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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에서 '5·18'까지
증 언 자 : 김상윤(남)
생년월일 : 1949. 10. 16 (당시 31세)
직 업 : 대학생(현재 하심의료기상사 운영)
조사일시 : 1989. 6
개 요
1974년 민청학련에 관련됐고 1977년 사회과학책을 보급하는 녹두서점을 운영했다. 1980년 전남대 국문과에 복적하여 복적생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5월 이전까지 학생운동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중 계엄확대 조치로 5월 17일 자정경 예비검속되었다. 상무대에서 김대중 씨 자금 관계로 심한 고문을 받고 결국 내란임무 주요종사자로 구속되었다가 1981년 12월 24일 석방되었다.
내 친구가 간첩이라니
나는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서 김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 마을에는 하서 김인후를 재향하는 필암서원이 있었는데 서원의 위세가 커 부락민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많이 하여 가난한 사람들만 모여 살았다. 우리는 그 마을에서 자작농이었으므로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리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은 6·25가 일어나면서 더욱 심해졌다. 우리 마을에서도 하서 김인후의 후손이고 필암서원이 있는 마을에서 산다는 이유로 지방 인민조직에 의해 7명의 우리 집안 어른들이 대창으로 죽음을 당했다. 나중에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당의 허락 없이 사적인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고 해 우리 집안 어른을 죽인 사람들이 담양 쌍치에서 모두 숙청을 당했다고 들었다. 그만큼 공산당은 규율이 엄격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광주에서 서석국민학교와 서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일고에 입학했다. 일고 내에 피닉스, 원시림, 광랑 등의 서클이 있었는데 특히 '광랑' 출신들이 대학에 들어가서 학생운동을 많이 주도했다. 나는 수필, 소설, 평론 등 책 읽기는 좋아했으나 서클 활동은 하지 않았다.
1968년 전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나는 송정민, 위상복과 함께 친하게 지냈는데 우리들을 문리대 삼총사라고 불렀다. 일고 동기인 송정민은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와 변혁운동에 관심이 많아 학교에서 시위를 많이 주도했고, 위상복은 그 시절에 풍미하던 실존주의 철학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나는 개인을 소우주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고에 심취하여 직접 데모는 하지 않고 운동하는 친구들을 뒷바라지해 주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나는 학교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휴학계를 냈다. 등록금으로 니체, 프로이트, 헤세 전집을 사서 독파하고 군에 입대했다. 내가 군에 있을 때 정부에서 남북대화를 했다. 곧 통일이라도 될 듯이 세상이 온통 남북간의 대화에 쏠려 있었다.
나도 잘하면 통일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과 희망을 가지고 남북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후 남북대화가 중단되고 위수령을 발표하여 사회운동 및 학생운동권에 대대적인 탄압을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나의 일고 동창인 안평수, 송정민, 윤재근 등이 대거 제적되었다. 그리고 정부당국은 유신헌법이라는 것을 발표해 정국을 초긴장으로 몰아가고 운동세력에 대한 극심한 탄압을 자행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온 몸이 떨리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제대 후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광주에 있던 집을 팔아버리고 일곱 식구가 사글세 방으로 이사했다. 집안이 어려워지자 장남인 나는 곧바로 학원 강사로 취직했다. 그러던 차에 1973년도에 친구인 김남주, 이강이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것도 간첩과 관련된 간첩단사건으로 조작되었다. 내 친구가 간첩이라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적색공포가 있던 나는 그들의 재판을 보고 또 충격을 받았다. 이상하게 재판받는 사람은 당당한데 판사, 검사들이 학생들의 눈치를 봤다.
나는 학원 강사를 하면서 윤정열 선생님과 함께 월간잡지 {호남}에 샤르트르의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를 싣고 이애신 총무 등과 문학 대담을 하는 글을 실으면서 학원강사 생활을 마감했다.
비록 살림이 어려웠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책임져야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상복이의 소개로 윤한봉 씨를 만나면서 1973년 후학기에 복학하여 자연스럽게 운동에 투신하게 됐다.
민청학련에 연루되어
1973년 10월 정찬용, 나병식 등이 서울대 시위를 주도하여 유신 강권 통치하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호응이 전남대까지 파급되었다. 그해 11월 전남대에서는 유신 이래 최대의 데모를 했다. 광주에서는 함성지 사건으로 관련된 박석무, 김남주, 이강 재판이 진행되던 터라 학생들이 재판을 방청했다. 그 분위기까지 겹쳐 11월 전남대 시위는 유신으로 억눌려왔던 민주화 열기가 엄청나게 폭발하였던 것이다.
서울 쪽에서는 10월, 11월 학생시위에 자극을 받고 자본주의의 모순이 급속이 첨예화되는 현상태에서 내년에는 박정권을 타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의 산발적, 고립 분산적인 싸움을 지양하고 전국적인 연계 하에 조직적인 시위를 하기로 했다.
서울의 이철, 나병식 등이 전남권과 연계를 갖기 위해 막 출소한 이강, 김정길을 만나서 그들이 윤한봉과 나를 소개시켜 주었다. 대구에서는 이강철, 부산에서는 임규영, 황철식 등이 관여했다. 윤한봉 씨가 전남북 지역을 총괄하고 나는 전남지역의 학생부분을 담당하기로 했다. 몇 번의 논의과정을 통해 전국적인 단위의 '민족민주민중선언'이라는 유인물을 작성하고 그 성명서 아래 '전국민주청년 학생총연맹'이라는 단체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서울에서 예정보다 빠른 4월 3일 학생 연합시위를 시작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긴급조치 4호를 만들어놓고 명확한 실체만 보이면 선포하려고 했는데 시위를 하자 그날 밤 10시에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학생들이 대거 구속이 되었다.
전남대에서는 4월 9일 계림동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전남대에 들어가 시위를 하려 했는데 사전에 발각되어 전남대에서 모두 잡히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싸움도 하지 못하고 사전에 체포되어 버린 것이다.
정부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전국을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지기 시작한 물꼬는 막을 수가 없었다. 언론까지 긴급조치 4호를 규탄하자 정부는 광고 탄압을 시작했다. 그러자 전시민들이 신문사에 광고를 내주었다. 이에 1975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대대적인 탄압을 하게 되어 그 결과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만들어졌다.
그런 제반 싸움에 힘입어 우리는 구속된 지 열 달 만인 1975년 2월에 석방되었다. 나는 석방 후 전국구속자협의회에 가입했다. 박형규, 지학순 주교가 의장단이었고 이철이 대변인을, 전남지부 초대 회장은 윤한봉 씨가 맡았다. 우리는 구속자 옥바라지를 위해 풀베기, 서적 외판원, 포장마차 등을 했다.
석방 후 광주에서는 민청학련 내부에서 역할 분담이 있었다. 이강, 박형선은 농민운동 부문인 가톨릭농민회로 들어갔고 민청과 연계될 수 있는 이양현, 정상용 등이 노동부문을 담당했다. 한봉이 형은 강신석 목사와 함께 교회활동을 하고 제적된 학생들을 모아 현대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청년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또한 극단 '광대'를 조직하여 문화운동을 체계적으로 시작했다. 이렇듯 사회운동의 틀을 만들어가는 작업을 했다.
나는 제적된 상태였지만 학생운동에 관계했다. 전남대 내에는 메시아, 민사연, 맷돌, 독서잔듸, 루사 등의 서클이 있었는데 거의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서클 중심의 학습보다는 소그룹 단위의 학습에 대해 생각했다. 소그룹 단위의 학습은 활동인자가 노출되지 않고 학습내용을 심도있게 진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윤상원, 김광한, 김금해 등 5명이 6개월 단위로 학습했다. 또한 5명이 각자 소그룹을 만들어 학습을 시켰으므로 1976년도에는 그 수가 굉장이 많았다.
학습내용은 역사, 경제, 노동, 농민 분야였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조용범의 '후진국 경제론'은 필독서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들어라 양키들아'를 직접 필사하여 학습자료로 사용하였다. 그때는 광주에 사회과학 이념 서적이 없어 내가 서울로 가 책을 샀고 판매금지서적은 저자에게 부탁한 경우도 있었다.
1977년 1학기까지 학습을 시켰다. 보안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윤상원, 조봉훈, 노준연, 김영종, 김금해 등의 활동가들이 학교에 대거 진출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일은 그들에게 맡겼다. 나는 학생들이 원활하게 책을 사 볼 수 있도록 녹두서점을 운영하고 학생운동에서 배출되는 인자들을 사회운동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 녹두서점을 할 때 지금의 아내인 정현애를 만나 1978년 결혼하였다.
복적하여 어용교수 문제를 터뜨리고
1980년 박정희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정부는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며 모든 제적생들을 복적시켰다. 윤한봉씨와 나는 역할 분담을 하여 사회운동부문은 윤한봉 씨가, 나는 학생운동을 담당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전대에 복적을 했다.
1980년초 전남대에서 한상석을 위원장으로 하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학내의 비민주적인 요소를 척결하고 민주적 학생회 수립을 위해 결성되었다. 때를 맞추어 복적생이 대거 진출했으므로 정동년 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복적생협의회가 구성되었다.
복적생들은 정보기관과 밀착된 상담지도관실을 폐쇄하고 어용교수를 폭로하면서 학내의 분위기를 잡아 나갔다. 3월 '어용교수 백서'를 발표하고 어용교수 퇴진을 촉구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어용교수비'를 건립하겠다고 천명했고 어용교수들의 방에 못을 박는 정침식도 가졌다.
나는 정동년 선배와 함께 정책결정 과정에 항상 참여했다. 그리고 전남대에 대한 외부의 영향력이 심했는데 외부의 입김이 강하면 학생들이 판단하는 데 장애를 일으켰기 때문에 나는 대외창구의 단일화 역할을 맡았다.
5월 14일부터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이때 저들이 계속 시민들이 학생들의 주장에 호응하지 않는다고 선전을 하니 횃불행진을 할 때 소등을 하자고 제의했다. 시민들이 단결된 모습으로 소등을 하도록 하여 우리의 힘을 확실히 보여주자고 했다. 그러나 소등을 했을 경우 시민들이 불안해 하고 또 저들이 의도적으로 사고를 낼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져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5월 16일 박석무, 전홍준, 이경순을 만났다. 그들은 내게 상황을 낙관한다고 하며 현재 군부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군부에 쐐기를 주는 성명서가 나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국군장병에게 드리는 글'을 썼다. 사실 그 당시 나는 군부에 대해 낙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생지도부가 불안해 하거나 혼돈하면 안 될 것 같아 세계 전반적인 데탕트 분위기에서 국제 역학 관계상 미국이 다시 군부를 등장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줬다.
예비검속되어
5월 17일 밤에는 총학생회 간부들과 이병철, 노금노 씨와 함께 19일 북동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가톨릭농민회 전국대회 관계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전에 전남대 학생과장인 서명원 선생님, 윤한봉 씨와 함께 학생회 문제로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총학생회 총무부장인 양강섭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금 산장입니다. 이화여대에서 학생회 회장단이 모두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단 피신을 하고 관망중입니다. 확인 좀 해주십시오."
"알았네. 그럼 가농대회는 어떻게 할 건가?"
"지금 이 상태에서 누가 선뜻 내려가기가 뭣하네요. 저희는 대주호텔에 가 있겠습니다."
"알았네. 곧 연락하겠네."
윤한봉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으니 몸을 피하라고 한 후 헤어졌다.
이병철, 노금노 총무와 함께 서점으로 와서 서울로 확인을 하는데 모두 통화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저들이 사전에 차단시킨 것 같았다. 서울로 연락이 되지 않자 MBC로 전화를 했다.
"나는 전남대 복적생입니다. 지금 서울에서 학생들을 연행한다는 소리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전화 끊습니다."
다시 CBS로 전화를 해 상황을 물었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전화를 끊는다고만 했다.
"이 전화 끊겠습니다."
"아니, 송정민 기자 좀 바꿔주세요."
"사람 이름 대지 마세요."
가톨릭 노동청년회로 전화를 했다. 그곳의 아가씨는 좀 달랐다.
"잘 모르는데 그런다는 것 같데요."
이렇게 전화를 하다 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시청 앞에 있는 대주호텔로 밤 10시 30분쯤 전화를 했다.
"모든 게 사실이다. 아마 확대 계엄일 가능성이 있으니 이 전화가 도청된다고 생각하고 지금 즉시 피해라."
나는 이병철, 노금노 씨에게 학생회 회장단을 만나기 힘드니 내일 다시 만나 얘기를 하자고 했다. 그들이 밤 11시에 돌아가자 나는 서점의 셔터를 내렸다. 그리고 아내와 대책을 논의했으나 아내는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도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호주머니에 돈을 넣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거기 화순이에요?"
여자 목소리였다.
"아닌데요."
"알았습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있는지 확인전화를 한 것 같다. 걱정이 되었다. '통금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어디로 가지, 아내를 두고 가야 될까'라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누가 셔터문을 탕탕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그때가 11시 30분이었다. 나는 혹시 후배가 왔는가 싶어 문쪽으로 갔다. 셔터 눈높이만큼 올리니 서부경찰서 형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사람입니다."
"김상윤이지?"
동시에 사복을 입은 합수단 한 명이 내 목에 총을 들이댔다. 셔터문을 올렸다. 밖에는 지프차 한 대와 군인 두명이 서 있었다. 그대로 보안대 지하실로 연행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2시에 연행하기로 했는데 내가 셔터 문을 일찍 닫자 먼저 잡아간 것이다. 내가 연행되자 아내가 곳곳에 전화를 해 상당수가 피할 수 있었다.
집안 식구들이 모두 잡혀오고
보안대로 끌려갔으나 그들은 뭘 조사하겠다는 지침도 없이 나를 잡아오기만 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때리지도 않고 존칭어를 썼다. 나는 그들과 큰소리로 싸웠다.
"당신들 힘으로 막지 못할 거요. 학생들을 섣불리 보지 마시오."
한 12시 반쯤 되니까 옷을 벗기고 군화발로 찼다. 옆 방에서 누군가 맞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새벽 1시가 넘어서는 윤한봉, 박관현 등 그들이 붙잡지 못한 사람들의 거처를 불라고 했다. 나는 윤한봉 씨는 자취방에, 박관현은 대주호텔에 있다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부리나케 나갔다. 나를 지키던 사병들은 고생한다며 담배도 주었다.
그들이 나간 지 50분 후에 들어왔다. 대주호텔에서는 총학생회 간부들이 방금 전에 나갔다고 하니 내게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네의 힘이 커서 내가 사실대로 말하는 줄로 착각했다.
"왜 박관현이 있는 데를 말했냐?"
"우리가 잘못한 게 뭐가 있소. 나는 오히려 박관현이를 잡아야 학생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했소. 학생회장이 연행됐는데 학생들이 가만있겠소."
그곳에서는 별다른 지침이 없어 고작 50장 정도의 자술서만 썼다.
보안대에서 상무대로 넘어가기 직전에 형사 세 명과 끝이 날카로운 신발을 신은 중사 한 명에게 약 두 시간 정도를 맞았다. 그들은 "이 새끼 때문에 난리가 났다"며 담뱃불을 지지고 볼펜으로 찔렀다.
상무대로 이감된 후에는 항쟁 참여자들을 조사하느라고 나에 대해 별 조사를 하지 않았다. 예비검속자들은 상무대에 있으면서도 광주사태의 추이를 정확하게 몰랐다. 상무대 내의 수사관이나 군인들이 광주에 치안마비가 되어 강간과 강도가 득실거렸으며 폭도들이 난동을 부린다고 했다. 그런데 5월 21일쯤 14세 먹은 구두 직공이 들어왔다. 그는 얼마나 맞았는지 온 몸이 멍들어 있었다. 나는 그가 안쓰러웠다.
"너 그렇게 많이 맞았는데 아프지 않니?"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왜 들어왔니?"
"유동파출소 태워버렸습니다."
그는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 직공의 말을 듣고도 실감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몇 명 들어오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하다 잡힌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
27일 새벽 밖에서 잡혀온 사람들을 토끼뜀을 시키고 각방에 집어넣었다. 쳐다보니 김윤기, 이양현 등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 둘씩 보였다. 윤기처럼 보였지 확신은 없었다. 그런데 그 뒤에 동생 상집이가 들어왔다. 참담한 느낌이 들었다.
5월 28일 아침에 일어나니 모르는 사람이 옆에 누워 있었다. 모포를 들쳐 보니 정상용이 있었다. 어찌나 맞았는지 다리가 퉁퉁 부어 수통다리가 되어 있었다. 나는 너무나 놀라, "상용아!"하고 불렀다. 옆을 보니 정해직도 누워 있었다. 상용이는 내가 부르자 깨어 일어나 다리도 불편한데 간신히 무릎만 대고 내게 큰절을 했다.
"형님, 지고 와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해직이는 일어나자 마자 열을 내면서 그동안의 일을 얘기했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광주사태에 대해서 정확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그날 영창 안에서 근무하는 병장이 내게 달려왔다.
"김상윤 씨, 김상윤 씨!"
그는 새끼손가락을 치켜들며,
"당신 이것 들어와부렀소."
쳐다보니 아내와 처제가 들어와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한번은 조사를 받으러 가는데 박용성이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는 조사를 받으면서 나에 관한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얘기하지 마라고 손짓을 했다. 내가 손짓을 하자 용성이는 그 자리에서, "어, 어." 하고 뒤로 넘어지면서 미친 흉내를 냈다.
김대중 씨 자금관계로
수사관들이 정동년 씨가 김대중 씨에게서 5백만 원을 받았다고 조작했으나 자금의 사용처가 밝혀지지 않았다. 정동년 씨는 박관현, 윤한봉에게 건네줬다고 하고 나와 조선대생 김운기 씨에게는 주지 않은 걸로 했다.
그들은 누구를 수괴로 할 것인지 계속 고민하다가 정동년 선배를 수괴로 몬 것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별 도리 없이 홍남순 변호사가 수괴로 몰렸을 것이다.
6월말 학생회 간부들이 하나둘씩 잡혀왔다. 양강섭은 얼마나 맞았는지 소변도 못 볼 지경이었다. 그는 학생회장 선거시 나에게 선거자금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자금문제로 혈안이 되어 있던 그들에게 이는 좋은 미끼가 되었다.
나는 불려가 여섯 명에게 고문을 당했다. 상무대의 사병들이 먹다 남은 고춧가루 국물을 얼굴에 붓기 시작했다.
"니가 관현이에게 돈 주었지?"
"아니오."
"그럼 누구에게 주었냐?"
"양강섭에게 주었소."
그러더니 학생반을 담당한 과장이 소주와 오징어를 사가지고 와서 모두 얘기하라며 술을 먹였다. 그는 오늘 저녁에는 그냥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다음날 또 불려가 자금의 규모에 대해 계속 추궁을 받았다. 강섭이가 얼마를 받았다고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막막했다. 차라리 대질 심문해 주기를 바랐다. 명확하지 않은 돈을 쓰게 되면 그 불똥이 내게 튈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윤상원이 준 3만 원, 내가 개인적으로 교수들에게 빌린 35만 원, 내 돈 15만 원을 합해 총 53만 원을 양강섭에게 전해줬다고 했다.
그런데 김차갑 수사관이 15만 원을 김대중 씨에게서 받은 것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나를 몹시 괴롭혔다. 나는 견디다 못해 정동년에게 두 차례에 걸쳐 15만 원을 받았다고 허위 자백했다. 엄청난 고문과 허위 자백 속에서 돈의 출처가 둔갑한 것이다. 그 처참한 과정에서 신동엽 시인의 <금강>이라는 시에서 '먼저 간 사람은 행복하여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정말 죽고 싶었다.
또 조선대의 자금은 정동년 씨가 윤한봉에게, 윤한봉 씨가 김운기에게 전달한 것으로 조작을 했다. 김운기는 윤한봉에게 돈을 받았다고 하지 말고 김대중 씨에게 직접 받은 걸로 해달라고 했더니 수사관들은 '그건 각본에 없다'고 했다고 했다.
그즈음 나는 학생반에서 조사를 마치고 우리 집 식구와 함께 대공과로 넘어갔다. 그들은 이양현, 김영철, 윤상원 등을 국가보안법으로 묶어 광주가 이런 빨갱이들에 의해 파괴, 폭력, 난동이 일어났다고 조작하려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연결을 맡았으므로 나를 공산주의자로 몰면 그들이 조작한 시나리오를 엮기가 용이한 까닭에 나를 한 달 가량 조사하면서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할 것과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했음을 시인하라고 다그쳤다. 그때 쓴 진술서가 1500장 정도 되었다.
전라도 출신 수사관들 사이에서 "이제 사람들 그만 때리자. 그들이 뭔 죄가 있냐"는 분위기가 팽배해 수사비로 속옷과 과일 등을 사주었다. 나는 그들의 시나리오에 필요한 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보안대 소령인 대공과장과 이양현을 담당하는 강중사가 나를 많이 괴롭혔다.
나중에 송기숙 교수의 얘기를 들으니 보안대 모중령이 광주를 여순처럼 빨갱이의 폭동으로 규정하면 그 후유증이 너무 크고 정권유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빨갛게 물들이는 데 반대했다고 했다. 그래서 김대중씨 내란음모로 묶은 것이었다. 나는 내란임무 주요종사자가 되어 조사를 마치고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박흥숙이 죽는 것을 보고
그해 8월경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들어가는 첫날 누가 나를 불렀다.
"18방. 18방……."
나는 내방이 18방이라는 것도 몰랐기 때문에 그냥 있었다.
"아니 거 광주사태로 들어온 양반 아니오."
그래서 나를 부른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갔다.
"나 부르요."
"광주사태로 들어왔지라우."
"그렇소."
"나 박흥숙이오."
"아! 무등산 타잔."
"나를 아요?"
"알다마다."
"이름이 누구요?"
"나 김상윤이요."
"아! 상윤이 형이 들어오셨소."
"나를 어떻게 아요? 나는 당신을 잘 알지만."
"내가 왜 형을 몰라라우. 여기에 얼마나 많은 빵잡이들이 지나갔는데 내가 형님을 모르겄소. 형님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는 것도 알고 있소."
아마 밖에서 구명운동을 해주었던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반갑네."
이렇게 해서 박흥숙과 알고 지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1주일 전부터 말을 걸어도 흥숙이는 일체 대답하지 않았다. 흥숙은 사형수로서 거의 3년 가까이 감옥에 있었다. 사형수는 보통 선고받은 지 3년 안에 사형을 시킨다. 특히 8·15, 크리스마스, 석가탄신일 등 수감자들을 가석방시키는 날 사형을 집행하는 경우가 많다. 흥숙이는 12월 25일이 가까워지자 생사의 갈림길에서 떨고 있었다. 대개 사형수들은 재소자들이 입방을 하기 전에 사형장으로 데려간다. 그런데 12월 25일 재소자들의 입방이 끝나자 흥숙이가 나를 불렀다.
"형님."
"어디 아펐는가, 왜 통 말도 안하고 그랬는가?"
"아니라우."
흥숙이는 즐거운 듯 막 얘기를 했다. 이번 크리스마스를 넘겼으므로 사형수로서 3년을 넘겼으므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무척 들떠 있는 것 같았다 .
취침하기 얼마 전에 교무과 담당이 흥숙이를 찾아왔다. 주로 박흥숙을 괴롭힐 때는 보안과에서 오고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교무과 담당이었다. 항상 교무과 담당이 오면 흥숙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이를테면 외부에서 석방운동을 했거나 국내외에서 영치금이 들어오거나 편지 등을 전해 주었다. 그런데 그날 교무과에서 온 것이다. 박흥숙은 기쁜 소식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름을 부르자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나가자마자 문 뒤에 지키고 있던 교도관들이 양쪽에서 어깨를 잡고 그대로 사형장으로 끌고 갔다. 교도소측에서는 탈옥한 경험도 있고 또 무술이 상당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으므로 그를 사형시킬 방법을 계속 궁리했던 것이다. 입방을 시키지 않고 끌고 가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으므로 그를 일단 안심시킬 작전을 썼던 것이다. 그는 12월 25일 사형당했다. 그날 눈이 무척이나 많이 왔다. 그 다음날 흥숙이 어머니가 교도소에서 전신을 던져 절규하면서 나뒹굴었다.
1981년 4월 나는 대법원에서 20년을 선고받고 홍성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그들은 5·18 주요인물을 모두 분리시켰는데 정동년 씨는 안양교도소로, 나는 홍남순 변호사와 함께 홍성으로 간 것이다. 그곳에서 1981년 12월 24일 석방되었다.
5·18은 광주라는 지역성이 크다
5·18을 경험한 후 고민이 많았다. 5·18이라는 민중의 엄청난 폭발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고문에 견디지 못해 정동년 선배를 내란수괴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더불어 내 자신이 조직을 보위할 수 없다는 허탈감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후배 윤상원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그때 후배들 역시 패배주의 분위기에 젖어 술집에서 술이나 먹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을 하지 않는 실업자들이 많았다. 나는 후배들에게 생활상의 모범을 보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내 나이가 35세였으니 생활상의 문제가 절실하기도 했다. 곧바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의료기 판매사원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하심의료기상사를 운영하고 있다.
5·18을 보는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다. 혹자들은 5·18을 사태로 보는 것은 군부 파쇼와 동일한 시각이고 민주화 운동이라고 보는 것은 자유주의자의 시각이다고 본다. 그리고 민중항쟁이라고 했을 때 항쟁은 공격적인 것에 대한 수세적인 저항의 논리이고 무장봉기라는 시각은 노동자 계급이 권력탈취를 위해 전면적으로 무장했다고 본다. 어느 시각이 정확한지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확실해져야 5·18에 대한 자료를 수집할 때도 관점이 생기리라 본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힘찬 첫 주일 맞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