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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야고보서 3장 1-12절
저주에서 찬송의 입으로
야고보서 2장 마지막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고 말씀합니다. 이때 믿음이란 무엇인가 했을 때 행함, 다른 말로 하자면 열매를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을 가진 자로서 어떤 부분에서 열매가 있어야 하느냐 할 때 말에 대한 부분을 대표적으로 언급합니다. 왜 말이냐? 2절에 보시면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이며, 3절과 4절에 의하면 혀는 작지만 온 몸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이란 것이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열매로서 전체를 대표로 하는 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말은 곧 인격이라는 말도 하는데, 신자의 신자됨의 표 가운데 한 가지가 말을 통해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 육신의 지체 가운데 이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은 작은 것처럼 보이지만 큰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자로서 열매를 맺는다고 할 때, 특히 성찬 이후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고 할 때 이 말에 대한 부분은 주의하지 않을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1절을 보시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 말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면서 선생 된 자들에 대해 주의를 주고 있는가? 선생이란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많은 말을 하는가? 가르치는 사람이 더 많은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말을 한다고 해서 주의하라는 것이 아니라, 선생으로서 가르친다고 할 때 가르침만 있고 그 가르침대로 온전히 거하지 못한다면 결국 2장에서 말한 행함이 없는 믿음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 가르치는 자로부터 말에 대한 주의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어떤 면에서 말씀 사역자들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 사역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만, 가르침만 있고 그 가르침대로 본인이 행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 믿음은 야고보서 2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죽은 믿음이요,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더 큰 심판 외에 받을 것이 없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말하느냐?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이 있는데도 이런 면 때문에 선생이 되는 것을 거부하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 주의하고 또 주의하라, 말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행함이 있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저도 가르치는 자로서의 소명을 받아 여러분 앞에 있지만 이런 면에선 참으로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만큼 전하려고 애쓰긴 하지만, 사실 그렇게 살아가느냐 할 때는 여전히 부족하고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사역자들은 이 말씀 앞에 주의를 하고 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도 많은 애를 써야 하지만, 가르치기 위해 애를 쓴 것이 나의 경건이 되도록 먼저 말씀 앞에 자신을 돌아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배우는 성도 입장에서는 다음의 부분에 대해서도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에 있어서는 분명 합당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행실에 있어선 가르침만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니 인간의 본성, 다시 말해 부패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가르침만큼 행함으로 나타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때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그 사람의 행실 때문에 바른 가르침이 묵인되거나 무시가 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2절과 3절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이후 말씀을 보면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5).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들이 말하는 바, 즉 가르치는 바에 있어서는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때도 전제되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서 정당하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가르친다고 해서 분별없이 다 받아들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합당하다면 그들의 행위와 상관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가르치는 자의 행실 때문에 정당한 가르침까지 묵인이 되거나 무시가 된다면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에게도 유익이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1절을 통해 선생 된 자들을 향하여 경고하고 있다고 할 때 가르치는 자들, 말씀 사역자들은 그들이 가르치는 바에 대하여 자신의 행실로 말미암아 누군가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말씀에 전념하면서 그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말씀에 합당한 행실로 나타나도록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2절은 단지 가르치는 사람에 대한 경고로만 있지 않고, 모든 사람에 대한 경고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다는 것은 누구도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온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우는 사람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특히 말과 관련해서 누구든지 말에 대한 실수가 많다고 할 정도로,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온전하다고 할 만큼 사람은 온전하지 않다, 불완전한 존재임을 역설합니다. 말만이 아니라, 확대하면 우리의 모든 행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실수가 많은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내용인데, 분명 말에 대한 실수는 누구도 예외 없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을 때 조심해야 할 것 중 한 가지가 진리를 전하는 것에 대해 실수하는 것을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한 실수는 다른 어떤 실수보다도 심각한 결과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야고보서 2장 내용에서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루터는 카톨릭의 ‘믿음 + 행위’에 대해 반박하여 ‘오직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즉 성경은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믿음’을 강조하다 보니까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야고보서에 대해 꺼리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바 있듯이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강조하되, 그 믿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열매로서 행위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이런 루터의 잘못된 이해가 이후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 하면 히틀러가 유대인을 증오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오직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율법이 경시가 되고, 율법이 경시가 되다 보니 구약보다는 신약에 무게를 두게 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구약에 대한 경시로 있게 되다 보니 결국 구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해 증오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는 다른 이유를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사고방식을 가졌느냐에 따라, 어떤 가치관을 가졌느냐에 따라, 어떤 사상을 가졌느냐에 따라 우리가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목사로서 성도를 가르친다고 할 때 진리에 대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혹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할 때 아이들 수준으로, 좀 더 쉽게, 좀 더 재미있게 라는 말을 더러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진리가 왜곡되지 않게 가르쳐야 합니다. 예전에 보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 물의 고체 성분, 액체 성분, 기체 성분으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아니면 한 사람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아이에게는 아빠, 한 아내에게는 남편, 그리고 직장에서는 어떤 직분을 가진 ᄉᆞᆷ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설명하는 자체가 이단입니다(양태론). 쉽게 설명한다는 것이 잘못된 가르침이요, 거기에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어려울지라도 차분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가르침으로 그러한 가르침에 노출을 시키는 것이 더욱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에 대하여 여러분도 진리를 진리로서 배우고자 해야 합니다. 단순히 세상 지식처럼 쉽게 혹은 재미있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만 진리를 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가 개혁주의의 내용을 배운다고 할 때 지식적으로만 배우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지식이 우리의 경건으로 나타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더욱 경외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알면 알수록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해야 합니다. 개혁주의를 말할 때 사람들은 머리만 큰 것으로 말할 때가 많은데, 결코 그렇지 않은 신학에 대하여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지식에 합당한 경건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개혁주의의 내용을 배운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경건의 부족함 때문에 개혁주의라는 올바른 신학까지 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실수가 없는 사람, 달리 표현하면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말에 대한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가 신자가 되었다고 할 때 무엇보다 변화되어야 할 부분 중 한 가지가 바로 말에 대한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서 세우고자 할 때 그 온전함이 오늘 본문에서는 말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 능히 온 몸도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말이란 매우 중요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과 4절을 보시면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리십니다. 먼저 3절을 보시면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여기에 ‘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린다는 것은 짐승 ‘말’을 의미합니다. 이 말을 제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면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재갈을 물릴 때 그 위에 탄 사람이 말을 제어하여 가고 서고 좌로나 우로나 말 위에 탄 사람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말 전체를 제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함을 알리는 비유입니다. 4절도 보시면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똑같습니다. 큰 배를 제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냐 하면 작은 키입니다. 키 자체는 분명 큰 배에 비해 매우 작은 것이지만 키가 없이는 사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게 배입니다. 때문에 이 비유 역시 작지만 매우 큰 것을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작지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을 하게 되는 혀도 그와 같다고 알립니다. 작지만 이 작은 혀가 인간의 생활을 조절하는데 있어서 행사하는 영향력이란 그렇게 지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이런 일반적인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5절 상반부입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십시오. 인간의 혀는 분명 작습니다. 그러나 이 혀가 하는 일이 얼마나 큰가 하면 5절 상반부에 의하면 큰 것을 자랑한다고까지 합니다. 단순히 쓸데 없는 자랑, 허세를 부르는 게 아니라, 작지만 얼마든지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칼빈). 실제로도 우리말 속담에도 보면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말의 중요성은 이미 인류를 향한 도덕법이란 차원에서도 인지되고 있는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류의 보편적인 죄성을 따라 말 역시 부정적일 때가 많고, 그런 면에서 야고보서는 5절 하반부와 6절에서 혀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냅니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기 보면 작은 불이지만 많은 나무를 태울 정도로 무서운 것이 혀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 말을 했는데 사람에게 옮겨지면서 더 많이 과장된다든가, 아니면 어떤 말을 했지만 그 말 안에 있는 사실은 사라지고 없던 말이 덧붙여진다든가 할 때 그 말 한마디가 걷잡을 수 없게 커지게 되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사실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는 비일비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희한하게도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이 얼마나 빨리 퍼지는지 모릅니다. 이런 것이 무엇과도 같은가 하면 성냥불 하나 잘못 던져 모든 산이 다 타버리는 것과 같을 정도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말에 대해 조심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신자로 있다면,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도로 있다면 이 말에 대한 부분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과장되게 말하지도 말고, 사실을 빼버린 채 부분만 말하는 것도 매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이런 부정적인 면 때문에 이 혀를 무엇으로 비유하느냐? 혀는 곧 불이라고 말합니다. 5절에서도 나왔지만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지 모릅니다. 산 전체를 태우고도 남습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그렇게 큰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혀는 무엇이냐 하면 불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불과 같은 혀가 얼마나 불법적인가 하면 그 혀가 곧 불의의 세계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말만 하면 부정과 불법이요, 말만 하면 거짓이 나올 정도로 그렇게 불의합니다. 그래서 그 부정과 불법, 그리고 거짓된 말로서 그 사람 자체를 더럽히는 것이 곧 말이라고 가르칩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우리가 사는 모든 세계를 입으로서 담아냅니다. 그래서 전문분야가 아니면서도 우리는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교육이면 교육 많은 말들을 입에 담습니다. 입 자체가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입으로 하는 말들은 무엇입니까? 불의함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비판하고, 헐뜯고, 욕하고, 위협하기도 하는 등 불의가 가득 담긴 곳이 바로 우리의 입입니다. 한국의 교육을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정치와 경제를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잘은 몰라도 정당하게 비판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너무 많습니다. 무턱대로 비판합니다. 좀 더 좁혀 교회라는 곳 안에서도 보면 주의 이름으로 모여 비판하고, 헐뜯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예배를 위해 모였으면 하나님을 높이는 일에만 집중해도 부족한데, 주의 이름으로 모여 사람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헐뜯습니다. 때론 세상적인 자랑을 일삼기도 하며, 그 자랑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기도 하는 모습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말로 인해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말로 인해 병들기도 합니다. 사람의 입에 온갖 세상의 불의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보면서 세상을 불의하다, 썩었다, 더럽다는 말들을 하지만, 이미 그런 세상의 불의, 썩음, 더러움이 우리 입에 함축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입이 우리 자신을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 말했기 때문에 입만 불의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말한 사람이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입이기 때문에 그 사람 자체가 더럽다고 말하며, 그 입으로 죄를 짓기 때문에 그 사람 자체가 죄의 원흉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는데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난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쉽게 말해 혀의 횡포는 무엇과 같은가? 지옥의 불길과 같다는 말입니다(칼빈). 그 지옥의 불과 같은 말이 우리 인생을 다 태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마귀에 대해 수식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일단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이 뭐냐 하면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진리가 아닌 거짓을 퍼뜨리려고 하는 피조물의 대표가 마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그 속에 진리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악한 말을 한다면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마귀의 자리는 어디인가? 종국에는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따라 거짓을 말한다면, 다시 말해 진리가 없는 자처럼 말한다면 과연 우리가 가야 할 자리는 어디이겠습니까? 저는 말을 잘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행위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함으로 성도로서 성도답게 입을 조심하는 것이 마땅하는 의미에서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도 보시면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가운데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 게 아니라, 말 한 마디로 지옥 불에 들어갈 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단순히 말 한 마디가 아니라, 그 말이 그의 인생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광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문제만 있으면 원망, 불평,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광야 40년은 무엇 때문에 있게 된 것인가?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신앙에 대한 징계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그것을 저들로 하여금 겸손케 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셨는데, 말씀에 대한 순종을 훈련하기 위해 광야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런 하나님의 의도에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로 결국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도 문제지만 이미 그 말이 그의 모든 삶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입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격이, 우리의 모든 삶이 그 혀를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더욱 더 조심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혹 정치, 경제, 교육, 사회 전반에 대해 비판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때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훈련의 장으로서 우리에게 주고 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가 정확하게 그런 의미였습니다. 인간이 모인 교회의 모임, 어떻게 완벽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조차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훈련의 장일 수 있습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원망만 하고 있느냐? 아니면 말씀 앞에서 여러분을 돌아보시면서 더욱 겸손하도록 무릎을 꿇을 것인가? 우리의 삶의 전반이 이런 부분에 있어서 점검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7절과 8절로 오시면 이 혀를 길들이기가 쉽지 않다고까지 말합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맨 처음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모든 만물의 질서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꼴이 되었고, 동일하게 다른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에게 복종해야 했지만 그렇지 않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임한 저주가 뭔가 했을 때 단순하게 말하면 노동이지만, 그 노동도 결코 쉽지 않음을 알리셨습니다. 그래서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창조 때 세우신 질서가 파괴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모든 만물을 다스리며 길들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모든 인류 가운데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만큼은 길들여지지 않느냐? 혀입니다. 인격체가 아닌 것에는 다스리는데, 인격체는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자기 몸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다스리는데, 자기 몸의 것도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혀는 아무도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게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뒤에도 나오지만, 이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한 선한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혀가 일반적으로 내놓는 성격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지옥 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요,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입술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9절과 10절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11절도 동일한 뜻입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일반적으로라면 모든 입은 지옥에서 불이 나오는 것처럼 그런 열매밖에는 맺지 못합니다.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로마서 3장에서는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3:13-15)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썩은 냄새가 풍기는 그곳으로 찾아가는 데 빠른 발입니다. 가서 무엇을 합니까? 썩은 것을 내뱉고, 속이며, 죽입니다. 때로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면전에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신자에게 합당하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건 우리가 죄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자냐 할 때 그렇지 않은 자임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여러분, 남을 저주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남을 죽여서라도 자기가 살아남겠다는 심보입니다. 밀림의 세계를 양육강식의 세계라 하지만, 이미 이 사회가 그런 사회입니다. 그래서 남을 죽여야지만 내가 살아남습니다. 그래서 거짓이 판을 치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들이 너무나도 비일비재합니다. 결국 남을 저주한다는 것은 자기를 내세우며, 자기를 알아주길 바라며, 자신이 마치 주인공인 양 그렇게 살아가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자신을 높이는 삶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삶으로 변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그분이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는 그러한 자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사라질지라도 하나님만 높임을 받으시면 되는 그런 자로서 인식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남을 저주하는 데 앞장설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줄을 아는 자이기 때문에 입으로 악을, 저주를 내어놓을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존엄성이라고 해 봐야 하나님이 없는 존엄성일 뿐입니다. 인간이 마치 주인공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는 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간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피조물로서 바라봅니다. 피조물이기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나님보다 더 크신 분이 없음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피조물이 어떤 모양으로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도 압니다. 앞에서 모든 만물에 대하여 어느 정도 다스린다고 할 때 하나님의 형상이 이런 면을 통해 남아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 자들을 향하여 저주한다? 그런 자들을 향하여 악을 내뿜고 독을 내놓는다? 그것은 단지 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짓는 것이 12절입니다.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7장에도 보면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5장에서는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가 맺힌 것에 대해 한탄을 하십니다. 그만큼 신자로서, 성도로서 그 열매가 합당치 못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2절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다 실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혀가 불로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는 것으로 있다면(6) 그것은 성도에겐 합당하지 않는 열매라는 것도 잊지 마셔야 합니다(10,12). 달리 말하면 실수가 많다고 해서 실수를 용납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말씀 사역자로서 진리를 대변하는 자로 있다면 그 진리가 거짓이 되지 않도록 바른 말씀만을 증거해야 할 책임이 저와 같은 목사에게는 있을 것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이 없기 때문에 목사로서 과연 합당한 말씀만 전하고 있느냐 모든 목사는 이 말씀 앞에서 반드시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단지 목사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님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든 교회 밖에서든 우리의 입술의 열매가 어떤 의미의 열매인지를 확인하시고 고치셔야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합당한 말이야 좋지만, 합당하지 않은, 그 말이 죄와 관련되어 있는데도 많다면 문제입니다. 아니 죄와 관련된 말이라면 많은 것이 아니라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적은 말이 많은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말이 사람에게서부터 사람에게로 번지게 되면 부풀어질 수 있고, 왜곡될 수 있고, 사실이 거짓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이 정당하지 않는, 그저 남을 비난하거나 험담하거나, 좀 심하게는 악평을 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에 세상적인 말도 우리는 줄이고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아가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오늘 본문이 말이 대한 부분이긴 하지만 단지 말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도 우리는 살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말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은 말 자체를 말하고 있지만 이미 그 말이 그 사람 자체를 나타낸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미 그 마음까지도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마음이 없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우리 스스로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말을 조심하라는 것은 결국 마음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니 우리의 말을 바꿔야 한다면 우리의 마음도 바꾸셔야 합니다.
잠언 4장 2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24절입니다.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마음이 무엇과 연결이 되어 있느냐 하면 입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우리의 모든 육체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도 말씀합니다. 25절 이하 27절입니다. “네 눈은 바로 보며 네 눈꺼풀은 네 앞을 곧게 살펴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네 발을 악에서 떠나게 하라” 즉 마음이 입과 연결되어 있고, 또한 마음이 눈과 발 등 모든 육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을 지킬 수 있는가? 하나님 말씀 외에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잠언 4장 20절에서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21절과 22절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 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가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거룩을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마음을 지키도록 만드는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 이것이 성령을 통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열매맺게 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읽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일에 세상적인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술이 만들어진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그 은혜를 찬송하기 위해 우리 입술이 존재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금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고 권면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부드럽게 말해야 합니다. 함부로,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말해야 합니다.
요즘 예능 프로그램이 많지만, 예능에는 어떤 면이 있느냐 하면 그때그때 얼마나 재치있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주목이 되고, 그렇지 않고가 결정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능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얼마나 재치가 있느냐가 아닙니다. 거짓말하면서까지 이기고, 남을 속이면서까지 트로피를 거머쥐고, 남을 죽이면서까지 왕좌의 자리에 앉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말에는 진실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 속에 부드러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 속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음담폐설을 농담처럼 즐기지만, 그것이 죄인 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싫어해야 합니다. 세상은 모여서 한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런 말로, 저런 말로 쓰는 것을 재미있어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자리를 박차고 나올 정도로 그런 모임 자체를 거절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 진리 안에서 하나됨을 막는 것을 주의해야 할 것이며, 자기의 기득권 때문에 마치 고린도교회처럼 분파를 이루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성으로 보자면 우리의 입술이 저주의 입술과도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이 되어 합당한 열매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되도록 더욱 주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계속해서 살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