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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미로 인가?
풋풋녀/김정숙
프로로그
나는 오빠 보다 3살이 어리다
대학시절 그는 학훈단(ROTC) 후보생 이었다.
교복에 교모 까지 반듯 하게 착용한 오빠의 모습은 당당하고 멋있어 보였다.
부자와 빈자가 분명한 시절 서울에 대학을 보낼수 있을 정도의 우리집은 부자 였다.
나는 오빠 핑계를 대고 무작정 상경하였다. 부모님은 과년한 딸을 서울에 보내놓고 그대 로 놔 둘수 없었는지 구미 타자 학원에 등록 시켜 주었다. 나는 물 만난 고기 처럼 서울 시내를 쏴 다녔다 . 때로는 오빠와 ,오빠의 친구들과 무교동 낙지골목으로 당시 명동국립극장 주변을 배회 하면서 서울사람 행세를 하였다 .당시 지금의 삘딩숲 인 강남일대는 배추밭 이었고 한강 철교는 서울입성의 유일한 관문이었다.
오빠의 4년 대학시절 동안을 내내 서울의 중심가를 누비면서 어엿한 숙녀로 변모 해 가고 있었다
타자기 의 쉬프트 키를 치면서 탁탁거리는 단절음이 생활의 리듬처럼 경쾌 하게 변모 해 갈 무렵 오빠는 졸업을 해야 했다 . 나는 오빠가 없는 서울은 생각 할수 가 없었다 .오빠는 졸업과 동시 육군 소위로 임관 하였다. 타자 학원에서 타자를 배우면서 창밖의 도심에 는 쌍쌍의 남녀가 팔장을 끼고 포도위를 깡충거리며 뛰듯이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의 임관식 당시 파트너로 축하해주던 던 성장한 여대생들의 모습들이 눈에 선한데 그 흔한 짝지 한번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시골 , 금산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생각 하니 울컥 눈물이 나기도 하지만 엄마와 아빠가 계신 곳으로 생각 하니 서울 생활이 피곤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오빠는 임관 하여 경북 포항 에 있는 송신소 소장으로 근무 하게 되었다
눈뜬 이성
오빠가 근무 하는 송신소는 영일만의 항구 였다.
면회를 핑계대고 나는 자주 오빠를 찾아 갔다 .지중해의 푸르름과 동해안 특유의 남성다운 웅장함은 바다를 접하고 살지 않은 나에게 있어 환호와 충격이었다 .해안선을 따라 절벽과 백사장이 어우러진 그 아늑한 절경은 숨이 콱 콱 막힐정도의 감격을 주었다 .
오빠의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건장 하고 씩씩해 보였다 .송신소에서 하는 역할이 구체적으로 무엇 인지는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순간 까지도 잘 알지 못한다 . 군인들 치고는 여유도 있고 낭만도 있어 보였고 밤 과 낮으로 구분 하여 교대근무를 하는것 같았다 .내가 송신소 안에 들어 서면 그들은 아우성이었다. 거울속의 나를 마주 할때 마다 나는 부자집 귀하고 예쁜 딸 이었으니 그럴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묻은 구두를 딲아 주려고 서로 다투었고 숨겨두었던 빵이며 초코릿을 서로 먹이려고 하였다.
이를 지켜 보는 어른 스러운 오빠의 표정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과 아무 스스럼 없이 잘 어울렸다.서울 생활을 통하여 오빠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항상 귀염둥이 로서 대우를 받든 과거의 전력이 한 역할을 했으리라 .송신소 안에서는 카드놀이나 장기 . 바둑등 을 둘수 있었다. 27명의 부대원들에게 나는 신델레라 였다 .어느 누구에게 도 모나지 대우 해 주기는 했지만 그들을 이성으로 나 혹은 사귐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사병 이었고 나는 서울에서 4년을 보내면서 제법 눈높이가 높아져 있었기에 더욱 그랬으리라.
오빠의 부하들이 내 부하들 처럼 여겨 지기도 했다. 거이 비슷한 나이 또래 이기도 해서지만 나도 그들을 부를때 존칭을 생략 하고 윤병장 !.이상병! 하고 계급을 불렀다.
그런데 유독 나한 테 심드렁 한 사람 이 있었으니
병장 계급의 귀공자 처럼 얼굴이 해사 한 윤영탁 병장이다
군 에서 병장계급은 은 5대 장성중 하나라고 힌소리를 치는 다른 병장들과는 달리 그는 자기 자랑도 힌소리도 하지 않았다.억지로 라도 함께 해변을 거닐것 을 프로포즈 하는 사병도 있었고 부대 이탈을 종용 하며 맛있는 횟집을 안내 하겠다 는 유혹도 있었지만 송신소 밖에서의 다른 군인들과의 데이트는 일체 하지 않았다. 그의 침울 한 표정에 언제 부터인가 휘말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 해서 부터였다 . 그러나 그는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둥 모르는둥 침묵 일관 이었고 나는 졸갑증이 나기 시작 하였다.
그의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 다는 사실을 듣고 부터 였다.나는 오빠에게 그의 신상에 대하여 물었다 . 싱긋이 웃는다 . 작업 들어 가려고 ? 뭐야 ? 나는 무엇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달아 올랐지만 시치미를 떼었다 .
그가 제대를 한 후부터 영일만에 오빠를 만나러 가는 면회 수는 현저 하게 줄어 들수 밖에 없었다
윤영탁은 충남 부여가 고향 이라는 것, 그는 홀어머니의 둘째 아들이라는것 , 영남대에 복학을 하였다는 것,
그리고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 하다는것 등이 하나씩 알려 졌지만 그것은 그가 제대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였다,그에 대한 연민은 불랙홀 처럼 빠지면 헤어날수 가 없을것 같았다 .이대로 두면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기도 했다. 그해 가을은 그렇게 자꾸만 깊어져 갔고 나는 그리움에 밤잠을 설쳤다, 그는 여전히 부잣집 귀공자 였고 나를 가슴 설래게 하는 유일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포항의 오빠 면회를 핑계로 윤병장을 만나기로 했다 . 포항에가서 오빠에게 그의 집 주소를 찾아 달라고 했다. 부랴 부랴 대구행 뻐스를 탓다 . 경산행 뻐스를 갈아 탔다 . 오래 떨어 져 있던 애인들의 만남을 상상 하면서 초조한 마음을 내 스스로 어루 만지면서 ...
그는 나를 와락 포옹 해준다거나 반가운 표정을 연출 할 줄 아는 그런 남자는 아니었지만 , 내 손을 꼭 잡아 준다거나 맛있는식사를 알선 해 줄 수는 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내 일방적인 기원 이었을 뿐, 그 와의 만남은 내 주머니 속사정만 어려워 졌다 . 항상 내 기대와 상상은 잔인 하게 부서져 내렸다. 그에 비례하여 내 연민의 깊이는 더해갔다. 그 에게는 모두가 사치였고 그 와는 인연이 닿지 않는 이밴트였다
그래도 나는 계속 그를 만나러 갔다 .철부지 처녀의 가슴에 와 닿은 그 이외 에는 누구도 생각 할수 없었다.
그렇게 보낸 몇개월 후 어느날 그와 대구의 달성공원에 갔다. 항상 싸구려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중국집에서 우동이나 짜장면으로 식사를 하던 시절이다. 때문에 제법 괞찮은 장소 였다 .공원 밴치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 다가 해가 저물었다.
자연스럽게 부근의 동산여관엘 들어갔다.그는 나를 원했고 나는 그외의 남자가 없었으므로 그를 사랑 하는것으로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다가 오는 그가 두려웠다 .나의 처녀가 그외의 다른 남자에게 가는것을 상상한 적이 없는데도 나는 저항 하였다 . 순결 하였지만 그 순결을 혼전에 지켜야 한다는 평소의 신념이나 교육을 통하여 고수 하려는 의도 도 없었다. 그러나 나의 저항은 치열 했다 . 속옷을 쥔 나의 손은 힘이 들어 가 있었고 영탁은 결국 나를 이겨 내지 못하였다. 밤새 전투에 가까운 씨름으로 날밤을 세운 그는 새벽녁 눈이 부어 기숙사로 돌아 갔다. 나는 그가 기숙사로 돌아 간줄도 몰랐다. 화가 나서 밖을 배회하는줄 알았다 . 그가 돌아 오지 않음 을 안후 텅빈 방 을 눈물로 채울것 처럼 나는 꺼억 꺼억 울기 시작 했다.그는 돌아 오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떴다. 낮선 여관방 에서 의 나의 모습은 도대체 어떻게 된것인가
갑짜기 부끄러운 생각아 몰려 왔다. 나는 옷 매무시를 가다듬고 부은 눈을 찬물로 식혔다 . 여관방 욕실에 비친 나는 여전히 예뻤다 .
전날 그와의 약속이 생각 났다. 오늘 11시40분발 대구역 출발 대전행 열차를 타기 로 했던 약속이다 . 시계를 보았다 충분 하다. 나는 고통의 밤을 잠시 잊었다. 대구역으로 갔다 . 약속 시간은 여유가 있다. 기다림의 고통이 가슴을 에이게 하는것도 기다릴수 있는 환호 도 난생 처음인것 이다 . 그는 확실히 올것이다, 나는 두장의 열차표를 준비하였다 . 승차를 준비 하는 줄서기 가 시작 되었다 .나는 줄서는 대열에 끼었다 .그리고 그를 찾아 계속 두리번 거렸다 .
열차가 폭음같은 하품을 하고 플랫홈을 빠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오지 않았고 나는 개찰구 옆의 목재 장의자에 앉아 또 울기 시작 하였다.
차는 떠났다. 맥빠진 다리에 힘을 모아 역사를 빠져 나오려고 뒤를 돌아서는 순간 이게 왠일인가 ?
그가 내 앞에 서 있는것 아닌가 . 숨이 멎는것 같았다.
나의 손을 잡는다 . 역사를 나오더니 고속 뻐스 터미날로 날 데려 간다.
그는 한장의 고속 뻐스 표를 끊었다 운전기사 바로 뒷 좌석이다 . 우리집 으로 혼 자 서 되 돌아 가라는 것이다.
순결을 거부한 대가 치고는 너무 혹독 한 것 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나로서는 시키는데로 할수 밖에 없었다. 가슴에 북바쳐 오르는 형언 할수 없는 아픔은 멍이 되어 차있고 헝클어진 슬픔은 가닥을 잡을수가 없었다.
눈치를 챈 운전기사가 묻는다 .잘 어울리는데 이별은 왜 하느냐고 ?내가 무슨 말을 할수 있을 것인가
또 한번의 해후
나는 편지를 썼다 .수신이 확인 되지 않는 편지지만 편지 마저 쓰지 않고는 하루 하루를 살아 갈수 없을것 같았다
윤영탁 병장님 !
그날 이후 저는 사람이 살아 가는 이유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을 계속 해 왔지만 답을 얻지 못 했습니다
남자와 여자 가 만나서 애를 낳고 알콩 달콩 소시민적 행복을 누리고 자 하는 염원은 누구에게나 공통적 일 거란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나의 대상은 당신이었습니다 .당신 이외의 어느남자도 생각 할수 가 없 습니다.
부끄러웠지만 동산여관에서 당신의 품은 따뜻했습니다 . 첫 키스는 가슴 설래는 황홀 그 자체 였습니다 . 당신의 눈빛은 신비 하였습니다.그러나 우리가 맞은 그 첫밤의 전투는 지금도 이해 수가 없습니다. 거기 까지 만 이어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 이상의 요구에 당혹 할수 밖에 없는 것은 당신께서 이해 하고 받아 드려 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아직도 소중하게 당신을 위하여 간직한 내 처녀는 그대로 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것 같습니다.-중략-
수십통의 답장없는 편지를 띄우고는 나는 다시 용기를 냈다 . 그의 집 부여를 찾았다. 아무것도 생각 할수 없었다 초행이다.시골길의 뻐쓰는 흔들리는데로 몸을 맞기면 된다.정리 되지 않은 머리속에는 부여읍 신정리 정곡 마을 39번지 윤병장의 집주소만 맴돈다. 뻐스 기사에게 물어서 신정리에 하차했다. 허허 벌판이다 .정곡마을은 산모퉁이를 돌아 논두렁길을 한참 걸어야 갈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묻고 또 물었다 . 걸으면서 묻고 구두 위에 쌓여 가는 흙먼지를 털어 내면서 머리속이 완전하게 빈 사람 처럼 걸었다 .그렇게 그의 집을 찾았다. 동네 입구 웅덩이에서 손이 빨갛게 얼은 아낙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윤영탁 병장의 집을 물었다 . 이 추운 날씨 에 왠 아가씨가 영탁이네 를 찾는가?
영탁이 학생 지금 없을 긴데.논산 사는 즈그 형네 집에 갔을기다.야산아래 초라한 오두 막집을 가르켜 준다 .영탁이가 집에 없다고? 그냥 되돌아 갈수 는 없다. 나는 오두 막집을 향해 한걸음씩 토박 토박 걸음을 옮겨 놓는다 . 영탁이가 집에 없다니 . 목구멍 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자제 하며 싸립문도 담장도 없는 그집 앞에 섰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용마루를 다시 틀고 볏집으로 지붕갈이를 하는데 그 조차 하지 않은듯 지붕 까지 꾀 죄죄 하다.
토방에는 검정 고무신 한컬래, 문도 없는 부억에는 검은 강아지 한마리가 부뚜막을 지키고 있다 때다만 청솔가지 몇개가 초라함의 극치를 보여 준다 . 여기서 영탁이가 산다는 말인가 . 어떻게 그 화사한 얼굴이 이런데서 거주 한다는 말인가
우리집은
우람한 대문이 있다 .5칸방에 깨끗한 대청마루 가 있다 . 사랑채 에는 항상 공밥 먹는 사람들이 득시글 거린다 .이집과 우리집 은 비교 도 될수 없다 . 우린 정말 부자 였구나 .
헌데 이집이 내집 같다는 생각이 들까? 내가 미쳤나 .
피로가 엄습해 온다 . 그냥 주인없는 빈방에 들어 가 눕고 싶다.
나는 금방 무너져 내릴것 같은 처마 밑 마루 끝에 걸쳐 앉았다 .내가 왜 앉아 있는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는 집에 없다고 하는데 .
뜨락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 했다 ,나는 꼼짝 하기가 싫었다 . 이데로 얼어서 죽어 버리고 싶다, 서산에 걸려 있는 겨울 해가 완전하게 산 넘어로 기울무렵 웅덩이에서 빨래를 하면서 이집을 가르켜 준 아줌마가 찾아 왔다. 어쩐담 ? 날씨도 추운데 이렇게 오래 기다려서
부억으로 들어간 아줌마가 군불을 지핀다 . 꼼 짝 않고 부뚜막을 지키던 강아지가 목청을 내어 짖기 시작 했다 .
이때 낮선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집에 누가 왔어?
금산 에서 온 아가씨구만 . 우리 영탁이 논산 형네 집에 가 있어
나 장사 나가지 밤이면 전기불도 없이 호롱불을 켜니 무슨 공부가 되겠어 .어머니는 혼자서 혀를 차시며 . 내손을 쥐어 준다 . 투박 하지만 가슴이 녹느것 같은 느낌이다. 어여 방으로 들어 가
뭐라도 먹어야지 .하루종일 아무것도 않먹었다. 나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 갔다 , 키가 조금만 더 크면 천정에 머리가 닿을것 같다 . 방안에 호롱불 심지를 돋운다. 우리집 같으면 절대로 먹어지지 않을것 같은 초라한 밥상이지만 우리는 겸상을 했다. 이것 저것 골라서 밥수저에 얹어주는 반찬을 받아 먹으며 시집살이 에 멍든 딸 친정에 오면 친정엄마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눈길 같은것이 느껴 진다.
나는 금산에서 낳아서 금산에서 자랐다 . 외동 딸이다 . 금산여고를 졸업했다 .외지라고는 오빠 때학시절 4년을 서울에서 타자 학원을 다닌것 외에 별로 한것이 없다 . 앞에서 잠시 언급 한것 처럼 우리집은 금산 읍내에서는 알아 주는 부자다
머슴 이라고 불리는 일꾼을 1년 내내 둘씩 이나 두고 산다 .. 농번기 일손이 달리면 온동네 사람을 품삯 을 주고 부린다 .항상 부엌일에는 가나한 옆집 아줌마들이 밥지어 주고 부엌일 거들어 주면서 우리집 식솔이 되어 있다 사랑방에는 동네 유지들의 회의실이 되기도 하고 오가는 길손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 가는 곳이다.
아버지는 면직원이다 . 아침 자전거를 타고 출근 하면 집안일은 거이다 어머니 몫이다 .시집갈 나이가 되기 까지 부엌 일이나 빨래 등속을 해본 기억이 없다 . 기억을 되살려 본다면 품삯을 선 지급 해준 일꾼 도망 가는것 감시 하라는 어머니 의 명령 정도다 . 그것도 귀한딸 험한일 시킨다고 아버지 가 어머니에게 주의 를 주셨 다고 한다.
지금도 만나고 있는 명자 나 신희네들과 어울려 웃고 까불며 공부 보다 노는 재미에 심취해서 적벽강이거나 동네 고삿을 누비든 기억만이 전부다, 부자집 외동딸 가슴 아파본 적도 누구 때문에 통한 서린 눈물을 흘려 본적 도 없는 내가 이 낮선 초락한 오두 막집 에서 윤영탁 병장의 어머니라는 이유 만으로 마주 앉아 저녘을 머고 있다니 ?
저녘상을 윗목에 밀쳤다 .설겆이라도 해 보려고 내가 일어 서자 말리신다. 괞찬아 걱정 말고 영탁이 있는 논산에나 가보자 차가 있는지 모르겠다 .
어머니는 풍체도 있었고 미인이었다 ,그가 엄마를 닮았구나 라 는 느낌 추수르는 동안 어머니는 웃옷을 걸치시고 내 손을 잡는다 처음 보다 더 따뜻 하다 . 모녀처럼 편안한 느낌도 기이 하지만 이토록 쉽게 가까워 질수 도 있겠구나 . 내가 영탁 어머니의 딸이 되어 드려도 괞찮겠다는 생각 이 들었다 . 어머니를 따라 주저없이 논산 그의 형 집 , 지금은 그가 머물고 있는집에 도착 했다. 내나이 스물 여섯,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형은 경찰 공무원 이라고 했고 신혼 살림을 시작 했다고 한다 . 살림살이 는 잘 정돈 되어 있었다 . 깨끗했다 어머니가 나를 소개 했다 , 영탁이 찾아온 손님이다. 영탁이 찾아와라. 영탁이 지금 2층에서 공부 하는데요 , 영탁이를 부른다 .그순간 에 서야 얼굴이 화끈 하게 부끄러움이 밀려 왔다.. 여자 혼자서 총각을 찾아 그의 형 집에를 그의 어머니를 대동하고 오다니 상상할수 도 없는일을 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 이것이 사랑인가 아니면 사랑의 힘인가?
이층에서 머쓱 해 가지고 내려 오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움은 더 극에 달했다 .내가 이토록 뻔뻔 할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인가 ?외동딸 ? 서울생활 ? 사랑 의 힘?
형님께서 는 날 다시 부여 에 데리구 가서 부여 구경을 시켜 주라고 하신다 .금산에서 여기 까지 동생을 찾아온 아가씨에 대한 접대 차원이다.우리는 다시 부여 에 왔다 . 어머니는 우리 둘만의 시간을 주시 려는 듯 가까운 영탁 이 고모님 댁으로 가셔서 기다리신 다고 했다 ,영탁이가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것 만도 다행이다. 나 또한 여자로서의 기본적 자존심이나 수치심을 깡그리 잃어 버렸는지 그저 좋기만 하다 .
그는 내손을 잡아 주었다 . 부소산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의 물줄기는 흑빛 이었지만 나는 영탁 외의 어느곳에도 시선을 줄수 없었다. 고란초가 자란다는 약수터에서 물을 떠주기도 하고 낙화암에서 떨어진 삼천 궁녀의 이야기도 귀에 들어 오지 않는다 . 고란사 중턱의 매점에 자리를 잡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 했다 . 맥주를 마시기 시작 하면서 그는 그의 장기인 침묵을 시작 했다 . 그의 침묵은 묘한 매력을 지녔다. 최초 그에게 매료 되었던 바로 그 표정의 연출이 시작 된것이다. 한병 두병 8병째 병나발을 분다.나는 따라 놓은 한잔도 비워내지 못하고 있다 . 술에 취한 영탁은 할말이 있는듯 , .하지만 하지 못 한다 . 그를 부축 하여 부소산을 내려 왔다.우리는 어머니가 기다리시는 고모 댁에 왔다. 술 취한 영탁이는 어머니 부른다.
큰일 났네. 금산 가는 막차가 없는데 할수 없이 우리집에 가야 겠구먼 .
낮선 방에 총각과 처녀가 함께 있게 할수는 없으셨는지 조카 딸을 나오라고 한다. 4사람은 시내 뻐스를 탔다 .술이 그토록 취해 있는 모습을 나는 처음 대했다. 뻐스에 타자 말자 그는 계속 울기 시작 했다 손님 이 없어 다행이기는 했지만 그는 어머니도 나도 조카되는 사람도 개의하지 않고 계속 울기만 했다. 참다 못한 어머니의 푸념이 나온다
누가 너 더러 결혼 하지 말라고 그랬냐 ? 내가 어떻게 결혼을 해? 서울로 시집간 두 누이가 보태주는 학비로 학교 엘 다니는 주제야 . 나는 살아야 할 가치도 없는 놈이야 사랑 같으거 할 자격 조차도 없어, 내가 어떻게 정숙이를 사랑해?
누구 신세 망칠일 있어 , 엄니 보따리 장사로 먹구 사는 주제에 , 빨리 다른데로 시집가 버려 !나같은 놈 뭐 볼께 있다고 .
듣고 있는 나는 뭐고 지금의 이상황은 무었인가 ?고모님 의 딸까지 대동해서 나를 지키려는 이유도 바로 이것 이란 말인가.
윗방에는 영탁, 아랫 방엔 어머니 나와 조카딸, 셋이 함께 누워 잠을 청한다. 잠이 올리 없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다 얼핏 잠짖을 하는 순간 어머니가 일어나 군물을 때려고 부엌으로 나간다. 아 새벽이구나 . 조금 있으니 조카딸이 출근 해야 한다 면서 나갔다 . 그순간 윗방에 있던 그가 내려와 나를 부등켜 않았다. 동산 여관의 악몽이 되살아 났다. 어머니 부엌에서 일 하고 계신데 이렇면 안된다고 그를 떼 내었다. 뚱뚱 부은 그의 눈을 보면서 그는 나를 절실하게 사랑 하고 있음을 알았다. 편지 에 답장 한번 안주 던 사람 .사랑의 열병을 가난때문에 식혀야 했던 사람 .나는 그를 받아 드려야 하나? 잠시의 포옹으로 날이 밝았고 우리는 또 헤어져야 했다 . 금산행 버스에 오르면서 나는 또 북바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수 가 없었다. 금산의 우리집은 여전히 활기 가득찬 집 . 딸을 믿고 외박에 대하여 딸 마음 상할까 단 한마디의 핀잔이나 꾸짖음도 없 이 내 눈치를 보는 부모님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일절 바갖 출입을 끈었다.
정숙아 촣은 혼처가 났는데 선 한번 보면 어떨까
미동도 않는 나는 부여에 있는 병탁이 어머니 드릴 강정 담는일 에 만 정성을 쏟는다 .영탁이가 보고 싶다 .영탁 이 어머니도 보고 싶다 . 나는 부여행 시외 뻐스를 탄다 . 이번에 도 요구 하면 나는 기꺼이 순결 따위에 연연 하지 않겠다.
버스에 내려 산모퉁이를 돌아 갈때면 오솔길에서 다람쥐도 만나고 풀벌래 우는 소리도 듣는다 . 영탁 어머니의 인자 한모습에 가슴이 벅 차오르기도 하고 그가 잡아주는 따뜻한 손의 체온 은 나에게 늘상 감동이다 . 내가 누구에게 시집을 간다고, 나는 그냥 처녀로 살면 살았지 시집은 안가 .영탁이라면 몰라도 ....
에필로그
여기 저기 혼처가 나도 28살 되도록 시집도 안가고 버티는 나 때문에 온 집안이 불난이다. 막내 고모 때문에 시집 못 간다는 탄원이 쇄도 하고 조카들 애인 까지도 나에게 협박성 언질을 던진다 .빨리 시집을 가란다, 똥 차가 밀린다나?
영탁에게 소식을 전할수도 없고 소식도 없다 . 나는 선을 보기 시작 했다 .정이 가는 사람이 없다.아직은 부자집 외동딸 이다 내가 나를 봐도 별로 흠잡을데 없이 아름답다. 시원스런 눈매에 쌍까풀 까지, 거기다 뽀오얀 유백색 피부는 우리 부모님 말씀 처럼 어디 주기에 도 아까운데 . 그 가난뱅이에게 혼이 째앗겨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으니 나는 집안의 암 덩어리 처럼 부담스러운 존재 가 되어 가고 있다.
언제까지 시한을 두고 영탁이를 기다려 야 하나 , 아니면 가출 이라도 해서 가족의 근심 종목에서 제외 되어야 하나 ?
유일하게 지난해 선을 봤던 지금의 남편이 생각 났다 어머니 한테 넙적 절 한 남자다. 딸 고생 안시킬 테니 자기에게 시집 보내 달라고 해서 이미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 한테도 가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 내 딸이지만 어떻게 내맘 데로는 안되는 구만, 자네가 알아서 잘 해보게 ..
아버지도 허락 한 셈이다
나는 두통의 편지를 썼다 .한통은 영원히 수신인 없는 편지 한통은 마음 으로 보내는 편지다
윤병장님 !
지나온 세월 가난과 싸우면서 견딘 아픔을 보상 받으셔 야 되겠지요. 기다림에 지친 한 아녀자의 가슴에 각인된 상처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젊은 날의 초상으로 가끔씩 꺼내어 보실수 만 있어도 좋으련만 . 정숙이 시집 가렵니다 . 아무것 도 아닌 순결이라도 드리고 떠났으면 이 아픔이 조금은 덜 할수 있었을 것을 - 중략-
그리고 지금의 남편에게
아버지가 당신에게 시집을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 집은 일제시대 부터 양반과 상놈중 양반 가정이었고 할아버님은 초대 군수를 지내 셨다면서요, 당신의 아버지는 여중 , 여고 시절 저의 선생님이 셨어요. 저 많이 아프거던요, 당신에게 치료 받고 싶어요 .그리고 정말 미안 해요 .
나는 애원 하는 그남자와 1년후에 결혼을 했다
후기
결혼 어언 30년이 되어 가고 있다. 나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길렀고 성 장 한 모습이 대견 하다.
가끔씩은 영탁씨 어머님이 그리워질때가 있다 아! 우리영탁이 없어서 어떡 하나 ? 금산에서 여기 까지 왔는데
만나지 못하고 돌아 서는 허탈함을 위로 받을수 있었든 그 시절 반가워 하든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랑인지 열병인지 독 하게 가슴 에이든 순간들 ,
순간을 이겨 내지 못하여 삼천 궁녀의 낙화처럼 백마강에 투신 할수 도 있었을것 같았던....
몇년전 영탁 씨를 만나봤다, 옛 정인으로 서의 감정은 온데 간데 없고 초등학교 동창생 같았다. 옛날 같은 감정은 없어도 친절 하고 부드러워 져 있었다 .성공 한사람으로 보였다 . 물론 내가 처녀 시절에 가슴에 품었던 귀공자는 더더욱 아니었고 시속에 닳아 빠진 사업가 처럼 보였다. 살망은 안심이되었다 . 내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사람 치고는 너무 아니었다 .그 또한 나에게 실망을 통한 자위를 했겠지만 ,
어머니가 치매로 논산 백제 병원에 입원 하고 계신다고 헀다 .이제 모두가 정리된 자리에 놓여 있는데 찾아 뵐 필요가 있었다 . 그래도 뵙고 싶었다 . 나는 친구의 차를 빌려 타고 병원을 찾았다.
숨민 쉬고 계시지 죽은 듯 한 모습을 하고 계신다 ,.
다가가 어루 만지니 날 알아 보는듯 한 눈빛이다.공포가 스쳤다 친정 어머니 돌아 가실때 날 보지 못하면 눈을 감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엄마 하고 부르는 순간 나를 알아 보고 눈을 감으셨는데 그때도 그리 무서웠다 . 모두가 떠날떼는 공포를 주고 가시는것이나 아닌지 .영탁 어머님도 결국 돌아 가셨다. 이제 우리 차례가 다가 오는 것 이겠구나 생각 하면
허무 하다는 생각이 든다, 문예창작 반에 들어와 이글을 써 보지만 답답한 것은 똑 같다. 누구나 자기 인생을 영화로 생각 한다 물론 주연은 자신이지만 영화를 보는 순간 최선이 아니었음에 유감을 갖듯이 남은 여생 무엇 인가 에 매달려 최선을 다해보자 . 유감을 남기지 않도록
여보! 미안해요
그리고 아들 딸 정말 사랑 해 !
첫댓글 가슴한켠에 남아있던 사연 ...잘쏟아내셨군요... 아직도 찡한 ..그사연이...없었으면 인생이 밋밋햇겟죠??? ..지금도 누군가를 또 사랑하면서 ..늘행복하시암...내내 풋풋녀여!!
부여읍 신정리 정곡 39번지 윤병장의 집주소는 아직도 그대로 인지 궁금하옵니다....풋풋한 첫사랑의 그리움이 참 아름다와요... 멋진 에필로그가 기다려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