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시대 2024- 봄호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을 보고
글 아리나
“무언가 ‘되기(be)’ 위해서는 반드시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해야(do)’만 해.” 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의《ping》에 나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충분히 만족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때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경향이 있다. 그 완벽한 조건이란 절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기다리는 와중에 하고 싶었던 바람이 사라질 수도 있고, 의지가 약해져 결국엔 후회하는 일만 남길 수도 있을 텐데.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움직인다는 것, 실천한다는 것이 왜 이리 힘든 걸까. 누군가 타인을 위하는 일도 아니고, 자신을 위한 일인데도 그렇다. 마감 시간이 임박해 올 때까지 한참을 망설인다.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자신을 위하는 일, 이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작년 말 연극 한 편을 예약해 놓았다. ‘실천하는 새해’로 정한 행동 중 하나로, 한 달에 2~3회 정도 여행, 공연 관람 등 문화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예술인 패스카드로 예약하니 30% 할인이 되었다. 이 카드는 각종 공연, 전시 이외에도 생활 속 할인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패스 발급을 원하는 예술인은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홈페이지를 참고하길 바란다.
1월 5일 국립극장으로 향했다.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을 관람하기 위해서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으로, 뉴욕타임즈는 ‘세기의 진정한 걸작 중 하나’로 평가했다. 작년에 《혼자서 함께하는 여행 1》 책을 쓰며 이 작품을 읽었다. 우리 삶 자체인 ‘기다림’이라는 주제가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것 같아서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문학작품이 어떻게 구현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공연은 150분(인터미션 20분 포함) 동안 상연되었다. 그 긴 시간 동안 초지일관 열연하는 80대 원로 배우들의 에너지를 따라가느라 공연 내내 긴장했다. 저렇게 많은 분량의 대사를 어떻게 다 외웠을까, 혹시 중간에 한 대사라도 까먹으면 어떡하지, (역시 관록의 명품배우는 다르다) 나는 감동하며 대사가 나오는 책의 장면을 떠올렸다. 더 놀라운 것은 두 달 일정에 원캐스팅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었다.
무대장치의 유일한 하나인 앙상한 나무 한 그루는 쓸쓸하고 황량한 불투명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들게 했다. 저자가 말했듯이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다. 고도는 신이다, 자유다, 희망이다. 등……. 확실하게 정해진 것이 없다. 기다림의 존재라는 것밖에는.
극적인 사건 없이 거의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단순한 내용은 어느 순간 지루하기도 했다. 새로움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도 내일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습관처럼 되풀이하는 똑같은 일상에 희망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 또한 고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참을성 있게 연극을 관람했다. 가끔 배우들의 기상천외한 대사와 기이한 동작을 통해 잠시 일탈한(?) 집중력을 붙잡으며 연극을 보는 즐거움을 경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의미가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이 연극이 그랬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더 관심을 두게 되고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인물들의 모습이 어쩌면 나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친근감마저 들었다. 중간에 놓친 부분을 집중해서 다시 보고 싶기도 하다. 객석이 연일 만원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무대장치나 소품 하나 없이 목소리와 몸짓 하나로 큰 무대가 꽉 채워졌다. 수십 년 연기 내공과 이름 자체로 신뢰를 주는 원로 배우들의 저력과 존재감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연극의 4요소인 배우, 관객, 희곡, 무대가 모두 완벽했다고 생각한다.
결국 삶이란 기다림의 연속이다. 저마다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언제 오는지, 어느 곳에 나타나는지, 확실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도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삶은 언제나 희망을 준다. 중요한 것은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 있음을 증명해 내는 일 말이다. 그것은 의미 있는 기다림을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는 것이다. 고도가 올 때까지. 고도를 찾을 때까지.
아리나
수필가 (2021·순수문학)
저서『기적을 만드는 의식혁명』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