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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물비늘
“개천절을 부활시킨 홍암 나철 선생을 아시나요?”
전남 보성군은 2015년까지 애국지사 홍암 나철 선생(1863∼1916·사진)의 고향인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용지 2만4684m²에 생가, 사당, 기념관 등을 건립할 계획이라고 11일 밝혔다. 기념관은 나철 선생 서거 100주기를 맞는 2016년 역사교육, 문화공간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기념관 건립사업은 2006년부터 추진됐으나 국비 10억여 원을 제외한 나머지 60억여 원이 군비로 추진돼 늦어지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일본 중국의 역사 왜곡이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나철 선생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국어사랑은 후손들에게 역사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본다.
나철 선생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우국적 행보와 항일투쟁, 국어와 국사 등 민족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와 영향이 지대해 항일독립운동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가 주도한 단군정신의 부흥운동은 근현대사에 단군 신드롬을 일으킴으로써 민족의 정체성 확인 근거를 마련해 줬고 일제하에서 항일운동의 정신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1. 항일 무장투쟁의 정신적구심점은 나철의 대종교!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아무도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흘린 피 덕분에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그들의 희생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진실이 밝혀집니다."
한국 최초의 백두산 사진 원판이 발견되었다.
"옛날 동판인데요. 인쇄판 하나 만듭시다."
수소문 끝에 인화가 가능하다는 인쇄소 한 곳을 찾았다.
꾸러미 속에서는 한 남자의 사진과 백두산 천지를 담은 동판이 나왔다.
100여 년전 천지의 풍광이 선명하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에서 찍은 사진은 처음이라는 것이죠.
지금 사진들을 보면 전부 천지를 중심으로 찍었거든요.
웅장함 보다는 정경을 찍으려고 하다 보니까 평평한 백두산이 되는데
이것로 보면 오히려 훨씬 더 웅장하게 보이죠."
사진의 구도와 촬영 연도에 대해 전문가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만약 1910년대에 사진이 찍혔다고 한다면
한국 사람으로선 처음으로 백두산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1921년 동아일보에서 찍은 사진보다
10여 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이 백두산 사진 자체가 지금까지 봐 왔던 사진들과 전혀 다른 구도라는 것이죠.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이 사진을 찍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백두산 동판의 출처는 이 사진의 주인공 나철.
그는 어떤 특별한 의미에서 백두산을 촬영했던 것일까?
1920년 청산리 전투를 다루었던 영화의 한 장면.
일본인 사상자만 2천 명에 달하는 이 전투의 지휘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김좌진 장군.
"그동안 7개월에 걸쳐 블라디보스톡에서 무기 구입에 전력투구 하신
우리 군정서 총재각하를 이 자리에 모시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김좌진 장군보다 높은 서열인 총재각하가 등장한다.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이 사람이 북로군정서의 총재 서일,
그의 초상화 앞에서 김좌진이 수련하는 모습도 그려진다.
"아!~왜 그러냐면 그 당시 김좌진 장군의 부대에 서일이 최고 지도부였어요.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라는 종교가 있죠?
거기에 최고지도부 총재였으니까요."
- 이장호 영화감독
영화에 바탕이 된 이우석의 증언일지.
그 속에는 북로군정서가 대종교 정신으로 무장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920년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봉오동 전투에 승첩을 이어서,
그 해 시월에 백두산 근처에서 청산리 전투가 한 십여 일 벌어졌는데 그 때 총지휘관이 김좌진 장군입니다.
그리고 1933년에 동방 대전자령이라고 하는 나자부 부근 산령에서 대전자령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전투의 지휘관은 지청천이라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세 분들이 다 대종교의 중견 인물들입니다."
- 윤병석,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대종교의 항일 운동사에 있어서 전체적인 위상은
만주지역 전체 항일무장투쟁을 대표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면 만주지역에 가장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북로군정서라든가 신민부, 한국독립당이 모두 대종교 단체였습니다."
- 박환 교수, 수원대학교 사학과
만주에서 활동한 독립군 대부분이 대종교도였다는 총격적인 증언!
이름조차 낯선 이 종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이 모셨다는 초상화 속 주인공 나철.
그는 대종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의문의 실마리를 풀 문서 하나가 발견되었다.
일본 외무부성 자료보관실.
1942년 만주 종교 관련 문서속에 대종교에 관한 언급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외무성은
대종교가 종교가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위한 단체라고 규정짓는다.
어떤 이유에서 이런 정의가 내려졌던 것일까?
서울 홍은동의 대종교의 총본사.
대종교는
우리 민족의 선조 단군을 섬기는 고유의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1909년 나철에 의해
이 신앙이 민족 종교로 부활된 것이다.
"단군조선부터 부여, 고구려, 백제 이 때에도 민족종교가 다 있었습니다.
이 민족종교가 단절된 것은 고려 원종 때 몽고의 침략 이후 입니다.
이것을 다시 연결시키는 것을 '중광'이라고 합니다.
- 박영석, 前 국사편찬위원장
1909년
나철과 이기, 유근 등 16명으로 구성된 대종교는
그후 급속히 번져 나갔다.
서일,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이범석을 비롯한 무장독립운동세력과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과 같은 민족사학자들과
한글문화운동을 일으킨 주시경, 지석영, 김두봉,
그리고 민족지도자 이시영, 신규식, 안재홍, 이동녕 같은 인물들이
모두 대종교 사상을 바탕으로 활동했다.
"대종교 정신에 의해 움직이는 핵심 멤버들이 상당히 많은데
먼저 핵심적인 사람들을 본다면
김두봉, 최현배, 이윤재, 이병기, 정인보, 안재홍 등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 김동환 연구위원, 국학연구소
"그 당시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대부분이 대종교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동녕이나 신규식, 조완구, 이시영 이런 분들도 들 수 있고,
홍범도라든지 이상설, 서일 등 많은 사람들이 대종교를 믿었던 것으로 보아도
대종교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고 하겠습니다."
- 이동언 책임연구원, 독립기념관
2. 나철은 왜 대종교를 만들었는가?
민족정신의 부활!~그리고 자주독립을 위해!~
1907년 3월 20일.
공화문 거리에 한 발의 총성이 들렸다.
조선총독부 기밀 서류에는
'을사오적 암살 미수 사건'이라고 적고 있다.
사건 당일 오전 10시 군부대신 권중현은 국사를 위해 입궐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 때 권중현을 향해 날아온 총알.
그의 목숨을 노리던 무리들은 일본 경찰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협조했던 이완용, 권중현,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은
이른바 '을사5적'으로 민족의 반역자였다.
"우선 국내문제부터 처리해야겠다고 해서 먼저 '자신회'라는 조직을 동지들과 함께 조직합니다.
우선은 을사5적을 처단해야겠다 하여 실행에 옮기시게 됩니다."
- 이동언 책임연구원
최초의 을사5적 암살 기도 사건.
결사대원 18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그 주모자는 나인영이었다.
나인영은 바로 나철의 본명.
그는 결사를 위해 '자신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치밀한 계획하에 그가 대원들에게 나눠준 것은 일종의 살인허가증.
'참간장(斬奸壯)'
'매국노를 죽이는 것은 하늘의 뜻이기에 살인을 허가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의 암살 계획에 동원된 인원만 250여 명.
'의거를 위해 모금한 사례를 포함하여
객주상과 농민, 부녀자들이 신분을 초월하여 참가했다'고 적혀 있다.
"그 당시에 규합된 동지들을 보면 호남 뿐만 아니라 경상도, 충청도,
지역을 초월해서 전 국민들이 참여한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 이동언 책임연구원
재판에 회부된 나철은 10년형을 선고받고 유배에 처해졌다.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이 사건은 이후 항일의열활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최초의 테러리스트였던 나철.
그의 어떤 면이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나철의 고향은 전남 벌교 금곡마을.
후손이 간직한 그의 유품속에는 그의 경력을 말해주는 서류가 있었다.
나철이 친필로 쓴 이력서.
'단기 4224(1891)년 10월 응제 참감시 문과 급제.
단기 4224(1891)년 12월 승정원 가주서 사관.
단기 4226(1893)년 3월 고종으로부터 말을 하사 받음.
단기 4226(1893)년 10월 승문원 부정자.
단기 4228(1895)년 5월 징세서장 임명을 고사.
그는 고종 때인 1891년 정7품인 승정원 가주서에 합격했다.
그리고 2년 가까이 관직생활을 했고
다시 징세서장에 임명 되었지만 고사하고 낙향했다.
나철의 유품 중 특이한 것은 이 명함.
가난한 하급관리에 불과했던 그에게 왜 영문 명함이 필요했을까?
일본 외무성 사료관.
최근 발견된 문서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1908년 일본 외무성의 요시찰 외국인 기밀문서 보고서.
을급 비밀 제1257호에 보면 그 해 11월 24일,
나철과 그의 동료 이기, 홍필주, 오기호들이 일본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후 두 달에 걸친 나철 일행의 일본 방문 행적은
몇 원, 몇 전의 과자와 옷을 샀다는 기록까지 일본 밀정에 의해 낱낱이 보고되었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접촉한 일본 정치인들에 대한 기록이다.
나철은 일본 우익의 거두이자 흑룡회 간부였던 우치다 료헤이를 비롯해
마츠무라 류노스케, 오카모토 류노스케, 토야마 미츠루 등을 만났다.
"도야마 미쯔루는 19세기말 큐슈의 지사들을 모아놓고
'현양사'라는 최초의 무력단체를 만든 거물급 정치가입니다.
그는 무력의 일인자인 인물이고
일본 정계에서도 큰 발언권을 가진 실력가였습니다."
- 삿사 미츠야기 박사, 게이오 대학교
"아시아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도야마는 매우 관심을 갖고 있어서
손문의 활동이나 인도와 아프카니스탄의 독립 등 망명자나 아시아의 독립운동을 중요시했습니다."
- 다케유키 다나카, 다쿠쇼쿠대학교 연구원
일본 도쿄의 태영관.
일본 방문 당시 나철이 묵었던 여관이다.
그가 이곳에 장기간 머무르며 만났던 인물들은
이토오 히로부미와는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나철은 이 세력을 통해 얻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나철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과 한국인들의 재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을 촉구했다.
한편 일본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나철의 일행 정3품 정훈모는 동양척식회사의 이사가 되려는 로비에만 몰두했으며
그후 그는 나철과 갈라서 친일로 갈라섰다.
"정훈모는 동양척식회사의 이사가 되려고 운동 중이며,
그 목적을 위해 잠시 동경에 머물 것이라고 한다."
- 을비 제1439호(1908년 12월 3일)'
결국 나철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은
일진회의 방해 공작으로 좌절을 맞는다.
"나인영의 뜻에 반대하는 일진회는
나인영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소문을 퍼뜨려
세상 사람들이 나인영의 진의를 오해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나철 선생의 민간 외교 항쟁이죠.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가장 실질적이고 가장 적극적인 외교 항쟁을 택하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후 나철 선생님은 이 민간 외교 항쟁에 한계를 느끼시고
방향의 전환을 하시게 되시지요."
- 이동언 책임연구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 팽창 정책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미 조선은 일본에게 지배의 대상이었지 동등한 외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보다 자주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국운이 쇠퇴하던 이 시기에 나철이 주목한 것은 민족정신의 부활이었다.
1909년 음력 1월 15일.
나철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동료들과 대종교를 중광(重光)한다.
이 때 발표한 포명서에는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우리 민족정신을 통해 지켜나갈 것을 천명하고 있다.
"또 우리 민족을 죽었는데 다시 소생시키고,
나라를 잃었는데 다시 찾게 하는 근본 중심, 핵심 동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그것을 민족 정신 대종교에서 찾아야 한다,
조국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 역사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이런 것이 결집된 것입니다."
- 윤병석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의 재발견,
바로 단군을 쟁점으로 해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한 메세지를 바로 나철이 전했던 것입니다.
이런 나철의 민족의 재발견은
당시 지식인 사회, 특히 방황하는 지식인 사회에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일대의 대사건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박환 교수, 수원대 사학과
3. 언론, 서적 간행 등을 통한 대종교의 민족의식 고취!~
각계에서 이어지는 민족독립운동들!~
중광 이후 나철의 행적을 알려주는 중요한 문서 하나가 발견되었다.
1911년 나철이 장지연에게 보낸 편지 한 통.
장지연은 을사늑약 체결후 그 분노와 억압을 '시일야 방성대곡'이라는 논설로 폭로한 언론인이었다.
그에게 보낸 편지속에 그의 명함과 함께 북간도에서 보내는 또 다른 편지글이 있었다.
바로 중국 만주 길림성에 대종교 시교당 제1호를 세웠다는 공문이었다.
또 이 사실을 장지연이 주필로 근무하는
경남일보에 실어달라며 현금까지 동봉해 보냈다.
비밀스런 문건을 주고받은 나철과 장지연은 어떤 관계였을까?
"유근 선생님이 대종교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또한 두 분이 사돈 관계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위암 장지연 선생이 대종교에 관여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 장재수 장지연 증손자
나철과 유근, 그리고 장지연.
이들은 1907년부터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유대를 다져오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유근은 대종교의 핵심 멤버로 참여했고
장지연 또한 마찬가지였다.
봉투에 표시한 '인체(人?)'라고 하는 표현이 그것이었다.
"인체라고 하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귀하'라는 칭호인데
편지 서신을 왕래할 때 대종 교우들 끼리는 꼭 '인체'라는 말을 썼지요."
- 우원상 선도사, 대종교
나철이 보낸 편지에는 백두산과 단군 관련 유적지 목록도 있었다.
나철은 당시 첨단 매체인 사진과 언론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것이다.
한편 나철은 일제의 눈을 피해
백두산과 만주 일대를 답사를 다니며 대종교의 활동을 펼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백두산 바로 아래 마을인 만주 화룡현 청파호.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호마을.
지금도 마을 주민 대부분이 조선족인 이 마을에는
대종교 관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실제 나철이라는 분이 여기 와서 학교를 건립할 때 대종교를 전파하면서
우리 민족을 독립하겠다는 사상을 불러일으킨 곳입니다."
- 이경식 현지 주민
"역사이야기를 하면 조선 초기의 우수한 역사를 이야기하거든.
그게 참 듣기 좋지요.
그 때 저희들은 모르니까 매일밤 가서 들었죠. 그 이야기가 상당히 구수하고 재밌었죠.
뭐 이런 걸 통해서 대종교가 민중들한테 민족의식을 심어준 거 같아요."
- 박창욱 교수, 연변대학교
대종교의 역사교육은 서적 간행으로 이어졌다.
대종교 2대 교주 김교헌과 <신단실기(神檀實記)>
대표적인 것이 <신단실기(神檀實記)>로,
단군왕검을 포함한 고대사를 중심으로 저술한 역사책이었다.
그 당시 그들이 불렀던 애국가에도
고대사에 대한 그들의 자긍심과
만주를 포함한 우리 영토에 대한 주권의식이 강하게 드러났다.
대종교의 이러한 사상은 신채호와 박은식의 국학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사의 기틀이 된 박은식의 한국통사,
단군조선과 발해사를 우리 민족사로 끌어안았으며,
조선상고사의 신채호는
나라가 망해도 '국혼'의 개념을 강조했다.
이들의 기저에는 대종교 2대 교주였던 김교헌의 역사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분들은 당시에 최고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한자 실력부터 해서 최고의 지식인들이었고
무엇보다 강점이 있었는데 그분들은 현장을 직접 본 것이죠.
당시 조선, 우리가 말하는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 유물, 유적을 직접 보고 기술한 분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그 이후의 일제와 관련된 강단사학자들보다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윤명철 교수, 동국대 사학과
"대종교에서는 역사책을 편찬했는데
대종교에서 편찬한 신단민사라든지, 신군실기 같은 이런 책들은,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다 한 권씩 그 책을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 서광일 교수, 한신대 국사학과
"만주로 이동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
이분은 우리 민족사 투쟁사 중에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모범이시고 으뜸이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1920년대 계속 해서 우리 대종교 신도로서
많은 우리 동포들을 교화하는데 앞장섰고 독립투쟁에 참여하게 한 것,
역사가인 박은식 선생조차 대종교 교인이었다고 하는 것은
대종교가 우리에게 얼마나 깊은 의미를 주는 종교였는가를 다시 깨우치게 합니다."
- 조정래 소설가
대종교의 역사의식과 사상은 만주의 타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대표적인 기독교 학교인 명동학교.
시인 윤동주와 문익환, 문동환 목사의 모교로도 유명한 곳이다.
"'일본(日本)'이란 말쓰기 싫어서 '왈본(曰本)'이라고 했다잖아요.
일본이라는 말을 발로 꽉 눌러 놓으면 왈자가 되니까요."
- 박용길 장로, 고 문익환 목사 부인
문익환 목사의 동생인 문동환 목사는 아직도 명동학교의 교가를 기억하고 있다.
"흰 뫼가 우뚝코 은택이 호대한
한배검이 깃치신 이 터에
그 씨와 크신 뜻
넓히고 기르는 나의 명동"
"많이 불렀죠 이 노래들은.
명동학교 단군 기일에는 언제나 축제를 벌였죠. .
교가에도 단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사실 단군절을 기념일로 하는 것은 은신중학교에서도 지켰어요.
일제가 들어온 다음에도요."
- 문동환 목사
"그가 이끌었던 그 학교의 교실에는 단군초상이 다 걸렸습니다.
또 예배당에도 십자기와 단군기를 같이 놓고 예배를 봤다라는 기록도 나옵니다."
- 서광일 교수, 한신대
문재린, 김신묵 부부.
문재린 목사 회고록.
만주에서 열렸던 문목사 부모님의 결혼식은 또 하나의 예다.
신랑과 신부가
대종교에 신성한 색으로 상징되는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고 예식을 올렸다고 한다.
"거기는 뭐 단군의 아들 딸들이 결혼을 했으니까
을지문덕, 이순신 같은 아들을 낳아라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그래요."
- 문영금, 고 문익환 목사의 딸
"모든 종교를 포함해서
그들이 또 하나의 더 높은 이념에 한 민족이었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
또 이민족인 중국인의 지배속에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태워주는
가장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종교가 대종교였습니다."
- 서광일 교수, 한신대
종교를 넘어 하나의 민족의 이념이 된
대종교 사상은 만주에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결국 나철은 체계적인 관할을 위해 포교지역을
네 개로 나누고 책임자를 파견했다.
북도본사는 이상설과 이시영,
동도본사는 만주 무장항쟁을 실질적으로 이끈 서일,
남도본사는 동아일보와 함께 백두산 성산운동을 펼친 강우,
그리고 서도본사는 신규식과 이동녕이 이끌게 되었다.
4. 일제의 탄압과 나철의 자살!~
'무오독립선언(1918)'과 이어지는 항일무장투쟁들!~
대종교의 교세에 당황한 일제는 칼날을 뽑아들었다.
그 시작은 종교 통제.
1915년 총독부에서는 모든 종교의 신고를 명령했다.
그리고 무속까지 종교로 인정했지만
대종교는 포교를 금지 당했다.
"제1조 본령에서 종교란 신도(神道), 불도(佛道), 기독교를 말한다."
- 조선 총독부령 제 83호
"일본인들이 이건 종교가 아니다, 반일조직이다, 그러면서 포교를 금지했지요."
- 박창욱 교수, 연변대
"타 민족종교단체들이 유사종교단체로 분류된 것에 비해,
대종교는 민족주의자들의 소굴,
소위 일본어로 말하자면 후테이센징(불령한 조선인)들의 아지트이고,
이를 유사종교단체로서 인정한다는 것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철저히 탄압을 가하기 위해
유사종교단체로서의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 삿사 미츠야키 박사, 게이오대학교
포교금지령이 내려지고 일제의 탄압이 진행되자
절망적인 상황에서 나철이 찾은 것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매년 국가에서 단군제일을 담당했던 곳이었다.
후에 북한의 부주석이 된 김두봉이 나철의 수행제자로 따라나섰다.
1916년 8월 15일.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대종교의 스승 나철.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대종교를 위해
나라를 위해
그리고 세계를 위해
암흑의 시대에 대한 죽음의 항거였다.
공고교도문(恭告敎徒文)
위태롭기가 불로 뛰어드는 나방이나
우물로 추락하는 아이와 같다.
사람의 피와 살이 뚝뚝 떨어지고
산하는 유리쪽으로 부서졌으며
모래먼지가 비바람에 날린다.
날은 저물고 길은 궁한데
사람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지만 나철의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1918년 무오년.
3.1독립운동보다 한 해 앞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무오독립선언문(대한독립선언서).
"무오독립선언이라고 하는 것이 1918년,
국내 3.1독립운동에 앞서서,
동경에 2.8독립선언보다도 앞섰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1919년보다 앞서 무오년(1918년)에 발표되었다는 자체가 의의를 갖지요."
- 오세창 교수, 영남대 사학과
기미년에 앞서 무오년에 만주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
우리에겐 생소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
1. 일본의 합방 동기는 그들의 소위 범일본주의를 아시아에서 실행함이니, 이는 동아시아의 적이요,
2. 일본의 합방 수단은 사기강박과 불법무도와 무력폭행을 구비하였으니, 이는 국제법규의 악마이며,
3. 일본의 합병 결과는 군경의 야만적 힘과 경제의 압박으로 종족을 마멸하며,
종교를 억압하고 핍박하며, 교육을 제한하여 세계 문화를 저지하고 장애하였으니 이는 인류의 적이라,
.............................
건국기원 4252년 2월 일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김약연(金躍淵) 김좌진(金佐鎭)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범윤(李範允) 이상룡(李相龍) 이승만(李承晩) 이시영(李始榮)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翼) 신채호(申采浩) 안정근(安定根) 안창호(安昌浩) 윤세복(尹世復)
하지만 1949년 대한민국 공보처 발행한 <무오독립운동사>나
일제가 만든 조선근현대사연표 등 여러 사료에는
분명하게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 반포'라고 그 연도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만주에서 '독립선언' 하면 전부 '무오독립선언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미년이 아닌 무오년이다,
옛사람들이 간지에 대해선 정확하거든요.
틀림없이 기미년이 아닌, 무오년 1918년에 발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오세창 교수, 영남대 사학과
"무오독립선언서를 중광단선언서라고 하는데
그것을 발표한 게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해요.
그걸 이루는데 대종교의 교인이 제일 많았습니다."
-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
무오독립선언에는 서명자 39명 중 25명의 대종교인이 참여했다.
이들 대부분은 대종교의 핵심인물들이었다.
"국내에서 발표된 3.1독립선언에는 전투적인 것은 비교적 빠져있습니다.
무오독립선언은 아주 전투적으로 되어 있지요."
- 오세창 교수, 영남대 사학과
2천만 동포들이 총궐기하여
육탄공격으로 독립을 완성하자는 소리는 곧 무장항쟁으로 이어졌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봉오동 전투를 시작으로,
그 해 10월 벌어진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는 일본인 사상자가 3천 명에 이르는 대승리였다.
그리고 1933년 7월 지청천의 대전자령 전투까지
'일제하 3대 대첩'을 비롯해 무장투쟁이 봇물처럼 일어났고
이를 이끈 지도자와 대원들은 대부분 대종교인이었다.
1920년 6월 4일 봉오동 전투
- 중국 길림성 화룡현 봉오동 일본군 전사 157명
1920년 10월 20일~22일 청산리 전투
-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일대 가노 19사단 3,300명 사상
1933년 7월 1일 대전자령 전투
- 중국 흑룡강성 대전자령 일본군 1개 연대 사상
"나라를 되찾고 민족이 다시 살겠다는 것이니까
애국지사는 물론 애국지사가 아니더라도 한국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일본에 빌붙어 사는 몇 사람의 친일파가 아닌 대부분의 대종교인들은
이것을 민족을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봤고,
그러니까 모든 것을 바치고 대종교에 귀의하는 그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지요."
- 윤병석, 매헌연구원 원장
"1910년대부터 1940년대 우리가 해방될 때까지 가장 강력한 독립운동세력,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독립세력은 대종교가 이끌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박 환 교수
특히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 3개 사단 만여 명 정규군과의 대결이었다.
이 전투의 승리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대한민국 군대가, 임시정부 군대가 일본의 정규군을 격파했다고 하는 데서
한국민의 자긍심,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야 됩니다."
-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 전 건국대 사학과 교수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본을 자극했다.
일제는 군인들을 만주로 집결시키고,
전투가 있었던 청산리 마을부터 불태웠다.
민간인들까지 학살한 대대적인 보복이었다.
1920년 간도참변.
1921 자유시참변.
"왜 마을을 불태웠는가?
독립군이 지나갔다는 거지.
학교도 그렇고 예배당도 그렇고 다 불태우고 죽였지요."
- 박창욱 교수 연변대
5. 상해 임시정부의 요원들도 대부분 대종교인!~
개천절을 국경일로 삼았다!~
일제는 무력 진압과 함께 아예 대종교 세력의 싹을 제거하려 한다.
1925년 일제와 중국 만주의 군벌 장작림 세력이 맺은 삼시협정.
이 협약에는 대종교가 강제 해산시켜야 할 불량 단체로 명시되어 있다.
삼시협정(1925년 6월 11일)
- 중국 관헌은 재만 한인이 무기를 휴대하거나 한국에 침입하는 것을 엄금할 것.
- 불령선인 단체를 해산하고 그 무장을 해제할 것.
- 불령선인 단체의 수령을 체포하여 일본 관헌에게 인도할 것.
"대종교 운동가들이 가장 강력한 반일 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에
일본에게는 가장 골치 아픈 존재였습니다."
- 삿시 미츠야키 박사, 게이오 대학교
"만주탄압작전 속에서
특히 대종교를 합법적으로 포교 금지시키기 위해
만주 장작림 정권과 삼시협정을 맺게 되지요.
거기서 특히 서일을 중심으로 한 대종교 독립군 집단을
낙인을 찍고 강제 해산, 강제 이동을 요구하는 협정을 맺게 됩니다."
- 김동환 소장, 국학연구소
이것을 해결한 사람이 남파 박찬익,
그는 외교적 노력으로 삼시협정을 풀었다.
"대종교가 다시 활동할 수 있도록
1933년 박찬익 임시정부의 유명한 남파 박찬익 선생의 노력에 의해서
군벌의 허락을 받아가지고 맥을 살려냈습니다."
- 박영석
어떻게 박찬익이라는 한 개인이 만주 군벌의 정책을 좌우할 수 있었을까?
그의 영결식에 참여한 이승만, 이시영, 김구, 조완구 같은 인물들을 통해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외교에 있어서도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박찬익은 중국 임시정부의 밀사 자격으로 삼시협정을 해결했던 것이다.
임시정부가 대종교를 도운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94년 상해 임시정부의 5인의 유해봉안식.
헌사를 바친 이는 뜻밖에도 대종교 간부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현 5위 제전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 상해 임정5인 유해봉안식, 국립묘지 1994년
"다섯 분의 선생님은 망령의 땅 만주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잃은 그 까닭이
나라의 혼을 상실한 것임을 통곡하신 후에 국혼을 세우시기로 하셨습니다.
단군 성조 이래 5천 년을 내려온......"
- 김선적 전 대종교 종무원장
상해 임시정부와 대종교의 인연은 신규식 선생에게서 비롯되었다.
나철과 의형제였으며 대종교의 서도본사 책임자였던 그는
1911년 상해로 건너가 동제사를 세웠다.
이곳에서 정치, 외교적인 인맥을 쌓으며
상해 임시정부의 발판을 마련했다.
"상해로 건너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 발판을 잡을 수 있도록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 신규식 선생님입니다.
신규식 선생은 1911년 건너가서 1912년 동제사를 결성하시고
동제사를 통해 중국의 수많은 혁명동지들과 교분을 쌓습니다."
- 김동환 연구위원
신규식은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한 중국의 외교통이었다.
특히 손문과의 친분은 상해 임정이 중국의 허가를 얻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손중산과 신규식은 대한민국의 독립에 있어 매우 의견이 일치하였습니다.
즉 신규식과 혁명당은 협력하는 관계임을 알 수 있고
손중산과 신규식이 서로를 의지하고 믿었던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석원화 교수, 상해 푸단대학교
상해 임시정부는 각지에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던 단체들을 불러모았다.
그 중에서도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대종교 인맥이었다.
1921년 제2회 상해 임시의정원 위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다.
이동녕을 비롯, 이시영, 김구, 조완구, 조성환, 차이석, 송병조 등도 그 핵심 인물이었다.
대종교 정신을 기반으로 움직였던 임정.
단군 관련 기념일을 국경일로 지켰다.
당시 발행된 독립신문에는 임시정부의 개천절과 오천절이 나온다.
기념식에는 이승만과 안창호 같은 타 종교 세력들도 참여하는 민족 축제의 성격을 지녔다.
"대종교 중광일이라든지, 단군이 돌아가신 날을 오천일이라고 해요.
그런 날은 임시정부의 국경일로 경축행사를 했어요.
기독교에 철저했던 이승만과 안창호 같은 사람도 헌사를 바치고 했어요."
- 윤병석 원장
6. 멈추지 않는 일제의 탄압, 민족말살정책!~
1942년 '임오교변'과 '조선어학회 사건'!~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시작으로 일제의 식민 정책은 극으로 치달았다.
징병과 신사참배, 창씨개명 속에 항일 민족세력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이 시기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려던 한글 운동가들의 수난이 이어졌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안재홍 같은 인물들이 옥고를 치루었다.
이들이 연루된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1942 조선어학회 사건 - 일제 최후판결문 발견
1942년 8월 함흥 영생여고 여학생의 일기장이 빌미가 되어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단체로 검거되었다.
공판에 회부된 13명 중 이윤재와 한징은 옥사하고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등
나머지 11명은 6년에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세간에 알려진 사실과 다르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당시 대종교 교주였던 윤세복 선생의 연락 편지와 연관이 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윤세복 선생이 단군성가라는 노래 가사를 이극로에게 보내어 작곡을 의뢰하는데
그 단군성가가 이극로 책상위에서 발견이 되는 결정적인 빌미를 잡아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죠."
- 김동환 연구위원
당시 변호사이며 조선어학회 사건의 직접 연루자인 이인.
그의 책 <반세기의 증언>에는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제에 빌미가 된 것은 이극로의 책상에서 발견된 한 통의 편지,
나철의 제자로 대종교의 3대 교주인 윤세복이 단군성가의 작곡을 의뢰하기 위해 보낸 것이다.
왜 윤세복은 멀리 떨어진 이극로에게 이런 일을 의뢰했을까?
이 둘의 관계는 몇 장의 사진과 재판기록문 예심종결서를 통해 드러난다.
조선어학회 초대이사장인 지낸 이극로 역시 대종교인으로
윤세복의 감화를 받아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조선어학회를 세웠다.
도대체 조선어학회와 대종교는 어떤 관계인가?
"이인 선생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대종교가 조선어학회의 국내 비밀결사였다는 단정도 큰 무리가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됩니다."
- 김동환
그로부터 한 달후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대종교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임오교변'이라 불리는 이 사건 역시 이극로와 연관되어 있었다.
천진전 건립을 위해 이극로가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 중
"일어나라 움직이라! 한배검이 도우신다"라는 문구를
일제는 조선 독립을 촉구하는 문구로 보았던 것이다.
"일제가 1942년도에
조선어학회 사건과 대종교의 임오교변을 2개월 사이로 일으키는데,
그것은 일제의 조선민족말살정책에 가장 장애가 되는 두 요소,
정신과 언어로 본거죠."
- 김동환
일제는 한글운동을 독립운동과 같은 선상에 놓고 탄압했다.
그 이유는 한글운동의 선구자 주시경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는 조선시대 '암글' '언문'이라고 천대받던 우리글에
처음으로 '한글'이라는 이름을 붙인 학자였다.
주시경은 그의 책에서 한글의 발생 자체가 단군의 강림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이런 사상은 홍암 나철의 대종교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조선어학회 역시 주시경의 사상을 계승했다.
"조선어학회의 정신적 배경은 주시경 선생이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조선어학회 성립이 주시경 선생 제자들로 구성되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 김동환
배재학당.
기독교학교에서 세례까지 받았던 주시경,
그러나 그는 기독교를 버리고 대종교로 귀의했다.
주시경 전서.
그의 전기에는 그 이유가 나타나 있다.
외국의 종교를 신봉하는 것 또한 그에게는 정신적 침략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주시경 선생이 1910년 4월 <국어문법>이라는 저술을 냅니다만
선생은 그 글에서 한국어의 발생이 단군의 강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 김동환
"'한글'이라는 운동이
대개 대종교도들에 의해 일어난 것입니다.
주시경 선생의 한글운동이나,
이극로 선생의 운동도 모두 대종교에 연원하고 있습니다."
- 서광일 교수
실제 한글운동을 이끈 인물들은 대부분 대종교에 입교한 교인들이었다.
주시경을 비롯해 이극로, 이병기, 지석영 등이 있었고 안재홍도 그 중 하나였다.
한글과 국학자, 그리고 정치가로 명망 높았던 안재홍 역시 대종교 교인으로
매일 아침 단군께 경배를 올리면서 남북통일을 기원했다.
"남편은 대종교를 믿는데
매일 아침 경배할 때 남북통일을 염원했다."
조선사연구 등을 집필하며 한글과 국학운동을 이끌었던 위당 정인보.
조선얼과 홍익인간을 중심으로 한 그의 사상 역시 대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대종교에 대해 가끔 말씀하셨어요.
6.25사변 전에 대종교회에 늘 나가시고, 나철선생에 대한 말씀 많이 들었어요.
정치의 근간을 어디에 두느냐, 그것을 단군사상,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존재이고
그 실존함은 신화 속에 다 흐르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사상이 될 것이다 하셨습니다. "
-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 관장
대표적인 한글학자 최현배.
그는 <민족 갱생의 원리>와 <나라사랑의 길>에서
우리나라의 이상적인 길로 단군의 한배나라를 실현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우리 민족 고유의 대종교가 지향하고자 하는 삶의 가치를
최현배 선생은 한배나라라고 하여
우리 민족이 가야 할 방향으로 설정하고 활동하신 인물입니다."
- 김동환 연구위원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은 그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중국 점령과 함께 만주에 괴뢰국을 세운 일제.
동북아 전체를 하나로 넣으려는 진군을 계속 했다.
같은 시기 만주의 대종교 세력은 일제와 대응할 기회를 다지고 있었다.
그 중심 기지는 현재 중국의 동경성.
대종교 총본산을 이곳으로 옮기고 발해농장을 건설했다.
발해농장은 쌀 3천 가마니를 생산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땅을 개간하고 둑을 쌓는 대공사가 이루어졌다.
"이 발해농장은 명칭에서 보듯이
외형상으로는 땅을 개간하고 농사 짓는 경제활동을 하는 농장으로 보입니다만,
많은 자료, 특히 사진자료가 남아있습니다만
독립군을 양성하는 독립군기지였다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 이동언 책임연구원, 독립기념관
장총을 든 보초병, 그리고 권총을 들고 있는 중국인 농장관리인,
발해농장은 독립군 양성소와 같았다.
이 은밀한 계획을 세운 이는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과 안희제였다.
중외일보 사장직을 맡고 있던 부산의 거부였던
백산 안희제는 자금조달과 교육을 담당했다.
그는 이곳에서 발해학교를 세우고 독립투사들을 길러냈다.
"이곳입니다. 발해학교입니다. 안희재 선생이 지었죠."
이곳에서는 학생들이 고구려 군가를 부르고 우리 역사를 배웠다.
"역으로 본다면 일반 종교단체와 같이 대종교 경전을 만들고 배우게 했지만
속 내용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철저히 독립운동,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한 겁니다."
- 윤병석
"당시에 북만지역에서 대종교 세력이 상당히 커져 갔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그 당시에 주목했던 것을 세 가지 사항으로 열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동경성 내에 있는 대종교의 삼일학원의 민족교육,
두 번째는 안희제의 발해농장, 독립군 기지였으니까요,
세 번째는 발해국 궁궐터에 그 당시 대종교에서 천진전 건축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 이동언
동경성은 대종교의 총집결지였다.
경제활동과 민족정신교육, 그리고 독립군을 양성하는 독립군 기지였다.
결국 일제는 대종교 세력 제거를 위해 임오교변을 일으킨다.
"1942년에 발생한 임오교변인데요,
이 때 대종교를 조선의 독립을 최후로 삼고 있는 독립군 단체로 생각하여
교주 윤세복 이하 스물 다섯분을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검거를 합니다.
그래서 치안유지법을 들어 혹독한 고문을 하게 되지요."
- 정영훈 교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임오교변으로 검거된 대종교 간부들은 만주의 액하감옥에 수감되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악명높은 정치범 수용소였다.
높은 담장과 전기가 흐르던 철조망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 보이는 담은 밑과 위가 똑같은 높이로 지어졌어요.
또한 형식도 탑식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구조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감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엔 이 건물에 창이 하나도 없고 단지 환기구만 있었다.
탈출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감옥 보았지요.
면회를 가니 시아버지가 이쁘게 생겼구나 그랬어요. 내가 얼른 나가서 잘해줄께 하셨어요.
일본놈들이 칼을 무섭게 휘두르고 그랬는 모양이더라구요.
건강하게 지내거라, 여기 오지말아라 하시더라구요 시아버지가."
- 이금산, 현장목격자, 나철의 손부
"거기서 보면 환자들이라거나 죽은 사람을
소위 당가라고 해서 짚으로 만든 것에 넣어 실어나와 가지고 벌판에 그냥 버립니다.
매장도 안 하고 그냥 버립니다.
그 때 그 주변에는 까마귀가 참 많았어요.
그럼 시체를 그냥 파먹는 광경을 보고 그랬어요."
- 이영재, 당시 현장목격자
계속 되는 관리자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저기 보이는 화장실이 옛날에는 물감옥이었어요.
최고의 죄인들은 수옥이라고 해서 물에 잠겼어요."
악질 반역 죄인들을 고문하는 수옥을 알려주자 후손들은 그곳에 절을 올렸다.
선친들이 여기서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구덩이 이런 것을 파놓고 전기 고문을 했대요.
물을 채웠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린 마음에 물어봤지요. 작은 아버지 담배도 안 피우는데 왜 손가락 끝이 꺼매요.
왜놈들이 전기고문을 해서 손가락과 손이 꺼멓게 타들어갔더라구요."
- 나종애, 나철의 손녀
액화감옥의 구조는 살인적이었다.
탈출을 막기 위해 땅속 깊이 뿌리박은 담장과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
폭 8미터, 길이 50미터의 감옥 네 동이 들어섰고,
그 뒤에 수옥이 들어섰다.
깊이 2미터의 구덩이에 물을 가득 채운 채
그 속에 죄수들을 넣고 고문을 가했다.
"이 임오교변은 일제하에 종교 탄압사 중에서도 사망자 규모로 봐서도 가장 큰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민족운동사를 연구하는 분들 중에서도 이런 사건이 있는 줄 모르는 분이 참 많습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대종교는 지도자의 태반을 잃게 되는 큰 정신적 타격을 입게 됩니다."
- 정영훈 교수
임오교변으로 체포된 대종교 간부는 스물 다섯 명.
그 중 안희제를 비롯해 나철의 두 아들과 권상익, 이정 등 열 명이 수감 일 년안에 사망했다.
일제하 종교탄압사 중 가장 큰 사건이었지만 그들은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
액하감옥을 처음 찾은 지 2년이 흘렸다.
다시 찾아간 그곳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중국의 새로운 정책 아래 액화감옥은 모두 철거되었다.
그 때를 되새길 흔적은 이제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중국 화룡현의 청파호.
이곳엔 대종교 삼종사의 묘가 있다.
대종교를 중건한 나철과 2대 교주 김교헌, 그리고 무장항쟁의 주역 서일이다.
하지만 이들을 기억하는 이 누구인가?
흐르는 구름인가?
아니면 메마른 대지인가?
과거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망각 속에 이 삼종사도 어느날 흔적없이 사라질 지 모른다.
"그러한 상처를 더 확대 해석해야만 우리에게 다시는 그런 역사가,
비극의 역사, 오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더 확대해야 하고,
그 속에 대종교의 역사가 더 높게 평가되어야 하고,
거짓으로 말하면 안 되지만 진실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역사를 올바르게 보는 자의 책무입니다."
- 조정래, 소설가, 동국대 석좌교수
"(친일파와 그 후손들)
이것은 개인을 나무랄 것이 아니라
해방후에 민족사, 현대사를 가르치면서
자기들 설 자리가 없어질까 일부러 안 가르친 거예요.
모르기도 했고..."
- 박영석 전 건국대 사학과 교수
첫댓글 마지막이 백미인데요.ㅋㅋ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이 보이네요.............
이런 사실을 잘 가르쳐야하는데....
이렇게 진정한 우리민족의 종교를 찾아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