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각본 없는 드라마 아니던가?
프로야구가 재밌어진다. 요즘 들어 기아타이거즈가 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야구광은 아니다. 해질 무렵, 술친구를 만나면 주막부터 찾게 되니까 말이다. TV를 본다 해도, 기아의경기가 아니면 싱거워서 못 본다. 기아가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속상하는 그저 평범한 기아타이거즈 팬이다.
오래전, 해태타이거즈시절, 야구장을 찾은 적이 있었다. 승부에는 관심 없이 어깨동무를 하고 ‘비 내리는 호남선’과 ‘목포의 눈물’을 소리 높여 합창하고, 파도타기도 하면서, 간간이 ‘김대중’을 목청껏 외쳤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군부독재시절,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그리워 할 때였다.
검정바지에 빨간 티의 해태원정유니폼은 왜 또 그렇게 멋지게 보였는지? 길을 가다가 비슷한 옷차림만 보아도 저절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토록 사랑했던 해태타이거즈가 어느 날 갑자기 낯선 모습의 기아타이거즈로 변심(?)할 때, 나 또한 사랑의 밧줄을 놓고 말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김선빈, 오랫동안 외면했던 TV앞으로 나를 돌아앉게 만든 프로야구선수다. 165cm의 단신으로 ‘작은거인’ ‘무등산메시’ ‘선빈어린이’라는 별명을 가진 기아타이거즈 내야수다. 홈런보다 하이파이브가 더 어렵다는 즐거운 비명(?)으로 프로구단의 주전을 꿰찬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좋다. 지난 2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와의 원정 3차전에선 선제 3점포를 쏘아 기아를 단독3위에 올려놓은 수훈갑이기도 했다.
내가 어릴 적엔 온 국민의 우상이었던 박치기왕 김일 선수가 있었다. TV가 귀한시절, 김일 선수가 나왔다하면 온 동네사람이 TV가 있는 이장 집 등으로 모여들었고,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을 졸여가며 응원을 하다가 드디어 박치기가 터지기 시작하면 지붕이 날아갈듯 한 함성과 함께 세상이 온통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곤 했다. 참, 다행인 것은 박치기 앞에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프로축구가 승부조작에 휘말려 현역선수가 자살까지 하는 등, 그 파문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세상에서, 스포츠만은 진실이라고 믿었기에 ‘각본 없는 드라마’라 여겨 나름대로 환호하며 좋아하는데, 그것마저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니 그저 할 말을 잃는다. 요즘 나라꼴이 구석구석 성한 데가 없어 눈 돌릴 곳이 마땅찮은 판에 프로야구만은 재미있게 본다는 사람이 적지 않는데, 승부조작의 불똥이 여기까지 튈까 걱정이다. 그리고 국민스포츠였던 레슬링이 ‘프로레슬링은 조작이다’는 한마디에 하루아침에 몰락했던 지난날의 악몽이 자꾸만 떠올라 두렵기만 하다.
이 모두가, 오랜 세월 경쟁만 부추기며 인간의 가치를 소홀히 한 이 땅의 교육이 빚어낸 참담한 결과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가기엔 갈 길이 너무 멀지않은가? 어찌됐건 축구계 전반이 통렬하게 반성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다시는 재발하는 일이 없도록 만반의 조치를 다해야 한다. 한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운 것이 세상인심이기에….
그러나 어쩌랴, 내 마음 특별히 둘 곳이 없어, 오늘 밤도 어쩔 수없이 TV앞으로 다가간다. 이제 막 야구를 시작하는 어린 친구들에게 김선빈 선수가한 말의 진정성을 믿으며,
“야구에선 키보다 땀이 더 중요하거든요!”
첫댓글 짜고 치는 것이 고스톱만은 아닌가 봅니다. 보내주신 옥고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왕성한 창작욕, 튼튼해져가는 문장력! 안삿갓이 아니라 진짜삿갓이구먼! 안창순 진면목이야! 후배들의 귀감이네.
어제 저녁 지인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데, 기아의 경기에 빠져 술도, 얘기도 뒷전이더구먼. 기아가 이기면 좋은 일이 있다고 하면서. 속임수를 쓴다고 영국 사람들은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다데만, 지네들은 속임수로 약한 민족과 나라를 괴롭혔으면서. 키보다 땀! 화룡점정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