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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한삼국지 328
(소설삼국지)
제3권 적벽대전
제35장 새로운 인재들의 성장
1) 사마의
업성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 사내가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고 우산을 받쳐 든 채 복잡한 뒷골목을 돌아 나왔다. 봉의 눈에 수염이 넉 자나 되는 풍채가 당당한 선비였다. 부릅뜬 눈에서는 광채가 빛처럼 쏟아져 나왔다. 최염이었다.
업성의 거리는 아직도 한을 품고 있는지 을씨년스러웠다. 불과 4년 전 이 거리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조조가 업성을 포위 공격했을 당시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는 노약자들에게는 식량이 공급되지 않았다. 명문 사족의 집안에서도 영양실조로 서로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로 쓰러져 죽은 사람이 많았다. 최염은 그 때 옥사에 갇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지였었다.
업성은 한창 시가지 재단장 중이었다. 조조가 유성에서 돌아와 막 승상이 되고 나서 새로운 건축물들이 여기 저기 신축되고 있었다. 사공부와 승상부는 격이 다르고 부서와 관원들의 수효도 차이가 많았다. 이제는 전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허도가 아닌 업성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새로운 부서와 관직이 생기니 관부도 증축해야 했고 성시가 활기를 띠다 보니 상업적 시설들도 건축 붐을 이루었다.
그렇지만 뒷길은 아직 포장도 안 된 곳이 많았다. 최염은 조심스럽게 골목길에 파인 물웅덩이를 피해 요리조리 발길을 옮기더니 한 고풍스러운 저택 앞에 발을 멈췄다. 문고리를 두들겨 사람을 부르자 한참 지나서 한 젊은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갈건에 도복 차림이었지만 한참 낮잠을 자다가 나왔는지 머리에 쓴 건도 약간 삐뚤어졌고 옷매무새도 흐트러져 있었다. 젊은이는 최염의 다소 엄한 눈길을 의식했는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젊은이는 최염에게 길게 읍을 했다.
“중달(仲達), 백씨께서 이미 도착하셨는가.”
“어젯밤 늦게 도착해서 지금은 쉬고 있습니다.”
중달이라 불린 젊은이는 최염을 사랑채로 안내했다.
사내는 키가 헌칠하게 컸다. 비록 비쩍 마른 편이었지만 근골만은 튼튼했다. 최염은 문득 체격이 큰 것이 사마씨의 특징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골격만으로 봐선 틀림없는 장재였다. 하긴 이 젊은이의 형 사마랑도 그 점에 있어선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형제는 격검과 무예에는 신경 쓰지 않고 학문에만 몰두했다. 가끔씩 병서를 읽기는 읽는 모양이었다.
타고나길 장재로 태어났으면서도 학자나 문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최염 자신만 해도 젊어서 한 때 날리던 검객이었다. 풍채나 기상으로 보아도 천하를 호령할 대장의 상이었지만 그도 지금은 주의 관부나 사공부에서 인선이나 하는 문관으로 종사했다.
그라고 난세에 대군을 이끌고 천하를 종횡할 뜻이 없었겠는가. 젊어서 강호를 유랑하고 또 사 년여에 걸친 수형생활을 하다 보니 스스로 근거를 만들 기회가 없었다. 최염 자신이 담백한 성격이어서 먹고 먹히는 권력투쟁의 장에 뛰어들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현재 그가 섬기고 있는 조조라는 사람은 질투심이 강하고 타인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이어서 문무에 두루 재능이 있거나 자신보다 장점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절대 병권을 쥐어주지 않았다. 최염은 그러려니 하면서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고 충신근후(忠愼勤厚)한 자세로 맡은 바 임무에만 충실했다.
최염은 사공 조조가 업성을 점령하고 기주목을 겸하게 되었을 때 그의 별가종사로 초빙되었다. 조조가 병주를 토벌하러 갈 때 최염을 업성에 남겨 조비를 보좌하게 했다. 그 때 조비는 팔팔한 십대 소년이었다. 사냥을 좋아해 수렵용 옷가지와 수레를 마련해 놓고 머릿속에는 온통 사냥터에서 짐승들을 잡을 생각이 가득했다. 최염이 글을 올려 간언하자 조비가 깨우침을 받아 수렵용구와 말 탈 때 입는 의복을 다 폐기했다.
조조가 승상이 되자 참모조직을 개편했다. 승상부 내에 동조(東曹)와 서조(西曹)를 설치하고 동조는 모개가 담당하고 서조는 최염에게 맡겼다. 조조는 승상부에 최고의 실력을 갖춘 신진 사류들로 채울 생각이었다. 최염은 사마랑(司馬朗)을 승상주부(丞相主簿)로 추천했다. 최염은 사마랑보다 십년 정도 연상이었지만 그들 둘은 막역한 사이였다. 조조의 수하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사마랑이 먼저였다. 사마랑은 건안2년(197년)에 스물두 살의 나이로 처음 출사해 사공 조조의 부름을 받아 사공연속(司空掾屬)이 되었다. 반면에 최염이 기주목 조조의 별가종사가 된 것은 건안9년(204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사공부 내에서 최염의 비중이 훨씬 더 높았으므로 양자 간의 사이는 대등한 친구사이라기보다는 최염이 사마랑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해 발탁하고 끌어주는 그런 사이였다.
사마랑은 위군 원성(元城) 현령으로 있다가 승상부의 부름을 받고 이제 막 업성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사마랑의 자는 백달(伯達)이고 하내(河內) 군 온(溫) 현 출신이었다. 사마랑의 조부 사마준(司馬俊)은 고문(古文)을 좋아하고 박학했으며 기개가 있고 도량이 컸다. 신장이 팔척 삼촌에 허리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어 체격이 우람하고 비범한 형상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특별하게 대우했으며 향당과 종족들이 다 우러러보고 의탁했다. 직위가 영천태수에 이르렀다.
부친 사마방은 자가 건공(建公)이고 성정이 곧고 반듯해 모든 일에 공정 무사했다. 아무리 연회장에서 먹고 마셔도 위엄과 예절이 어긋남이 없었다. 사마방은 한서(漢書)의 명신열전을 매우 좋아했으며 암송한 것이 수십만 자에 달했다. 젊어서 주와 군의 관리로 봉직했고 낙양령(洛陽令)과 경조윤(京兆尹)을 역임했다. 사마방은 나이를 먹은 후 기도위(騎都尉)로 자리를 옮겼으며 여염집에 머물면서 문을 닫아걸고 뜻을 기르며 스스로를 수양했다. 여러 명의 아들들이 관례를 해 성인이 되었음에도 나아가라는 명이 없으면 감히 나아가지 못했고 앉으라는 명이 없으면 감히 앉지 못했다. 부자지간의 엄숙함이 이와 같았다.
조조를 천거해 낙양북부위에 임명되게 한 사람이 바로 사마방이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여덟이 있었는데 사마랑이 장자였고 중달이라 불렸던 사마의가 둘째 아들이었다.
사마랑이 나이 아홉 때 어떤 사람이 사마랑의 부친의 자를 함부로 부르자 사마랑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부친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친도 공경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손님은 그에게 사과했다.
사마랑은 십이 세에 경서 시험을 보아 동자랑(童子郎)이 되었다. 이 때 시험을 감독하던 사람이 사마랑이 신체가 장대한 것을 보고 그가 나이를 속였다고 의심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사마랑이 말했다.
“저의 집안은 대대로 기골이 장대합니다. 사마랑이 비록 약하고 어리나 높아지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없습니다. 나이를 줄여 일찍 성취하기를 구하는 것은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시험감독자가 이 말을 듣고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관동에서 병사들이 일어났을 때 전 기주자사 이소의 집안이 야왕(野王) 현에 거주했다. 야왕현은 험한 산이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이소는 온(溫) 현으로 거처를 옮기고자 했다. 사마랑이 이소에게 말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비유가 어찌 우(虞)와 괵(虢) 나라에만 적용되겠습니까. 온현과 야왕현이 바로 이런 관계입니다. 지금 그곳을 떠나 이곳에 이주하려는 것은 아침에 망할 곳을 피해 저녁에 망할 곳으로 옮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그대는 백성들이 우러러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도적들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그대가 먼저 이사를 하면 산악지방의 현들은 반드시 놀라 어지러워질 것이고 민심이 요동을 치게 되어 간악한 도적들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도적들이 군내의 우환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소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과연 변방 산에 사는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내륙지방으로 이주하면서 혹자는 도적질과 약탈을 자행했다.
산동에서 대란이 일어났을 때 동탁은 천자를 장안으로 천도하게 했다. 사마랑의 부친 사마방은 치서어사(治書御史)로 있었으므로 당연히 천자를 따라 서쪽으로 이주해야 했다. 사방에 소요가 구름같이 일었으므로 사마방은 사마랑에게 가속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사마랑이 반군에 망명하려 한다고 고발한 자가 있어 동탁에게 체포되었다. 동탁이 사마랑에게 말했다.
“경과 나의 죽은 아들이 동갑인데 그대는 어찌 나를 저버리려 하는가!”
사마랑이 답변했다.
“명공은 세상을 뛰어넘는 높은 덕으로 재난의 시기를 맞이해 더러운 무리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널리 어진 선비들을 천거했으니 이는 진실로 마음을 비우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힘을 기울인 것입니다. 장차 더할 나위없는 훌륭한 통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지금 명공의 위엄과 덕망이 융성하고 공훈과 업적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만 병사들이 어지럽게 일어나 주와 군이 들끓고 있어 근교와 경내의 백성들이 편안이 생업에 종사할 수 없어 집과 재산을 버리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달아나 숨고 있습니다. 비록 사방에 관소를 설치하여 금지하고 무겁게 형벌을 가한다 할지라도 완전히 근절할 수 없으니 이것이 제가 고향 땅에 가 의지하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원컨대 명공께서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살펴보시되 적어도 세 번은 생각하십시오. 그리하면 영광과 명성이 해와 달과 같이 빛나게 되고 이윤과 주공조차도 감히 견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마랑은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풀기보다는 이 기회를 이용해 동탁의 공덕을 칭송해 주는 척하면서 그에게 깨우침을 주고자 했다.
동탁이 말했다.
“나 역시 깨달은 바가 있소. 경의 말이 의미가 있소!”
사마랑은 동탁이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므로 그에게 억류될까 두려워 즉시 재물을 풀어 동탁의 주변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온현에 돌아온 후 사마랑은 고향의 부로(父老)들에게 말했다.
“동탁이 패역하여 천하의 원수가 되었으니 이는 충신과 의사가 분발할 때입니다. 하내군과 경도(京都, 낙양)는 경계가 서로 붙어있고 낙양 동쪽에는 성고(成皋)가 있고 북쪽 경계엔 황하가 있어 만약 천하에서 의병을 일으킨 자들이 전진할 수 없게 되면 그 기세가 반드시 이곳에서 멈추게 될 것입니다. 이곳은 곧 전쟁터가 되어 사분오열될 땅이니 스스로의 안전을 구할 수 없습니다. 아직 도로가 서로 통해있으니 종족을 데리고 동쪽 여양으로 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여양(黎陽)에는 군영과 병사들이 있고 예로부터 우리 향리와 혼인관계에 있는 조위손(趙威孫)이 감영알자(監營謁者)가 되어 병마를 통솔하고 있으니 우리를 맞이해 잘 대접해 줄 것입니다. 만약에 나중에 다른 변화가 생기면 그 때 서서히 고향으로 돌아와도 늦지 않습니다.”
부로들은 옛 고향을 떠나길 싫어해 사마랑의 말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 오로지 같은 현 출신의 조자(趙咨)만이 가속을 이끌고 사마랑과 함께 여양으로 떠났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관동의 여러 주와 군에서 병사를 일으켜 병력 수십만 명이 다 형양(滎陽)과 하내(河內)에 구름처럼 모였다. 여러 장수들은 서로 통제할 수 없어서 병사들을 풀어 약탈하니 백성들 중 죽은 사람의 거의 반수에 이르렀다.
순욱의 경우와 비슷한 사례였다. 사마랑의 형세 판단은 비슷한 시기에 영천에서 기주로 이주한 순욱과 같았다. 무릇 현명한 자들의 판단은 대개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오랜 후 관동의 병사들이 흩어지고 조조가 여포와 복양에서 서로 대치할 때, 사마랑은 집안을 이끌고 다시 온현으로 돌아왔다. 그 때 큰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사마랑은 집안사람들을 구휼하고 여러 동생들을 훈육하며 세상이 어지러웠음에도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후 조조의 부름을 받아 사공연속(司空掾屬)이 되었다가 성고(成皋) 현령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관직을 떠났다가 다시 당양(堂陽) 현장이 되었다.
사마랑의 통치는 관대하고 은혜로워 채찍과 곤장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백성들이 법을 어기지 않았다. 사마랑의 현 백성들 중 낙양의 인구를 보충하기 위해 이사한 자들이 있었다. 그 후 조정에서 사마랑의 현에 명을 내려 갑자기 배를 만들어 바치게 했다. 이사했던 백성들이 그가 미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 서로 의논해 고향으로 돌아와 배 만드는 일을 도왔다. 그가 백성들에게 사랑받음이 이와 같았다. 사마랑은 원성(元城) 현령으로 옮겼다가 이번에 다시 조조의 부름을 받았다.
최염은 사랑채에서 사마랑과 환담을 나누었다. 사마랑은 인물품평과 고전에 능했으므로 대화소재가 풍부했다. 최염의 주요 역할이 좋은 인재를 발굴해 추천하는 일이었으므로 조정과 재야의 여러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주요 의제였다. 조정의 시무로 화제가 옮겨가자 사마랑은 본인의 지론인 오등급작위제(五等級爵位制)의 부활을 역설했다.
오등급작위제란 주나라 시절에 제후들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가지 등급으로 나누어 각지에 분봉하던 제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바로 분권적 봉건제도를 일컫는 말이었다. 사마랑은 세상이 혼란한 이유가 중앙집권화하면서 군과 국의 군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군과 국에서 농한기를 이용해서 군대를 양성하고 훈련시킬 수가 없었기에 사방에서 오랑캐가 침입하고 안에서 도적들이 일어나도 이를 조기에 진압할 능력이 없었고 이로 인해 천하가 점차 혼란해지게 되었다는 것이 사마랑의 분석이었다.
이와 아울러 사마랑은 정전제(井田制)의 부활을 주장했다. 천하가 혼란해져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유랑하게 되니 점점 더 도적떼의 무리만 성해졌다. 백성들이 농토를 버리고 다 흩어져 모든 토지가 공전이 되었으니 이 기회에 정전제를 실시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최염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사마랑은 일종의 복고주의자였다. 주대의 제도를 이상화 한다는 점에서 공자의 사고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최염은 의론은 좋으나 현실적으로 실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마랑이 한 참 열변을 펼칠 때 사마의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인사를 하러 왔다. 행장을 꾸린 모습이 어디인가 멀리 다녀올 품새였다.
“아버님께 다녀오겠습니다.”
사마방은 그 무렵 고향 온현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업성과 온현을 수시로 왕래했지만 하내군이 안정된 이후로는 향리에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일전에 연락이 와 몇 가지 물품을 챙겨 보내라고 했다. 사마랑의 집에서 그 심부름을 할 사람은 현재 사마의 밖에 없었다. 그때는 차일피일 미루더니 손님이 찾아오니 갑자기 길을 떠나겠다 했다.
사마랑은 마뜩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사마랑은 건녕4년(171년)생이었고 사마의는 광화2년(179년)생이었으므로 사마랑이 사마의보다 여덟 살이 위였다. 사마방이 치서어사로 장안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사마랑은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며 집안 살림을 꾸려왔고 사마의를 포함한 동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사마의가 부친을 찾아뵙는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빠져나가려는 것을 알았지만 마지못해 허락했다. 사마의가 자리를 뜨자 최염이 사마랑에게 물었다.
“중달은 올해 나이가 몇인가?”
“서른이 다 되었습니다.”
“아직도 환로에는 나갈 생각이 없는 것인가?”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빈둥거리기만 하니.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수양한다든가 학문에 힘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마랑은 입맛을 쩍쩍 다셨다. 수명이 그다지 길지 않았던 시대였다. 사족 명문가의 자제로 학문과 재능이 있는 자들은 나이 이십 전후에 출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사마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빈둥거리고 있었다. 학문에 정진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자기를 철저하게 수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부 불량한 소년들처럼 작당을 하거나 한량처럼 놀고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무위도식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간간히 집안 심부름이나 다니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불러주는 곳이 없어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건안6년(201년)에 하내군에서 사마의를 사공 상계연(上計掾)으로 천거했다. 사마의는 젊어서부터 박학다식하고 머리가 비상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또 끊고 맺는 것이 분명했으며 기개가 있었다. 또 하내군 출신의 남양태수 양준(楊俊)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사마의가 아직 약관(弱冠)에 이르기 전에 그를 살펴보고는 장차 비상한 큰 그릇이 될 것으로 보았다. 조조가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초빙했다.
조조가 사마랑 형제를 연속으로 부른 것은 마음의 빚을 갚고 싶은 심정도 어느 정도 있었다. 왕조 시절에 사인의 출사는 반드시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것이었다. 관직이 유일한 직업인 사족계급의 구성원은 환로에 나간다는 것은 바로 제 2의 탄생을 의미했다. 어떻게 보면 출생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이 출사였다. 여기서 비로소 세상에 나간다는 의미로 출세(出世)라는 말이 나왔다. 따라서 사인이 출사할 수 있게 천거해 준다는 것은 필생을 두고 갚아야 할 큰 은혜를 베푸는 일이었다.
사인들은 자신을 천거해준 사람을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군사부일체의 윤리질서 하에서 스승에 대한 의리는 군주에 대한 충성에 버금가는 의미를 지녔다. 원환이 자신을 추천해준 유비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여포의 칼날에 맞서기까지 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 손권은 효렴으로 자신을 천거해준 주치를 평생 스승의 예로 대접했다. 조조를 알아봐 주고 뒤에서 그가 관직에 임용될 수 있도록 힘을 써준 사람은 교현이었지만 실제로 그를 천거한 사람은 사마방이었다.
사마의는 당분간 거취를 정할 생각이 없었다. 사인의 출사는 중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누구에게 출사하느냐가 더 중요했다. 사인의 미래는 자신이 섬기는 주군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인의 출사는 신중히 검토되어야만 하는 사안이었다.
천하는 어지러워졌고 바야흐로 한나라의 명운은 풍전등화에 처했다. 한나라가 중흥의 기회를 맞을 수 있을지 분명치 않았다. 현재 패권을 쥐고 있는 조조의 명운 자체도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조조의 향후 의도가 무엇인지 아직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사마의는 병을 핑계대고 조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사공부의 재촉이 심하자 사마의는 풍질에 걸려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말에 속을 조조가 아니었다. 갓 스물을 넘은 혈기왕성한 젊은이가 풍기가 있다니. 그의 정보망은 각 군과 현에 세밀하게 펼쳐져 있었다. 사마의는 남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문을 닫아걸고 이불을 깔고 누워버렸다. 조조가 이 말을 듣더니 위악적인 표정을 짓더니 짐짓 심드렁하게 한마디 했다.
“온몸이 마비되었다고? 가서 누운 자리를 칼로 찔러보아라. 그래도 안 일어나는지.”
누구의 말인가. 사자는 부리나케 길을 떠났다. 품속에는 날카로운 비수를 품었다. 사자가 온현에 도착해 사공부의 명을 전하니 사마의는 재빨리 침상에 올라가 눈을 뒤집고 몸을 비튼 채로 누웠다. 집안사람의 안내를 받고 들어온 사자는 이 모습을 보고 다짜고짜 단검을 뽑아 사마의를 찔렀다. 칼끝이 눈앞에 이르렀지만 사마의는 꼿꼿하게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사자는 사마의의 병이 정말로 심각하다고 판단에 손을 거두었다.
담력도 담력이었지만 사마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때 내려치는 칼날이 두려워 몸을 피했다면 윗사람을 기만한 죄를 면하기 어려웠다. 조조의 날카로운 성미에 죽음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그 후 조조는 하북을 평정하고 오환족을 정벌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사마의 따위의 일개 서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사마의는 슬그머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과의 교류도 천천히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병객인 체하며 다소 어수룩하게 행동하면서 날카로운 지혜를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피했다.
사마랑이 동생에 대해 마음에 안 들어 하는 표정을 역력하게 짖자 최염이 한마디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다 제 생각이 있는 것이지. 자네의 동생은 장차 뛰어난 인물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네.”
최염은 사마랑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자주 그의 집에 드나들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마의와도 자주 접촉하게 되었다. 몇 번 대화를 나누어 보고 최염은 사마의가 대단히 예리한 분석력과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학문적인 면에서도 정치함은 떨어졌으나 고금의 학문에 두루 박식할뿐더러 그 요체를 꿰고 있었다. 사마의는 총명하며 지략이 풍부할뿐더러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우국의 뜻도 가슴 속 깊이 품고 있었다.
과거 인물평에 뛰어났다는 평판을 들었던 사람들이 왜 초년 시절의 사마의를 그렇게 높게 평가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염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사마랑에게 말했다.
“자네의 동생은 총명하고 사리에 밝으며 강단이 있고 영특해 장차 자네가 따라갈 수 없을 것이네.”
사마랑은 최염의 말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마랑의 관점에서 보면 사마의는 소싯적에 매우 총명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불성실한 태도로 자신의 재능을 썩히고 있었다. 사마랑은 매사에 성실한 태도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충신근후함이야 말로 선비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품성이라고 생각했다.
사마의는 길을 떠났다. 아직도 한적한 길에는 도적들이 출몰했다. 조조가 비록 중원을 평정했다고는 하지만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여러 장수들과 병사들은 백성들을 약탈하고 수탈하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누가 병사고 누가 도적인지 구분이 잘 안가는 때도 있었다.
곳곳에 사람들이 굶어서 쓰러져 있고 성읍에 거주하는 자들도 얼굴이 파리했다. 난세였다. 사백년 간 번영을 누리던 한나라도 이제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후한 순제 시절에 전국적으로 호구조사를 한 바에 의하면 전국 백 다섯 개 군에 등록된 인구가 사천구백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구가 반도 채 되지 못했다. 각 주와 군에 기록된 공부와 실제 호구 수는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학살되고 굶주려 죽고 또 목숨을 구해 뿔뿔이 흩어졌다. 국가 체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곡에 들어가 숨어 살거나 만이의 땅으로 도망해 들어간 자들도 많았다.
전쟁은 아직도 끝날 전망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비록 조조가 천자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고는 있지만 이대로 천하가 평정되어 하나로 통일될 수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게다가 조조에 대한 악평이 몹시 심했다. 사대부 계급에서는 그를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정서가 강했다. 출신 배경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조조는 학살자였다. 법령이 너무 가혹했고 덕으로 다스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곧 찬탈자가 되고야 말 것이라는 깊은 의심이 존재했다.
현실적으로 한나라가 중흥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 합리적 판단이었다. 그러나 사마의는 유학의 가르침을 가슴 속 깊이 품고 체화한 사람이었다. 한나라에 대한 절조를 지켜야 하는 것은 유교가 가르치는 당위였다. 사마의는 번민하고 있었다. 천하대란을 맞이해 나라와 백성들의 장래와 운명을 걱정했지만 현실을 개탄하는 것 이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마의가 마냥 명분과 도덕에만 얽매이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 이룬 공도 없이 나이만 쌓여가고 있었다. 더 이상 출사를 미룬다면 속세를 등진 처사의 길만이 남아 있었다. 그의 번민은 점점 더 깊어만 갔다. 천하의 대세는 이제 거의 정해진 것은 아닌가. 이제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만 할 시점이 된 것은 아닌가. 나라를 저버렸다는 양심의 가책을 면할 수는 있지 않을까.
조조는 승상이 된 후 널리 젊고 유능한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그도 역시 드러내 놓고 뜻을 보이는 일을 경계하고는 있었지만 이미 한나라의 명운이 다했으며 이를 역전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한나라를 대신해 천하를 바로잡아야만 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천하를 안정시켜 백성을 편안케 할 자는 바로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조조가 승상이 되었을 때는 나이가 오십 삼 세였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는 이미 장수한 셈이었다. 언제 질병으로 쓰러질지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자신이 천하의 주인이 된다면 후사를 담당할 후계자를 양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장자 조비는 나이가 스물이 되었다. 조조는 젊고 능력 있는 천하의 재사들을 모아 자기의 후계자에게 자산으로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두루 인재를 구했다. 조비 등 아들들의 측근에 두고 함께 키워보고자 했다.
가장 먼저 징소된 사람이 태위 양표의 아들 양수와 사마의였다. 조조는 사마의를 승상부의 문학연(文學掾)으로 불렀다. 그 동안 사마의가 꾀병을 부리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았으므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조정에서 불러도 관직에 나오지 않겠다는 것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겠다는 간접적인 의사표시였다. 이런 태도를 내버려 두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름을 얻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초빙을 거부하면서 밖으로 돌 것이 아닌가. 채옹이나 공융과 같은 무리는 적은 게 좋다는 것이 조조의 판단이었다. 예형과 같은 자가 되기 전에 싹을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조조는 사자를 보내면서 엄명했다.
“이번에도 조칙을 거부하면 그대로 돌아 오거라. 내 별도로 취할 계책이 있다.”
조조는 사마의가 더 이상 핑계를 대면 조명을 거부한 죄를 물어 즉시 처단할 것임을 은근히 암시했다.
조조의 뜻을 알아차린 사자가 사마의를 찾아와 뻣뻣한 자세로 조명을 전했다. 조칙을 받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나는 가서 보고만 하면 된다는 식이었다.
“만약 또 다시 머뭇거리면 곧 조칙을 거두어들이겠다.”
사마의는 두뇌가 명석한 사람이었다. 곧 상황을 판단했다. 사마의는 조조의 보복이 두려웠다. 이만 하면 스스로 할 만큼 했다고 자위하면서 관직을 받고 승상부로 나아갔다.
조조는 흐뭇했다. 사마의에게 조비와 함께 교유를 나누게 했다. 이때 조비의 양육을 위해 조조가 그와 교유하게 한 사람은 사마의와 양수 이외에도 문장가로 이름난 진림과 북해사람 서간, 진류사람 완우, 여남 사람 응창 등이 있었다. 형주를 평정한 이후에는 그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왕찬도 이들과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조비보다는 나이가 열 살에서 스무 살 가량 위였다. 비교적 비슷한 연배는 사마의와 양수뿐이었다. 이들 이외에는 조조의 친척으로 조조가 거두어 키운 조진, 조휴 등과 하후연의 조카 하후상 등이 조비의 친한 친구였다.
사마의는 곧 황문시랑(黃門侍郎)으로 승진했다가 의랑(議郎)으로 전보되었으며 다시 승상 동조속(東曹屬)이 되었다가 이어서 승상부 주부(主簿)가 되었다.
당시에는 모든 권한이 승상 조조의 수중에 있었으므로 승상부 관리들의 지위와 권력이 매우 강했다. 일개 승상연속들이 외직에 나갈 때 바로 주목이나 군수로 나가는 경우도 많았고 군의 태수나 현령들이 승상연속으로 들어오면 영전했다고 보는 분위기였다. 사마의는 승상부의 핵심 요직들을 전전했을 뿐더러 조비와 벗이 되었으므로 조씨 정권의 차세대 주자로서의 확실한 길을 보장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