승으로 끝나고..... 포회괸 꼬끼리 10마리 외에는 대부분 다 죽엇으며 카르타고
군의 전사자는무려 2만에 달했고 카르타고군 지휘관은 소환당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메텔루스의 로마군은 코끼리를 새긴 은화를 주조했으며 그로인해 바다에 대한 공포심도 잊기 시작
했으니 기우너전 250년 새로 건조한 200척 로마함대와 4개 군단은 서부 마르실라 공략에
투입하자 카르타고는 마르실라와 트라파니 방어를 위해 1만명의 용병을 보낸후 본국
에서는 10만의 용병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로마군은 요새화된 항구도시를 공략하는데 미숙했습니다.
트라파니항구 카르타고 함대는 로마 해군이 마르실라를 바다쪽에서 포위하려는 것을 방해햇으며 트리파니
에서 파견된 카르타고 기병대는 육지에서 마르실라를 포위하려는 로마군을 방해했고 또 항구도시라
카르타고 본국에서 오는 보급을 차단하기도 어려웠으니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겨울 휴전기가 닥칩니다.
이듬해 기원전 249년 1차 포에니전쟁 16년째에 집정관 풀크루스는 220척 군선을 지휘해 트라파니를
공격하며 다른 집정관 유니우스는 마르실라를 공격하는데.... 트라파니의 카르타고 지휘관은
항구를 등지고 싸우는게 아니라 바다로 출진해 북쪽으로 이동한후 로마함대가 항구를 포위하자
수평선에서 나타나 바깥에서 벼랑으로 둘러싸인 해안선을 등진 로마 함대를 역으로 포위했습니다.
카르타고 장군은 접근전에서는 로마군을 당할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지라 항해술이 뛰어난 장점
을 살려 거리를 두고 싸우는 전술을 취하니 로마 해군은 처음으로 패하는데 93척이 포획되고
30척이 침몰햇으며 2만명에 이르는 병사와 선원들이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진 대참패 였습니다.
기원전 247년 5년마다 행하는 인구조사에서 늘 10% 늘어나던 로마인구는 이때는 해난
사고 몰죽음 탓에 14%나 줄었고 18년간의 전쟁으로 국고가 탕진됐는데 이해에
하밀카르 바르카스라는 장수가 시칠리아 전선에 투입되니 훗날 한니발의 아버지
인데...... 하지만 카르타고 본국은 해상무역파와 육지 농경파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국내 농경파의 리더가 한논 가문이라면 해외 무역파는 바르카스 가문인데 국내파는 아프리카 영농에
적극적이라 해외무역을 경시하니 지원에 소극적이라 불과 2개 군단만 배정받으니 이 병력으로
로마군을 밀어부칠수 없었으니 기동력을 살리기로 하고 먼저 근거지를 팔레르모 근교의
높은 산인 펠레그리노산에 두고 마르실라를 공격하는 로마군의 배후를 기습하는 작전을 벌입니다.
4년간 전쟁의 주도권은 하밀카르가 쥐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로마의 강화사절은 나타나지 않았
으니.... 로마 원로원은 카르타고 본국이 시칠리아에 보내는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4번째
대규모 선단을 만들기로 하고 국고가 비었는지라 전시 국채를 발행했으니 구입 의무자
는 원로원 의원과 정부 요원에 부자들이었으니..... 여기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를 보게 됩니다.
집정관 카톨루스는 200척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파견됐는데 로마 함대는 마침내 마르살라 항구를
점령했으니 기원전 241년 3월 카르타고도 함대를 파견했으니 로마군 교체기를 노린 것인데
하지만 로마군은 육군은 절반으로 줄었어도 해군은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전원 대기햇으니 보급품
을 가득 실어 수송선처럼 보이는 카르타고 함대는 두 도시 사이의 섬인 마레티모섬에 닻을 내립니다.
그러자 카툴루스의 로마군은 북상해 에가디제도 파비냐나섬에 도착햇으니 카르타고 함대가 머문
마레티모섬은 불과 10킬로미터니 서풍이 불자 북쪽 예리체로 움직였는데 로마군이 진로를
막자면 역풍이 되는데 그래도 카툴루스는 공격하기로 작정햇으니 이점은 군량을 가득 실은
카르타고 함대에 비해 로마함대가 가볍다는 것이니 돛을 내리고 노만 저어 앞길을 가로막습니다.
강풍에 카르타고 함대는 로마함대로 돌진했고 적선에 올라 싸우는 격전이었지만.... 육박전에서는 중무장
로마군을 당할수 없으니 카르타고 배는 50척이 침몰하고 70척이 나포되었으며 나머지는 때마침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본국으로 도망쳤는데 총사령관은 극형인 책형에 처해져 사형당하니 세 번째 입니다.
마키아벨리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로마는 집정관에게 군대를 주어 전장에 내보낸 이상 패전
해도 책임을 묻지 않고 강화 조건까지도 로마 원로원은 절대로 간섭하지 않고 모두 일임
했으니... 카르타고 본국의 지령을 받은 하밀카르는 협상을 제의했으니 카툴루스와 마주 앉습니다.
1.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섬에서 철수하고 영유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2. 카르타고는 시라쿠스를 포함한 로마 동맹국에 싸움을 걸지 않는다.
3. 포로는 양국 모두 몸값을 받지 않고 석방한다.
4. 카르타고는 배상금으로 2,200 탈렌트를 로마에 10년 분할 지급한다.
5. 로마는 카르타고의 자치와 독립을 존중한다.
로마에서 민회가 열려 23년 전쟁의 댓가로 미흡하다고 강화안을 부결시키자 10명의 원로원 대표단이
시칠리아에 파견되는데 이들은 결국 카툴루스의 의견에 동의해 배상금 액수를 1,000 탈렌트 더
올리고 일시불로 받으며 에가디제도와 몰타섬에 판탈레리아섬을 로마가 차지하니 로마는 우수한
병사의 질, 풍부한 전쟁경험, 지휘관 자질 등에서 카르타고에 우위를 점했으므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카르타고는 비옥한 아프리카 농장 경영만으로도 1년에 1만 탈렌트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으니 400년만에
시칠리아에서 철수해도 나라가 기울 정도는 아니고, 그리스계 주민들은 지배자가 카르타고에서 로마로
바뀐것 뿐이었고, 로마시민은 민회에서 추인해 23년간 계속된 전쟁이 끝난 기원전 241년 6월 카툴루스는
로마에서 4마리 백마가 끄는 개선식을 올렸으며..... 로마의 야누스 신전의 문은 432년 만에 닫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