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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도 뒤안마늘 왕마늘이 있고, 대도 왕대 중대 시누대가 있듯이 사람도 역시 선이 굵은 사람이 있다.
시인 차길진 선생의 아버지 차일혁 총경은 6.25전쟁의 영웅, 할아버지 차경석은 일제시대 보천교 600만명을 이끌었던 수장, 증조부 차치구는 동학군 5,000명을 이끌고 맨 선두에 섰던 동학군 장령이었다.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난 차일혁은 1936년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해이다. 바로 독립운동가 김성수를 만난 것이다. 김성수는 밀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의열단,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해 무장투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김성수의 권유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들어간 차일혁은 졸업 후 중국군 중앙군 제1전구 32사단 포병중대장으로 일본군과 맞섰다. 이어 그는 조선의용대에 가입해 화북 태항산 일대에서 무장투쟁에 전념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차일혁은 향토방위를 담당하는 청년방위대에서 일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한다. 1950년 12월 차일혁은 중국에서 같이 항일투쟁을 했던 동료 전북지구 전투사령관 최석용의 권유로 제18전투경찰 대대장으로 취임한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지리산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1953년 9월 ‘빨치산 총수’라 불리는 남부군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면서 빨치산 토벌을 사실상 마무리 지었다.
1991년 방송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속 주인공(장하림)은 경찰 차일혁을 모티브로한 것이다. 이 드라마 뿐 아니라 오페라 '카르마' 역시 그의 삶의 그린 오페라라고 한다. MBC ‘서프라이즈’에도 소개 된 바 있다.
차일혁 총경의 할아버지는 동학군의 수장 차치구(車致九, 1851-1894)
차일혁 경무관의 할아버지 차치구(車致九, 1851-1894)는 농민군 5,000여 명을 이끌고 동학군의 맨 앞에 섰던 인물이다.
2차 봉기 때 차치구의 휘하에 농민군 5,000명이 있었다. 차일혁선생의 할아버지 차치구는 후일 일본군에게 잡혀 분살형(焚殺刑)이라는 참혹한 형벌을 당한다.
차일혁 총경의 아버지 차경석(車京石, 1880~1936) 일제시대 보천교 600만명을 이끌었던 창시자
1894년 정읍 고부에서 전봉준장군이 동학혁명을 일으켰을 때, 차일혁의 아버지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은 할아버지 차치구(車致九, 1851-1894)를 따라 전쟁터를 누볐다. 할아버지 차치구는 농민군 5,000여 명을 이끌고 동학군의 맨 앞에 섰던 인물이다.
일제시대 보천교 600만명의 경전, 도道의 원전原典, 도전(道典) 책 속에서의 조상과 자손의 관계에 대해서
약 150년 전, 말씀인 도道의 원전原典, 도전道典 책에서
道典 8:32) 하루는 상제님께서 어느 마을을 지나시는데 한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거늘, 정작 제사 받는 신명은 마당을 겉돌고 다른 신명이 들어가 제사상을 받고 있는지라.
상제님께서 그 신명을 부르시어 “저 사람의 날인데 어찌 네가 먹느냐?” 하시니, 그가 답하기를 “저 사람이 살아생전에 저의 재산을 모두 탕진시킨 채 갚지 못하였는데 죽어서도 그 은혜를 갚지 아니하니 오늘은 비록 자기 날이라고 하나 저의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하니라. 후에 상제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세상에 이치 없는 법은 없느니라.”
道典 4:104) 황천신과 중천신
“중천신(中天神)은 후사(後嗣)를 두지 못한 신명이요, 황천신(黃泉神)은 후사를 둔 신명이라. 중천신은 의탁할 곳이 없어 황천신에게 붙어서 물밥을 얻어먹어 왔으므로 원한을 품었다가 이제 나에게 하소연을 하니, 이후로는 중천신에게 복을 맡기어 사(私)가 없이 고루 나누게 하노라.”
道典 9:143) 상제님께서 하루는 원평에서 천지대신명을 불러 모으시고 대공사를 행하실 때, 구석에 앉은 한 박복한 신명에게 이르시기를 “네 소원이 무엇인가 말해 보라.” 하시니, 그 신명이 아뢰기를
“자손을 둔 사람은 살아서도 대우를 잘 받고 죽어서도 대우를 잘 받아 왔는데 자손이 없는 사람은 온갖 설움을 받아 왔으니 앞으로는 고루 낳아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해 주옵소서.” 하거늘,
상제님께서 허락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앞으로는 중천신에게 복록을 맡겨 고루 나누어 주게 하리라.” 또 말씀하시기를 “앞세상에는 공덕(功德)에 따라서 그 사람의 복록이 정하여지나니 치우침과 사(私)가 없느니라.”
道典 2:118) 사람이 죽음의 질서에 들어가면
김송환(金松煥)이 사후(死後)의 일을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는 혼(魂)과 넋(魄)이 있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神)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가 지나면 영(靈)도 되고 혹 선(仙)도 되며
넋은 땅으로 돌아가 4대가 지나면 귀(鬼)가 되느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손을 둔 신은 황천신(黃泉神)이니 삼신(三神)이 되어 하늘로부터 자손을 타 내리고 자손을 두지 못한 신은 중천신(中天神)이니 곧 서신(西神)이 되느니라.”
道典 4:117) 문턱 밖이 곧 저승길
“사람의 죽음길이 먼 것이 아니라 문턱 밖이 곧 저승이니라. 생유어사生由於死하고 사유어생死由於生하니라
삶은 죽음으로부터 말미암고, 죽음은 삶으로부터 말미암느니라. 죽으면 아주 죽느냐? 매미가 허물 벗듯이 옷 벗어 놓는 이치니라.”
道典 4:144) 상제님께서 세상에 전하여 온 갖가지 예식을 두루 살피시고 크게 꺼려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는 묵은하늘이 그르게 꾸민 것이니 장차 진법(眞法)이 나오리라.” 하시니라. 또 제례진설법(祭禮陳設法)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또한 묵은하늘이 그릇 정한 것이니 찬수는 깨끗하고 맛있는 것이 좋은 것이요, 그 놓여 있는 위치로 인하여 귀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니라. 신(神)은 사람 먹는 데 따라서 흠향(歆饗)하느니라.”
하루는 한 상인(喪人)이 상복 입은 모습을 보시고 미워하여 말씀하시기를 “상복(喪服)은 거지 죽은 귀신이 만든 것이니라.” 하시니, 한 성도가 여쭈기를 “유가(儒家)에서 정한 것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하거늘, 말씀하시기를 “추하고 험악하니 앞세상에는 이 옷을 없애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부모의 시신을 묶어서 묻는 것은 부모를 원수로 여기는 것이라. 묶지 말고 그대로 입관하여 흙으로 덮어 두는 것이 옳으니라.”
道典 9:213) 사람은 죽어서도 공부를 계속한다
“죽는 것도 때가 있나니 그 도수를 넘겨도 못쓰는 것이요, 너무 일러도 못쓰는 것이니라... 명부에서 데려오라고 해야 명부사자가 데려오는 것이니
각기 닦은 공덕에 따라 방망이로 뒷덜미를 쳐서 끌고 오는 사람도 있고, 가마에 태워서 모셔 오는 사람도 있느니라.
또 하늘에 가면 그 사람의 조상 가운데에서도 웃어른이 있어서 철부지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듯 새로 가르치나니 사람은 죽어 신명(神明)이 되어서도 공부를 계속하느니라. 죽었다고 당장 무엇이 되는 것은 아니니라.”
道典 4:122) 자손 싸움이 선령신 싸움으로
사람들끼리 싸우면 천상에서 선령신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나니 천상 싸움이 끝난 뒤에 인간 싸움이 귀정(歸正)되느니라. 전쟁사(戰爭史)를 읽지 말라.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신명은 춤을 추되 패한 자의 신명은 이를 가나니 도가(道家)에서 글 읽는 소리에 신명이 응하는 까닭이니라.
道典 2:119) 60년 공덕을 들이는 천상 선령신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무한한 공부를 들이나니 그러므로 모든 선령신(先靈神)들이 쓸 자손 하나씩 타내려고 60년 동안 공을 들여도 못 타내는 자도 많으니라. 이렇듯 어렵게 받아 난 몸으로 꿈결같이 쉬운 일생을 어찌 헛되이 보낼 수 있으랴. 너희는 선령신의 음덕을 중히 여기라. 선령신이 정성 들여 쓸 자손 하나 잘 타내면 좋아서 춤을 추느니라.
인간의 죽음이란 매미가 허물 벗듯이 옷벗어 놓는 이치.
道典 2:26) “부모를 경애하지 않으면 천지를 섬기기 어려우니라. 천지는 억조창생의 부모요, 부모는 자녀의 천지니라. 자손이 선령(先靈)을 박대하면 선령도 자손을 박대하느니라.
예수는 선령신들이 반대하므로 천지공정에 참여치 못하리라. 이제 인종 씨를 추리는 후천 가을운수를 맞아 선령신을 박대하는 자들은 모두 살아남기 어려우리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조상의 제사를 극진히 받들라. 사람이 조상에게서 몸을 받은 은혜로 조상 제사를 지내는 것은 천지의 덕에 합하느니라.”
道典 4:154) “사람마다 그 닦은 바와 기국(器局)에 따라서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한 신명이 호위하여 있나니 만일 남의 자격과 공부만 추앙하고 부러워하여 제 일에 게으른 마음을 품으면 신명들이 그에게로 옮겨 가느니라. 못났다고 자포자기하지 말라. 보호신도 떠나느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부간에 다투지 말라. 신명들이 가정 기국을 시험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루는 박공우(朴公又)가 아내와 다투고 와 뵈니 상제님께서 문득 꾸짖으시며 “나는 독(毒)함도 천하의 독을 다 가졌고 선(善)함도 천하의 선을 다 가졌나니, 네가 어찌 내 앞에서 그런 일을 행하느냐.
이제 천지신명들이 운수 자리를 찾으려고 각 사람의 가정에 들어가서 기국(器局)을 시험하느니라. 만일 가정에서 솔성(率性)이 용착(庸窄)하여 화기(和氣)를 잃으면 신명들이 웃고 손가락질하며 ‘기국이 하잘것없으니 어찌 큰일을 맡기리오.’ 하고 서로 이끌고 떠나가나니 일에 뜻하는 자 어찌 한시라도 소홀하리오.” 하시니라.
道典 8:77) 마음에 응하는 신명(神明)
모든 일에 마음을 바로 하여 정리(正理)대로 행하여야 큰일을 이루나니 만일 사곡(邪曲)한 마음을 가지면 사신(邪神)이 들어 일을 망치고, 믿음이 없이 일에 처하면 농신(弄神)이 들어 일을 번롱(飜弄)케 하며, 탐심을 두는 자는 적신(賊神)이 들어 일을 더럽히느니라.
道典 4:89) “마음이란 귀신이 왕래하는 길이니, 마음속에 성현을 생각하면 성현의 신이 와서 응하고, 마음속에 영웅을 생각하고 있으면 영웅의 신이 와서 응하며, 마음속에 도적을 생각하고 있으면 도적의 신이 찾아와 응하느니라.
道典 4:122) 전쟁사(戰爭史)를 읽지 말라.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신명은 춤을 추되 패한 자의 신명은 이를 가나니, 도가(道家)에서 글 읽는 소리에 신명이 응하는 까닭이니라.
道典 4:62)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神)이니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르고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떠나면 무너지고,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느니라. 신이 없는 곳이 없고, 신이 하지 않는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
명절이 되면 조상님께 제사를 올려야 하는 이유?
道典 11:407) 하루는 성도들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신명 대접을 잘 하라. 앞으로 신명을 박대하면 살아나기 어려우니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선령을 박대하면 살 길이 없느니라.”
道典 1:42) “이 세상을 살면서는 죄를 지어도 남 모르게만 하면 그만인 줄 알아도 죄진 사람은 천상에 가면 모든 게 다 드러난다. 죽으면 편할 줄 알고 ‘죽어, 죽어.’ 하지만 천상에 가면 모든 것이 다 무섭다. 믿으면서 지은 죄는 사하지도 못하느니라.”
道典 4:28) 원래 역신은 시대와 기회가 지은 바라. 역신이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능으로 천하를 바로잡아 건지려는 큰 뜻을 품었으나 시세가 이롭지 못하므로 그 회포(懷抱)를 이루지 못하고 멸족의 화(禍)를 당하여 천추에 원귀가 되어 떠돌거늘, 세상 사람들은 사리(事理)를 잘 알지 못하고 그들을 미워하여 ‘역적놈’이라 평하며
일상용어에 모든 죄악의 머리로 일컬으니 어찌 원통치 않겠느냐. 그러므로 이제 모든 역신을 만물 가운데 시비(是非)가 없는 별자리(星宿)로 붙여 보내느니라. 하늘도 명천(明天)과 노천(老天)의 시비가 있고, 땅도 후박(厚薄)의 시비가 있고, 날도 수한(水旱)의 시비가 있고, 때도 한서(寒暑)의 시비가 있으나 오직 성수(星宿)에는 그런 시비가 없느니라.
道典 2:103) 무척 잘사는 길
상말에 ‘무척 잘산다.’ 이르나니 ‘척(隻)이 없어야 잘산다.’는 말이니라. 남에게 원억(寃抑)을 짓지 말라. 척이 되어 갚느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그의 신명(神明)이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느니라. “세상의 모든 참사(慘事)가 척신(隻神)이 행하는 바이니라. 삼가 척을 짓지 말라. 만일 척을 지은 것이 있으면 낱낱이 풀고 화해를 구하라.”
세상의 모든 참사(慘事)가 척신(隻神)이 행하는: 비참하고 끔찍한 일.
道典 4:16) 선천에는 상극의 이치가 인간 사물을 맡았으므로 모든 인사가 도의(道義)에 어그러져서 원한이 맺히고 쌓여 삼계에 넘치매 마침내 살기(殺氣)가 터져 나와 세상에 모든 참혹한 재앙을 일으키나니..
道典 6:52) 무신년 6월에 천원(川原)에서 새 붓으로 경면주사(鏡面朱砂)를 찍어 28장(將)과 24장(將)을 써서 벽에 붙이시고 겉육임을 정하신 뒤에 성도들에게 “각기 마음에 드는 대로 장수의 이름을 짚으라.” 하시고, 경면주사로 써서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채우시더니 그 뒤에 불사르시니라.
이 때 어떤 사람이 참외를 가져와 올리매 상제님께서 잡숫지 않고 두시거늘 공우가 한 개를 먹었더니 설사가 나서 낫지 않는지라
상제님께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본래 그 아내가 주기 싫어하였으므로 살기(煞氣)가 붙어 있었나니 네가 그 살기를 맞았도다.” 하시고, “닭국을 먹으라.” 하시므로 공우가 명하신 대로 하매 곧 나으니라.
道典 3:255) 재산 수효대로 살기가 붙어 있나니
상제님께서 부호를 싫어하시어 혹 부호를 천거하는 자가 있으면 언제나 그 부호가 오는 길가 주막에 가시어 짐짓 폭 잡을 수 없이 횡설수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싫어서 스스로 물러가게 하시는지라. 성도들이 그 까닭을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부호들에게는 그 가진 재산 수효대로 살기(殺氣)가 붙어 있나니
만일 그들의 추종을 허락하려면 먼저 그 살기를 제거하여 앞길을 맑혀 주어야 할지니 그렇게 되면 허다한 시간을 낭비하여 공사에 지장이 있게 될지라. 그러므로 차라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물러가게 하려 함이니 그 중에도 혹 혜두(慧竇)가 열려서 나를 알아보고 굳이 따르려 하는 자가 있으면 허락할 뿐이로다.”
道典 3:245) 꿩에 살기가 박혀 있었느니라
구릿골에 계실 때 하루는 한 성도가 꿩 한 마리를 드리거늘 받아 두시고 사흘을 지내니 꿩이 썩게 된지라. 성도들이 아뢰니 삶아 먹게 하시고 상제님께서는 조금도 맛보지 아니하시거늘
그 이유를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그 아내가 주기 싫어하였으므로 그 꿩에 살기가 박혀 있었느니라.” 하시니라. 이에 성도들이 다시 여쭈기를 “그러면 어찌 저희들에게 살(煞) 박힌 것을 먹게 하셨습니까?” 하니 “이제 그 살기는 다 제거하였노라.”
인간의 대부분의 병(病)은 다른사람에게 살기를 받아 내몸에 세포가 유전자 변형을 일으켜 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道典 8:59) 정미(丁未 : 道紀 37, 1907)년에 구릿골 박순여(朴順汝)가 부종(浮腫)으로 다리가 큰 기둥같이 되어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더니 마침내 반신불수가 되어 사경에 이르거늘, 상제님께 사람을 보내어 고쳐 주시기를 간청하니라. 상제님께서 자현에게 물으시기를 “순여의 병을 다스려 살게 함이 옳으냐, 그대로 두어 죽게 함이 옳으냐?
네 말 한마디에 있느니라.” 하시니, 자현이 이상히 여기며 아뢰기를 “살려 주심이 옳겠습니다.” 하매, 말씀하시기를 “순여는 불량한 사람이라. 순여가 네게 불평을 끼친 일이 많으니 너와 함께 가서 다스리리라.” 하시고, 자현을 데리고 순여의 집에 이르시어 휘파람을 한 번 부시고 병들어 부은 다리를 주물러 내리시며 끓인 물 한 그릇을 먹이시니 그 병이 곧 나으니라.
이는 본래 순여가 자현보다 나이가 많다 하여 항상 무례하므로 자현이 말은 아니하였으나 속으로 몹시 불평을 하였더니 상제님께서 그 일이 척이 되어 병이 들었음을 아시고 물으심이더라.
박순여(朴順汝, 1872∼1943). 본관 밀양(密陽). 부 춘오(春五)와 모 김씨의 장남으로 청도리에서 출생. 부인 이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道典 4:126) 먹장난하다 한 맺고 죽은 신명을 위로하심
하루는 경석에게 “검은 두루마기를 가져오라.” 하여 입으시고, 또 속옷을 벗으시고 긴 수건으로 허리를 매신 뒤에 여러 성도들에게 물으시기를 “이리하면 일본 사람과 같으냐?” 하시니 모두 대답하기를 “같습니다.” 하니라. 이에 다시 벗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에 한 아이와 더불어 먹장난을 하였는데,
그 아이가 지고 울며 돌아가서는 다시 오지 않고 다른 서당에 다니다가 그 후에 병들어 죽었거늘 그 신명이 그 일로 원한을 품었다가 이제 나에게 와서 해원시켜 주기를 원하므로 ‘어떻게 하면 해원이 되겠느냐?’ 물으니 그 신명이 내가 일본옷을 싫어하는 줄 알고 ‘일본옷을 입으라.’ 하므로 내가 이제 그 신명을 위로함이로다.”
道典 2:68) 억울하게 죽은 낙태아들의 원한
한 사람의 원한(寃恨)이 능히 천지기운을 막느니라. 뱃속 살인은 천인공노할 죄악이니라. 그 원한이 워낙 크므로 천지가 흔들리느니라.
예로부터 처녀나 과부의 사생아와 그 밖의 모든 불의아의 압사신(壓死神)과 질사신(窒死神)이 철천의 원을 맺어 탄환과 폭약으로 화하여 세상을 진멸케 하느니라.
세상의 모든 사건,사고와 참혹한 일들은 과거 억울하게 죽은 신명들이 사람에게 붙어서 일으키는 것이다.
道典 2:103) 무척 잘사는 길
상말에 ‘무척 잘산다.’ 이르나니 ‘척(隻)이 없어야 잘산다.’는 말이니라. 남에게 원억(寃抑)을 짓지 말라. 척이 되어 갚느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그의 신명(神明)이 먼저 알고 척이 되어 갚느니라.
앞세상에는 서로의 마음속을 드나들어 그 속내를 알게 되나니, 남을 속이지 말고 척이 있으면 풀어 버리라. 부하고 귀하고 강권을 가진 자는 모두 척에 걸려 콩나물 뽑히듯 하리라.
道典 3:188) 공우가 상제님을 종유(從遊)하기 달포 전에 천원장(川原場)에서 예수교인과 다투다가 가슴에 큰돌을 맞아 가슴뼈가 상하여 한참 기절하였다가 일어난 적이 있는데 이 때 수십 일 동안 치료를 받고 간신히 다니기는 하나 아직 가슴에 손을 대지 못할 만큼 크게 고통스러우므로 이를 상제님께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전에 어느 길가에서 남의 가슴을 쳐서 사경에 이르게 한 일이 있으니 그 일을 잘 생각하여 뉘우치라. 또 네가 몸이 나은 뒤에는 가해자를 찾아서 죽이려고 생각하나, 너 때문에 죽을 뻔하였던 자의 척(隻)이 그 예수교인에게 붙어서 갚은 것이니 오히려 그만하기가 다행이라. 네 마음을 잘 풀어 가해자를 은인과 같이 생각하라. 그러면 곧 낫게 되리라.” 하시니라. 공우가 이 말씀에 크게 감복하여 가해자를 미워하는 마음을 풀고 ‘훗날 만나면 반드시 잘 대접하리라.’는 생각을 두니라.
“세상의 모든 참사가 척신(隻神)이 행하는 바이니라. 삼가 척을 짓지 말라. 만일 척을 지은 것이 있으면 낱낱이 풀고 화해를 구하라.”
道典 3:238) 척신 붙은 김영학의 입문
6월에 백암리에 계실 때 박공우와 신원일이 모시는데, 24일에 김영학(金永學)이 경학의 인도로 와 뵙거늘 이레가 지나도록 아무 말씀도 아니하시니 영학이 크게 분해하는지라. 이에 공우와 원일이 이르기를 “성의를 다해 사사(師事)하기를 청하면 밝게 가르치실 것이라.” 하거늘 영학이 그 말을 좇아 상제님께 사사하기를 청하매 상제님께서 허락하시더니
갑자기 “이놈을 참수할복(斬首割腹)하리라.” 하시며 크게 꾸짖으시니라. 영학이 상제님의 우레와 같은 목소리에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분하기도 하여 문밖으로 나가거늘 상제님께서 영학을 불러 “나에게 사배를 하라.” 하시고 절을 받으신 뒤에 말씀하시기를 “너를 꾸짖은 것은 네 몸에 있는 두 척신을 물리치려 한 것이니 너는 불평히 생각지 말라.” 하시니라. 이에 영학이 “무슨 척신인지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네가 열여덟에 사람을 죽이고 금년에도 사람을 죽였나니 잘 생각하여 보라.” 하시니라. 영학이 생각해 보니 18세에 남원에서 전주 아전 김 모와 대화하다가 그의 무례한 말에 노하여 화로를 던져 머리를 다치게 하였더니 그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가 다음해 2월에 그가 죽었고,
금년 봄에는 장성 맥동(長城 麥洞)에 사는 외숙 김요선(金堯善)이 의병에게 약탈을 당한 고로 영학이 장성 백양사(白羊寺)에 있는 의병 대장 김영백(金永伯)을 찾아가 그 비행을 꾸짖었더니 영백이 사과하고 범인을 검거하여 포살한 일이 있는지라 비로소 황연히 깨닫고 아뢰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정히 그러하다.” 하시거늘, 영학이 마침내 전날의 과실을 뉘우치고 상제님의 크신 은혜에 감읍(感泣)하니라.
김영학(金永學, 1876~1945). 본관 광산(光山). 족보명 기선(箕善), 초명 영선(永善). 피노리의 아랫마을 먹살리에 살았다. 조선 독립을 위한 의병 활동에 참여했으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창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장성 맥동(長城 麥洞). 전남 장성군 황룡면(黃龍面) 맥호리(麥湖里) 맥동. 맥동은 울산 김씨 집성촌이다.
김영백(金永伯, 1880∼1910). 본관 안동(安東). 전남 장성군 북이면 달성리 출신의 농민. 군대 해산 후 의병 약 1천 명을 모집하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정읍 등 전라 지역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5분 50초 부분부터 자신이 죽인 여자가 쫒아 다닌다는 얘기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3k8KOeS0uPg&t=462s
[차길진법사의 영혼수첩]
과거 뉴저지 후암정사에서 올렸던 구명시식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미국의 한 유력 가문 며느리가 죽은 남편 영가를 천도하는 자리였다. 남편 영가가 오셨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편 영가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당신이 죽은 다음에 내가 시아버지에게 얼마나 괄시를 받았는지 알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놔두고 그렇게 일찍 가면 어떡해?"
그러자 남편영가는 기가 차다는 듯 "아니,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구명시식 3일 전에 다른 남자와 자고 와? 이런 자리에 올 때는 몸가짐을 좀 깨끗하게 해야 하는 거잖아."
참 전하기 민망한 말이지만 영가의 요청대로 그대로 적어서 부인에게 보여줬다. 그러자 아내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당신은 나 몰래 바람 많이 피웠잖아? 나는 당신 죽은 다음이고, 당신은 나 살아있을 때 바람 폈으니까, 쌤쌤으로 칩시다." 나는 이쪽편도 저쪽편도 들어줄 수 없어 그냥 웃고 말았는데.구명시식에서 얻는 웃음의 힘. 이런 일이 있기에 아마도 구명시식을 계속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구명시식을 하다가 웃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엄숙한 자리라 속으로 웃음을 참다가 어떤 때는 배가 찢어지는 고통을 겪기도 한다. 돌아가신 영가님을 초혼하는 자리라 마냥 슬플 것 같지만 이렇게 희로애락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의식이 구명시식이다.
탈렌트 이창훈씨가 호텔에서 본 신명(神明)
1995년 늦은 봄, MBC 드라마 "전쟁과 사랑" 촬영차 국내 연기자들이 필리핀에 체류할 때다. 당시 주인공 역을 맡았던 이창훈씨는 유독 많은 대사를 외우기 위해 현지에서 독방을 썼다. 도착 이틀째 되던 날, 낮잠을 자던 이창훈씨는 이상한소리에 눈을 떴다.
그런데 자신을 향해 웃으며 얘길 나누는 두 소녀가 눈에 띄었다. 순간 그들을 도둑으로 생각한 이창훈씨는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지갑 속의 돈을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돈을 셀 때마다 한 장씩 없어지는가 하면, 놀라서 지갑을 떨어뜨리자, 지갑이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소녀들은 잠겨진 방문을 열지도 않고서 그냥 통과해 사라지는 게 아닌가!
밤이면 밤마다 소녀들의 혼령은 어김없이 출몰하여 이창훈씨를 괴롭혔다.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서 목덜미에 불어대는 뜨거운 입김과 목소리만으로 그를 잠 못 들게 했다. 그러던 차에, 로비에 모인 연기자들도 귀신얘기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탤런트 '전현'씨도 낮잠을 자다가 귀신을 보았다는 것. 잠을 자고 있는데 가위에 눌린 듯 숨을 쉴 수가 없어 눈을 떠보니, 웬 남자가 자신의 목을 마구 조르고 있더라는 것이다.
호텔 주인장에 따르면, 앞서 이 호텔 3층에서 웬 아버지와 딸이 묵었다가 어느 날 모두 비명횡사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이들 혼령을 봤다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고 한다. 출처: MBC 다큐멘터리 「이야기속으로」 중에서
[공포ssul화] 배우들의 귀신 목격담?! 드라마 촬영 중 일어난 일!|#공포ssul화 MBC961108방송 - YouTube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만 해도 남 음해해서 죽이는 일들이 허다했다. 예를 하나 들면, 당파싸움 하다가 상대방을 치기 위해, 남의 집 초상에 문상(問喪) 온 조문록(弔問錄)을 역적 모의한 물증이다 해서 갖다바쳤다. 그래서 그날 문상 간 사람들이 다 역적으로 몰려서 죽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죽으면서도 왜 죽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남 음해해서 죽이고 한 사람들 자손들은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은 척신(隻神)들에게 보복을 받아서 나중에 떰버덩 구멍으로 그냥 떨어져 버리고 만다.
道典 2:78) 믿음은 선령신의 음덕으로
선령신이 짱짱해야 나를 따르게 되나니 선령신을 잘 모시고 잘 대접하라. 선령신이 약하면 척신(隻神)을 벗어나지 못하여 도를 닦지 못하느니라.
선령의 음덕(蔭德)으로 나를 믿게 되나니 음덕이 있는 자는 들어왔다가 나가려 하면 신명들이 등을 쳐 들이며 ‘이곳을 벗어나면 죽으리라.’ 이르고, 음덕이 없는 자는 설혹 들어왔을지라도 이마를 쳐 내치며 ‘이곳은 네가 못 있을 곳이라.’ 이르느니라.
삼생의 인연이 있어야
하루는 한 성도가 여쭈기를 “석가불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널리 공덕(功德)을 쌓아서 앞으로 오는 용화세계에서 살아가라.’ 하였다 하온데, 그 때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선경의 낙원세계에 참여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삼생(三生)의 인연이 있어야 나를 따르리라.” 하시니라.
道典 2:40) 공자 석가 예수를 내려 보내심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불교도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동학 신도는 최수운의 갱생을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 사람만 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 하여 따르리라. ‘예수가 재림한다.’ 하나 곧 나를 두고 한 말이니라.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 하시니라.
道典 5:8) 선령신을 박대하는 예수교의 기운을 거두심
하운동 입구 오동정(梧桐亭)에 세 아름씩 되는 큰 둥구나무 세 그루가 서 있거늘 상제님께서 제비창골을 오가실 때 그 나무 아래 바위에서 자주 쉬시니라. 하루는 바위에서 주무시다가 갑자기 일어나시어 그 앞에서 주막을 경영하는 예수교인 김경안을 부르시더니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는 예수교서를 가져오라.” 하시매
경안이 영문을 모른 채 신약전서를 가져다 올리거늘 상제님께서 불살라 버리시니라. 이에 경안이 깜짝 놀라 “왜 책을 사르십니까?” 하며 소리치니, 상제님께서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이놈아! 이것 믿어 가지고 뭐할 것이냐! 이 책은 죽은 뒤에야 천당으로 간다는 조건이 붙은 책이니 살아서 잘되고 행복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앞으로 이 교가 수많은 중생을 죽게 할 것이요, 선령신을 박대하는 길이니 태우는 것이다.” 하시니라.
道典 5:160) 서교(西敎) 의전을 참관하심
병오년 10월에 한 예수교 교당에 가시어 모든 의식과 교의(敎義)를 직접 보고 들으신 뒤에 성도들에게 이르시기를 “족히 취할 것이 없다.”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예수의 기운을 다 거두었노라.”
道典 4:48) 신명을 박대하는 서교의 운명
서교(西敎)는 신명을 박대하므로 성공치 못하리라. 이는 서양에서 신이 떠난 연고니라. 구천에 사무치는 ‘시~’ 소리에 서양이 덜덜 떠느니라.
道典 5:162)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배당 귀신들은 옷을 다른 신명과 같이 입고 있지만 힘을 못 쓰느니라. 예수꾼들이 청지기를 맡았느니라.”
道典 5:17) 상제제님께서 늦은 밤에야 금산에 도착하시어 한 예배당으로 가시니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설교를 듣고 있거늘, 그가 이르기를 “하느님이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으니 누구든지 맘 변치 말고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자, 우리 서로 서로 손잡고 함께 믿읍시다.” 하며 열변을 토하더라.
道典 5:18) 어찌 중생을 속이느냐!
이 때 상제님께서 앞으로 나가시며 큰 음성으로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그렇게 가르쳐서는 안 되느니라! 천지만사의 이치란 천지에 모여 사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거늘 네 어찌 중생을 속이느냐! 가르치려거든 한길을 내듯 똑바로 가르쳐라. 길이 한 번 나면 그 길이 힘줄과 같이 천지 밖으로 벌어지나니 올바른 길이 아니면 가르치지 말라.” 하시니라.
환부역조의 큰 죄를 꾸짖으심
또 말씀하시기를 “중생들을 그릇 인도하면 천지의 원 주인도 자리를 잡지 못하느니라!” 하시며 환부역조(換父易祖)의 큰 죄를 호되게 꾸짖으시니 사람들이 술렁이며 수군거리거늘, 상제님께서 “벼락신장은 어디 있느냐. 속히 벼락을 치라!” 하고 건물이 흔들리도록 큰 음성으로 칙령을 내리시니라.
순간 창창하던 밤하늘이 칠흑같이 어두워지더니 잠시 후 해처럼 밝은 불덩이가 나타나 번쩍번쩍 세상을 환히 비추고, 뇌성벽력과 함께 비가 억수로 쏟아지며 난데없이 하늘로부터 미꾸라지, 메기, 쏘가리, 뿌럭지 들이 수없이 떨어지니라. 이에 모두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바닥에 고개를 박은 채 벌벌 떨기만 하는데,
몇몇 사람이 고기를 줍는다고 뛰쳐나가니 빛나던 불덩이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사방이 다시 칠흑같이 어두워져 한 치 앞을 분별할 수 없거늘. 고기를 잡기는 고사하고 쏘가리에 쏘여 아프다고 소리치며 흩어지매 실로 아수라장을 이루니라. 이 때 호연이 보니 고기들이 꼬리를 치며 다시 하늘로 올라가 순식간에 없어지더라.
속히 벼락을 치라. 이 때 불벼락을 내리신 것은, 단순히 한 목사의 설교를 꾸짖으신 것이 아니다. 동서양의 숱한 인간들이 ‘창조와 피조’라는 이원론적 구조의 낡은 창조 신화를 받들며 유대족의 신 여호와에 미쳐서 제 민족의 뿌리와 조상신을 몰아낸 환부역조의 대죄악을 천지의 불칼로 응징하신 것이다.
환부역조(換父易祖): 자신의 조상과 국조(國祖)를 바꾸고 부인하는 모든 행위. 즉 성(姓)을 바꾸거나 조상 제사를 거부하며 타민족의 이스라엘의 민족신 여호아를 하느님으로 받드는 행위 등을 말한다. 이는 제 뿌리인 조상을 부정하는 큰 죄악이라 말씀하셨다.
道典 10:120)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가 유대의 예수가 태어난 곳이다.” 하시고, “그 제자들이 선령을 심히 박대하니 무슨 복을 바랄 수 있으리오.” 하시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시니라. 다시 구름을 타고 어떤 곳에 당도하매 “여기는 석가가 태어난 곳으로 본시 왕국이 있었나니 잘 보아 두어라.” 하시고,
“석가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의 천륜을 끊게 하고 인종씨를 말려 모두 멸망당하게 하였을 것이라.” 하시니라. 잠시 후에 다시 어떤 곳에 도착하거늘 “여기가 바로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니라.” 하시고, “그 제자들이 도둑놈이 되었다.” 하시며 여기저기 둘러보시더니 “이제 그만 가자.” 하시고 내성의 집으로 돌아오시니 어느덧 수 시간이 흘러 해 넘어가는 저녁때가 되었더라.
그 제자들이 도둑놈이 되었다.: 유교 경전은 일상적인 교훈들로 이루어져 있으나, 유교의 정교하지 못한 논리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등장한 성리학이 후기에 이르면 지나치게 형이상학화 되어 사회적으로 병폐를 끼치게 되었다. 곧 공소(空疎)한 관념론으로 인한 지나친 명분주의나 편협 논리에 빠지게 되었고, 후기에는 남존여비 등의 폐단이 관습화되면서 사회적으로 심각한 폐해를 낳기에 이르렀다.
道典 10:40) 이 날 오후에 약방 마당에 멍석을 깔고 상제님께서 그 위에 반듯이 누우시어 치복에게 “새 자리를 그 앞에 펴라.” 하시거늘, 치복이 명하신 대로 멍석을 가져다 펴니 상제님께서 허공을 향해 준엄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를 “오늘은 참 성인을 판단하리라.” 하시고,
문 앞에 세워 두었던 기(旗)를 가져다 불사르게 하시니 뜻밖에 벽력이 일어나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큰 소리로 명하시기를 “공자(孔子) 부르라.” 하시니 성도들이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거늘, 다시 “어서 공자를 부르지 못할까!” 하고 호통치시매 성도들이 놀라서 엉겁결에 “공자 잡아 왔습니다.” 하는지라.
상제님께서 “불러 오라고 하였지 잡아 오라고 했느냐?” 하시고 “너희들은 눈을 감고 보라.” 하시므로 성도들이 눈을 감고 보니 뜻밖에 펼쳐 놓은 자리에 공자가 무릎을 꿇고 “공자 대령했습니다.” 하고 아뢰더라.
상제님께서 꾸짖으시기를 “공자야, 네가 소정묘(少正卯)를 죽였으니 어찌 인(仁)을 행하였다 하며, 삼대(三代) 출처(黜妻)를 하였으니 어찌 제가(齊家)하였다 하리오.
또한 내 도(道)를 펴라고 내려 보냈거늘 어찌 제자들을 도적질 해먹게 가르쳤느냐. 그 중생의 원억(寃抑)을 어찌할까. 그러고도 성인이라 할 수 있느냐! ” 하시고 큰 소리로 “저리 물리쳐라.” 하시니라. 이어 “석가(釋迦)를 부르라.” 하고 명하시니 즉시 석가모니가 “대령했습니다.” 하고 꿇어앉아 아뢰거늘
상제님께서 꾸짖으시기를 “석가야, 너는 수음(樹陰) 속에 깊이 앉아 남의 자질(子姪)을 유인하여 부모의 윤기(倫氣)와 음양을 끊게 하니, 너의 도가 천하에 퍼진다면 사람의 종자나 남겠느냐. 종자 없애는 성인이냐? 네가 국가를 아느냐, 선령을 아느냐, 중생을 아느냐. 이런 너를 어찌 성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시고 “이 자도 물리쳐라.”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다시 명하시기를 “야소(耶蘇) 부르라.” 하시니 즉시 예수가 꿇어앉아 “대령했습니다.” 하고 아뢰거늘, 상제님께서 꾸짖으시기를 “야소야, 너를 천상에서 내려 보낼 적에 내 도를 펴라 하였거늘 선령을 박대하는 도를 폈으니 너를 어찌 성인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네가 천륜을 아느냐 인륜을 아느냐!.” 하시고 큰 소리로 “이 자를 물리쳐라.” 하시니라. 이어서 “노자(老子)를 부르라.” 하시니 즉시 노자가 “대령했습니다.” 하매,
상제님께서 꾸짖으시기를 “노자야, 세속에 산모가 열 달이 차면 신 벗고 침실에 들어앉을 때마다 신을 다시 신게 될까 하여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생각이 든다 하거늘, ‘여든한 해를 어미 뱃속에 머리가 희도록 들어앉아 있었다.’ 하니 그 어미가 어찌 될 것이냐. 그런 불효가 없나니 너는 천하에 다시없는 죄인이니라.
또한 네가 ‘이단(異端) 팔십 권을 지었다.’ 하나 세상에서 본 자가 없고, 나 또한 못 보았노라. 그래도 네가 신선(神仙)이냐!” 하시며 큰 소리로 “당장 물리쳐라.” 하시니라. 잠시 후에 상제님께서 또 명하시기를 “공자, 석가, 야소, 노자를 다시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모두 대령하거늘,
말씀하시기를 “들어라. 너희들이 인간으로서는 상 대우를 받을 만하나 너희들의 도덕만 가지고는 천하사를 할 수가 없느니라. 너희들의 도덕이 전혀 못쓴다는 말은 아니니 앞으로 나의 도덕이 세상에 나오거든 너희들 모두 그 안에서 잘 살도록 하라. 나의 말이 옳으냐? 옳으면 옳다고 대답하라.” 하시며 소리치시니 천지가 진동하여 문지방이 덜덜 떨리더라. 상제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수천 년 밀려 오던 공사를 금일에야 판결하니 일체의 원억이 오늘로부터 고가 풀리느니라.” 하시니라.
일제와 친일언론, 보천교와 민족종교를 사이비종교로 매도
일제는 1915년 8월에 조선총독부령으로 포교규칙을 선포하여 독립활동에 적극적인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단체로 분류하여 건전하지 못한 반사회적집단, 미신집단, 사이비종교단체로 규정했다. 언론도 일본 총독부의 선전도구로 전락해 보천교와 민족종교를 유사종교 및 사교와 같은 사회악의 존재로 취급하였다. 친일 언론들은 보천교를 비윤리적 반사회적 사상과 가르침을 펴는 미신, 사교집단으로 매도했다.
일제는 민족종교를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과 같은 정치적 변혁을 꾀한다고 판단해 민중과 격리시키고 통제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이비종교단체라는 올가미를 씌워 종교가 아닌 일반결사단체로 취급하여 '보안법', '집회취체에 관한 건'을 적용시켰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는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을 만들어 보천교를 비롯한 민족종교를 탄압하고 파괴시켜 나갔다. 1920년 청송군 일본경찰서는 안동을 비롯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보천교 신도 3천여 명을 체포하여 감금하였고, 그 중 수십 명이 고문치사, 700여 명을 기소하였고,
고등법원에서 징역을 받은 사람이 129명이나 되었다. 당시 전국에서 검거된 보천교 신도가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출처:강영한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일제의 보천교 탄압과 해체)
일제, 유사종교해산령 만들어 보천교와 민족종교 강제 해산시켰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민족말살정책을 펼쳤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일제는 한국의 민족성, 독립 등을 풍기는 모든 단체는 철저하게 해체시켰다. 그 정점은 1936년에 내린 '유사종교 해산령'이다. 두 사람 이상의 집회가 금지되고, 1원 이상의 금전수합 역시 금지되었다. 유사종교 해산령에 따라 각도 경찰국은 종교 시설물을 폐쇄시키고, 종교지도자들을 검거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다.
1936년 6월 6일, 일경이 보천교 간부 24명을 연행하였고, 6월 15일에는 보천교 건축물을 강제로 경매에 부쳐졌다."
민족종교는 사이비, 외래종교는 진짜
1924년에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時代日報 사건이 있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더불어 그 당시 민간 3대 신문 중 하나가 시대일보다. 경영난에 처한 시대일보를 보천교에서 인수하자, 보천교의 교주가 천자로 등극할 것이다라는 천자등극설을 유포하게 된다.
천자 등극설은 당시 보천교를 탄압하기 위한 일제와 친일언론이 만들어낸 자작극이었다. 이를 빌미로 이 해 9월 일제와 친일언론들에 의해 보천교 박멸운동이 전개 된다.
이러한 난국을 극복할 방법으로 보천교 주요간부들을 일본 동경으로 보내 보천교의 취지를 한번 설명하기로 한다. 그래서 동경을 방문해 조선총독으로 오게 될 사람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일제가 제시한 것이 '시국광구단'을 만들어 총독정치를 홍보하는 연설회를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면 우리도 보천교를 적극 지원해주겠다는 취지였다. 그렇게 해서 "시국대동단"을 만들게 되는데
결과적으로는 1925년 1월부터 6개월정도 운영하다가 지지부진하게 되는데, 여기에 당시 11개 친일단체가 결성된 '11연맹'이라는 단체가 보천교라는 명칭을 빌려 "시국대동단"이란 이름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일제의 정책들을 지지하게 되는데,
그래서 당시 조선민중들은 보천교 박멸운동에 가담을 하며, 보천교 성토대회가 여러 곳에서 열린다. 이것은 보천교 입장에서는 친일이라는 오명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철저하게 일제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이 때문에 민족의식 선양과 대한독립의 큰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업적은 역사속으로 묻히고 친일파라는 꼬리표가 붙게 되었다. 보천교는 일제와 친일세력이 의도한대로 1925년을 지나면서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29년 십일전이 완공되자, 다시 일제와 친일언론은 보천교 교주 차월곡이 천자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빌미로 보천교 간부들을 체포하고, 1936년 일제는 보천교를 해산시키고,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보천교 본소 건물들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해체한 보천교 본소 십일전의 자재들은 서울 조계사에 보내고, 보천교 청기와는 청와대의 전신, 경무대에로 보낸다. 완전히 보천교 흔적을 지워버린 것이다.1936년 보천교 해체와 더불어 조선인을 일제 황국신민으로 만들자는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이 이때부터 본격화되었다. 조선민중을 일제와 친일세력들의 노리개로 만들겠다는 정책이었다.
보천교 십일전 청기와(靑蓋瓦)가 청와대(靑瓦臺)로
차일혁 경무관 아들 차길진 선생의 증언
“차일혁의 아버지는 차경석이란 인물로, 증산도의 맥을 이은 보천교의 창시자이다. 일찍부터 항일정신을 배운 차일혁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김학철 등과 함께 항일유격전에 참가한다.
민족주의자인 차일혁이 좌익계열인 조선의용대에 들어간 것은 당시 중국의 조선인 민족주의 세력들이 일본과의 무력투쟁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 귀국한 차일혁은 미군정의 보호를 받고 있던 악랄한 일본인 경찰 ‘삼륜’을 저격하고 수배되어 공장의 경비대장을 하던 중 조선노동조합 전국 평의회의 총파업을 맞아 좌익노동자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우익의 선봉으로 나선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남한이 3개월 간 인공 치하가 되자 유격대를 결성해 인민군과 싸우던 그는 경찰에 특채되어 이현상의 남부군과 맞서게 된다.
이념이라는 집단적 광기에 빠져 있던 시절이었다. 좌우익 할 것 없이 반대편에 선 사람이라면 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몰살시키던 시절이었다. 특히 친일파 출신 남한 군경의 잔혹함은 악명 높았다.
그러나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을 잘 알고 있던 차일혁은 경찰연대장으로써 빨치산 토벌에 큰 공을 세우면서도 가능한 한 한 명이라도 살리려 애쓴다. 생포된 빨치산 중에는 그와 함께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동지들도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들을 전향시켜 경찰에 편입시켰고, 심지어 부상한 빨치산 간부에게 자신의 피까지 수혈해 준다.
적장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준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일혁의 남다른 인명존중의 정신은 극단적 반공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남한 사회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웠다. 전쟁이 끝난 후, 차일혁은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점, 생포한 빨치산들에게 남다른 관용을 베풀었다는 점, 무엇보다도 과거 팔로군 산하 조선의용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사상적인 의심을 받게 된다.
진해경찰서장으로 근무하던 중 좌익 혐의로 이틀간 조사를 받고 나온 그는 공주경찰서장으로 좌천된 후에도 수사 대상이 되어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받는다. 죽기 2주전, 그는 11살짜리 아들 차길진에게 이현상의 시신에서 찾아낸 가래(호두처럼 생김) 두 알을 자신의 유품이라며 건네주고, 1주일 전에는 ‘죽음도 삶의 연속이다’ ‘절대 벼슬을 하지 말라’는 등 유언 같은 말들을 남긴다.
사망 당일, 가족과 함께 금강으로 물놀이를 간 그는 어린 아들을 강 가운데 바위에 앉혀놓은 채 조선의용대 팔로군의 노래인 <볼가강의 노래>를 부르며 홀로 천천히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들은 엉엉 울며 아버지를 외쳐 불렀으나 그는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시신은 19시간 뒤, 곰나루 근처를 도강하다 가라앉은 인민군 탱크를 끌어안은 자세로 발견되었다.” -차길진과 ‘이현상 평전’ 저자 안재상의 대화에서 일부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