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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2내가 곧 성령의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4장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1) 하고 시작이 됩니다. 이 장면을 “교회의 휴거”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지점이 계시록의 해석이 갈리게 되는 첫 번 분기점입니다. 이는 “휴거” 장면이 아니라 하늘 문을 여셔서 보여주셨다는 뜻입니다. 지상에 있는 전투하는 일곱 교회를 비추시던 계시의 앵글이 지상(地上)에서 천상(天上)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의도가 무엇인가? 다시 상기시킵니다만 계시록에는 “내가 보니” 하고 “보았다”는 말이 54회나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열어서 보여주시는 것이 “계시”요, 인간은 하나님께서 열어서 보여주셔야만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 즉 칭찬 받는 교회, 책망 받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시다가 하늘 문을 여시고 앵글을 천상으로 향하여 하늘 보좌의 광경을 보여주시는 의도가 무엇인가? 4장에는 도표에 표시된 대로 “보좌”라는 말이 무려 13번이나 등장합니다. 여기에 4장의 핵심이 있습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3) 하늘 보좌
둘째 단원(4-7) 24장로와 네 생물
셋째 단원(8-11) 네 생물과 24장로의 찬양
첫째 단원(1-3) 하늘 보좌
①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1) 하십니다. 요한은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먼저는 밧모섬에서,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1:10)을 듣고, 2-3장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4장에서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리로 올라오라”(1) 하고, 하늘에서 말하는 것을 듣게 된 것입니다. 요한의 몸이 문자적으로 하늘로 올라갔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3)고 답변합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의 몸이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하늘을 여시고 보여주신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는데” 한 보좌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계시록에는 보좌라는 말이 44회나 등장하고 있어서 이 보좌가 4장뿐만이 아니라 계시록 전체의 중심(中心)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② 요한은 보좌만을 본 것이 아니라,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2) 하고,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3) 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족하다 하겠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행 7:55)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열어서 요한에게 보여주신 “하늘 보좌”인데, 요한에게 보좌만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둘째 단원(4-7) 24장로와 네 생물
①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아 있는”(4) 광경을 보여주셨습니다. 계시록에는 24장로들과 네 생물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이들에 대한 해석이 구구합니다만 성경은 24장로들이 누구들인지, 네 생물이 무엇들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한 체 그들이 하고 있는 임무에 대해서만 말씀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하고 있는 임무를 주목해보면서 이들이 누구들인지 추론(推論)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② 먼저 “24장로들”인데,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4) 하나님 보좌에 둘려 각기 24보좌에 앉아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그들이 다스리는 자들임을 나타냅니다. 또한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계시는 이에게 경배”(10)를 드린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분명해지는데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는 성도들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다면 왜 “24장로들”이냐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교회)의 묘사에서 찾을 수가 있는데, “열 두 문에는 12지파의 이름이 있고, 열 두 기초 석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있더라”(21:12-14) 합니다. 그러니까 24장로들이란 신구약 교회를 대표하는 자들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보좌에 앉은 24장로를 바라보게 된 요한은, “내가 장로(벧전 5:1)인데 저 장로들은 누군가?”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장로가 바로 너다”. 바울은 증언합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주님께서는 환난 중에 있는 지상의 교회들에게 하늘 문을 여시고 하늘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천상(天上)의 교회를 보여주심으로 위로와 격려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점이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한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와 격려는 없다 하겠습니다.
③ 다음은 “네 생물”인데,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6) 합니다. 생물의 모양을,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다”(7) 하는데 이는 에스겔이 본 환상(겔 1:10)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 하고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고”(8)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이렇게 하나님을 수종들고 있는 존재란 천사로 볼 수밖에 없는데, 다만 하나님 보좌 주위에서 섬기는 특별한 임무를 맡은 특별한 천사들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하겠습니다.
이점에서 24장로와 네 생물의 차별화가 나타나는데, 장로들에게는 “금관”이 있는 반면, 생물들에게는 “많은 눈”이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여기에 신분과 임무가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신구약의 성도들을 대표하는 24장로들에게 금관이 주어 진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네 생물들”에게는 금관이 없는 대신에 많은 눈이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시종 드는 임무를 신속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라 할 것입니다.
④ 이 광경을 통해서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은 지금은 24장로들과 생물들이 섬기고 있는 것을 보지만 이들은 상징 일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섬기는 복스러운 몫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성도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승리한 자들이 금관을 쓰고 보좌에 앉아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게 되리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라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7:14-15절에서는,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라고 하나님을 섬기는 몫은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단원(8-11) 네 생물과 24장로들의 찬양
①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 하고(8),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9-10),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11) 합니다.
이처럼 요한에게 하늘 보좌와,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보여주시고, 24장로들과 네 생물이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광경을 보여주시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요한이 본 광경은 이사야 6장과, 에스겔 1장의 반영인데, 하나님께서 이사야, 에스겔, 요한에게 하늘 보좌를 계시하여주실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난국(難局)에 처했을 때라는 공통점(共通點)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사 6:1)라고 그 배경을 말씀해주고 있고, 에스겔 선지자는 “내가 (바벨론에 있는) 그발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겔 1:1) 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을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계 1:9) 유배되어 있을 때입니다.
② 이런 배경에서 “하늘 보좌”를 보여주신 의도는 모든 주권이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게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지상의 왕은 죽고 갈리어도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지상 나라들의 흥망이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으며, 저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있으나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과, 지금 신약의 교회가 로마나라의 황제숭배와 유대인의 훼방 등으로 인하여 박해를 당하고 있지만 최후 승리가 교회에게 있음을 확신시켜 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③ 주님은 하늘의 광경을 보여주심으로 환난 중에 있는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은 사도일 뿐만이 아니라 “장로”(벧전 5:1)입니다. 그런데 장로 요한은 하나님 “보좌에 둘려 24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24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는”(4) 광경을 보면서 요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요한은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눅 22:28-30) 하신 말씀을 상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장로 요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는 몸이면서 동시에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는 경이로운 사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④ 그리고 이 영광스러움은 요한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주 성령께서 이를 기록하게 하심으로 읽는 자와 듣는 자들(1:3)도 공유(共有)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2장-3장의 여러 처지와 형편에 놓여있는 교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는 천상의 관점을 갖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상의 관점을 갖고 있는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1-3)고, 옥중에 있으면서 밖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장로가 아니라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를 상징하는 24장로가 보좌에 앉아있는 광경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야 천국에 가는 줄로 알고 있지만 주님은 우리가 이미 주와 함께 하늘에 있는 시민권(市民權)자임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⑤ 주님은 3장 마지막에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약속하셨는데, 4장에서 바로 그 광경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는 장차 되어 질 일입니다만 믿음 안에서 우리는 이미 하늘 보좌에 앉아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를 대표한 24장로들과, 만물을 대표하는 천사(겔 1:5-10, 10:14, 20)들로 여겨지는 네 생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천상교회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2장-3장에 등장하는 지상의 교회들이 현실적으로는 환난 중에 있다하여도 믿음으로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바 된 존재임을 확신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⑥ 이점이 네 생물의 찬양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네 생물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8)고 찬양을 합니다. 이는 이사야 6:2-4절에서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고 찬양하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찬양을 대조해보면,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한 부분을 계시록에서는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변형시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고 보아야만 합니다. 1:4절에서도 “장차 오실 이”라 하고, 1:8절에서도 “장차 올 자”라고 이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하고 있을까요? “장차 오실 자라” 하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음을 성도들에게 확신시켜주면서 그 나라가 임하게 될 때에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가 될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⑦ 천상의 예배광경을 통해서 지상의 예배도 어떠해야 마땅한가 하는 각성을 하게 되는데, 어찌하여 생물들에게는 여섯 날개가 필요한가? 날개를 여섯이나 주신 것은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겸비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은 이렇게 찬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장로들이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드리는” 장면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경외하는 자세라 하겠습니다. 자신들에게 씌워주신 면류관은 자신들이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받으셔야 할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함을 장로들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은 이렇게 경배를 받으시기에 너무나 “합당”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⑧ 하나님은 어찌하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시다고 말씀하고 있는가? 찬양의 핵심이 장로들은 “만물을 지으신지라”(11하)고 창조주이심을 찬양하고 있고, 네 생물은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찬양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를 요약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오고 계시다는 것이 됩니다. 계시록에서는 오고 계시는 하나님, 오고 계시는 주님,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5장에서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해서 가능하여지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