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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삼국유사(三國遺事 ) 해제
본 해제는 신태영 선생의 해제를 옮겨왔다.
저자 : 일연
저자 일연(一然, 1206~1289)은 성은 김(金), 이름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 호는 목암(睦庵)인데, 후에 이름을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9살 때 광주 무량사에서 공부하다가, 14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출가하였고, 22세에 승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몽고의 침략이 있었던 31세 때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았고, 이 해에 삼중대사를 시작으로 54세에 대선사가 되었으며, 72세에 운문사의 주지가 되었고 78세에 국존이 되었다. 말년에는 인각사에 머물렀는데, 이 시기에『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인각사의 비문에는 8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고 하지만, 현재 전하는 책은 비문에 기록되지 않은『삼국유사』이외에는 거의 없다. 일연은『삼국유사』를 통해, 우리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위대한 민족이라는 자각심을 심어주고 흐트러진 고려의 정신을 하나로 모아, 몽고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고려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해설: 신태영
해설자 신태영(申太永) 선생은 성균관대학교 문과대학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노수신(盧守愼)의 시를 연구하여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명나라 사신과 조선 접반사 사이의 문학적 교류 양상을 연구한 「황화집(皇華集) 연구(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주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한국문집 소재 부(賦) 역주 해제> 프로젝트에 연구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이후 청주대학교 학술연구소의 연구원을 지냈다. 성균관대·청주대·안동대·한림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저서로 「명나라 사신은 조선을 어떻게 보았는가 -황화집 연구-」(다운샘), 공저로 「옥동 문익성 및 그 후예들의 학문과 문학」(술이), 중학교 「한문」 교과서(장원교육) 등이 있다. 현재 조선과 명의 문화 교류에 대해 집필 중이다.
1.
일연(一然, 서기 1206~1289) 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이러한 유언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비석에 저서의 이름을 기록할 텐데, 다른 것은 다 좋지만 『삼국유사』만은 기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민족을 살릴만한 비기(秘記)가 숨어 있으니 이 비기를 찾으면 우리 민족은 멸망하지 않고 흥성하리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일연의 비석에는 그의 저서 이름이 모두 기록되었지만 유독 『삼국유사』만은 기록하지 않았다.
당시 고려는 몽고와 처절한 항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몽고는 아무리 싸워도 도무지 고려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가 끝까지 저항하는 이유를 연구하였고, 그 결과 고려는 힘만으로 굴복시켰던 여느 민족과 격이 달랐고, 그 정신을 무너뜨리기 전에는 항복시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고려의 정신은 곧 불교였고 그 중심에는 일연이 있었다. 몽고는 고려의 정신을 파괴하기 위해 일연의 저서를 모조리 불사르기로 했다. 물론 저서 목록은 비문을 참조하면 되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일연의 저서는 모두 잿더미가 되었지만, 단지 『삼국유사』만은 목록에 없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일연 스님이 열반에 들기 30년 전(서기 1259)에 몽고와 강화를 맺었고, 삼별초의 항쟁도 16년 전(서기 1273)에 끝났기 때문이다. 다만 비석에 『삼국유사』의 이름을 넣지 말도록 한 일과 『삼국유사』에 비기가 들어있다는 말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실제로 인각사 일연의 비문에는 『삼국유사』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삼국유사』 외에 전해오는 일연의 책은 1970년대 일본 쿄토대학 도서관에서 발견된 『중편조동오위(重編曺洞五位)』 말고는 없다.
여하튼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삼국유사』가 지닌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것이다.
충렬왕 7년(서기 1281) 6월 일연은 76세의 나이로 충렬왕을 따라 경주 행재소로 갔다. 충렬왕이 경주로 내려간 것은 몽고의 일본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경주는 신라의 황도였다. 경주에는 찬란한 신라 문화를 상징하는 황룡사(皇龍寺)가 있었고, 이 황룡사 안에는 거대한 황룡사 9층목탑이 있었다.
황룡사의 규모는 실로 대단했다. 현재 남아 있는 여러 자료에 의하면, 황룡사는 총 면적 2만여 평에 경내만 8,800여 평으로 불국사의 여덟 배에 이르고, 발굴된 치미(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의 규모로 볼 때 황룡사의 금당은 현 서울 남대문의 8배로 추정된다. 그리고 범종은 성덕대왕신종의 4배에 달하고, 황룡사 9층목탑은 그 높이가 자그마치 82미터로 아파트 30층 높이에 해당했다고 한다.
황룡사는 그 당시 모든 기술이 총 동원된 신라의 상징이자 고려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이 황룡사는 고종 25년(서기 1238) 몽고의 침입으로 전소되어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다. 그 당시 황룡사를 태운 검은 재가 경주의 하늘을 수일이나 뒤덮었다고 하니, 그 참상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충렬왕을 따라 온 일연이 목도한 것은, 신라의 상징이자 고려의 자랑인 황룡사 9층목탑이 아니었다. 텅 빈 허공과 폐허가 된 빈 터였다. 그런데 일연은 지금 황룡사를 잿더미로 만든 조국의 원수인 몽고군의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경주에 내려온 것이다. 일연은 이 기막힌 참상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라는 황룡사와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우고 국력이 크게 신장되어 삼한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고려는 이를 모두 전소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일연은 「황룡사 9층탑」 말미에서 당대까지 5번 벼락을 맞고 6번 중수된 이력을 나열한 후, 몽고의 침략으로 모두 불에 탔다고 담담하게 기술했다. 비록 담담하게 기술했지만, 그 이면에는 7번째 중수하지 못하는 통탄스런 심정이 숨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황룡사가 국력을 키웠는지 국력이 황룡사를 창건하도록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고려가 이제 황룡사를 지킬 능력도 재창조할 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고려의 존망에 관한 문제였다.
긴 전란으로 고려의 조정과 백성은 모두 피폐해졌고 그 기강도 크게 무너졌다. 사회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승려들의 타락도 극에 이르렀다. 당시 경주의 행재소에는 비단 등의 뇌물을 바치고 승려의 직급을 높이려는 중들이 모여들었으니, 당시 사람들은 이들은 능수좌(綾首座, 비단 수좌)와 나선사(羅禪師, 비단 선사)라고 불렀으며, 이들 중 태반이 처를 거느리고 산다고, 『고려사』 원종 7년 6월조 기사는 말하고 있다. 피폐한 조정과 백성, 그리고 타락할 대로 타락한 불교계······. 일연은 이런 낯 뜨거운 현장을 목도하고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배층의 타락은 민생의 파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시일이 경과될수록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으로 내달린다. 여기에 외세의 침략이 있다면 국가의 멸망은 시간문제이다. 바로 고려가 그러했다. 이제 고려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전화위복을 하든지 아니면 멸망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전화위복을 위해서는 두 가지 일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는 상층부의 각성이 필요하다. 상층부가 타락했다는 것은 이들이 도덕적으로 해이해졌다는 뜻이다. 자신의 권리만 알았지 의무를 망각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정신 상태는 권력의 남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들을 도덕적으로 재무장시키고 자신의 의무를 깨닫게 해야 한다. 둘째로 상층부와 하층부가 단결하여 서로 공동 운명체임을 자각해야 한다. 만일 상층부와 하층부가 심하게 괴리되어 공동 운명체라는 것에 의심을 품고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 사회는 서로 반목하다 결국 쿠데타로 이어지거나 외세에 의해 공멸하게 될 것이다.
일연은 경주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을 더욱 절감했을 것이다. 고려의 정신을 재정립하고 사회를 통합해야 했다. 일연은 비록 정치인이나 무인은 아니었지만 승려였고 고려의 지도층이었다. 그렇다면 승려로서 고려의 지도층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
결국 일연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고려의 뿌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고려의 기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불교계의 단합을 촉구하고 몸소 실천하여 고려의 정신을 ‘불교’로 다시 재정립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이미 일연이 경주에 오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2.
일연은 희종 2년(서기 1206)에 경주 장산군(章山郡, 지금의 경북 경산군)에서 아버지 김언정(金彦鼎)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견명(見明)인데, 말년에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자는 회연(晦然)이고 호는 목암(睦庵)이다.
일찍 아버지를 잃은 일연은 나이 9세(고종 1, 서기 1214)에 지금의 전남 광주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공부하다가, 14세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22세(고종 14, 서기 1227)에 승과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일연이 31세(고종 23, 서기 1236) 되던 해에 몽고가 고려를 침략하였다. 당시 일연은 난국을 타개하고자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외우면서 부처님의 감응을 빌었는데, 문수보살이 나타나 가르침을 주는 효험을 얻었다고 한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僧階)를 받았고, 41세(고종 33, 서기 1246)에 선사(禪師)에 제수되었으며, 54세(고종 46, 서기 1259)에 선종의 가장 높은 법계인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 78세(충렬왕 9, 서기 1283)에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다.
일연은 불교계의 최고 자리인 국존에 올랐지만, 노모를 봉양하겠다고 간절히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9세에 공부하기 위해 어머니 곁을 떠난 일연은, 아마도 말년까지 홀로 지내시는 어머니가 계속 마음에 걸렸나 보다. 일연의 모친은 그 이듬해 96세(서기 1295)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이 해부터 일연은 인각사(麟角寺)에 머물다가, 84세(충렬왕 15, 서기 1289)를 일기로 7월 8일 입적했다.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것이 일연의 대체적인 약력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삼국유사』를 언제 저술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학자에 따라 운문사(雲門寺)에 머물던 시절(서기 1277)이라고도 하고 인각사에서 머물던 시절(서기 1284~1289)이라고도 한다. 다만 젊었을 때부터 자료 수집을 해오다가 운문사 시절에 본격적인 저술을 시작하여 인각사 시절에 마무리를 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개 승려도 아닌 국존의 자리에 있던 일연이 모친과의 인연에 연연해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연이 자신을 목암(睦庵)이라 자호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일연은 효를 중시하였다. 일연은 평소 목주(睦州, 중국 절강성 건덕현)의 진존숙(陣尊宿)을 사모했는데, 진존숙은 개원사(開元寺)에 주승으로 있으면서 깊은 밤이면 부지런히 왕골로 짚신을 삼아 곡식으로 바꾸어서 어머니를 봉양한 일로 유명하다.
그리고 『삼국유사』의 「효선(孝善)」편에는 모두 5편의 효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것만 보아도 일연은 효와 불교의 교리가 상충하지 않으며 오히려 효는 권장해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3.
일연의 『삼국유사』는 어디까지나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다루어지지 않아 남겨진 이야기인 ‘유사(遺事)’를 정리한 책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삼국사기』는 역사[史]를 기록한 것이지만 『삼국유사』는 역사가 아닌 일[事]을 기록한 것으로 애초에 그 성격부터 달랐다. 따라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덜 엄격하고 보다 여유롭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일연의 『삼국유사』는 다섯 권 아홉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권과 2권의 「왕력(王歷)」과 「기이(紀異)」 부분이 하나요, 3권 「흥법(興法)」과 「탑상(塔像)」, 4권 「의해(意解)」, 5권 「신주(神呪)」ㆍ「감통(感通)」ㆍ「피은(避隱)」ㆍ「효선(孝善)」이 하나이다. 이 중 「기이」가 전체 분량의 34%를 차지하고 「탑상」이 20%를 차지한다. 『삼국유사』 자체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기이」편에도 불교적인 이야기가 상당수 있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전자는 역사편이고, 후자는 불교편이라 할 수 있다.
1편 「왕력」은 군왕 순서로 만든 연표이다. 신라 개국에서 시작해서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를 기록하여, 복잡한 연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본서에서는 순서를 바꾸어 맨 뒤에 배치하였다.)
2편 「기이」는 1권과 2권에 나누어져 있고 그만큼 분량도 많다. 단군의 개국신화를 비롯하여 역대 왕조의 신화와 전설 및 불교 설화 등을 시대순으로 정리하였다. 특히 제일 마지막에 배치된 「가락국기」는 잊혀진 왕조 가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이」편의 의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3편 「흥법」은 불법(佛法)이 어떠한 난관을 극복하고 전래되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서술하였다.
4편 「탑상」은 불탑과 불상이 건립된 유래와 그 영험을 정리한 것으로, 고려 국토는 성스러운 불국토였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이를 통해 고려 민족에게 잃어버린 자긍심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5편 「의해」는 원광(圓光)ㆍ양지(良志)ㆍ자장(慈藏)ㆍ원효(元曉)ㆍ의상(義湘) 등등 고승들의 행적을 소개하여 신앙심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특히 이역만리의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떠난 수많은 승려들의 이야기에서 우리민족의 도전정신을 새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6편 「신주」는 밀본(密本)ㆍ혜통(惠通)ㆍ명랑(明朗)의 세 밀교의 승려들이 주문을 통해 재앙을 물리친 일을 기록하였다.
7편 「감통」은 고승들이 아닌 평범한 승려나 일반인들이 겪은 감응을 기록하였다. 신분이 미천한 계집종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람은 신분이나 겉모습이 아닌 그 마음씨와 정성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소중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8편 「피은」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숨어 산 승려와 일반 사람들의 기이한 행적을 기록하였다.
9편 「효선」은 효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얼핏 불교와 효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였다. 일연에게 있어서 효는 중요한 불교의 실천 윤리였던 것이다.
4.
1권은 연표에 해당하는 「왕력」과 사국(四國)의 기이한 이야기를 모은 「기이」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사국’이라 한 것은, 비록 책의 제목을 ‘삼국(三國)’이라 했지만, 「왕력」에도 분명 가락국을 포함해 네 칸으로 나누어 연표를 구성했고, 「기이」에도 ‘가락국기(駕洛國記)’라는 제목으로 별도로 가락국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하게 ‘사국유사’라 하지 않고 ‘삼국유사’라고 한 것은, 『삼국사기』에서 ‘다하지 못하고 남겨 놓은 이야기’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기이」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문을 살필 필요가 있다. 서문이라 하지만 별도로 보기 좋게 기록된 것이 아니고 「기이」편의 첫머리에 몇 자 적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타의 편에는 이러한 서가 없으며 또 그 내용상 『삼국유사』 전체의 서문으로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서문에 언급한 신이한 이야기는 「기이」편 뿐 아니라 『삼국유사』 전편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대저 옛 성인들은, 예(禮)와 악(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仁)과 의(義)로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렇기 때문에 괴력난신(怪力亂神) 등의 일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날 때는 응당 하늘의 명과 예언서를 받았으니 반드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러한 이후에야 큰 변화를 틈타서 제왕의 지위를 장악하고 대업(大業)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 (중국에서도 신이한 일들이 많았는데) …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한 곳에서 나왔다는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는가? 이것이 「기이」편을 여러 편의 첫머리로 삼은 까닭이며 그 의도도 여기에 있다.
일연은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서 기록하지 않은 신이한 일을 자신의 저서에서 기록한 이유에 대해 위와 같이 밝혔다. 『삼국사기』에도 신이한 일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어서 『삼국유사』처럼 전편을 꿰뚫지는 못한다. 일연은 대업을 이룩한 역대 제왕이 모두 신이한 일이 있었던 것은 중국이나 우리 삼국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이제 그 신이한 일을 당당하게 기록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삼국사기』에서 기록하지 않았던, 단군조선과 위만조선, 그리고 조선왕 준이 세운 마한, 조선의 유민들이 흩어져 세운 72국, 오가야(五伽倻)와 부여 등등 삼국 이전의 고대국가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이로써 『삼국사기』에 빠져 있었던 고대사의 맥을 이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고대 국가를 기술하면서 그 서에서 ‘신이’에 대해 언급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단군의 개국신화(開國神話)를 자칫 괴력난신(怪力亂神, 괴이ㆍ용력ㆍ패란ㆍ귀신에 관한 일, 곧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으로 치부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단군의 개국신화를 괴력난신으로 치부할 경우 우리 민족의 태초의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다. 만일 우리가 괴력난신과 연관된 이야기를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는 당장 전 세계의 개국신화와 각종 전설 및 불교와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를 거의 대부분 폐기해야 할 것이다.
일연은 하마터면 일실될 뻔한 고대사를 기록했는데, 단지 그 기록 자체에만 의의가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선 단군의 개국 연대를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대임을 밝혀, 고려 민족의 역년이 중국의 한족에 비해 하등의 차이가 없음을 밝힌 것도 매우 중요하다. 곧 고려의 한민족과 중국의 한족은 그 역사에 있어서 대등하다는 의식을 표출한 것이다.
다음으로 고려 민족이 단군의 후손임을 명확히 하였다. 단군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준왕이 바다를 건너와 세운 나라가 마한이라고 밝혔고, 또 단군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가 72개국이나 되며, 이들 국가는 바로 마한ㆍ변한ㆍ진한을 구성하고 있다고 밝혔다. 즉 삼한은 모두 단군조선에서 기원한 것이므로, 자연 고려 민족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 되는 셈이다. 이로써 삼한이 하나의 민족이며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명분과 목표를 제시할 수 있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 고려는 이미 몽고와의 30년 전쟁으로 귀족ㆍ평민 할 것 없이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무신의 난과 몽고와의 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무신정권이 강화도에 있는 동안 백성들은 몽고군과 싸워야 했다. 몽고군은 살육과 방화를 자행하여 그들이 지나간 군현마다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화 정부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도 계속되었다. 결국 무신의 난 초기에 발생했던 민란이 몽고와의 전쟁 중에 다시 일어났으며, 심지어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에 투항하는 일도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몽고군에 의지해 삼별초를 진압해야 했으며, 또 몽고의 풍습이 점차 유입된 것은 물론 몽고에 아부하는 부원세력(附元勢力)까지 등장하여 활개를 치고 있었다.
이처럼 고려는 내부적으로 극심한 갈등과 분열을 안고 있어 그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고려 민족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는 ‘민족적 자각’은 민족의 주체성에 눈을 뜨게 하고 분열을 단합으로 이끌어 위기를 타개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주게 된다. 일연은 고려의 뿌리, 곧 우리 민족의 시원에서부터 탐색하여 당대의 난국을 헤쳐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은 단지 일연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연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이규보(李奎報, 서기 1168~1241)는 「동명왕편(東明王篇)」 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본기」를 보니, 그 신이함이 세상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하였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 귀(鬼)이고 환(幻)이라 여겼는데, 세 번 계속해 탐독하고 음미하여 점차 그 근원에 이르게 되니, 환(幻)이 아니라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라 신(神)이었다. 이승휴(李承休, 서기 1224~1300)도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고려의 지리적 배경을 간략히 노래한 후 곧바로 단군의 사적을 노래하였다.
이처럼 이규보와 이승휴의 의도도 일연과 궤를 같이 한다. 이들의 주장은 고려 민족사를 다시 인식하자는 것이고, 그래서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가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사의 재인식은 일연이 살았던 험난한 시대의 화두이자 시대정신이었다. 이것은 물론 모두 외세의 침략, 이유 없이 남의 나라를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은 몽고에 맞서 싸워, 민족과 국토를 지키고자 한 고결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지름길이 바로 민족정신을 자각시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온전히 드러낸 것이 바로 일연의 『삼국유사』였다.
『삼국유사』 전편이 모두 그러하지만, 특히 이 「기이」편은 신화와 전설의 보고(寶庫)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판타지(fantasy)의 세계인 것이다. 일연은 고대국가와 삼국의 신화는 물론이고, 그 외에도 많은 판타지를 기록해 놓았다. 일례로 해와 달의 신화인 연오랑 세오녀, 죽어서도 나라를 보호한 미추왕과 김유신의 죽엽군, 하늘이 신라를 보호하기 위해 내렸다는 옥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 적병을 물러가게 하고 비를 내리게 하는 만파식적, 뛰어난 미모로 뭇 남성은 물론 바다의 용까지 매혹시킨 수로부인, 역신을 춤과 노래로 감화시킨 처용랑, 저 멀리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상제의 명을 받고 남편이 될 수로왕을 찾아 바다를 건너 온 허왕후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지금 읽어도 우리 민족이 얼마나 강인하고 훌륭한 민족인지 새삼 느끼게 해준다.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들은 난세에 주눅 들어 살고 있던 이 땅의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자부심이 되었을 것이다.
식자들은 『삼국유사』를 통해 민족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확인하고 자부심을 갖고 힘을 얻어 이 이야기들을 널리 알렸을 것이며, 일반 백성도 이러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역경을 극복할 용기를 내었을 것이다.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고려의 백성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며, 고려의 민족은 위대한 업적을 쌓은 훌륭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심어주려고 한 것이다.
5.
일연은 고려 민족에게 잃어버린 자부심과 용기를 심어주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고려의 국토가 매우 신성한 땅임을 일깨우고자 했다. 이 국토가 신성한 땅임을 깨닫는다면, 국토에 애착을 갖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국토의 신성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황룡사에 대한 기록이다. 일연은 특히 황룡사에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정을 많이 드러냈다는 것은 상실감도 그만큼 컸다는 뜻이 된다. 일연은 여러 곳에서 황룡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탑상」편에 자세하다. 황룡사 자리는 원래 절을 세우려던 곳이 아니었다. 진흥왕 14년(서기 553)에 월성(月城)에 신궁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난 것을 보고 궁궐 대신 절을 지은 것으로 공사 기간이 무려 17년이나 되었다. 황룡사의 규모는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어마어마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규모만 큰 것이 아니라, 수많은 전설과 숭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절에는 높이 5~6척 쯤 되는 연좌석이 있었는데, 이 연좌석은 가섭불이 전생에 수양하던 곳이었다. 곧 석가모니불이 나타나기 이전 시대에 일곱 개의 절터가 있었는데 이 황룡사 자리가 바로 그 하나라는 것이다. 일견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지만 이것은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나라가 신라이며, 또 그만큼 토속 종교의 저항이 심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불교는 외래 종교가 아니며 원래부터 이 땅에 있었다는 논리는 신라인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지녔을 것이다.
이 외에도 황룡사는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중 그 둘을 가지고 있었다. 세 가지 보물이란, 황룡사의 장륙존상(丈六尊像)과 9층탑, 그리고 하늘이 진평대왕에게 내려주었다고 하는 천사옥대(天賜玉帶)를 말한다. 고구려의 왕은 심지어 신라에 세 가지 보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공격할 계획을 그만두었다고 한다.(「기이1ㆍ천사옥대(天賜玉帶)」)
신라의 보물인 장륙존상은 부처상 하나와 보살상 둘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역시 신비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황룡사를 지은 뒤 얼마 후 큰 배 한 척이 신라에 당도했다. 이 배를 조사해 보니 인도의 아육왕이 황철 5만8천 근(약 12.4톤)과 황금 3만 푼(약 3킬로그램)을 모아 석가모니상을 주조하려다 못하고, 인연이 있는 곳에 닿으면 불상을 주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배에 실어 띄워 보낸 것이었다. 이 배가 세상의 수많은 나라를 돌고 돌아 마침내 신라에 당도한 것이다. 신라에서는 아육왕이 함께 보낸 견본에 따라 단 한 번의 주조로 불상을 만드는 데 성공하여 이를 황룡사에 안치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아육왕이 1300여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소망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찬미하였다.
티끌세상 어느 곳이 참 고향이 아니랴마는
불교의 인연은 우리나라가 최고라네.
아육왕이 착수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월성의 옛터를 찾아오려 함이었다네.
아육왕이 장륙존상을 못 만든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연은 바로 가섭불의 옛 수행터인 신라의 월성에 있다고 했다. 2구에는 신라는 가섭불이 수행한 성스러운 땅이며, 또 불교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라는 무한한 자부심이 들어 있다. 일연의 이러한 자부심은 허황된 말이 아니었다. 당시 신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불교학과 불교문화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층탑의 조성도 또한 신비롭기 그지없다. 선덕왕 대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중국에 유학 갔는데, 어느 신인(神人)이 나타나 ‘신라의 왕이 여자이므로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어서 이웃나라가 침략하는 것이니, 속히 돌아가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세우라.’라고 하며, 그렇게 하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하고 조공을 바쳐 길이 편안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탑이 세워진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번성을 누린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이다. 이 탑은 각 층마다 담당하는 나라가 있었으니,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탐라,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이었다. 외적이 침입해오면 그 해당 층이 이를 진압하는 역을 맡았다. 9층 목탑은 그야말로 호국 그 자체를 위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탑상」편에는 불상이나 불탑과 관련된 많은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신라의 경우, 경덕왕이 백률사(栢栗寺)에 행차했을 때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파서 얻었다는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이 새겨진 큰 돌, 돌미륵을 캐내고 지었다는 생의사(生義寺), 제석(帝釋)이 내려와 열흘이나 머물렀다는 흥륜사(興輪寺), 그 외에도 부처님의 어금니에 관련된 이야기나 미륵신앙에 관련된 이야기 등등 이루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에 비해 고구려나 백제, 가야에 관련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고구려의 경우 육왕탑(育王塔)과 영탑사(靈塔寺)를 들 수 있다. 육왕탑은 요동성에 있다. 어느 날 신이한 기운이 있는 땅을 한 길이나 파서 지팡이와 신 그리고 고대 인도글자가 적힌 명패를 발견하고 이곳에 7층 목탑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이라 자세한 연유를 몰랐다가 나중에야 전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영탑사에 관련된 연기설화 역시 탑과 관련이 있는데, 어느 신인(神人)의 말에 따라 땅을 파서 8면으로 된 7층 석탑을 얻고 영탑사를 세웠다고 한다.
가야에 관련된 것으로는 금관성(金官城)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들 수 있다. 이 탑은 수로왕의 부인인 허왕후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처음 항해할 때 파도가 심하여 되돌아왔는데, 이 파사석탑을 싣고 다시 출발하자 파도가 잠잠해져 무사히 가야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석탑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처럼 국토 곳곳에 있는 사찰과 그에 대한 수많은 설화를 들으면서 그 당대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이 땅이 불교와 많은 인연을 지닌 신성한 땅이라 생각하고, 신라를 계승한 고려를 불국토로 인식하며 자랑스러워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몽고로부터 이 성스러운 국토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사찰이나 불탑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신라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삼국유사』를 신라 중심의 불교사라고 평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삼국유사』가 신라 중심으로 쓰인 것은, 신라가 삼한을 통일했고 고려는 바로 신라를 계승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삼국유사』가 일연의 직접적인 견문을 중심으로 저술되었다는 점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인각사에서 자료를 모아 저술한 것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현장에서 채록한 자료를 상당수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연의 행적을 따져볼 때 그 기록이 자연 신라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고구려와 백제 땅을 두로 돌아다니며 수행했다면 더 많은 유산을 남겼을 것이다.
다음으로 일연이 삼한의 흥망을 불교와 연관 지어 생각한 점도 들 수 있다. 일례로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중국의 도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신라가 통일을 이룬 것은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거론하기로 한다.
6.
전술했듯 『삼국유사』는 불교 이야기를 모아 정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삼국유사』는 불교를 빼고는 이야기될 수 없다.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기이(紀異)와 불교와 관련이 있으며, 이 기이도 불교적인 것이 상당히 많다. 곧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진주라면, 그 진주를 꿰는 실이 바로 불교인 셈이다. 심지어 단군신화의 환인과 환웅도 불교어이며, 홍익인간이라는 이념 역시 불교적 냄새가 짙다는 점을 상기해 보라.
일연은 고려의 정신,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불교로 보았다. 이것은 일연 개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신유학인 주자학이 대세를 이룬 것은 한참 후대의 일로, 아직까지는 불교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일연이 불교의 정신이 온전히 제자리를 잡고 거듭 나아야 나라가 보존되고 부흥될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일연은 나아가 불교적 시각에서 역사의 흥망을 살피었다. 곧 고구려가 멸망한 것은 불교가 아닌 도교를 일으켰기 때문이며, 신라가 성공한 것은 불교를 진흥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고구려는 그 말년에 도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보장왕은 유ㆍ불ㆍ도 삼교를 함께 일으키려고 했다. 그 당시 재상이었던 연개소문은 도교가 유ㆍ불에 비해 융성하지 못하니 당나라에 도교를 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때 보덕화상(普德和尙)은 좌도인 도교가 정도인 불교에 맞서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며 여러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통력으로 자신의 암자를 날려 지금의 전북 완주군의 고대산으로 옮겨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 후 6년만에 고구려는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흥법ㆍ보장봉로(寶藏奉老) 보덕이암(普德移庵)」)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도교를 좌도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불교의 입장에서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유교는 좌도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중국의 종교는 유교도 불교도 아니다. 중국의 종교는 대대로 도교였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도교가 들어와 번성한다는 것은 중국의 정신이 들어온다는 것이니, 보덕화상이 이를 위기상황으로 파악한 것은 혜안이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신라는 불교를 전적으로 받들었다. 이차돈은 죽으면서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의 순교로 인해 불교는 비로소 신라에서 융성할 수 있었다. 곧 이차돈의 순교 자체가 불교를 통한 호국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다음의 「황룡사 9층탑」에 실린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귀신의 도움으로 제경(帝京)을 누른 듯
휘황한 금색과 청색 날아오를 듯한 용마루라.
이에 올라 어찌 구한(九韓)의 항복만을 보겠나
비로소 천지가 유달리 평화로움을 깨닫노라
첫 두 구는 밑에서 바라보는 탑의 모습을, 다음의 두 구는 탑 위에서 굽어보는 감회를 읊었다. 학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탑의 높이는 최고 80여 미터로 추측되고 있다. 아파트 30층 높이의 탑을 나무로 쌓아 올렸다는 것은, 지금도 30층 이상의 아파트가 그리 많지 않다는 현실을 상기할 때 현대의 기술로도 대단한 것이다.
위의 시에서 거대한 탑을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지을 수 없을 것 같아 귀신이 붙잡아 지지해주는 듯하다고 했고, 또 육중한 탑이 옛 신라의 황도인 경주를 누르고 있는 듯하다고 표현했다. 탑의 규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거기에 휘황찬란한 단청을 하였고 용마루도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하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더 주목할 곳은 이제부터이다. 이 탑의 영험함으로 인해 외침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외적들이 항복한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세상은 원래 평화로운 곳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굳은 염원의 표현인 것이다.
신라 불교의 호국적 성격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승려들의 활약상이 종종 기록되어 있다. 전술했듯이 자장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워야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신라가 번성할 수 있다는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왔다.
한편 의상은 당나라가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히 귀국하여 보고하였다. 이에 문무왕은 용궁에서 비법을 전수받은 명랑법사(郞朗法師)에게 자문을 구하자, 명랑법사는 낭산 남쪽에 있는 신유림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도량을 개설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당나라 군대가 신라의 바다로 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그러자 명랑법사는 여러 채색비단으로 임시로 절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 배는 갑자기 사납게 일어난 파도에 모두 침몰하였다. 그 후 671년에 또 5만의 군대가 쳐들어왔으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모두 수장시킬 수 있었다.
문무왕이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보호하려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당시 문무왕은 평소 “큰 용이 되어 불교를 받들고 국가를 보위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무왕을 이은 신문대왕은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해 감은사(感恩寺)를 지었다.(「기이ㆍ문무왕(文武王)」) 삼국은 물론 고려와 조선도 전략적 요충지에 절을 많이 지었는데, 이 절은 유사시에 야전작전사령부로서 작용하였다. 이 역시 불교를 호국사상으로 삼은 증거이다.
만파식적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신문대왕 때의 일이다. 감은사 앞바다에 어느 날 작은 산이 나타났다. 그 산 위에 있는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불자, 적병이 물러나고 가뭄에 비가 오며 거센 파도도 잠잠해졌다. 그래서 이름을 만경의 물결을 잠재울 수 있는 피리라는 뜻으로 만파식적이라고 하였다.(「기이ㆍ만파식적(萬波息笛)」) 후대에 일본이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군대를 퇴각시켰다고 한다.(「기이ㆍ원성대왕(元聖大王)」) 이 역시 감은사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불교와 연관이 있다.
화랑도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세속오계는 원광법사가 일러준 것이다. 그 이전에 흥륜사(興輪寺)의 승려 진자(眞慈)는 늘 부처님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나타나기를 빌었다. 그 결과 미시(未尸)라는 고아를 찾아 왕에게 데리고 갔는데, 이후 미시는 국선이 되어 사람들을 교화시키다가 7년이 되자 사라졌다고 한다.(「탑상ㆍ미륵선화(彌勒仙花)」) 곧 화랑도 또한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신라가 비록 불교로 인해 흥했다고는 하나, 불교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번성했다고 본 것은 아니었다. 불교를 숭상했던 신라도 멸망했으니 말이다. 경덕왕 때의 일이다. 경덕왕은 아들이 없어서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아들을 얻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표훈이 수차례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청하였는데, 천제는 경덕왕이 아들을 얻는다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경고하며, 아울러 표훈도 하늘에 오지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덕왕은 그래도 좋다며 아들을 원했고, 결국 경덕왕의 뒤를 이어 8살에 왕위에 오른 혜공대왕은 정치를 그르쳐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으며 그 자신도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표훈 이후로 신라에 성인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기이ㆍ경덕왕」) 신라에 성인이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신라의 국운이 다했다는 말과 상통한다. 그 원인은 불법을 올바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일연은 불교적 시각에서 나라의 흥망을 이해했으며, 그의 불교는 호국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삼국유사』에는 곳곳에 부처의 현신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 부처의 모습은 때론 휘황한 빛을 발하며 나타나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근엄하고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초라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말을 타고 다니는 승려 경흥(憬興)을 풍자하고 사라진 초라한 승려는 다름 아닌 문수보살이었다.(「감통ㆍ경흥우성(憬興遇聖)」) 어느 날 누추한 행색으로 왕이 베푸는 재에 참여한 승려가 있었는데, 왕이 농을 하길 “돌아가거든 사람들에게 국왕이 직접 불공하는 재에 참여했다고 말하지 말라.”라고 하자, 그 승려는 “폐하도 사람들에게 진신석가(眞身釋迦)에게 공양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몸을 솟구쳐 하늘로 올라갔다.(「감통ㆍ진신수공(眞身受供)」) 초라하고 볼품없는 행색을 한 승려가 바로 부처요 보살이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보살이 일반 노인이나 젊은 여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고승인 연회(緣會)는 나라에서 자신을 국사로 삼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 얼른 도망쳤다. 그런데 도중에 벼슬하기 싫어 도망치는 것을 나무라는 노인과 노파를 차례로 만났는데, 알고 보니 문수보살과 변재천녀였다.(「피은ㆍ연회도명(緣會逃名)」)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의 득도를 도와주러 온 임신한 여자는 바로 관음보살이었다.(「탑상ㆍ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그리고 광덕(廣德)의 아내는 관음보살 19응신(應身) 중 하나였다.(「감통ㆍ광덕(廣德) 엄장(嚴莊)」)
부처는 나이가 어린 아이나 심지어 불구의 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굴산조사(崛山祖師) 범일(梵日)은 당나라에 갔는데, 그곳에서 왼쪽 귀가 떨어진 나이 어린 승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거든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신라로 돌아와 어린 승려의 집을 찾아갔다가, 왼쪽 귀가 떨어진 정취보살(正趣菩薩)의 불상을 물속에서 건져냈다. 그 어린 승려가 정취보살이었던 것이다.(「탑상ㆍ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진자가 찾아낸 부처님은 바로 미시라는 어린아이로 고아였다. 진자는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만나기 위해 열흘길을 한 발자국마다 절을 하면서 갔는데, 그를 문 밖에서 맞이한 미소년이 미륵선화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탑상ㆍ미륵선화(彌勒仙花)」)
승려만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계집종 욱면(郁面)은 주인을 모시고 절에 가면 염불을 했는데, 주인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여러 모로 방해했지만 욱면은 그럴수록 더욱 신심을 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욱면은 몸이 하늘로 솟구치더니 부처의 몸으로 변하였다.(「감통ㆍ욱면비(郁面婢) 염불서승(念佛西昇)」)
이상의 부처는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한 부처님의 모습이 아니다. 이들은 힘없는 약자의 모습이요, 당대 하층민의 모습일 뿐이다. 부처나 보살은 먼 곳에 있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가까이 있으며 심지어 매우 비루하고 비천한 곳에도 있었다. 남녀노소 부귀빈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부처는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었고, 어떠한 이들도 부처가 될 수 있었다.
승려 정수(正秀)는 어느 겨울날 황룡사로 돌아오다가, 천엄사(天嚴寺) 문 밖에 여자 거지가 아이를 낳고 누워 거의 얼어 죽게 된 것을 발견했다. 정수가 그 여자를 안고 한참을 있었더니 간신히 깨어났다. 정수는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는 벌거벗은 채로 절로 달려가 거적으로 몸을 덮고 밤을 보냈다. 이에 감동한 하늘은 정수를 왕사로 봉하라고 대궐에 외쳤다.(「감통ㆍ정수사(正秀師) 구빙녀(救氷女)」) 정수가 왜 그녀를 절로 데려오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연이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정수와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승려가 되고 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연은 이러한 설화들을 통해,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하찮게 여길 것이 아니라 마치 부처님을 대하듯 더 많은 관심과 정성을 쏟으라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또한 허상인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그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판단하라는 충고도 함께 전하고 있다. 사람을 신분과 외모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층민도 인간이며 나아가 자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다면, 이 세상은 좀 더 평화롭고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이것이 일연이 꿈꾸는 불국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8.
지금까지 13세기의 일연이 살았던 세상으로 돌아가,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의 마음과 소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리하자면 일연은 고려 민족이 모두 단군의 자손임을 보여 그들에게 민족적 자각심을 심어주고, 고려의 국토 곳곳이 불교와 연관된 성스러운 땅임을 보여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갖도록 하였다. 그리고 고려 이전의 역사와 사적을 불교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아울러 하층민에게도 부처님을 대하듯 관심과 정성을 쏟으라는 가르침을 전하여, 불교를 통해 고려 민족의 정신을 통일하고자 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고려를 위기에서 구하고 최종적으로 불국토를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제 몇 가지 군말을 붙여 마무리하고자 한다.
첫째는 불교와 호국사상과의 관계이다. 일견 세속을 떠나 정진해야 할 승려가 세속의 문제에 깊이 관여해도 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소승이 아닌 대승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개인적인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대승의 최종목표이다. 그렇다면 나라가 위기에 빠져 생민이 모두 도륙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적 해탈이란 어떤 의미를 지닐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설사 해탈을 한다 해도 누구를 구제할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정진이 가능하겠는가? 종교가 세속에 대해 시시콜콜 간여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다면 오히려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도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단군과 단일민족에 대한 문제이다. 단군신화는 구전되어 내려오다 일연의 시대에 이르러 재조명을 받았다. 이 신화는 고구려의 일부 고분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단군상 훼손사건처럼 ‘단군’이나 ‘민족’이란 용어에 대한 반감이 상당수 존재한다. 아니 이제는 외국에서 이민 온 사람들과 그 2세들로 인해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폐기하고 나아가 민족이라는 말까지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랑스럽게 역설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과연 이 폐기론자들이 말하는 ‘단일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애초에 존재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민족은 단일민족이다.’라고 말할 때, 그 단일민족이란 뜻이 외부 피가 전혀 안 섞인 순도 100퍼센트를 뜻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러한 일은 있을 수도 없다. 만일 진짜 순도 100퍼센트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생각을 깊이 해보지 않았거나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일 것이다.
혼혈아가 대거 생길 것이므로 단일민족이란 말을 쓰면 안 된다는 주장도 이러한 점에서 따져봐야 한다. 이들은 엄연히 우리의 피가 섞였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단군의 아들딸이며 다 같은 한민족이다. 이들이 왜 우리 민족이 아닌가? 물론 다른 부모가 속한 그 민족의 구성원도 될 수 있다. 귀화한 외국인도 같다.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이들의 후손은 우리와 피가 섞일 것이다. 귀화인들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갖고 우리와 동화되어 살아간다면 같은 배를 탄 우리 자신인 것이다.
만일 이주민이 자기들만의 집단을 형성하고 우리민족과 거의 동화되지 않은 상태로 수십 년을 산다면, 그 때는 정말 다민족 국가를 심각하게 논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무엇보다도 아직은 시일이 너무 짧다고 본다.
이제 민족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자. 서구에서 사용하는 민족이란 말은 근대에 생겨났다. 그러나 동서양을 떠나서 민족이란 말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강자는 약자를 침략하여 예속시키려고 사용하고, 반대로 약자는 강자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사용한다. 우리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 곧 ‘민족’이란 말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외세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말이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강자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약자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다.
이처럼 단군의 자손이니 단일민족이니 하는 말은, 같은 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점을 인식시켜서 우리민족을 단결시켜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지, 글자 그대로 100퍼센트 단군의 자손이고 단 하나의 핏줄을 지닌 민족이라고 뻐기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주민을 차별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나라는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들 두 나라가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는 이상,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외세에 대한 투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강자가 ‘민족’이란 무기를 버리지 않는데 약자가 먼저 무장해제를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먼저 솔선수범하자는 말도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단군과 민족이라는 개념을 지금 폐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족’이란 개념은 분명 사라지는 것이 좋다. 온 인류가 너 나 구별 없이 함께 어울릴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이요, 현재의 일은 아니다. 필자는 단일민족을 예찬하는 것도 국수주의를 부르짖는 것도 아니다. 단지 ‘민족’이란 개념을 폐기하기에는 아직 때가 이르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세계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그렇다면 국제인으로서 더욱 더 자기 민족에 대한 정체성을 지녀야 한다. 자기 정체성 없이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는 신세로 세계화에 어떻게 무엇으로 기여하겠는가? 진정한 세계화란 하나의 색채가 아닌 수많은 색채가 조화를 이루는 것일 것이다.
최근 이주민과 귀화인이 늘어나는 것을 그리 나쁘게 바라볼 필요도 없다. 오히려 좋은 현상이라 할 것이다. 도대체 우리나라가 좋다고 이민 오는 사람들을 왜 못마땅하게 바라봐야 하는가? 이것은 자랑할 일이지 경계할 일이 아니다. 이주민으로 인해 생기는 사회적 문제는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수업료로 봐야 한다.
이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어디까지나 소수이고 약자이다. 이들을 피부색에 따라 차별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들의 2세들이 대거 교사ㆍ의사ㆍ국회의원ㆍ장관, 나아가 대통령이 되는 시대가 빨리 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면 이들 문화의 장점이 우리문화의 장점과 융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우리문화의 장점 중 하나가 비빔밥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라. 이러한 점에서 이민자들의 미래는 곧 우리민족의 미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가 지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720여 년 전이다. 그 동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숱한 역경에 처했으며 존망의 위기에 처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21세기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은 난제에 싸인 채 갈 길이 험난하기만 하다. 국토는 물론 국론까지 분열되었고,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으며 이제는 종교적 갈등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중국은 중화주의를 내세워 동북공정을 가속화하고 있고 일본은 극우 군국주의가 다시 기세를 떨치고 있다. 이토록 우리는 연일 나라 안팎으로 험난한 난제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종교라는 굴레를 떨치고 볼 때, 『삼국유사』의 정신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다고 말하는 것이 한갓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망상이 아니라면, 21세기의 일연은 누구이며, 21세기의 『삼국유사』는 진정 어떠한 내용일까?
각주
1 본 글은 『한문화연구(韓文化硏究)』 창간호 <삼국유사편>(한국한자한문능력개발원, 2007)에 ‘삼국유사와 호국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을 수정하여 재수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