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간의 직장 생활을 마쳤다. 집으로 나앉으니 직장 다닐 때와 다른 변화를 느낀다. "밥 먹자, 술 마시자"하며
다가오던 사람들도 뜸해졌다. 명절 때 주방에 놓이던 선물 상자도 보이지 않는다. 수시로 울리던 전화벨도
잠잠해졌다. 친지나 지인이 자주 와 앉던 거실 의자도 신문 잡지들만 쌓인다.
아내마저 내 곁에 있을 때가 드물다. 물론 천성적으로 무뚝뚝한 성격에다 아기자기한 말재주라곤 없는
내 탓이기도 하지만…. 친구들은 집에서 가끔 손자, 손녀들과 논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재미도 누리지 못한다.
자식들이 외국으로 제 갈 길로 떠났기 때문이다. 아들은 미국으로, 두 딸은 일본으로.
그러니 나이 든 부부만 사는 작은 영지(領地)에 가장이라고 집에 버티고 있어 봐야 아내는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틈만 나면 수영이다, 헬스센터다 하여 밖에 나가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간다. 월급 타다 주던 시절에는
끼니때만 되면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준비해 놓고 "국이 식어요"라고 따뜻하게 맞던 아내였다.
그러던 아내가 달라졌다. 어떤 때는 친구들과 밥 먹고 들어가니 중국 음식을 시켜 먹으라고도 한다.
가장이 집을 지키고 있어도 신경을 별반 쓰지도 않는다. 하기야 친구들과 술자리에 앉으면,
빗자루에 쓸려도 쓸려나가지 않고 빗자루에 달라붙는 '젖은 낙엽'처럼 아내에게 붙어 다니는 신세란 한탄이
서로 나오니, 나만이 겪는 처지는 아닌 듯싶다.
만감이 서린다. 일본·미국·브라질 등지로 근무지를 옮겨 다니며, 날마다 야근을 하고 휴일 없는 고된 외국 근무를
했는데 "이런 신세가 됐나"싶어 심정이 착잡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평생 월급 받을
직장이라도 구해 볼걸…."
전화가 온다. 막내딸이다.
아빠 엄마 결혼 40주년이라고 일본에서 오겠다는 것이다. 그 전화를 받자 아내는 신이 났다.
내겐 주지 않던 인삼을 달이고, 비싸다고 사 먹지 않던 명란젓도 사오며 주방을 들락거린다.
나는 며칠간 딸아이와 같이 지낼 희망에 부푼다.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맛있는 집에 가서 식사도 해야지 하며 나름대로 찾아갈 곳의 순서도 꼽았다.
그랬는데 처음부터 기대가 어긋난다. 공항에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딸애는 엄마와 같이 전에 다니던 미장원에
다녀온다며 둘이 팔짱을 낀다. '이럴 수가!' 하지만 "아빠 미안해요. 빨리 돌아올게요"라고 미소 지으며 나서는
딸애를 말릴 수 없었다. 오랜만에 딸과 오붓이 즐기려던 오후 일정을 모두 접어야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더니.
홀로 멍하니 응접실에 앉아 생각을 하니, 내가 이해심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딸애의 머리를 커트하러 미장원에 간 아내를 시샘하다니, 언제부터 내 마음이 이렇게 좁아졌을까.
전에는 이해심이 많다는 말을 듣곤 했는데…. 자탄하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배고프지요? 딸애가 사 온 '삿포로' 라면이라도 끓여 드시고 조금만 더 기다려요."
옷가게 몇 군데를 들러서 온다는 아내의 전화이다.
쇼핑은 나와 함께 다녀도 되지 않느냐며 짜증을 냈지만, 곧 들어간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그러던 아내는 석양녘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안방에서 사 온 옷들을 입어 보며, 근래에 듣지 못했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TV를 본다. 하필이면 '파고다 공원 노인들의 하루 생활'이란
특집 프로그램이다.
지난날이 그립다.
가족 데리고 외국에 나가기가 어려웠던 시절에 "아빠 덕에 애들이 미국에서 공부하게 되었다"고 내 손을
꼭 잡던 아내의 그 정겨운 표정은 이제 어디로 간 것일까.
그때는 아내도 애들도 내 곁에 있었다. 백화점을 갈 때도 동네 식품점을 들를 때도 나만 따라다녔다.
이제 내 힘도, 가정에서의 영향력도 점점 시들어 가고 있으니….
바깥이 어둑해져서야 아내와 딸은 거실로 나온다. 딸애가 선물이라며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내게 건넨다.
"저녁은 외식해요"라는 딸아이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아내는 "그러자"며 맞장구를 친다.
둘만 집에 있을 때는 자기 생일날에도 식당 음식이 비싸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아내가 아닌가.
복요리가 좋겠다며 아내는 선뜻 앞장을 선다. 절대로 싸지 않은 생선 요리를 모처럼 먹어 보자는 심사다.
밥 사 달라고 할 때나 끼워 주는 서러운 가장이 되었다.
식당 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아내는 딸과 연방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하긴 아내의 원기도 약해졌다. 낯선 외국에서 호강은커녕 찾아오는 국내·외 손님 접대에 집안을 쓸고 닦고,
항상 행주를 들고 살았다. 이제 앞치마 벗고 바깥바람을 좀 쐰들 그리 탓할 일이 아니다. 애들 없는 빈 둥지에서
아내인들 무슨 힘이 솟겠는가. 축 처진 어깨와 주름진 얼굴이 그저 안쓰럽다. 그래도 막내딸을 보더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닷새 동안 집에 있던 딸애를 공항에 보내고 오면서 내 삶을 뒤돌아본다.
아이들이 커서 제 갈 길을 떠나고, 아내도 나이가 들어 자기 일에 바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때문에 좀 쓸쓸함을 느낀들 그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필연적인 수순이다.
언젠가는 홀로 될 연습을 하는 것이 요즘의 내 삶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고 보니 당연한 일에 괜히 속병을 앓았다.
----정병욱 전 코트라 무역 중역---
"평균 67세… 퇴직자들이 세운 퇴직자들의 천국"
현대重 출신이 만든 명성산업… 성실성·기술력이 값진 자산
울산광역시 온산읍 ㈜명성산업 야외 작업장. 1만3223㎡(약 4000평) 넓이의 작업장에는 푸른색 작업복에
안전모를 쓰고, 분진 방지 마스크를 쓴 직원 30여명이 용접작업에 한창이었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고
시퍼런 불꽃이 곳곳에서 번쩍였다.
마스크와 안전모를 벗고 다가온 전국명(74)씨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현대중공업 하도급업체에서 30년 넘게 일한 전씨는 정년 퇴직 후 명성산업에 입사했다.
"일을 하니까 돈도 벌고 건강도 지키고, 사는 것이 지루하지도 않습니다. 놀면 뭐한답니까." 전씨는 70세를
넘어서면서 기력은 좀 쇠했지만 기술은 전혀 녹슬지 않았고 하루 8시간 일하는 것도 끄떡없다고 했다.
선박용 철판을 조립·가공해 납품하는 이 회사 직원들(50명)의 평균 나이는 67세다.
70세가 넘은 사람도 6명이나 된다. 정년 제한도 없다. 직원 대부분이 현대중공업이나 하도급업체에서
20~30년씩 일하다 퇴직한 사람들이다. 김창원 사장(73)은 "남들은 거들떠도 안 보는 퇴물들을 불러 모은 것
같지만 다들 산업 현장의 백전노장"이라고 말했다. 퇴직한 베이비붐 세대는 재취업 전선에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지만 이곳에서는 경험이 많을수록 환영받고 있다.
명성산업은 퇴직자들이 창업하고, 퇴직자들이 재취업해 일하는 회사다.
김 사장은 30년 동안 선박 조립만 해온 기술자로 57세 때 현대중공업에서 정년 퇴직했다.
작은 부품회사에 들어가 하루 6만~7만원을 받으며 일했지만 젊은 직원들은 '늙은이가 왜 아직도 현장에 와서
방해하느냐'며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그는 "평생 선박 부품을 만져온 실력을 보여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그러고는 2001년 다른 현대중공업 퇴직자 11명과 함께 이 회사를 세웠다. 11명 주주들의 평균 연령은 63세다.
처음에는 다들 '퇴물'들이 제대로 제품을 만들까, 납기일은 맞출까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노련한 기술력으로 결함 없는 제품을 만들고, 납기일에 앞서 제품을 전하자 이런 시선은 싹 사라졌다.
창립 초기 10억원 수준이던 연 매출액은 조선업 호황을 타고 2007년 30억원까지 늘었다.
김 사장은 "경험은 돈 주고도 못 산다"며 "우리가 오랜 시간 쌓아온 노하우는 젊은 인력들이 쉽게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에 부부가 정답게 지내려면?"
은퇴한 남편과 사는 오가와 유리씨. 몸이 좋지 않아 대학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더니 의사는 2주 정도 입원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보통의 주부라면 몸이 아픈 것은 둘째 치고 남편 걱정부터 앞설 대목이다. ’남편 밥은 누가 차려주지? 빨래는
또 어쩌고? 집안 청소와 쓰레기 분리수거는?’
그러나 오가와 씨는 이런 걱정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때를 대비해 남편을 잘 ’키워’ 왔기 때문이다.
’은퇴 남편 유쾌하기 길들이기’(나무생각 펴냄)는 은퇴한 남편을 자립적으로 키운 저자의 경험을 소개하는 책이다.
첫 시도는 점심상이었다. 점심을 먹는 남편에게 저자는 망설이다 단호히 말을 꺼냈다.
“내일부터 점심은 직접 차려 먹고 설거지도 하세요.”
남편은 순간 당황하더니 이내 점심상이 수고롭다면 김치와 밥만 있어도 괜찮다며 하소연했지만,
저자는 요지부동이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가르쳐줄게요. 평소 먹는 음식은 마음만 먹으면 금방 배울 수 있어요.”
그로부터 6년이 지나고 나서도 남편은 여전히 인스턴트 라면과 같은 간단한 음식 네 가지밖에 할 줄 모른다.
그러나 저자는 ’점심은 직접’이라는 규칙이 정착했을 뿐더러, 그전에는 인스턴트 커피도 탈 줄 몰랐던 남편이
이 정도라도 해내는 것은 대단하다고 칭찬한다.
어쨌든 그때 이후로 저자는 단 한 번도 점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남편과 다툰 적이 없다고 한다.
이어 설거지와 욕실 청소 같은 일을 남편 몫으로 돌렸다.
또, 매주 달라지는 ’이 주의 목표’도 남편이 해야 하는 일이다. 세차하기, 욕실 천장 닦기, 정원의 잡초 뽑기….
임무를 완수한 남편에게는 맛있는 간식이나 점심상을 상으로 준다.
저자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남편은 전혀 어려움 없이 집안일을 잘해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빨래하고 이불을 말리고 청소기를 돌렸어.
아침에는 빵과 우유에다 채 썬 양배추와 토마토를 먹었어. 쓰레기는 분리해서 내놨고.”
저자는 남편을 자립적으로 키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혼할 마음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남편은 빈둥빈둥 놀고, 자신은 수발을 드는 결혼생활을 지속한다면 오순도순 살기는 글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편과 집안일을 분담하는 지금은 부부관계도 더 좋아졌다.
은퇴 직후가 10점 만점에 5점 정도로, 같이 있어도 의식하지 못하는 ’공기’ 같은 사이였다면 지금은 8점 정도는
된다. 집안일을 분담하니 서로에게 스트레스가 없고, 함께 여가를 보내는 시간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첫댓글 남의 일이 아니지.............
사단 연병장에서 늠름한 모습으로 전역 사열을 받던 씩끽하던 박장군 께서 이런글을 가까히 해선 않되지 !
그동안 우리가 주연배우였다면 조연도 치워버리고 바로 관객이 돼버리면 어떨까. 관객이 되면 눈과 귀 그리고 손바닥만 있으면 돼. 봐주고 들어주며 손뼉이나 실컷치지 뭐. 관객이 있어야 연극배우 노릇 장수할 수 있듯이 이 노릇만 잘해도 인생의 반푼은 건질 수 있지 않을까. 이제 퇴직하여 퇴물같이 퇴패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보이지 않는 손(국부론?)으로 그동안 다지고 배풀어온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버리고 보살펴만 주면 될 것인데, 허나 친구와 사회 그리고 나, 사람이라는 것이 뭐당가? 이거 어떻게 해볼 수 없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