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내용
|
전체적으로 金重權이 주는 인상은 重厚(중후)함이다. 孔子도 『군자란 무게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남자가 가볍지 않은 인상을 풍긴다는 것은 큰 재산이다.
이런 인상은 기자만 받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金重權은 장인에게 잘 보여 그의 사위가 된 인물이다.
金重權이 1967년 사시 8회에 합격했을 때는 사법연수원 제도가 없었다. 판ㆍ검사실이나 변호사 사무실에서 試補(시보)를 거쳐야 했다. 그는 우연히 洪顯旭(홍현욱·작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試補를 했다. 애초 洪변호사 사무실에는 현재 한나라당 의원인 金榮馹(김영일)이 가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金榮馹이 집 근처에서 근무해야 할 사정이 생겼다며 그에게 試補 자리를 바꿔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그래서 洪변호사와 우연한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경향신문사 근처에 있던 洪변호사 사무실에는 金重權의 시골 친구들이 자주 찾아왔다. 試補에 불과하지만, 촌사람들은 金重權이 마치 큰 벼슬이나 하는 것으로 알고 의례적으로 찾아오기도 했고, 이런 부탁, 저런 부탁을 하고 가기도 했다. 金重權은 친구들이 찾아올 때마다 주머니를 털어 저녁 대접을 하고 차비도 챙겨 주곤 했다.
장인감에게 잘 보여 사위로 落點돼
洪변호사는 이런 金重權의 일거수 일투족을 눈여겨 보았다. 경기도 용인 태생인 洪변호사는 선린상고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일제시대 판임관 시험에 합격하여 재판소 서기를 하던 중 광복이 되자, 제1회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 1978년 제일변호사회 회장까지 지낸 거물급 변호사였다. 그는 슬하에 4남2녀를 뒀는데, 마침 洪변호사는 과년한 장녀의 남편감으로 金重權을 점찍었던 것이다. 부인 洪基銘(56·이화여대)은 그렇게 만나 결혼,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뒀다.
딸 셋은 모두 예원여고, 서울예고를 나와 기악을 전공했다. 서울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장녀 永信(31)은 미국 캔사스大에서 음악치료라는 독특한 분야의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사위는 이준섭(34·미국 뉴펜大) 미국 캔사스大 건축학 교수. 사돈은 영등포지청장을 지낸 공안검사 출신 李揆明씨(서울법대·작고)다. 차녀 仁敬(29·수원대 강사)은 서울음대에서 첼로를 전공했다. 사위 金昇煥(33·연세대, 美 노스웨스턴大MBA)은 경찰청장을 지낸 金孝恩씨(66ㆍ중앙대)의 아들로 맥킨지 컨설팅 社에 다니고 있다. 딸 셋이 모이면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딱 떨어지는 피아노3중주 멤버다. 독자 張宇(30)는 미국 코넬大를 나와 카네기멜론大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며느리 金知英(26)은 코넬大 경제학과 출신. 유학중 눈이 맞아 결혼했다.
장인 洪변호사는 사위를 깊이 신뢰했다. 金重權이 정계에 진출할 때도 가족들은 대부분 반대했으나, 장인만은 『남자로 태어나서 정치도 한 번 해 볼 만하다』고 격려, 정치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金重權이 재선의원이 됐을 때, 洪변호사는 『이제 손님도 많이 찾아올 텐데 이 집에서 살라』며 자신이 살고 있던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의1155번지 집을 사위에게 넘겼다. 지금 金重權이 살고 있는 그 집이다.
洪변호사는 金重權이 14代 총선에서 낙선, 놀고 있을 때인 1994년 3월22일 작고했다. 그는 자녀들이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 가정의 대소사는 매형을 중심으로 처리해라. 매형의 말이 곧 내 뜻인 줄 알고 무조건 따라라. 유산 문제까지 모두 매형에게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직계 상속인들(처남 洪基成·58·고려감정평가법인 회장, 洪基豪·53·홍기호신경외과원장, 洪基宗·서울지법 남부지원 부장판사, 洪基昇·회사원)은 부친의 유언에 대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나리 소년
金重權은 경북 울진군 평해면 월송리 775의51번지에서 金光明-朴粉伊 부부의 4남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누나 셋, 그리고 아래로 남자 형제 셋이었다. 그런데 형이 6·25 때 전사하는 바람에 그가 장남이 됐다.
金重權의 형제 중 누나 英淑씨(72)는 文熺昌씨, 春連씨(69)는 張雲城씨, 達潤씨(66)는 尹應老씨와 결혼했고, 아우 重榮(58), 重華씨(55)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金重權은 부친이 정부 배급품을 판매하는 일로 돈벌이가 괜찮았기 때문에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6·25가 나면서 형이 전사하고, 배급품 판매 일도 끊겨 살기가 어려워졌다.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던 미나리밭이 생계유지의 수단이었다. 金重權과 청상의 형수가 미나리밭에서 직접 가꿔낸 미나리를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맡았다. 그때문에 생긴 별명이 「미나리 소년」이다.
집안 일을 도우며 학업을 병행했지만, 그는 평해초등학교와 평해중학교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서울 유학에 대한 갈망과 실력 테스트를 겸해 서울의 한 명문고에 지원, 합격했다. 그러나 집안 형편으로 서울 유학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래서 1955년 수석입학생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후포고등학교로 진학했다.
金重權은 실력파 교사들로부터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다.
金重權은 고려大 법학과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었다. 그는 고학으로 대학 4년을 마쳤다. 그의 꿈은 유능한 행정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고시 행정과가 폐지되고 3급을류 시험으로 바뀌었다. 목표를 잃고 몇 년 간 방황하다가 대학을 졸업한 지 4년 만인 1967년 제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고시 동기로 朴哲彦 前 의원, 金榮馹 한나라당 의원이 있다.
날치기하지 않은 法司위원장
金重權이 서울지법판사로 있던 1979년 초, 병마와 싸우고 있던 모친이 마지막을 예감하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는 법원행정처장을 찾아가 시골로 轉補(전보)해 줄 것을 부탁했다. 수도권을 벗어나는 것을 큰 좌천으로 여기던 시절이라, 행정처장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가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자, 수긍하며 그를 영덕지원장으로 발령내 줬다. 그때가 1979년 9월1일이다. 영덕 주민들은 그의 영덕 부임 이유를 알고 그 곳에 뿌리를 가진 金重權을 따뜻하게 맞아 줬다. 그로부터 56일 후, 10·26이 발생했고, 1980년 4월, 어머니가 별세했다. 지역기관장이자, 유지인 그의 상가에 많은 문상객이 찾아왔다.
그에 대한 평판을 체크하고 있던 5共의 실력자들은 그를 정치판에 끌어들였다. 1980년 12월, 그는 민정당 청송ㆍ영덕ㆍ울진지구당 위원장으로 임명받았다. 법조계에서는 李漢東 검사와 金重權 판사, 柳尙昊 판사 등 세 사람이었다.
金重權과 金大中 대통령의 만남은 국회 법사위원장 시절, 그의 공정한 처신이 가져다 준 열매였다. 걸핏하면 날치기로 법안을 통과시키는 일이 다반사처럼 벌어질 때였다. 당시 야당 간사는 金大中 평민당 총재의 비서실장과 헌법재판관을 지낸 趙昇衡 변호사였다. 金重權은 불안해서 자리를 못 뜨는 趙昇衡 의원에게 약속했다.
『나는 절대로 날치기를 하지 않겠다. 그러니 안심해라』
그는 약속대로 법사위원장에 재임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날치기를 하지 않았다. 그때 金重權의 처신이 金大中 총재에게 전해졌고, 金총재가 金重權에게 호감을 갖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金重權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재임중, 헌법재판관 임기를 마친 趙昇衡 변호사가 훈장을 타러 청와대에 들어와 대통령과 3者가 앉아 환담할 때, 趙昇衡 변호사가 옛날 이야기를 꺼내며 확인됐다. 金重權이 盧대통령의 정무수석비서관일 때, 평민당 총재인 金大中 대통령을 동교동 지하서재에서 만나 20억원의 정치자금을 건네 줬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런저런 인연이 있던 두 사람은 1997년 大選을 바로 앞둔 11월11일, 정식 관계를 맺었다. 金大中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돼 20개월간 재임했다.
비난한 사람을 顧問에 임명
16代 총선에서 봉화·울진지역에 공천을 받아 출마, 16표 차로 낙선했다. 2000년 8·30 전당대회에서 당내 지지기반이 취약한 그는 李仁濟보다 불과 93표 적은 표를 얻어 제3위로 최고위원에 당선하는 저력을 보인다. 金대통령은 그를 徐英勳씨를 잇는 黨 대표에 임명해 변함없는 신임을 보여 줬다.
4選의 安東善 의원은 『국민의 바람과는 거리가 먼 인사』라고 黨 대표 인사를 비판했고, 盧武鉉 해양농수산부 장관은 『변절자』라고 공격했다. 그는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있다가 盧장관의 사과성명이 나오자, 그제서야 『취중에 한 발언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한다. 그것을 문제삼는 것보다 서로 덮어 주는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며칠 후에는 총재의 재가를 얻어 安東善 의원을 상임고문에 임명했다. 그것이 金重權식 대처방안인 셈이다.
그는 약수교회의 원로장로다. 부모님을 따라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그가 사법시험 공부를 하던 1966년, 약수동에 사는 누님 집에 가끔 드나들면서 천막을 치고 개척하는 약수교회와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36년 간 약수교회를 다닌다. 감리교 신학대학원에서 정식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은 신앙인이다.
珍松이라는 아호를 갖고 있다. 울진(珍)의 소나무(松)라는 뜻이다. 군대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30세 때, 공군 법무관으로 입대해 대위로 제대했다. 운동은 못하는 것이 없다. 기계체조, 철봉, 평행봉에 능하고 테니스도 칠 줄 안다. 중·고등학교 때 기계체조로 다져진 몸이라 팔, 다리 근육이 아직도 딴딴하다. 골프는 칠 줄은 알지만, 교회에 나가야 하는 일요일에 해야 하는 운동이라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담배와 술은 못한다.
초선의원일 때까지는 가족들과 노래방을 다녔으나, 아이들이 크면서 못 가봤다. 애창곡은 노사연의 「만남」이다. 좌우명은 「무거운 돌은 내가 먼저」. 중학교 1학년 때의 級訓(급훈)이었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 家訓은 아버지가 지은 나눔과 섬김이다. 감명깊게 읽었던 책은 「백범일지」.
좋아하는 음식은 김치찌개, 된장찌개. 존경하는 인물은 링컨이다. 영어는 중급, 일어는 상급의 해독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재산은 10억원을 신고했다. 납세실적은 재산세 337만원(1999년 기준). 승용차는 에쿠스 4500cc(2000년형). 저서로는 「헌법과 정당」(1990년),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자서전)」(1999년) 등 7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