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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신화 스크랩 9. 페르시아 제국과 조로아스터교
일 행 추천 0 조회 72 10.02.14 19: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9. 페르시아 제국과 조로아스터교                             이길상

 

가. 고대 오리엔트 세계의 변화

 

(1) 서 아시아의 풍운

 

우리들이 현재 중동지방하면 사우디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석유(원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석유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1938년 쿠웨이트에서 유전이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비롯되었고 그 전에는 오스만 투르크제국(1299-1921)이 한 때 동서교통로를 장악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유럽 인들이 지리상의 발견이라고 말하는 신 항로의 개척은 동서양을 뱃길로 연결시켜 육로 교통의 요충지였던 이곳은 점차 세계적인 관심사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8세기경에 아시리아가 이 지역을 통일하여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잡다한 민족으로 구성된 지역 특성을 살피지 못하고 강경한 통치정책을 고집하다가 망하고(621 BC) 리디아,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의 이른바 4국 시대로 분열했다가

 

아케메네스 조의 페르시아 제국이 등장하여 오리엔트 전역을 재통일하여(525 BC)대 제국을 세웠는데 이는 중국의 시 황제가 천하통일을 이룬 것(220 BC) 보다도 300년이나 앞선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은 오늘날 이란이 그 본거지이나, 이 지역은 정치적 변화가 심하였고, 민족도 다양했기 때문에 우리들로서는 구분이 어렵고, 페르시아도 이를 세운 부족의 명칭에 따라, 아케메네스조, 사산조 등으로 각각 부르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종족이 화려하게 역사에 등장하여 힘과 부를 뽐내고 있을 때 한미한 동쪽에서 가난한 생활과 낮은 문화 수준으로 멸시와 천대, 갖은 수모를 감내한 페르시아 인들이 여기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듯 삽시간에 오리엔트 전역을 정복하고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 것은 어쩌면 역사적인 순환법칙 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 세계를 정복한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인들로부터 야만인(바로바로이:말이 통하지 않는 자들)취급을 당한 것이 그렇고,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며, 로마제국은 변방에서 야만인 취급을 받던 게르만족에게 나라를 내주어야 했고, 영국 등으로부터 양키라는 이름으로 대접(?)받던 미국이 세계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 것도 흥미있는 사실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유식하면 겁이 많다. 제도나 법, 도덕과 규범은 힘 앞에서는 장식에 불과하다] 맞는 이야기입니까?

 

서 아시아 지역의 대부분이 사막 혹은 반사막화로 이루어져 척박한 토양과 메마른 기후, 여기에 전신을 천으로 가리고 눈만 빼 꼼이 내놓고 양떼를 몰고 다니는 여인들, 그림 같은 오아시스를 따라 이동하는 대상(caravan)의 행렬,

 

별을 보고 점을 친다는 의아스러운 이야기가 우리들에게는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그림같은 환상을 연상할 수도 있지만, 막상 이곳을 무대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신비도 낭만도 아닌 한숨 섞인 처절한 삶의 투쟁이 전부일 따름입니다.

 

19세기 이래 등장한 제국주의 침략 열강도 전략적인 요소를 빼면 경제적으로 얻을 것이 별로 없는 이곳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고, 우리에게는 백지의 상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연구하는 학자도 알고 있는 지식도 상대적으로 빈약한 곳입니다.

 

오리엔트 문명과 이슬람제국을 제외하면 가르치는 선생도 배우는 학생도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수없이 치러진 각종 시험에서 상대적으로 출제 빈도가 아주 낮은 곳이지요

 

그러나 이 지역은 일찍이 고대문명을 꽃피웠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발상지이며 석유의 매장량이나 생산량이 세계경제에 영향을 줄 만큼 중요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고 따라서 세계인의 관심이 이곳으로 집중되고 있었으나 이곳을 지배했던 왕조들 특히 고대국가는 자신들이 남긴 체계적인 역사가 없었기 때문에 구약성서나 그리스, 로마의 역사에 단편적으로 나오는 것을 토대로 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대규모 점토판 문자가 출토되고 이것이 해독됨으로써 고대의 모습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하였는데 그 양이 너무나 방대하고 복잡해서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을 훨씬 능가합니다.

 

그 복잡한 이야기를 다 늘어 놓는다는 것은 "알기 쉬운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알기 어려운 역사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이를 피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 양피지에 기록되어 전해온 구약성서의 내용을 따라 잠시 고대의 이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먼저 성서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약(約)"이란 Testament의 역으로 "신과 인간과의 계약"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언행을 기록한 책을 신약(New Testament:신과의 새로운 계약)으로 부르면서 그때까지 있었던 유다교의 경전을 오래된 신과의 계약, 즉 구약(Old Testament)이라 불러야 구분이 되겠지요,

 

이를 합쳐 Holy Bible(혹은 Holyscripture)이라 하였고 이를 漢譯으로 聖書라고 높여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구약성서란 정작 유다 교도들은 율법, 예언자(선지자), 제 문서 등으로 불렀고 구약이니 신약이니 하는 것은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율법(헤브루어Torah:영어Law)은 여호아(야훼 혹은 야야훼가 옳다고 함) 의 게시를 전하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이른바 모세5서를 가르치고 지도하여 신의 계율에 복종케 하는 것으로서, 시대의 흐름과 통치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 저리 바뀌는 법률과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Torah의 의미는 신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신의 동의 없이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법이라 해서 율법이라고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1517)도 성서의 내용을 바꾼 것이 아니라, 내용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로부터 파문의 위협을 당하였으며, 새로운 교파를 이룩하게 된 것일 뿐 성서에 대한 기록 자체는 자구하나도 고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예언자는 여호아의 대변인, 즉 신의 대리자란 의미로, 여호수아, 판관기(사사기), 사무엘 상과 하, 열왕기의 상과 하, 이사야, 에레미야, 에스겔, 및 호세아를 위시한 12예언자 등의 언행록을 말하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영웅적인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를 철저히 배격한 탓으로 전승기념비나 어떤 기념물도 남긴 것이 없고, 사울이나 다윗 등에 관한 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나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없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수메르인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은 수많은 전승기념비, 각종 기념물을 비롯하여 점토판에 자신들의 공적을 새겨 두었고, 이것이 현재 발굴을 통하여 세상에 밝혀짐으로서 그들의 역사가 세상에 들어 나게 되었는데, 반대로 이스라엘 인들은 구약성서라는 훌륭한 역사를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인 유물을 남긴 것이 없어서 기록에만 의존해야 하는 사료(史料)의 한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 문서는 시편, 읍기, 잠언을 비롯하여 에스라,느헤미아, 역대 상과 하 등의 11편의 문서로서, 율법과 예언자가 나타난 배경등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에 곁들여진 문학과 예술, 종교적인 열정과 철학은 높은 정신 세계를 반영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 구약성서의 세계

 

Hebrew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이 지금은 한 권의 책으로 엮어져 있으나 사실은 39종의 문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고, 어느 시기에 누군가가 갑자기 쓴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동안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수정, 보완, 가필되어 유다가 로마의 지배로 들어간 기원 전 30년 경에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합니다.

 

따라서 같은 사실에도, 전 후 사이의 내용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고, 누구의 입장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홍수와 노아의 3층 방주가 머문 애라랫(Ararat) 산은 아르메니아 고원에 있는 해발 5156m의 높은 산으로 북쪽에 위치하며, 산록 기슭에서 농경과 목축이 가능한 곳입니다. 셈어계에 속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 활동무대가 이곳이거나 아니면 여러 곳에 흩어져 살던 부족 중 어느 하나가 이곳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이 시기의 민족들은 살 곳을 찾아 몇 차례 이동을 하였는데 이스라엘 민족도 남쪽으로 이동하여 바벨탑을 세우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는 것이지요.

 

바벨탑을 세운 바벨은 훗날 그리스 인들이 바빌로니아로 이름 지은 메소포타미아 평야, 오늘날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만 사이로 남쪽에 해당합니다. 여기는 점토판과 벽돌을 만들 수 있는 진흙이 풍부하고, 물과 기름진 평야는 농경에 적합하며, 사방으로 통한 지형은 교역에 적합한 곳입니다.

 

자연적으로 여러 왕국과 여러 종족(부족)이 협력하고 다투면서 지냈는데 그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도 일원으로 살고 있었겠지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이스라엘인(헤브라이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서쪽 가나안(Canaan)(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등 지중해 연안 땅)에 들어온 것은 약 4,000년 전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부족의 수호신으로 야훼(여호와)의 신앙을 확립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유대(유다,유태) 그리고 헤브루(헤부르, 히브리, 헤브라이)등의 용어는 사용처에 따라서 혹은 역사적인 배경에 따라서 내용이 다를 수 있으나, 동의어(同意語)라는 전제하에서 생각하는 것이 편합니다.

 

가나안이란 이스라엘 민족의 활동무대로서 화려하게 성서에 등장하지만 여기에서 처음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페니키아 인들로서 그들은 우가리트, 비블로스, 시돈, 티루스 등의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였고, 해외 도처에 식민도시를 건설하였는데 그 가운데 오늘날의 튀니지에 건설한 카르타고는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번영하다가 이른바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146)으로 로마에 병합되어 자취를 감추고 현재는 그 유적만이 튀니스의 북쪽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알파벳 문자의 창시자는 아니라고 해도 개량과 전파 자로서의 영예를 누렸다는 사실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을 줄 압니다.

 

가나안에서 활약한 이름들 가운데 하비루의 역할에 대하여 여러 고문서는 적고 있습니다. 이들은 잡다한 종족의 하층민 집합체로 구성되어 군도(群盜), 유랑민, 호족의 용병 등으로 활약하였다고 보여지며, 그들만의 신을 모셨다고 합니다.

 

이와 더불어 가나안에서 활약한 것은 필리스티아의 사람들이란 뜻을 가진 블리셋 인이었는데 이들이 이스라엘인의 원수로 교양없고, 잔인한 바다의 민족으로 성서에 등장하나 오늘날 연구를 통해서 살펴보면 시리아나 아나톨리아에서 이주해온 셈어족의 한 갈래도 추정하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밝혀진 이유는 없지만 이스라엘의 일부 부족은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이주하였다가(3500년 전), 이집트의 생활에 견딜 수 없어 모세(Moses)의 인도로 이집트를 떠나 시나이산에서 야훼로부터 10계를 받아(BC 1200년경) 일신교 숭배를 확립하고

 

다른 유목민의 집단도 규합하여 유대교의 초기 사회 형태가 성립되었다고 합니다. 모세라는 이름은 이집트식의 이름이라고 하며, 과월절 이야기 등으로 미루어 보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살다가 새로운 곳을 찾아 이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Moses를 따라 이집트에서 건너온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이곳에서 오래 전부터 정착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합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찾아 북쪽으로 나아가 요르단 강을 건너 제리코(Jericho)를 중심으로 팔레스티나를 정복하여 12부족을 정주케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가나안 시대가 다시 전개되는데 여호수아로부터 사뮤엘 까지 즉 왕의 제도가 생겨난 기원전 1020년경까지의, 백 수십 년 간을 쇼페트의 시기라 합니다.

 

쇼페트란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각 부족이 합의하여 경험 많은 지도자를 뽑아 전투의 지휘를 맡기고 또한 그 지휘에 따랐는데 이를 쇼페트라 하였습니다. 이들은 평시에도 재판등의 사무를 통해 실질적인 지배력을 가진 최고의 통치자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사(士師)라고 번역했다가 지금은 판관(判官)으로 고쳐 쓰기로 기독교 제 종파가 합의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11세기 사울은 이집트의 지배가 쇠약하여진 틈을 이용하여 가나안 땅의 선주민 펠리시테인(필리시티아인)과 싸워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고,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은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이 곳에 왕궁과 여호아 성전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뒤부터 다윗 왕가와 여호아의 성전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족적 자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거인 골리앗과의 싸움, 피렌체의 메디치 광장에 세워진 미켈란젤로의 동상으로 유명한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시대의 이스라엘 왕국은 전성시대를 이룩하였으나 솔로몬 왕이 죽은 뒤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대(유데아) 왕국으로 분열되었고(925년경 BC)

 

그 후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에 아시리아 왕 사르곤 2세에게, 유대 왕국도 BC 586년 신(新)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 살)에게 수도 예루살렘을 점령당하고 각각 멸망하였습니다.

 

이 때 유대인은 바빌론으로 붙잡혀가 50여년간의 포로생활을 했는데 이를 "바빌론의 포수"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선민(選民:chosen people)과 메시아(구세주) 사상이 한층 더 자리를 잡은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습니다.

 

BC 538년 신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2세는(우리나라 성서에는 고레스로 기록)다음해 유대인들은 해방, 귀국케 하였고, 그 후 다리우스대왕은(우리나라 성서에는 다리오로 기록)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교를 성립시키는데 공헌했다고 합니다. 바빌론의 포수 생활에서 유대인을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한 페르시아 제국으로 이야기를 옮깁니다.

 

나. 페르시아(Persia) 제국의 성립

 

기원전 7세기경 페르시아 인들이 우르미아(Urmia)호 남서 쪽 파르스아의 땅에서 다시 남동 방면으로 이동하여 새 영토를 확장하고 이를 파르사(Parsa : 현재의 fars)라고 하였는데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이 지방 명에서 유래합니다.

 

메디아 인과 동시에 이란고원으로 침입하여 정주한 페르시아인은 10여 부족으로 나누어 있었는데 부족의 연맹 장으로 아케메네스(Achaemenes)를 왕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아케메네스의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그 후 여러 왕조가 겹치면서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편의상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들이 조선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조선왕조(이씨조선) 등으로 구분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크게 번성한 것은 키루스2세(Cyrus II: 559-531) 때로서 외조부의 나라인 메디아를 정복하여 페르시아 인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였고,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 전역을 순식간에 정복하여 고대사에서 최후 최대의 제국건설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같은 계통이었던 메디아를 정복한 키루스 대왕은 너그러운 정책으로 이를 포섭해 흡수하고, 에게 해의 통상로를 장악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던 리디아를 낙타부대로 쳐들어 갔는데 기마병으로 맞선 리디아의 말들은 난생 처음 보는 낙타의 이상한 모습과 그 특유한 냄새에 놀라 도망함으로서 강력한 리디아를 정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BC 546)

 

. 민첩한 말이 둔탁한 낙타에게 겁먹고 달아났다?는 사실을 두고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분석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런 것이 전술일까요? 우연일까요?

 

리디아를 정복하여 이미 그곳에 있던 그리스 인들의 식민 폴리스를 통해서 서방세계의 실상을 상세히 알게 되고, 여기에 두 개의 주를 설치하여 경제적 실권을 얻는 동시에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북으로부터 포위하는 전략상의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였고, 7년(545-539 BC)의 정복사업으로 카스피해를 거쳐 중앙아시아 일대를 정복하여 주를 설치하고 제국의 영토에 편입하였습니다.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신바빌로니아 왕국(아카디아 왕국이라고도 함)의 나보니두스왕이 현실과 유리된 정책으로 민심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키루스는 이 기회를 이용, 변변한 싸움 한번없이 바빌론을 점령하여 항복을 받았고(539 BC) 바빌론에 입성한 키루스 대왕은 너무나 감개 무량하여 스스로 다음과 같은 칭호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키루스, 세계의 왕, 위대한 왕, 위력있는 왕, 바빌론의 왕, 수메르와 악카드의 왕, 사계의 왕" 등등 세상에 존재하는 높은 칭호는 모두 사용하였으니 이는 중국의 시 황제를 능가하는 것으로,

 

이후 이란의 왕을 샤(하)안샤아(Shahanshah) 즉 "모든 왕의 왕"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키루스의 업적은 신의(神意)를 따라서 평화를 실현하는 해방자로서 각국의 종교와 풍속, 관습을 존중함과 동시에 신바빌로니아가 수도에 모아둔 각처의 신상(神像)들을 그 나라의 신전으로 되돌렸으며, 이런 와중에서

 

바빌로니아의 포수(捕囚)로 묶여 있던 유다인을 해방하여 그들의 고향 가나안으로 돌려 보냈습니다(537 BC).

 

이는 유다 인에게는 해방인 동시에 키루스 대왕에게는 이집트 정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나, 그는 생전에 이집트 정복은 보지 못하고 전장 터에서 사망하여(529 BC) 파사르가다이로 옮겨져 간단한 구조로 마련된 묘에 매장되었습니다.(오른쪽의 사진)

 

대제국의 동쪽 끝 시리아사막에서 전사한 키루스왕의 여한은 서쪽 끝에 위치한 나일의 이집트를 정복하지 못한 것으로서 그 임무는 그의 장자 감비세스2세(Cambyses II: 530-522 BC)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생을 암살하여 내분을 처리하고 부왕의 훈련된 군대를 이끌고 가나안을 지나 이집트를 침입하여 수도 멤피스를 점령하여 오리엔트 통일의 꿈을 실현하였습니다(525 BC) 그러나 멋모르고 서쪽으로 파견했던 그의 군대가 리비아의 모래바람에 휘말려 전멸하고 이디오피아에 출정한 군대도 보급로의 차단으로 실패하였으며 본국에서는 반란의 소식이 전해져 이집트 경영을 포기하고 귀환 중 자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자살에 대한 의문은 구구하나 비명횡사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캄비세스에게는 후사가 없었음으로 그를 따라 이집트에 원정했던 그의 삼종제(8촌 동생)인 다리우스1세(Darius I : 522-486 BC)가 즉위하여 페르시아의 운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각지에서 반란이 끊이질 않아 1만명의 친위군을 편성하여 19차에 걸친 전쟁으로 왕을 잠칭한 9명을 타도하고,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걸친 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520 BC)

 

다. 페르시아 제국의 발전

 

다리우스1세(페르시아명 다리야바우시1세)는 제사장 가우마타 등 반역의 무리들을 정벌하고 상세한 내용을 비시툰의 산길 절벽에 새기게 하여 왕위계승에 대한 정통성을 확립하고.

 

BC 518년∼BC 510년에 걸쳐 인도의 펀자브 지방, 소아시아의 여러 그리스 식민폴리스를 정복하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발칸반도의 트라키아를 지나 국토의 북변을 자주 침범한 스키타이인(人)을 정복하기 위해서 다시 도나우 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나 스키타이의 후퇴작전과 후퇴하면서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 이른바 초토작전으로 스키타이를 멸망시키지는 못했으나, 우랄 통상로를 확보하였고 마케도니아에 종주권을 인정받았습니다.

 

대왕의 에게 해와 흑해로의 진출은 그리스세계와 충돌하여 두 번에 걸쳐 그리스 본토에 원정하였는데, 첫 번째는 사위에게 지휘를 맡겼으나 중도에서 실패했지만 트라키아를 확보하였고, 두 번째는 마라톤 전투에서 그리스의 중장보병의 밀집대형에 밀려 전체적인 그리스 지배는 역시 실패하였지만 많은 폴리스를 영토로 편입하였습니다. 이것이 페르시아 쪽에 본 페르시아 전쟁입니다.

 

다리우스 대왕의 진가는 탁월한 행정 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하여 광대한 영토를 20수주(數州)로 나누고 각 주마다 사트라프(Satrap)라고 하는 장관을 두어 징세(徵稅)와 병역(兵役)등의 행정을 맡겼고, 군사권은 군 사령관에게, 대왕에게 바치는 속주 통치의 기록사무는 비서관에게 부과하여 권력을 분산하였으며,

 

또한 이 사트라프의 행동을 감시하고 중앙과 연락을 담당하는 ‘왕의 눈’과 이를 보좌하는 지방의 ‘왕의 귀’를 두었습니다. 중앙집권의 필수적인 조건인 교통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서,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전장(全長) 2,400 km의 "왕의 길"(王道)을 건설하고, 역전제(驛傳制)를 채택하여 각 역에는 말을 두고 역과 역 사이를 릴레이식으로 연결하여 신속하게 중앙정부의 명령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통로로, 전시에는 군용도로 이용되었고, 또한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습니다.

 

이 역전제(驛傳制)와 사트라프 제도는 그 이후 오랫동안 동방의 여러 나라에서 통치제도로 답습하였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민족종교 조로아스터교의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고,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 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에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웅대하게 만들었는데 그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오른쪽 그림 참조)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습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습니다(BC 449). 그후의 왕계는 이름만 복잡할 뿐 별다른 내용이 없습니다. 참고로 훑어 보고 지나가면 됩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2세는 재위 수십 일 만에 암살되었고, 동생 다리우스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이 무렵부터 궁정의 내분과 지방의 반란이 빈번해지기 시작하여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즉위한 무렵 당시 소아시아의 장관이었던 동생 키루스가 그리스 원병(援兵)을 얻어 제위(帝位)를 빼앗으려 진공(進攻)해 왔으나, 바빌론 전방(前方)에서 전사하였다고 하며,

 

다음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시대에는 이집트의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이를 가까스로 진압하기는 하였으나 다음 왕 다리우스 3세가 즉위할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영:Alexander)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도처에서 제국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제압,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Persia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으며, 다음해 다리우스는 암살되고 페르시아제국은 멸망하였습니다 (330 BC)

 

Persia 가 멸망 후 Rome가 지배할 때 까지를 Helleism시대(330-31 BC)라 하고 문화의 중심도 이집트의 알랙산드리아로 옮겨 갔습니다.

 

라. 조로아스터교 (Zoroastrianism)

 

조로아스터(원명:자라투스트라)가 만든 종교라 해서 조로아스터교라고 합니다. 불을 신성시하고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를 믿는다 하여 마즈다 예배교(마즈다야스나:Mazdayasna)라고도 부르며, 한자로는 불을 숭배하는 종교라 해서 배화교(拜火敎)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현교라고도 불렀습니다.

 

고대 인도와 이란에 들어온 아리아인들의 종교적 공유재산(하늘, 땅, 숲, 비, 바람, 공기, 해 등의 자연현상)에 근원을 둔 여러 신들을 최고의 신 아후라 마즈다 밑에 두고, 우주를 선과 악의 두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전 아베스타에 의하면, 태초에 앙그라 마이뉴(아리만)는 악을 택하고, 스펜타 마이뉴(아후라 마즈다의 성령)는 선을 각각 택하였는데, 인간도 생각, 말, 행동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의 상대가 없으면 의미가 없는 상호관계에 있기 때문에 아리만을 아후라 마즈다의 쌍둥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두 신의 영역은 선(善)과 악(惡)이라는 상반된 성격으로 결국은 다투게 되고

 

처음에는 선의 천사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연적 특성이 약화되고 아후라 마즈다의 뜻대로 움직이는 비주체적 천사가 되어, 저마다의 추상적 직능이 선과 악의 이원론과 함께 강조됨으로써 세력이 약해지고, 악의 천사들은 아리만을 중심으로 주체성을 회복하고 아후라 마즈다와 직접 대결하여 이기게 되어 악의 세상(암흑의 세계)이 되었다가

 

선과 악을 구별하는 방법과, 악의 편을 드는 자를 멸망시키는 방법을 조로아스터는 아후라 마즈다에게 물었고, 이 신은 결국 아리만을 타파하고 전세계를 정화하여 새로운 세계를 확립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유목사회였던 페르시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그들의 독특한 장례에 따라 풍장(風葬:시체를 그늘진 곳에 두는 것)이나 조장(鳥葬:시체를 바위 등에 올려 놓는 것)에 의해 들개들과 독수리의 밥이 되지만, 영혼은 천국의 입구까지 와서 조로아스터를 올바로 믿은 자는 그곳에 있는 다리(칼이라고도 한다) 위를 안내받으면서 무사히 건너 천국에 들어가나, 거짓으로 믿은 자는 발을 헛디뎌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합니다.

 

조로아스터가 가고 3000년이 되면 세상의 종말이 오는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나 천국·연옥·지옥에서 모든 인간이 부활하고, 용해된 금속으로 최후의 심판이 행해져 악은 멸한다고 합니다. 이 사상은 유대교·그리스도교·불교·이슬람교의 일부 등 그 후 종교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인 조로아스터(BC 630 ?~BC 553 ?)에 대해서는 그가 역사상의 인물이라는 것과 고전 작가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고,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BC 7세기 말에서 BC 6세기 초기, 그의 나이 20세경에 종교생활에 들어가서 30세경에 아후라 마즈다의 계시를 받고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하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주신(主神). 아후라는 "주(主)"를 의미하는 칭호이고 마즈다가 원래의 신 이름인데, 현자·지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경전인 아베스타에서는 이 두 낱말을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으나, 아케메네스 왕조(BC 7세기∼BC 4세기)의 많은 비문에서는 언제나 하나로 붙여 쓰고 있습니다. 최초의 생식자(生殖者), 세계의 창조자로서 빛과 어둠을 만들어 때를 정하고, 질서의 아버지로서 태양과 별의 길을 만들었으며, 선의(善意)의 창조자이라고 합니다.

 

종교적인 수식어나 용어를 빼고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은 선신(광명)과 악신(암흑)이 있어서 다투다가 처음에는 악의 신이 승리하여 암흑의 세상이 되나 최후의 승리는 선의 신에게 돌아가고 광명의 세상이 되는데, 인간도 이를 믿고 좋은 일을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가고 거짓으로 믿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3천년 후에는 종말이 오는데 이 때 구세주가 나타나 인간은 부활되고 착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새로운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종교에서나 흔히 있는 이야기입니다. 불교에서는 미륵과 극락,그리고 윤회사상, 기독교에서는 천국과 지옥, 구세주, 부활, 최후의 심판, 그리고 종말론 등 많이 듣던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융성과 함께 이 종교도 크게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페르시아 제국의 쇠퇴와 맥을 같이하여 지금은 이름만 겨우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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