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의 4대 미녀
越(월)나라 西施(서시)
춘추시대 말기 월나라 苧蘿山(저라산) 출신으로 가난한 나무꾼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施夷光(시이광)이라고 하며 소녀시절 빨래하던 浣沙女(완사녀)라 한다. 당시 저라산 아래쪽에는 2개의 촌락이 동서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施氏(시씨)로 시이광이 서촌에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서시라고 칭했다고 합니다.
어릴때부터 천성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항상 부러움을 샀는데 하루는 강가에서 빨래하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강물에 비쳤습니다. 이때 물고기가 물에 비친 서시의 이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헤엄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강바닥으로 가라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沈魚(침어)라고 합니다. 또한 속병이 있던 서시가 이마를 찌푸리고 걷고 있었는데 이 마을의 추녀가 그래야 아름다운 줄 알고 자기도 역시 가슴에 두 손을 얹고서 남이 보는데서 얼굴을 찌푸렸습니다. 추녀의 그 모습을 보고 마을의 부자는 문을 굳게 닫아 걸고서 나가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은 처자를 데리고 다른 고장으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效嚬(효빈)이라고 했지요. 吳越同舟(오월동주)란 고사성어가 있듯이 오나라와 월나라는 국경을 맞대어 크고 작은 갈등과 반목이 잦았다. 오월동주란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탔다는 뜻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끼리 이해관계 때문에 같이 한다는 뜻임니다,
당시 오나라에 패한 월나라왕 勾踐(구천)은 會稽山(회계산) 전투의 치욕을 씻으려고 몸을 수고롭게 하고 편안한 잠자리를 마다하고 섶에 누워 쓸개를 맛보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는 것에서 臥薪嘗膽(와신상담)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충신 范蠡(범려)의 계책으로 미인계로 선정된 서시는 가무와 몸가짐을 배워 오나라 왕 夫差(부차)에게 바쳐졌다. 부차는 서시에게 별도의 궁궐을 짓고 정원을 만들면서 서시의 미색에 빠져 국사를 소홀히 하였다.
반면 구천은 부단한 노력으로 전쟁 준비를 하여 오왕 부차는 월나라 왕 부차의 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오나라는 멸망하였다. 그후 범려와 미녀 서시의 행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범려가 모든 관직을 버리고 미녀 서시와 함께 항주에 있는 서호에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과, 또 하나는 서시가 월나라로 왔을때 월왕 구천의 왕비가 서시의 미모를 보고 왕이 총애할 것이 두려워 질투심에 몰래 그녀를 자루에 넣어 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설이다.(서시의 출생지는 저장성의 제기시)
한나라 王昭君(왕소군. BC. 202∼AD. 8)
後漢 元帝 建昭(후한 원제 건소) 원년(BC. 38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본명, 王嬙 왕장)도 18세의 나이로 후궁으로 선발 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毛延壽(모연수)등 화공들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부귀한 집안 출신이나 수도 장안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왕소군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필요가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는 왕소군의 용모를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려버렸다.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흐르도록 황제의 얼굴도 뵐 수가 없었다.
남 흉노의 呼韓邪(호한야) 선우가 황제에게 알현차 왔기에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호한야의 제의로 공주가 아니라도 좋다고 하면서 왕소군을 지목하였다. 황제는 그러라고 하였다. 원제는 연회가 끝난 후 궁녀들의 초상화를 대조해 보았다.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한 황제는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히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모연수는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왕소군을 미양궁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그후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왕소군은 흉노 땅에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세월이 흘러 호한야 선우가(BC. 58∼BC. 31) 죽은 후 호한야 본처 아들인 復株累(복주루)선후가 왕소군을 취하려 하자 왕소군은 한나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성제에게 서신을 올렸으나 成帝(성제)는 흉노의 풍속을 따르라고 했다. 왕소군은(당시 35세) 다시 복주루의 閼氏(알씨, 연지)가 되어 딸 둘을 낳았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大黑河(대흑하) 남쪽 기슭에 묻혔다.
왕소군의 묘는 내몽골 자치구의 후허하오터(呼和浩特, 호화호특)남쪽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록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靑塚(청총)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흉노를 향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고 한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 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는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짓 하는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왕소군의 미모를 “落雁(낙안)“이라고 칭하게 되었다.(西京雜記. 서경잡기)
삼국시대 貂蟬(초선)
초선을 가르쳐 天香國色(천향국색),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라는 傾城之貌(경성지모), 傾國之色(경국지색)은 모두 그녀에게서 나온 고사이다. 한나라 상서령 왕윤의 수양 딸이며, 노래와 춤에 능했다. 王允(왕윤)은 東漢(동한) 太原祁縣(태원기현, 지금의 산서성) 출신으로 靈帝(영제) 때 豫州刺史(예주자사)에 임명되었다.
獻帝(헌제)가 즉위하자 다시 사도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동탁은 少帝(소제)를 폐위시키고 헌제를 옹립하여 정권을 전횡하고 있었지만, 대신들은 권세가 두려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왕윤은 董卓(동탁)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미인계로써 그 목적을 달상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 동안 대상을 찾지 못하여 늘 고심에 차 있던 중 왕윤은 그녀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초선은 그러한 사정을 안 후 성심을 다해 왕윤을 돕고자 했다. 그녀는 왕윤의 계획에 의해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呂布(여포)와 동탁 사이에 갈등을 조성했다. 마침내 여포의 손을 빌어 동탁을 죽이고 왕윤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 그후에 여포는 초선을 첩으로 삼았는데,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어느날 저녂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우니, 왕윤이 말하기를 “달도 내 딸에게는 비교되지가 않아서,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는구나“ 고
하니, 이 때부터 초선을 閉月(폐월)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나라 양귀비(719∼756)
그녀의 성씨는 楊(양)이고 이름은 玉環(옥환)이다. 719년, 당 현종 집권 초기에 쓰촨성(사천성) 蜀州(촉주(현 두장옌(都江堰, 도강언)시에서 태어나 蒲州永樂(포주. 영락 山西省 永濟, 산서성 영제)에서 자랐다.
양옥환의 고조부인 楊汪(양왕)은 수 양제 양광이 통치하던 시대에 중신이었다. AD. 621년 당나라 이세민에게 왕세충이 패배할 때 양왕도 살해됐다. 양옥환의 아버지 楊玄琰(양현염)은 촉주에서 호구를 조사하는 하급 관리였고, 양현염의 가족은 촉주로 이사했다. 양현염은 아들은 없었고, 양옥환과 언니를 세 명 낳았다. 양현염은 옥환이 어렸을 때 죽어서 양옥환은 숙부 양현교 슬하에서 자랐다. 그후 16세 양옥환은 현종황제 이융기와 惠妃 武氏(혜비무씨)의 13왕자인 李瑁(이모)와 혼인했다. 이모는 무씨와 이임보의 후원으로 황태자가 되었으나 무씨 사망 후 환관 高力士(고력사)의 추천으로 李璵(이여, 숙종)가 황태자로 추천되었다. 고력사는 총애했던 무혜비가 죽고 나서 외로워하는 현종을 위로하기 위해 전국의 미녀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다. 그 중에 평소 수왕(이모)의 아내 양옥환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환관 고력사는 그녀를 현종의 술자리로 불러낸다.
양옥환은 이 자리에서 음악 애호가였던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자신의 장기인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당시 현종의 나이는 61살이었고, 양옥환은 스물세살로 6년동안 수왕(현종의 18번 째 아들)의 아내였다.
도가에 입문하면 이전에 있었던 속세의 일들은 지워지는 것으로 여겼기에 우선 도가에 입문하였다. 이때 양옥환은 화산에서 도가 수행 중, 현종은 아들 수왕을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하였다. 모든 일이 처리되고, 현종은 보고 싶은 여인을 맞을 수 있고, 도사를 불러 가르침을 받는다는 핑계로 태진궁을 짖고 양옥환과 살았다. 이때부터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고, 이후 양옥환은 27세가 되던 해에 귀비 책봉을 받아 양귀비가 되었다. 다년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이 난 현종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 까지 한국, 괵국, 진국부인에 봉해졌다. 또한 6촌 오빠인 양소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현종에게서 國忠(국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 받았다. 이외 양씨는 많은 친척들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족이 황족과 通婚(통혼)하였다. 그녀가 남방 특산의 여지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迎合(영합)하려는 지방관이 急馬(급마)로 신선한 과일을 進上(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AD. 755년, 그녀의 친척 오빠인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자(안사의 난), 현종 황제와 양귀비 등은 쓰찬(사천)으로 도주 중 장안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호위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현종에게 양귀비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현종도 이를 막을길 없자, 양귀비는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당시 나이는 38세였다.
羞花(수화)--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 올리다.
어느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미모사를 건드리니 바로 잎이 말아 올렸다. 당명황(현종)이 그녀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에 탄복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이라 칭했다.
자료 출처
劉向(BC. 77∼BC. 6) 의 列女傳(열녀전)
자는 子政(자정)으로 沛縣(패현, 장수성)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