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을 아우르는 산으로 팔공산도립공원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웃 팔공산(1,192m)의 유명세에 눌려 별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오히려 많은 이들로부터 팔공산 못지 않은 사랑을 받는다. 가산은 천혜의 지형을 이용해 축성한 가산산성이 있어 더욱 유명한데, 산세가 특이하고 유적 등 관광을 겸할 수 있어 가족을 동반한 산행에 안성맞춤이다. 가산산성 일원은 팔공산 순환도로가 개통되고 칠곡군 동명면과 군위군 부계면을 잇는 도로 포장 등으로 드라이브 코스와 하이킹 코스로 각광을 받는다.
가산바위는
부산 태종대의 신선바위를 산 위로 옮겨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100명은 넉넉히 앉을 넓이에 가산산성과 주변의 산세, 다부동과 유학산을 굽어보는 조망은 아름답다. 가산이라는 이름은 팔공산의 가(곁)에 있다해서 「갓산」이라 불리던 것이 변형되어 정착한 것이라 한다.
가산산성은
내성, 중성, 외성 등 세겹으로 축조된 산성으로 임진왜란과병자호란을 겪은 뒤 인조 18년(1640년)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축조한 성이다. 이때 내성만 축조했다. 내성은 성벽 둘레가 약 4km. 성곽에는 동, 서, 북문과 8개 암문, 포루 4개소, 장대 1개소가 있었고, 성안에는 우물과 샘 21개소, 4개 사찰이 있었다.
내성이 완성된지 60년 후인 숙종 26년(1700년) 당시 관찰사 이세재가 외성을축조했다. 외성은 성벽 길이 약 3km에 문루 1곳, 암문 3곳, 군기고 등으로 이뤄졌다.
내성와 외성 사이 중성은 영조 17년(1741년) 관찰사 정익하가 축조했다.
경상도지리지(1425년) 팔거현에 ‘가사산(加士山)’이라했다.
칠곡지(漆谷誌)에 ‘가산산성 내성의 관아 주위에 일곱 개의 봉우리가 있어 칠봉산(七峰山)으로 불렸고, 칠봉 사이에서 일곱 개의 골짜기가 발원되어 칠곡(七谷)이 되었다(七峰作谷爲邑基址故號曰漆谷云)’고 전한다.
팔거현은 인조 18년(1640년)에 가산산성이 축조되자 칠곡도호부(柒谷都護府)로 승격되었다.
‘七’을 숫자로 쓸 때 고치지 못하도록 ‘柒’로 썼고, 또한 ‘柒’은 ‘漆’과 같은 글자로 사용했다.
19세기에는 ‘柒’과 ‘漆’이 혼용되었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칠곡군(漆谷郡)이 되면서 ‘漆’자로 굳어졌다.
조선은 1392년 건국이후 200년 동안 큰 전쟁이 없었으나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으로 참혹한 피해를 입고 조정은 전화(戰禍)의 복구와 국토방어 대책을 수립한다.
인조 17년(1639년) 6월, 공산산성과 독음산성(禿音山城)의 가축(加築)을 검토하라는 비변사의 영에 따라 경상감사 이명웅(李命雄ㆍ1590∼1642)은 금오산성을 가축하는 한편, 대구에서 상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의 요충지인 팔거현의 가산(架山)에 산성 축성을 건의, 이후 군병과 승려를 동원하여 관아와 남쪽 곡성(曲城) 등을 대대적으로 중수해 인조 27년(1649년) 완성했다.
가산산성이 축조되자 칠곡도호부의 관아를 성안에 설치하였다.
군사시설인 산성에 지방행정시설인 관아가 설치된 예가 드물었던 것으로 볼 때 가산산성을 얼마나 중요시 하였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산성은 둘레 4,710보로 성내에 못과 우물, 사찰(보국사), 창고 등을 설치하여 관방(關防)과 읍치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했다.
숙종 27년(1701년)에 관찰사 이세재(李世載ㆍ재임 1698~1701)의 장계로 내성 동남쪽에 둘레 3,754보의 외성(外城)을 가축하고, 영조 17년(1741년) 관찰사 정익하(鄭益河ㆍ재임 1739~1741)는 기존 내성의 형세가 방어에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내성 가운데 길이 602보의 중성벽(中城壁)을 쌓고 중성문을 설치하여 산성을 더욱 튼튼하게 했다.
가산산성은 동래-한양을 잇는 영남대로의 최고 요충지에 100여년에 걸쳐 완성한 ‘영남제일관방(嶺南第一關防)’으로 경상감영의 별진(別鎭)이었다.
칠곡도호부는 의성, 군위, 의흥, 신녕, 하양, 경산 등 여섯 지역의 군사통치권을 가진 군영의 중심지로 인근의 금오산성, 천생산성, 독용산성, 화산산성과 기각지세( 角之勢)를 취하여 긴밀한 협공체계를 구축한 거점성곽이었다.
축성 초기부터 높은 산성 안에 관아가 있어 많은 불편이 대두되었다.
결국 순조 19년(1819년) 180년 동안 산성에 있었던 칠곡도호부는 팔거현의 읍치였던 팔거창지(북구 읍내동)로 이전했다.
가산산성은 고종 32년(1895년)에 폐지되고 이후 방치되었다.
그 뒤 1950년 8월 낙동강방어선에서 벌어진 치열한 포격전으로 성벽은 무너지고 성내 건물들이 불타는 등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1954년 대홍수로 남창마을과 남문이 산사태로 유실되는 등의 큰 피해를 입어 다음해 남창마을은 미군의 도움으로 성 밖으로 이주했다.
남문은 숙종 27년(1701년)에 완공한 가산산성 외성의 성문이다.
‘가산진(架山鎭)의 남문’을 줄여서 속칭 ‘진남문(鎭南門)’이라 불렀으며, 1954년 대홍수로 남문 전체가 붕괴되었다.
1977년에 남문과 성벽, 수문, 여장 등을 복원하였으나 칠곡 고지도에 표기된 남문의 옹성은 복원되지 않았다
동문(東門)은 인조 18년(1640년)에 창건된 성문으로 미수 허목(許穆ㆍ1595~1682)이 지은 가산산성축성기(1644년)에 ‘성문루를 설치했다’는 기사가 전한다.
초석의 흔적으로 보아 정면 3칸, 측면 1~2칸의 문루가 있었으나 1950년 가산전투로 문루와 성벽이 훼손되었다
첫댓글 앗! 1등
김경숙 신청합니다.
2등~~~~
삼빠네요.ㅎ
2016년의 끝자락 총회산행!
명숙이도 동참합니다~
장현모도 동참하니다 회비는 입금했고요 감사합니다
여섯번째 신청합니다..
일곱번째~
강영숙 갑니다.
김영희두~~8번입니다..^^
장철환 신청합니다
조규해 신청합니다
열한번째 입니다~~
꼭 올려주이소~~~
권경일 산행 신청합니다.
정상호, 엄기원 신청합니다.
월말 바쁜관계로 접수현황이 좀늦었네요~~~죄송합니다^^꾸벅
-340차 정기및 총회산행 신청자-
01-김경숙 02-강순구 03-박태임 04-김명숙 05-장현모 06-신종희 07-강영숙 08-김영희 09-장철환 10-조규해
11-엄지용 12-권경일 13-신점희 14-정상호 15-엄기원 16-김주원 17-오승자 18-김미경 19-김순남 20-김임규
21-김정진 22-유정열 23-강기언 24-김동선 25-남경미 26-김덕회 27-이인직 28-전화구 29-임영학 30-권창혁
31-이병구 32-김용원 33-장도순 34-김 일 36-김은미 36-한미경 37-김종훈 38-권준대 39-전경욱 40-김용원2
41-권태인 42-김종환
참석요
유정열 참석합니다.
산맥제340차 칠곡가산 산행비 입금자 명단입니다~~~
01-김경숙 02-김명숙 03-장현모 04-김영희 05-조규해 06-권창혁 07-이병구08-임영학 09-김정진 10-김용원2
11-김덕회 12-김일 13-유정열14-김종훈 15-권준대 16-신점희 17- 엄지용 18-오승자 19-김용원 20-김동선
21-이무수 22-이인직 23-김순남24-서길상 25-장도순26-강영숙 27- 권경일 28-박태임 29-엄기원30-김임규
31- 한미경 32-강순구 33- 신종희
34-강기언 35- 장철환 36- 조규해 37-김은미 38-정상호
임영학.권창혁.이병구 산행 신청 합니다.
단체로 접수하시네요~~ㅎㅎ
김용원 도 신청합니다.
고문님 접수합니다~~
장도순 신청합니다.
접수합니다~~
국장님 수고많으십니다. 김일 신청합니다.
오랜만입니다~~산행때뵙겠습니다
서길상 신청 합니다.
접수합니다~~
김용원2 참석합니다.
국장님 고생 많으십니다
김종훈 신청합니다
권준대 신청합니다
340차 정기산행 접수마갑합니다~~
이후 신청자는 예비로 접수하겠습니다.
접수하신 모든회원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좋은 한주되세요~~
-예비신청자-
01-권태인 02-김종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