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은 종교 용어가 아니다. '맹자' 진심장에 나온다.
공자가 "나는 비슷하지만 아닌 것을 미워한다(惡似而非者)"고 했다는 대목이다.
강아지풀이 벼의 싹을 어지럽히듯, 겉만 닮은 것이 참된 것을 흐린다는 뜻이었다. 이천 년 넘게 유가의 언어였던 이 단어가 오늘 한국에서는 특정 종교를 겨냥하는 낙인으로 쓰인다.
누가 이 낙인을 찍는가. 낙인찍을 권한은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종교학에는 오래된 상식이 하나 있다. 정통과 이단은 교리의 속성이 아니라 권력관계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단'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하이레시스(hairesis)의 원뜻은 '선택'이었다.
초기에는 학파나 분파를 가리키는 중립어였다. 이 말이 단죄의 언어로 바뀐 것은 교회가 제국의 비호를 받으면서부터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 사람은 주교가 아니라 황제 콘스탄티누스였다. 아리우스의 기독론이 이단이 된 것은 논쟁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다. 황제가 승인한 신조 바깥에 섰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뒤 아리우스파 황제가 들어서자 정통과 이단의 자리는 한동안 뒤바뀌었다. 교리는 그대로였는데 권력이 움직이자 낙인이 옮겨 다녔다.
유럽사는 이 명제의 실험장이었다. 13세기 남프랑스의 카타리파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알비 십자군을 일으키면서 말살당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통치자의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라는 원칙을 아예 명문화했다. 어느 신앙이 정통인지를 영주가 정한다고 국제조약이 선언한 것이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에 파리에서 위그노 수천 명이 살해됐고, 신구교가 얽힌 30년 전쟁은 중부 유럽 인구를 갈아 넣었다.
종교개혁 진영도 예외가 아니었다. 1553년 제네바에서 삼위일체를 부정한 의사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화형당했다. 칼뱅이 기소에 관여했다. 이를 지켜본 인문주의자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가 남긴 문장이 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정통의 칼은 늘 교리의 이름으로 사람을 베었지만, 벤 것은 언제나 사람이었다.
한반도에서 이 구조를 법령으로 완성한 것은 일제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 제1조는 "본령에서 종교라 함은 신도, 불도 및 기독교를 이름"이라고 못 박았다.
천황제 국가가 공인한 세 종교만 '종교'였고, 천도교·보천교·대종교 같은 민족종교는 '종교유사단체'가 됐다.
관할 부서부터 달랐다. 공인종교는 학무국 종교과가, 유사종교는 경무국, 곧 경찰이 맡았다.
믿음의 문제가 치안의 문제로 분류된 것이다. 대종교는 다른 군소 단체의 신고까지 접수하던 총독부가 유일하게 서류 접수 자체를 거부한 교단이었다.
홍암 나철은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했다. 그리고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과 같은 시기에 교주 윤세복 이하 지도부 25명을 검거했다.
임오교변이다.
안희제, 권상익 등 열 분이 고문 끝에 옥사했다. 교단은 이들을 순교십현이라 부르고, 일제강점기 전 기간에 스러진 교인을 십만으로 헤아린다.
청산리에서 싸운 북로군정서의 뼈대가 대종교인이었으니, 일제가 이 교단을 '유사종교'로 몰아 뿌리 뽑으려 한 이유는 자명하다. 사이비 규정은 신학이 아니라 통치술이었다.
해방은 낙인의 주인만 바꿨다.
미군정은 통역과 행정 요원을 구하면서 영어가 되고 미국식 교육을 받은 개신교 인사들을 대거 등용했다.
뒤이은 이승만 정권에서 개신교는 사실상의 국가종교에 가까운 지위를 누렸다.
제헌국회는 회순에도 없던 목사의 기도로 문을 열었고, 크리스마스가 공휴일이 됐으며, 군종과 형목 제도가 기독교 성직자에게 열렸고, 1954년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이 기독교방송으로 출발했다.
해방 당시 인구의 0.5퍼센트였던 개신교인은 1960년 5.8퍼센트가 됐고, 군사정권기의 폭발적 성장을 거쳐 지금은 국내 최대 교세의 종교가 됐다.
성장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총독부가 만든 '유사종교'라는 범주가 해방 후 아무런 검토 없이 그대로 통용됐다는 것이 종교학계의 일치된 지적이다.
식민 권력의 분류 도구가 이번에는 새 주류 종교의 손에 들어갔다.
오늘 한국에서 '이단·사이비' 담론을 가장 왕성하게 생산하는 곳은 개신교 교단들의 이단대책 기구다. 물론 자기 교단의 신자를 지키기 위해 교리적 경계를 긋는 일 자체는 어느 종교나 하는 내부 사무다.
불교에서 종파끼리 불경 해석을 두고 다투어도 그 논쟁이 담장 밖으로 나와 사회 전체의 낙인이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개신교발 이단 규정이 담장을 넘는다는 데 있다.
한 교단의 신학 판정이 언론을 타고 '사이비 종교'라는 사회적 상식으로 굳어지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까지 그 판정을 자기 것인 양 받아쓴다.
종교사회학이 낙인이론에서 말하는 그대로다.
일탈은 행위의 속성이 아니라, 규정할 힘을 가진 쪽이 붙인 딱지라는 것.
영어권 학계가 '컬트'라는 말을 사실상 폐기하고 '신종교운동'이라는 중립어로 갈아탄 이유도 같다. 컬트라는 단어에는 분석이 아니라 판결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작 성서 안에 이 문제의 답이 있다는 사실은 자주 잊힌다.
사도행전 5장에서 산헤드린이 사도들을 죽이려 하자 바리새파 율법교사 가말리엘이 말린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참과 거짓의 판정을 시간과 하늘에 맡기라는 것이다.
초대교회 자신이 유대교의 눈에는 이단이었고 로마의 눈에는 불온한 미신이었다. 박해받던 시절의 지혜를 주류가 된 뒤에 잊는 것, 이것이야말로 종교사가 반복해서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장면이다.
여기서 예상되는 반론이 있고, 그 반론은 무겁다.
종교의 탈을 쓴 사기, 착취, 성범죄, 헌금 강요는 실재하고 피해자도 실재한다. 그런 집단을 비판할 언어가 필요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필요하다. 다만 그 언어는 이미 있다. '형법'이다.
사기는 사기죄로, 감금은 감금죄로, 성범죄는 성폭력범죄로 다루면 된다.
행위의 불법성은 국가가 판정할 수 있고 판정해야 한다. 그러나 교리의 참과 거짓은 국가도, 다수 종교도, 여론도 판정할 수 없다.
헌법 제20조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교를 부정하며 정교분리를 명한 이유가 그것이다.
'사이비'라는 낙인은 바로 이 두 층위를 뭉개 버린다. 범죄를 저지른 집단과 교리가 낯선 집단이 한 단어 안에서 뒤섞이고, 낯섦 자체가 유죄의 정황이 된다.
그 낙인이 한번 붙으면 사실 확인은 생략되고 혐오가 일상이 된다. 백 년 전 경무국이 하던 일을 이제 여론이 대행하는 셈이다.
공자가 미워한 것은 강아지풀이었다.
벼를 닮았으나 벼가 아닌 것.
그런데 강아지풀과 벼를 가리는 일과, 권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벼를 강아지풀이라 부르는 일은 전혀 다르다.
지난 백여 년의 한국 종교사가 증언하는 것은 후자다.
일제에게 대종교는 사이비였고, 그 사이비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의 한 축이 꺾였다.
낙인의 역사를 아는 사회라면, 낙인을 물려받아 휘두르는 대신 물어야 한다.
이번에는 누가, 무엇을 지키려고 이 말을 쓰는가. 사이비의 실체는 없다. 사이비를 필요로 하는 권력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