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내일(5월 16일)이 벌써 50주년입니다.
그것이 혁명인지 쿠데타인지, 논란이 분분할거 같아 언급 하지 않을 랍니다. 걍 5.16으로만 표기합니다.
“반공을 국시의 제 1로 삼고~~”로 시작하는 혁명 공약을 달달 외며 국민학교 다니던 때가 엊그젠데 그게 벌써 50년 전의 일이 돼 버렸습니다.
여기 저기 많은 5.16 50주년 특집 기사가 나왔습니다. 대체로 자세히 읽어 봤습니다만 그 중 특히 눈길을 끈 것이 한겨레 신문의 도널드 그레그 전 한국대사 (재임 1989~1993) 인터뷰였습니다. 그는 70년대 유신 정권 때 美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 총책임자로 있던 사람입니다. (이하 그레그)
이 기사에서 그레그가 박정희 대통령(이하 박정희)에게 했다는 말 중
‘각하께서 터키의 케말파샤와 비교된다는 걸 아십니까?’ 라는 부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레그 또는 미국이 박정희를 그 정도로까지 평가했나? 이런 저의 의문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레그의 말에 대한 박정희의 답
‘이 친구가 지금 뭘 말하려는거야? 나는 케말파샤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터키를 경제적으로 강하고, 군사적으로 안전하게 만든 것처럼 나도 한국에서 그렇게 하길 원한다. 그러나 나는 (케말파샤처럼) 죽을 때까지 대통령직에 영원히 있진 않겠다. 어쩌면 나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이 자리에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지난번(1972년)에 대통령에 나서지 않았다면, 내 처는 아직도 살아있었을텐데’
관련기사 보기
“박정희 1972년 핵개발 착수…1977년 포기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77753.html
박정희의 답에서 자신을 케말파샤에 비견될 만한 인물로 생각했는지 안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높이 평가했던 건 사실인 듯하고요.
박정희와 케말파샤!
과연 박정희가 케말파샤와 함께 거론되고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인가?
저는 케말파샤에 대해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 케말파샤 전기를 한 권 읽은 것, 90년대 초 터키를 여행하면서 열흘 내내 가이드로 부터 들은 케말파샤에 대한 터키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 등이 전부일 뿐 전문지식은 전혀 없습니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국민학교 때 부터 군 전역 무렵까지 어린시절, 청년시절 동 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니 무슨 학술적인 비교는 불가능하고요. 5.16 50주년을 맞아 친구들끼리 술집에 앉아 잡담을 나누는 정도의 비교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간단하게 케말파샤의 생애를 살펴 보도록하겠습니다.
1. 케말파샤의 생애
그는 1881년 오스만 터키의 변두리 지역이던 지금의 그리스 땅에서 서민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다 중등군사학교를 거쳐 사관학교에 입학, 군인의 길을 걷습니다. 사관생도 시절및 초급장교 시절에 이미 이슬람 칼리프 왕정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여 하고 있었던 그는 1908년 청년 투르크 당 군대의 일원으로 왕정에 반대하는 군사 반란에 참여하였고, 이듬해 다시 한번 군사반란에 참여해 28살의 나이로 이스탄불 진공 작전을 맡아 성공 시킬 만큼 군에서의 입지를 키웠습니다.
그가 오스만 터키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것은 1차 세계대전 때문이었습니다. 1차 대전 초기 당시 세계 최강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함대를 격파하고, 상륙군 7만을 거의 전멸시켰습니다. 1915년 2월부터 10월까지 계속된 이 갈리폴리(이스탄불 서남쪽 200km) 전투에서 연합군은 25만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습니다. 그가 지도자라는 의미의 ‘파샤’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이 전투의 승리 덕분이었습니다. 1981년에 상영된 멜 깁슨 주연의 영화 갈리폴리가 바로 이 전투를 무대로 한 것입니다.
이후에도 그는 동북전선에서 러시아군을 대파하는 등 거의 모든 전투에서 적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한 장군이라도 한 사람의 힘으로 밀리는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는 일. 1918년 10월 오스만터키는 연합군에 항복하고 그는 패전국의 장수로 살아 남았습니다.
그의 놀라운 힘은 이때부터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점령군에 무력으로, 그리고 비정하고도 처절한 ‘전략’으로 저항해 오스만 터키의 전 영토(남부 유럽일대와 중동 전역)를 분할하려는 연합국의 조약체결 기도를 무력화 시켜 (이과정에서 그리스계 주민 밀집지역을 점령해 조약 체결 기도를 포기할 때까지 유럽계 주민들을 하루 몇 명씩 공개처형 하는 방식으로 연합국을 굴복 시켰다는 글을 읽은 기억인데 지금은 검색되지 않음) 이스탄불 일대의 유럽 지역과 아나톨리아 고원지역을 아우르는 지금의 터키 영토를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연합국은 허울뿐인 오스만 터키 정부를 마음대로 좌지 우지 하고 있었고 서쪽의 그리스와 동쪽의 아르메니아는 터키 영토를 엿보다 군사행동을 시작합니다. 당시의 오스만 터키 정부는 더 이상 나라를 지킬 의지도 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케말 파샤는 1919년 5월 19일 혁명을 선언하고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 나라를 새로 세울 것을 선업합니다.
그는 기존의 휘하 군대와 그를 지지하던 군인들, 그리고 새로운 지원병등을 규합해 오스만 터키의 군대가 아닌 케말파샤의 군을 지휘해 아르메니아와 그리스 군을 격파하고 그들을 터키 영토에서 완전히 몰아 냈습니다. 이쯤 되면 국민들의 지지는 보나 마나한 것. 1923년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패전국의 장수가 승전국들의 군대를 모두 격파하고 허수아비 정부를 폐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이런 전례는 역사적으로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비유는 지나칠까요?
조선이 명-왜 연합군과 전쟁을 했다. 이순신장군은 연전연승 백전백승했으나 육군과 다른 수군이 전멸하자 조선 정부는 명-왜 연합군에 항복했다. 명-왜가 38선을 경계로 나라를 나눠 가지고 선조는 명나라 귀족질이나 해 먹으려 든다. 장군이 남은 배와 병사들 그리고 의병을 규합해 명과 왜를 전멸시키고 입헌 군주국을 선포, 선조는 조선 왕실 제사를 모시게 해 주고 자신은 의회 선출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제가 이해하고 있는 케말파샤는, 이건 좀 많이 오버한거 지만 말하자면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2. 오스만터키를 폐하고 터키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케말파샤.
그는 1200년대에 건국된 중세 왕정국가를 근대국가로 거듭하게 하기위해 엄청난 개혁을 단행하고 이를 밀어 붙이고 거의 정착시켰습니다.
1) 神-政 분리: 이슬람이 모든 것인 나라를 이슬람은 종교일 뿐인 나라로 바꿔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구 오스만터키는 종교지도자 칼리프가 정치 지도자 술탄을 겸하는 나라. 종교가 나라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나라였으나 그는 종교는 칼리프가 주도하되 정치에는 개입할 수 없게 하고 정치는 종교에 개입할 수 없게 했습니다. 당시 이슬람 사회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조치였던 것으로 읽었습니다.
2) 종교와 생활의 분리 :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슬람권은 종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종교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그래서는 제대로 된 나라, 국민 개개인의 권익이 존중되고 경제 규모가 커지고 스스로 조국을 지킬 수 있고 국민이 제대로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다하는 나라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남성의 터번을 폐지하고 여성의 히잡 차도르 등등을 금지했습니다. (용어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전통 이슬람 복장은 종교행사 때만 착용하고 일상 생활에서는 그런 복장을 금지 했다는 글을 읽은 듯 한데요. 일부 독실한 또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따르지 않자 강압적으로 그런 복장을 금지한 걸로 알고 있는데 역시 검색을 통해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3) 기독교 인정, 종교차별 금지. 이슬람 사회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대 혁명이었습니다.
4) 남녀 차별 금지. 역시 당시로서는 꿈도 못꿀 대 혁명이었습니다.
5) 국가 주도 경제개발.
6) 문자 창제(?) : 저는 이를 케말파샤 최대 업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오스만 터키는 왜 서방에 졌나? 백성이 무식하기 때문이다.
오스만 터키 백성은 왜 무식하냐? 문자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터키는 터키어를 아랍문자로 표기했었는데 이 아랍문자가 보기에는 아주 멋있어 보여도 너무 어려워 일반인들이 제대로 배우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랍문자를 쓰는 나라들 문맹률이 대단히 높은 편입니다.
케말파샤는 아랍문자로는 온 국민이 글을 깨우쳐 진정한 민주시민으로 거듭나기 어렵다는 판단아래 아랍문자를 폐지하고 독일어를 기본으로하는 로마자를 채택, 영문 알파벳으로 터키어를 표기하는 지금의 터키 글을 도입했습니다. 실로 선견지명. 지금 터키의 문맹률은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낮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랍문자는 종교와 관련한 연구, 학술, 수련, 행사 등등에서만 사용하고 나머지 일상생활에서는 독일어를 기본으로한 로마자를 도입한 지금의 터키 글을 사용토록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문자가 없는 많은 나라들이 로마자를 도입해 자국어를 표기하고 있습니다. 최근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은 한글을 차용해 부족어를 표기하고 있다지요. 그 시초가 케말파샤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아랍권에서 일어 나고 있는 이른바 자스민 혁명, 그건 이미 약 100년전 터키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다른 점은 약 100년전 터키에서는 케말파샤 개인의 통찰력과 그가 지휘하는 군대의 힘이 상황을 주도했다면 지금은 SNS라는 커뮤니케이션이 주도하고 있는 정도라고 할까요. 그러나 지금의 자스민 혁명이 1920년대 당시 터키 처럼 세상을 일거에 바꿔 놓을 정도로 강력할지 그건 좀더 지켜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암튼 그는 백년 뒤 이슬람 권 사람이 꿈꾸기 시작한 것을 백년 전에 이미 이룩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과 박정희가 비교 될 수 있을까요.
그는 1938년 11월 57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사망원인은 과로와 간경화였던 걸로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일생을 혁명과 전쟁과 개혁에 투신했던 사람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정치의 스트레스와 격무로 인한 피로, 등등을 여가 시간에 술과 담배로 풀었다고 합니다.
격무로 인한 만성피로와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저는 그를 너무나 엄청났던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으니까 모든 것이 대단해 보입니다만, 57세 지금의 저와 동갑인 나이 때의 그의 죽음.
비교적 젊은 나이의 그의 죽음, 그 당시 그리고 지금도 터키 국민들의 슬픔이겠지만 오히려 그게 혹시는 지금의 민주 터키를 있게 하는 거름이 되지는 않았으지? 구국영웅들이 너무 오래 살아 망령이 들어 나라를 망치는 경우도 수 없이 많았습니다.
박정희와 케말파샤의 비교,
밤이 너무 깊어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양해들 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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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516004006
[5·16 50돌] 5·16을 말한다 김재춘 前중정부장과 김웅수 당시 6군단장
■ “8기 JP가 주도했다고? 5기가 핵심 세력이었지”
주역 중 1인 김재춘 前중앙정보부장
‘삼국지’ 첫 대목으로 기억된다. ‘창장(長江)강은 뒤 물이 앞 물을 밀치면서 도도히 흐른다.’ 역사의 물줄기를 의미하겠다. 꼭 50년 전 오늘은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긴박했던 하루였다. 도도히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를 확 바꿔놓은 사건, 이른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던 날이다.
▲ 5·16 군사정변 50주년을 맞아 지난 13일 김재춘 5·16 민족상 이사장이 서울 마포 사무실에서 당시 긴박했던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 분위기를 술회하고 있다.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최근 50주년을 맞아 5·16 그날이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당시 주체세력 중 한 사람으로 알려진 김종필(85·육사8기) 전 자민련 총재가 5·16에 대해 오랜만에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전 총재의 인터뷰 내용에 대해 반박하는 논리도 만만치 않다.
“육사8기생들이 혁명의 주체세력이라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아니 혁명을 주도하려면 병력을 거느리고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당시 그들에겐 따르는 휘하 병력이 거의 없었는데 뭘.”
김재춘(84·육사 5기) ‘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장은 5·16 당시 6관구사령부 참모장(대령)이었다. 그는 거사 전야인 1961년 5월 15일 밤 육사 5기생 출신을 주축으로 30여명의 영관장교들과 대책회의를 주도했다. 나중에 박정희 소장도 참석, 부대를 진두지휘하는 등의 역사가 있어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소위 ‘혁명의 산실’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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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혁명의 발상지였어. 15일 밤 10시에 5기생부터 8기생까지 주요 보직에 있는 장교들이 많이 모였지. 그때 김 전 총리는 보이지도 않았어. 다들 목숨을 내놓고 온 장교들이라 긴 말이 필요없었지. 침묵으로 긴 밤을 새우고 이튿날 새벽 3시 혁명군들이 여러 시설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각자의 역할로 돌아갔지.”
“김종필 주장은 말도 안돼, 육사 8기가 무…과학벨트 대전 확정…기능지구도 충청탤런트 박주아, 암수술 후 별세…유족들 반…미녀 작곡가, 여성부자 1위…”예쁜데 돈까…폐 굳는 ‘원인불명 폐렴’ 알고보니 5년동…박정희 “혁명은 경상도와 함경도 출신들이…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에 장교들이 모인 까닭에 대해 그는 “6관구사령부는 수도권을 포함, 전국의 부대를 통신축선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당시 5기생 출신들이 5·16의 주도세력이었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때 말야. 5사단장 채명신 장군, 12사단장 박춘식 장군, 6군단 포병단장 문재준 대령, 1공수여단장 박치옥 대령 등이 5기생 출신이었는데 병력을 이끌고 앞장서 출동해 말 그대로 일등공신들이었지. 개인적으로 김 전 총재에 대해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지만 당시 김 전 총재는 민간인 신분인 걸로 알고 있어.”
김 전 총재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원된 3700명 병력이 적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혁명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 이사장에게 “당시 김 전 총재는 하극상 사건으로 민간인 신분인데도 권총을 차고 가담한 것으로 돼 있다. 이는 불법무기 소지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허허, 아마도 목숨을 내놓은 상황이라 다급하게 권총을 찼나 보지 뭐.”라고 했다.
다음은 김 이사장(이하 김 참모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긴박했던 그날의 참모장실 분위기를 개략적으로 재구성했다.
김 참모장은 5월 15일 저녁 9시 30분쯤 시내에서 6관구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특이상황 여부를 묻고 박정희 소장에게 연락을 취한 뒤 곧장 부대로 향한다. 잠시후 부대정문에 도착한 김 참모장은 대기 중이던 혁명군 장교 20여명과 합류하여 참모장 집무실로 들어갔다. 밤 10시쯤 되자 다른 장교들도 추가로 합류했다. 김 참모장은 장교들에게 무기를 분배하는 등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6관구사령부는 당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해 있었으며 수도군단의 전신이다.
이 시간 박정희 소장은 경호책임을 맡았던 한웅진 준장(육군정보학교장)과 함께 청진동 소재 서울호텔에서 은밀하게 만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평소 청진동 골목에서 막걸리를 즐기다 보니 비밀장소를 서울호텔로 정했다.
이날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은 새벽 3시 6군단 포병단이 육본을 완전 장악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까지 기침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과 긴장의 시곗바늘만 째깍째깍 돌아갈 뿐이었다. 특히 새벽 3시 무렵, 참모장실에 영어를 구사하는 낯선 목소리의 전화가 와 긴장과 초조함은 더했다. 백악관인지 미8군 관계자인지 영어가 짧아 되묻지는 못했지만 ‘거사의 주동이 박정희가 맞느냐.’고 묻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김 참모장은 ‘맞다.’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새벽 4시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김 참모장은 박정희 소장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던 혁명 취지가 담긴 박정희의 친필 서신을 장도영 참모총장에게 인편을 통해 보냈다. 내용에는 ‘만약 일이 잘못될 경우 전원 자결키로 맹세한다.’는 뜻도 담겼다. 장 참모총장은 육본 군수참모 이·취임식이 있는 날이어서 필동의 한 음식점에서 회식을 마친 뒤 나중에 이철희 방첩부대장에게 종합적인 상황보고를 받았다.
“5·16 아침 박정희 소장 등과 함께 청와대로 갔어. 윤보선 대통령한테 정확한 사정을 보고하기 위해서였지. 비서관이 먼저 나와 우리들에게 ‘각하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라고 묻더군. 앞으로 잘 모시고 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안심한 듯 만나게 해줬어.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피신해 있어서 금남의 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지.”
박정희 소장한테 거사계획을 언제 들었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박정희 장군은 점조직을 통해 혁명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대부분 1대1로 만나 가담 여부를 타진했고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원래 거사일을 5월 12일로 했다가 연기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고 술회했다. 또한 그는 “우리 5기생들은 육사 때 박정희 장군이 구대장과 중대장을 했던지라 거사 제의 같은 것은 거절할 수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5·16 관련 내용은 인터뷰나 자료 등을 통해 대부분 공개됐다. 이 중 거사의 발상지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실이며 주축세력이 육사 5기생과 8기생 출신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그동안 왜 8기생 출신들의 역할이 더 부각됐느냐고 하자 김 이사장은 “아마 김 전 총재가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여서 그랬나 보다.”고 하면서 웃는다.
김문 편집위원 km@seoul.co.kr
●김재춘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와 1955년 육군대를 졸업했다. 1957년 연대장을 지낸 뒤 1961년 5·16 당시 5·16 군사정변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6관구사령부 참모장을 맡았다. 이후 방첩부대장 겸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을 지냈으며 1963년 최고회의 문교사회위원장을 맡았다. 그해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뒤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다. 이후 무임소장관, 자민당 최고위원 등을 거쳐 1971년 제8대 국회의원(김포·강화, 민중당) 1973년 제9대 국회의원(고양·김포·강화, 민주공화당)을 지냈다. 1974년 축산단체연합회 회장, 1975년 한·중예술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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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前 JP가 찾아와 정치발언 하기에 내쫓아”
反혁명분자 몰렸던 김웅수 당시 6군단장
5·16 당시 육군 6군단장(소장)이었던 김웅수(88)씨. 수도권 요충지에 포진한 6만명의 예하 병력을 법을 어겨 가며 진압군으로 동원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반 혁명세력으로 몰렸고 1년 뒤 군사정권의 간접적 압력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지난 13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그레이트폴스시의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5·16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라는 질문에 “쿠데타로 본다.”고 했으나, 답변에서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주로 썼다.
▲ 5·16 당시 6군단장으로서 반혁명세력으로 몰렸던 김흥수씨가 13일(현지시간) 미국 자택에서 진행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5·16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사단장급 이상 야전군 지휘관 회의가 5월 17일 강원 원주의 야전군사령부에서 예정돼 있었어요. 16일 열리는 체육행사에도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25~26명의 지휘관들이 15일 원주에 다 모였어. 16일 새벽 4시쯤 잠을 자고 있는데 이한림 야전군사령관이 관사에서 회의를 소집한다는 거야. 그래서 가 보니 이 사령관이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면서 “각자 부대로 돌아가 병력을 장악해라. 병력 이동의 빌미가 될지 모르니 부대에 비상을 걸지 말라.”고 지시했어요.
→6군단은 어떤 조치를 했습니까.
-6군단의 작전지휘권은 내가 아니라 미 1군단장이 갖고 있었어요. 불법을 진압하려 불법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그때 북한군 교신이 급격히 늘어나기에 비상을 걸었지. 비상을 걸면 자동적으로 1개 사단이 완전무장해서 특정지구로 출동하게 돼요. 이 일로 나중에 나는 반 혁명세력으로 간주되게 되었죠.
→미군에는 조치를 요구했나요.
“김종필 주장은 말도 안돼, 육사 8기가 무…과학벨트 대전 확정…기능지구도 충청탤런트 박주아, 암수술 후 별세…유족들 반…미녀 작곡가, 여성부자 1위…”예쁜데 돈까…폐 굳는 ‘원인불명 폐렴’ 알고보니 5년동…박정희 “혁명은 경상도와 함경도 출신들이…-18일 나의 매부인 강영훈 육사교장이 육사생도들의 혁명지지 행진을 불허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라이언 1군단장한테 “왜 1군단이 갖고 있는 서울 비상계획은 쓰지 않는가.”라고 따졌어. 그날 저녁 라이언 장군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매그루더 미 8군사령관이 이한림 장군을 찾아가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 장군이 “I will do(하겠다).”라고 했다는 거예요. 실제 그날 저녁 이 장군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 와 “도와 달라.”고 하더라고. 다음날 아침 이 사령관이 소집한 군단장 회의에 가려고 횡성 비행장에 도착했는데 미군 대령이 “이 장군이 이미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면서 되돌아가라고 하더라고.
→결국 미군이 묵인한 건가요.
-매그루더 장군이 누구를 진압할 성격이 못 됐어요. 강직하지 않았어.
→미국이 5·16을 사전에 감지했었다는 얘기도 있는데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17일 마셜 그린 미국 부대사가 ‘군은 헌정에 의한 정통 정부에 귀속하라.’는 서한을 보내 왔거든.
→6군단장으로는 언제까지 근무하신 겁니까.
-20일 대통령 특사가 온다기에 군단 비행장으로 나갔어요. 도착한 비서 2명이 건넨 윤보선 대통령의 서신에는 ‘대립을 피하고 쿠데타에 협력하라.’라는 취지의 짤막한 글이 있었어. 그날 장도영 장군이 21일 오후 1시쯤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만나자고 하더라고. 서울로 떠나려는데 집사람이 전화를 걸어와 불길하다는 거야.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헌병 차량의 호송을 받으며 중앙청 쪽으로 가고 있는데 어떤 여인이 달려들어 막아서기에 내려보니 집사람이더라고. 그래서 “군인의 아내이니 이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아이들이나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하고는 차에 올랐어. 아내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어. 의사당 앞에 도착하니까 어떤 장교가 다가오더니 권총을 옆구리에 대고 같이 가자고 해요. 차지철이었던 것 같아. 나를 마포 형무소에 집어넣더라고.
→박정희 소장과 아는 사이는 아니었나요.
-잘 몰랐어. 하지만 그 사람이 청렴하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함께 일해 보고 싶었어. 그래서 1957년 내가 군수참모부장으로 있을 때 그를 군수기지사령관에 추천했어요.
→직접 본 박정희 소장은 어떤 인물이던가요.
-강직한 느낌이었어요. 군수기지사령관 취임식 참석차 부산 동래에 내려가 있었는데 박정희가 숙소로 찾아와서는 “각하, 혁명이라도 해야지 나라가 이대로 되겠습니까.”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군인이 혁명한다고 나라가 잘 된다는 보장이 있나.”라고 했지.
→김종필씨와는 인연이 있습니까.
-5·16 전에 김종필 소령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부패한 장성들은 군대에서 나가야 한다.”고 하기에 내가 “부패한 장성이 누구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소문으로 알지 실제로는 모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런 정치적 발언하려면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
→미국으로 떠난 이후 두 사람을 다시 만난 적은 없나요.
-1972년인가 장모님이 위독하셔서 한국에 갔었어. 그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더라고.
→청와대로 갔나요.
-청와대에서 박정희가 “언제 돌아오느냐.”고 묻기에 “이제는 사회 문제보다 개인사정이 더 중요하다. 막내 아들이 대학 들어가는데 3년은 더 있어야 나올 수 있다.”고 했어. 그랬더니 박정희가 “기업체를 순방하고 군부대도 순방해 달라.”고 그래요. 내가 “장모님 병 때문에 어렵다.”고 했더니 “나이 든 사람의 병이란 늘 그런 것 아니냐.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되지 않느냐.”고 해요. 그래서 포항제철하고 과학기술연구원인가 두 군데 돌아봤어.
→김종필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만났더니 “선배님이 오랜만에 오셔서 나라가 부패된 것 같은 인상을 받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미국에서 들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 같다.”고 했지.
→5·16은 필요했다고 보십니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까.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었다고 생각해. 그런데 오늘날 국민 전체가 수긍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 걸 보면, 5·16이 나라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구나, 국민의 감정에 완전히 반대되는 정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김웅수는 1923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다. 2살 때 청산리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할아버지 김조현의 거처로 옮겨 6살 때까지 중국 하얼빈 근처 독립군 부락에서 살았다. 일본 관동군 학도병으로 끌려간 뒤 일본 센다이 예비사관학교에 편입해 장교가 된다. 일본 야마가타 연대 소대장으로 임명된 지 몇 달 뒤 일본 패망으로 해방된 한국에 들어왔고, 국군 장교가 됐다. 5·16 당시 혁명재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년 뒤 집행유예로 석방,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 워싱턴주립대 등에서 학사·석사 과정을 밟고 워싱턴 DC의 가톨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일했다. 여동생이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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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1/05/16/5147784.html?cloc=nnc
[김진의 시시각각] 나를 바꾼 박정희
내가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만난 건 1990년 가을이었다. 중앙일보는 박 대통령의 통치 비사(秘史)를 다룬 ‘청와대비서실’을 시작했는데 내가 시리즈 (1)을 맡은 것이다. 나는 1년2개월 동안 장관·의원·비서관·군인을 지낸 박정희 부하들을 많이 만났다. 박정희뿐 아니라 부하들의 스토리도 드라마였다.
남은 인생을 박정희를 기록하는 데 쏟아 넣었던 ‘9년3개월 비서실장’ 김정렴, 80년 신군부에 보복을 당해 세상을 등졌던 중화학·방위산업의 설계자 오원철, 처음 만든 벌컨포의 사격실험에서 유탄에 가슴이 뚫린 이석표, 대통령의 해진 혁대를 회고하며 눈물 짓던 이발사…. 이런 부하들 속에서 박정희는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부하들은 한결같이 박정희의 애국심과 인격을 증언했다. 주군(主君)이 피살된 지 10여 년이 지났으므로 그들에겐 비판의 자유가 있었다. 그런데도 하자(瑕疵)에 관한 증언은 거의 없었다. 대신 청렴과 애국의 추억만 가득했다. 청와대 집무실의 파리채, 변기물통 속의 벽돌, 칼국수 점심…. 그리고 민족중흥·조국근대화·수출입국·새마을운동 같은 전설적 단어들뿐이었다.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증언’은 기자인 나에게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는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도 취재했다. 그중 어떤 대통령도 박정희처럼 부하들로부터 일치되고 단결된 칭송을 듣지 못했다. 이들의 부하들은 주군의 공적과 함께 잘못과 결점을 빠뜨리지 않았다. 주군들이 살아있음에도 그러했다. 이것만 봐도 후임자들은 박정희보다 훨씬 불완전한 지도자였다. 그래서 나는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가능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특히 “양 김씨는 민주주의도 함께 해냈을 것”이란 말은 더욱 믿지 못한다. 이런 얘기야말로 소설이다.
도대체 박 대통령은 어떤 인간이기에 수많은 부하를 그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발견한 박정희는 대표적인 ‘공동체적 인간’이었다. 대다수 사람은 그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추동(推動)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지도자는 개인의 욕구보다는 공동체의 개선을 추구한다. 인류문명의 진보와 공동체 발전에 개인의 궤적을 합일(合一)시키는 공동체적 인간…. 그런 인간 유형의 대표적인 사람이 박정희였다. 그런 박정희가 나의 세계관을 바꾸어 놓았다.
1960~70년대 한국에서 ‘공동체 발전’은 안보와 가난 극복, 그리고 경제발전이었다. 민주주의는 그 시대의 과제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박정희 개발독재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시초였다. 민주주의라는 건 경제개발로 중산층이 형성되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절은 지금과 달랐다. 북한의 적화(赤化) 위협 속에서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선 국력의 비상한 결집이 필요했다. 그래서 개발독재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박정희는 청렴했으며 그의 독재는 공동체를 위한 개발독재였고 나라를 지킨 애국독재였다.
박정희를 알게 된 이후 나는 ‘공동체를 속이는 지도자’에게 깊은 반감(反感)을 갖게 되었다. 공동체로부터 영양을 공급받아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입만 열면 공동체를 외치면서 현실에선 공동체를 배반하는 사람…. 이런 위선을 고발하고 싶은 것이다.
민주당은 오랫동안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걸 부인했다. 지금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 행위에 대해 내가 종교에 가까운 분노를 느끼는 건 박정희 덕이 크다. 북한의 위협을 막아내며 3000만 국민을 패배주의의 음지로부터 ‘하면 된다’의 양지로 이끌어낸 지도자 박정희…. 그가 살아있다면 민주당 의원들을 전부 백령도로 데려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죽은 이들이 누구이며, 누가 그들을 죽였으며, 자유민주국가들이 왜 한결같이 살인자를 규탄했는지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오늘이 5·16 군사혁명 50주년이다. 50년 전 새벽, 한강 다리 위에서 박정희 소장을 비껴간 헌병대 총탄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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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516005007
[5·16 50돌] “박정희 ‘김재규는 혁명 할 사람 못돼’ 말해” 당시 사령부 출입기자 황영준씨
5·16 혁명을 전후해 당시 육군 제2군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주변에서 지켜본 황영준(80·경북 구미시 선산읍)씨가 지난 14일 상모동 박 전 대통령의 생가를 찾았다. 황씨는 2군사령부를 출입하던 동양통신 기자로, 박 전 대통령의 고향 후배이기도 하다. 그는 정치권 입문 등을 제안받았으나, 평생 선산에서 학교 서무과장과 읍장, 농협 조합장으로 지내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김종필 주장은 말도 안돼, 육사 8기가 무…과학벨트 대전 확정…기능지구도 충청탤런트 박주아, 암수술 후 별세…유족들 반…미녀 작곡가, 여성부자 1위…”예쁜데 돈까…폐 굳는 ‘원인불명 폐렴’ 알고보니 5년동…박정희 “혁명은 경상도와 함경도 출신들이…→박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은.
-그가 2군 부사령관으로 부임한 1960년 12월 기자단과의 상견례 자리에서였다. 내가 구미 출신이라며 인사를 건네자, “반갑다.”고 말을 놓으며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비록 체구가 작아도 목소리가 분명하고 눈매가 범상치 않았다. 기자들은 그가 보통군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당시 실세 부대에 출입할 수 있었던 것은 죽마고우였던 고 김윤환 전 신한국당 대표의 친형 소개를 통해서다.
→부사령관 시절 그의 모습은.
-그는 다른 기자들을 거의 상대하지 않았다. 군부의 부정부패에 관여한 기자들도 많았는데, 그런 게 걸렸던 모양이다. 그는 한마디로 청렴·강직했다. 멸사봉공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하지만 고향 후배인 나와는 수시로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그는 “대구 헌병대 모 중대장과 친하게 지내라.”는 등 충고도 했다. 그는 정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구미 출신의 제헌의원 육홍균씨, 경북도 평의원을 지낸 김우동·김동석(김 전 대표의 아버지)씨 등에 대한 근황을 자주 물었다.
→5·16 혁명을 예감할 수 있었나.
-사전에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그가 혁명 직전에 사무실을 자주 비웠다. 상황을 보면서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박 부사령관을 언제 만났나.
-보름쯤 뒤 만났다. 내가 그에게 “육사 동기이자 동향인 김재규(전 중앙정보부장)씨는 왜 혁명주체에 가담시키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그 사람은 혁명을 할 사람이 되지 못한다. 이번 일은 (김재규를 제외하고) 경상도와 함경도 출신 군인들이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5·16을 어떻게 평가하나.
-성공한 쿠데타이다. 이에 대한 역사적 공과 과에 대해 여전히 말들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혁명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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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803030
'5.16과 박정희' 여전히 살아있는 정치 이슈
5.16 쿠데타가 발생한지 오늘(16일)로 50주년이다. 5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5.16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고, 정치권의 살아 있는 이슈가 되고 있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한 대권 후보로 부각되고 있는 현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오늘의 뉴스 포인트이다.
5.16 쿠데타가 발생한지 꼭 50년이 지났다. 그러나 5.16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먼저 명칭에서부터 의견이 엇갈린다. 대세는 분명 쿠데타이다. 그러나 보수 일각에서는 여전히 혁명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쿠데타이자 혁명’이라는 절충설을 제기한다. 5. 16 50주년을 맞아 열린 각종 토론회에서도 이런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테마가 있는 뉴스Why뉴스김학일 포인트뉴스최경주,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역전 우승(상보)공효진 '국보급 피부' 유지 비결은?연극 '산불', 대극장에서 어떻게 공연될까?예컨대 보수학자로 유명한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최근열린 ‘박정희 통치철학 국제포럼'에서 "5·16은 정변이며 혁명"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비합법적 수단으로 합헌정부를 전복시켰다는 점에서 쿠데타이지만 이후 산업화를 성공시키고 국가 개조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근대화 혁명이라는 것이다.
전상인 서울대 교수도 다른 토론회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부국이 된 것은 박정희 시대의 공적으로 명확히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야권인사가 주축이 된 민주복지포럼이 16일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하는 ‘5.16쿠데타 50돌 학술대회 자료집 출판기념회’에서는 평가가 다르다. 관련기사
전현직 대통령들이 다시 대선에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발.."박정희, 비상사태 선포 美보다 北에..
자료집에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경제지상주의에 기댄 박정희의 군사반란과 헌정질서 파괴, 정보정치를 용인한다면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최순영 전 민주노동당 의원은 “세계 최저의 임금수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세계 최대의 산업 재해로 벌어들인 초과 이윤을 재벌들에 몰아줘 급속한 산업화, 즉 고도 성장을 달성한 것이 박정희 개발 독재의 실상”이라며 “박정권 시절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은 노동자 민중의 희생을 감내한 부지런함 덕분이었다”고 지적했다.
5.16과 박정희 시대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는 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한 대권 후보로 부각되고 있는 현 상황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야권에서는 박정희 정권은 곧 독재 정권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이 연장선에서 박 전 대표를 바라보고 있다. 여권 내 반대파도 이 점은 놓치지 않는다. 지난 2004년 ‘독재자의 딸’이라고 비판한 이재오 특임장관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반면 박 전 대표는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라는 관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 유신 체제에 대해서도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검증청문회 때 나온 말이다.
박 전 대표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서도 이런 소신을 굽히지 않을 것으로 보여 또 하나의 치열한 역사 논쟁이 될 전망이다.
박 전대표가 앞으로 박정희 시대의 공과를 어떻게 승계하고 극복하느냐가 초점이고, 이런 점에서 5.16은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정치 이슈’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가운데 박 전표를 지지하는 각종 모임과 싱크 탱크가 최근 급격히 세를 확산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각종 모임의 발대식과 회합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 지난해 12월 출범한 싱크탱크 그룹인 미래전략연구원을 들 수 있다. 당초 관료와 교수 등 각 분야의 전문가 78명으로 출발했지만 현재 200명으로 회원수가 3배가량 늘었다.
회원 수가 증가하니 자문을 할 정책 분야도 당초 15개 분야에서 19개 분야로 늘렸다.
또 박 전대표의 지지모임인 국민희망 포럼은 부산과 제주를 제외한 14개 전국 지역에서 조직화 작업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다 다양한 지지 모임이 활동을 시작했거나 활동 재개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박 전 대표는 이들 모임과 거리를 두며 여전히 정중동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큰 대조를 이루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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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donga.com/Politics/3/00/20110516/37254127/1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 - 5·16 50년]5·16 전후기사
“방첩대가 거사계획 파악했지만, 장총리는 장도영만 믿어”
《 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했고 정계에 투신한 뒤 야당 정치인으로 7선 의원을 지낸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89)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을 증언하는 회고록을 낸다. 19일 두 권으로 출간될 ‘대한민국과 나: 이철승의 현대사 증언’에는 광복 이후 좌우대립 상황부터 건국, 자유당 독재, 4·19혁명, 5·16군사정변, 유신체제, 3김(金)정치 등 현대 정치사의 주요 장면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회고록 출판기념회는 23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2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회고록의 주요 부분을 소개한다. 》
회고록 출판기념회는 23일 오후 4시 서울 여의도 국회 헌정기념관 2층 대강당에서 열립니다.
5·16 당시의 박정희 소장. 동아일보DB
사진 더 보려면 Click! 숙취해소제에 혁명 리커버 술상무로 팔자고친 L씨의 성공5·16 때 6관구 방첩대장(현 기무부대장)이었던 이청일 소령(5·16 이후 강제예편 뒤 도미)이 1994년 12월 나를 찾아와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이 소령에 따르면 쿠데타 세력이 거사일을 1961년 4월 29일∼5월 26일로 잡았다는 첩보가 당시 방첩부대장(현 기무사령관)인 이철희 장군에게 보고됐다. 이에 현석호 국방장관이 미8군에 문의하자 미군 측이 ‘절대 신경쓰지 마라’는 대답을 했다. 그런데 이 대답은 미8군 자체의 정보와 판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시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에게서 나온 말이었다고 한다. 이 장군은 “1군사령부의 병력이 있고, 31사단이 부평, 30사단이 수색에 있어서 절대로 쿠데타는 일어날 수 없다”고 장담했다. 이 말을 미8군으로부터 전해들은 현 장관이 경계심을 풀어버린 것이었다.
이 소령의 증언과 내가 입수한 정보로 볼 때 쿠데타 계획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되고 있었고 그에 대한 정보도 여러 채널을 통해 장관, 총리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권 핵심부의 안일한 낙관론과 잘못된 판단, 그리고 기회주의적인 처신이 어우러져 쿠데타가 방 안으로 밀고 들어올 때까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장면 국무총리가 장도영 중장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하려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장 총리를 사흘 동안 매일 찾아가 “장도영은 기회주의자이므로 지금 같은 과도기에 기용해서는 안 되고 청렴하고 강직한 최경록 중장이 적격”이라고 건의하자 장 총리는 크게 역정을 냈다. 평안도 출신으로 같은 장 씨였기 때문이었는지 장 총리는 끝내 그를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6관구사령관 시절 박정희 1959년 서울 영등포의 6관구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왼쪽)이 국회 감사반을 맞아 인사하고 있다. 오른쪽 끝이 이철승 의원이다. 동아일보DB
당시 장 중장은 ‘자유당 때 부패한 정치군인이었다’는 투서를 받고 국회 국방분과위원회에서 비밀리에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일종의 피의자로서 조사받고 있는 사람을 참모총장에 임명하면서 나에게 동의를 요청하자 나는 강력히 반대해 국방위에서 닷새 동안이나 토의를 벌였다.
그 무렵 이청일 소령의 주선으로 김종필(JP), 석정선, 길재호 중령과 무교동의 ‘향진’이라는 식당에서 같이 만난 것이 5·16 주도세력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자리에서 JP가 나에게 국방장관을 맡아달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뒤에 이청일은 “쿠데타 성공 후엔 JP가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이철승 의원을 제거하려 했다”고 알려줬다. 놀라운 일이었다. 난국수습의 최적임자가 나라고 했던 바로 그 JP가 나를 제거하려고 했다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민주당 정권이 쿠데타로 9개월도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진 이유 중 하나는 군을 전혀 모르고 군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정치인에게 혼란기의 국방장관을 맡기는 등 군과 관련된 인사 실패였다.
나는 일찍부터 안보와 군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3대 국회에 진출한 이후 줄곧 국방위원으로 일해 왔다. 다른 의원들은 재선을 염두에 두고 자기 지역구에 도움을 주기에 유리한 위원회를 택했고 의원 중에는 군대 경험을 가진 사람도 흔하지 않았다. 6·25전쟁을 겪은 대한민국 국회로서는 믿기 어려운 아이러니였다. 문민 우월의식이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군대가 갖고 있는 불만을 몰랐고,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고, 짐짓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나는 장 총리에게 군의 숙정과 재편을 누차 건의했지만 수용되지 않고 계속 미뤄졌다. 그 사이 잠복해 있던 군대 내부의 동요는 커지고 있었고 공공연하게 쿠데타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래도 장 총리는 “나는 장도영 중장을 믿는다”고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 총리는 별안간 내게 유엔총회 한국 대표로 나가달라고 해 5·16쿠데타 두 달 전에 도미했다. 결국 귀국길 일본에서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이청일 소령에 따르면 쿠데타 세력이 국회 국방위원장인 내가 미국에서 17일에 돌아오기 하루 앞서 16일로 거사일을 잡았다는 것이다.
▼ JP와의 악연 ▼
백악관 앞 反군부 시위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이철승 전 의원이 백악관 앞에서 군사정권 타도 시위를 하는 장면. 왼쪽부터 최경록 전 육군참모총장, 이철승 전 의원, 전규홍 전 주미대사, 양일동 전 의원. 이철승 씨 제공
사진 더 보려면 Click!5·16 전 JP가 하극상 사건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는 그를 구해준 적이 있다. 4·19 이후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최영희 장군 등 선배 장성들이 부정부패하다며 몰아내려던 사건이었다. 나는 JP 등을 구제해 주고 단 1명만 처벌하도록 조치해 줬다.
일본에 있다가 5·16을 맞은 지 얼마 안 돼 주일 한국대표부에서 나의 외교관여권을 돌려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여권은 내가 대한민국 국민임을 증명하는 서류이다. 누가 감히 마음대로 내게서 국적을 빼앗는단 말인가”라며 호통을 치며 거절했다. 그러나 얼마 후 JP가 지휘하는 중앙정보부가 일본 정부에 내 여권을 무효화했다고 통보해 나는 ‘무국적 불법 체류자’가 됐다.
그 후 귀국을 포기하고 다시 미국에 가 있을 때 JP가 ‘자의반 타의반 외유’라는 명목으로 미국에 왔다. 그가 워싱턴에서 교포들과 간담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부랴부랴 2시간여 동안 기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갔다.
그는 “한일회담 당시 일본 외상과 회담하면서 ‘그 말썽 많은 독도는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버리면 양편에 말썽이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서슴지 않고 털어놓았다. 자신의 기지(機智) 있는 외교 솜씨를 자랑하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우리 강토를 제 집 텃밭처럼 마음대로 없애버리자고 말하다니 격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더구나 우리의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평화선을 저렴한 대가로 양보하면서도 그에 따른 구체적인 계획도 대안도 없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연설이 끝나고 내가 그의 옆으로 다가가자 그는 나를 알아보고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군사정부는 자기 스스로 국민 앞에 공약했던 것을 전적으로 뒤집고, 이에 대해 비판하는 국민에게 보복을 능사로 알고 있으니 어찌된 셈이오. 이것이 5·16 정신이오”라고 따졌다. 그는 보복정치를 그만두라는 내 말에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어색하게 “글쎄요. 우리는 혁명정신대로 잘 해보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내가 본 박정희 ▼
1977년 여야 영수회담 1977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이철승 신민당 대표가 청와대에서 만나 주한미군 철군 문제를 비롯한 정치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령(포병사령관)이던 때 동기(육사 2기생)인 한웅진 대령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내가 국방위원을 오래 지내 5·16 그룹의 멤버들 대부분도 내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쿠데타에 협조하지 않는 바람에 해외를 떠돌며 10년 동안 정치 방학을 했고 이를 계기로 서로 멀어졌다.
그러다가 정계복귀 후인 1970년 12월 31일 호남고속도로 준공·개통식 날 부산 해운대 한 호텔에서 다시 만났다. 그날 밤 만찬에서 박 대통령은 나에게 거듭 “미안하다”고 해 그와의 악연은 이런 식으로 대충 덮어졌다.
내가 비록 그로부터 많은 정치 탄압을 받았지만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객관적으로 그에 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깊이 생각하는 군인, 남의 말을 차분하게 듣고, 부단히 공부하며 현상과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식견을 지니고 있는 군인이었다. 비록 독재를 하고 많은 사람을 탄압한 잘못이 있지만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과 인간미는 특이한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신민당 대표 시절이던 1977년 5월 27일 여야 영수회담에서 나는 유신헌법 개정 얘기를 꺼냈다. 나는 “유신헌법은 근대화와 경제발전이라는 사안에는 적합하지 못하다”며 거구의 최규하 총리와 왜소한 김용환 재무장관의 체구를 비유로 들었다. “나라가 최 총리와 같은 몸집이 됐는데 김 장관의 옷을 입을 수 있겠느냐”며 “옷을 바꿔 입을 때가 됐다.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고치고 대통령은 통일·안보·외교권을 행사하면 좋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훗날 당시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들은 얘기로는 박 대통령은 그 후 박준규 씨 등 여당의 주요 간부들과의 술자리에서 내가 얘기한 개헌문제를 꺼냈다. 김 장관은 “대통령은 개헌의지가 있었으나 참모들의 조직적인 반대로 개헌이 결국 무산됐다. 아쉽기 짝이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만일 그때 박 대통령이 개헌을 단행했더라면 이후의 대한민국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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