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는 여물고 단풍은 붉게 물드는데 내 심신은 나태해져 가을을 따르지 못하니, 무료함을 덜기 위한 나 홀로 늦가을여행을 계획했다. 즉시 트위터를 켜고 팔로워들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 선택한 곳이 바로 충청북도 청주! 청주에서도 상당구에 위치한 ‘수암골’을 방문하기로 했다.
수암골은 6.25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정착해 형성된 달동네다. 원래 재개발로 철거예정이었던 마을이 예술단체 회원들의 벽화 그리기로 새로운 테마공간으로 변모했다고 하니, 꽤 사연이 깊은 곳이다. 드라마 <카인과 아벨>의 촬영장소이기도 한 이곳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적합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마을의 분위기가 관광지의 상업성이 묻어나지 않고, 서민들의 소소한 삶을 엿볼 수 있으니 조용한 여행지를 원하는 이들에게도 적극 권장되는 곳이다.
카메라와 책 한 권만 달랑 들고 떠난 나 홀로 수암골 여행, 그곳의 정취를 카메라에 담았다.
청주 터미널에서 30분간 시내버스를 타고 도착한 수암골 입구. 수암골로 향하는 언덕길은 소박한 달동네의 모습이다. 골목길 좌우에 자리한 ‘은희네닭집’이나 ‘아빠이발관’ 같은 상호들은 시골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도시와 완전히 격리되지도 않은 이곳은 조금만 큰길로 나오면 페스트푸드점과 커피숍이 즐비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중소 도시를 여행하는 데 있어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다. 번화가에는 서울과 다를 바 없는 속도감을 지녔지만, 조금만 골목을 파고들면 덜 개발된 환경에서 묻어 나오는 정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애써 포장하지 않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건축과 간판들은 지위와 형편에 맞는 솔직함을 만들어낸다. 서울의 삼청동이나 서래마을처럼 일정한 정체성에 맞춘 카페들이 생성되는 것과 사뭇 다르다.
수암골의 입구에 도달하자 풋풋한 문패가 나를 맞이했다. 밑에 매직으로 한자를 고쳐 쓴 듯한 글씨는 꾸밈없는 어린아이의 낙서 같다. 입구에는 붕어빵을 파는 할머니가 전부일 뿐, 명소라고 해서 잡다한 것들을 파는 상인들이 많은 다른 곳과 비교된다.
입구를 조금만 지나면 수암골의 골목지도가 나온다. 이 역시 일관성 있게 벽화로 표현했다. 그림으로 간주해보아 상당히 작은 동네임을 알 수 있다. 지도를 따라 골목을 다니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는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사진으로 감상해보자.
수암골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아기자기한 벽화들뿐만이 아니었다. 벽화를 구경하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마을의 일상을 느낄 수가 있었다. 김장하는 마을 아주머니들, 벽돌을 수리하고 있던 이웃집 아저씨, 벽화 그림 위로 태평스럽게 걸려 있는 빨래들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여행의 매력 중 하나는 타인의 일상 속에서 나 혼자 탈피의 기분을 겪는 것이다. 유럽 배낭여행자 중에서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예를 들어 리히텐슈타인 같은) 소박한 곳을 찾는 유형의 이들이 있다. 그들이 주로 느끼는 여행의 매력은 ‘다름’을 인정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내 일상이 타지의 일상과 다르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신기함과 경외감은 우리로 하여금 여행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수암골 입구를 나오면 팔봉빵집을 만날 수 있다. 얼마 전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껏 받고 종영한 <제빵왕 김탁구>의 촬영지인 바로 그 빵집이다. 같은 장소에서 두 작품의 드라마 촬영지가 공존해 있어, 드라마 마니아들에게도 매력적인 곳이다.
끝으로 수암골 동산에 올라 노을을 바라보며 셔터를 눌러댔다. 아무 생각 없이 입김을 불어가며 청주시내를 보고 있노라니, 지난 몇 달간 엉켰던 생각의 실타래가 풀리는 듯도 하고 또는 아무 생각 없이 넋 놓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렴 어떠랴! 여행은 경험 자체만으로도 이로운 것이니, 주말에 홀로 떠난 여행은 무형으로 내 잠재의식 어딘가에 뼈와 살이 되어 고이 간직되었으리라.
글/사진 : 인터파크도서 기자단 4기 김으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