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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기옥's 수필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모리코트
'박사리 사건'의 어제와 오늘
박기옥
‘박사리사건’ 발생부터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운동을 펼치는 오늘까지 내가 추진한 일, 향후 대응 방안에 대하여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응원을 받고자 이 글을 쓴다. 비슷한 사건으로 고민하시는 분이 있다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박사리사건의 발단 경위
박사리는 뒤로는 팔공산 능선이 병풍처럼 쳐져 있고, 남녘으론 무학산의 상서로운 서기가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산골치고는 제법 넉넉한 들판을 품었다. 갓바위가 거느린 골짜기에서 발원한 실개천이 모여 제법 큰 거랑을 이루었다. 소위 박사천이다. 내는 마을을 감고 돌아 금호강으로 흘러간다. 웬만한 가뭄에도 물줄기를 놓지 않고 들녘을 촉촉이 적신다. 1912년, 개화기에 교회를 세웠으니 일찍 문명을 받아들인 마을이다. 그러한 마을이 하룻밤 사이에 폐허가 되었다. 해마다 음력 시월이 되면 박사리는 깊은 슬픔에 휩싸인다.
박사사건은 1949년 11월 29일(음력 10월 10일) 저녁에 일어났다. 내가 태어난 지 겨우 칠 개월이 지나서다. 밤하늘에 차오르는 상현달이 고샅과 초가지붕에 골고루 뿌려대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 온 마을에 괴기가 감돌았다. 총과 죽창, 긴 칼을 찬 검은 그림자들이 골목을 점령했다. 중요한 연설을 한다며 사랑방에서 놀고 있는 청·장년들을 논마당에 끌고 나갔다.
어디서 총성이 들렸다. 그것을 신호로 마을 전체가 삽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공비들은 집집이 습격했다. 도망칠 기미가 보이면 바로 몽둥이와 칼을 휘둘렀다. 학살의 현장에는 놈들의 무자비한 광란의 칼춤이 바람을 갈랐다. 잔인한 칼날에 꽃다운 젊은이들의 선혈이 낭자했다. 그들은 두어 시간 만에 무고한 청·장년 38명을 죽이고, 16명에게 큰 상처를 입혔으며, 초가 108채를 불태웠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박사리는 평온를 되찾았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많은 유족이 생계를 위해 고향을 등지고 객지로 나갔다. 67년(2016년 현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건의 상처도 잊혀 갔다. 나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의 아픈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수많은 이야기 중에서 유독 '그날의 사건'을 선택한 것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 여겼기에. 누군가가 증언하고 기록하지 않으면 그날의 참상은 역사 속에 깊숙이 파묻혀 버릴 테니까.
막상 67년이 지난 일을 추적하려니 어려움이 많았다. 취재하는 과정에서 묻힌 사실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음에 보람을 느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망자의 유족과 중상자 가족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들었다. 때로는 전화로, 때로는 편지로. 직접 피해를 당하지 않았지만, 같이 마음 아파한 이웃도 만났다. 울먹이며 진술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다. 특히 부상자 중, 생존자의 증언을 들을 때는 그도 울고 나도 울었다. 사망자 한두 명은 후손이 끊어져 아팠던 이야기를 듣지 못해 못내 아쉽다.
글을 쓰면서 실체적 진실을 객관적 잣대로 서술하고자 노력했지만, 문득문득 목울대를 치미는 감정을 다스리는 데 애를 먹었다. 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충실한 내용을 쓰고자 노력을 기울였지만, 힘이 미치지 못해 아쉬움이 크다. 돌아가신 분은 말이 없다. 영령들이 겪은 찰나의 심정을 어찌 글로써 엮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질곡의 삶을 살아온 유족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이것이 영령들과 부상자를 위한 책무라 여겼기에. 내가 쓴 글이 지난 역사를 반추하고 내일을 밝히는 자그마한 등불이 되었으면 좋겠다. 비명에 간 38위 영령에게 삼가 이 글을 바친다.
- 작가의 시선
공비들의 작전은 치밀했다. 놈들은 학살의 현장을 크게 네 곳으로 잡았다. 그 당시 인명과 지명이다. 박명한의 집 앞 논 마당·정원덕이 운영한 정미소 마당·개미각단 홰나무보·부욱 한육만의 집 근처이다. 그들은 골목 단위로 장정들을 끌어 모았다. 집집이 습격했을 때, 도망칠 기미가 보이면 현장에서 바로 몽둥이와 칼을 휘둘렀다.
사망 38명, 중상 16명, 초가 108채 소실! 불과 몇 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기에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사망자의 비명, 중상자의 신음, 유족의 통곡이 마을을 흔들었다. 덩달아 소·돼지·개·닭 울음소리까지. 불길에 휩싸여 우지직우지직 집 무너지는 소리, 단지 터지는 소리가 고요한 시골 밤의 정적을 갈랐다. 뱀의 혓바닥처럼 널름거린 화마는 삽시간에 마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부상자는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 사건의 시대적 배경이다.
1945년 조국이 해방되고 6·25전쟁을 전후로 사상과 이념의 대립은 혼돈의 사회를 불러왔다. 대구사건·여순반란사건·제주사건으로 나라는 조용한 날이 없었다. 여기에 관련한 남로당과 일부 동조 세력은 토벌군에 쫓겨 산으로 도망갔다. 그들은 지리산을 총 거점으로 덕유산·운문산·신불산 등 곳곳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정부군과 투쟁해 나갔다. 전쟁이 일어나면 후방을 교란하고, 체제를 전복하려는 전술이었다. 팔공산 공비들도 같은 맥락이다.
# 사건의 줄거리다.
팔공산에 나무하러 간 동강리 도달권이 양시골兩城谷에서 공비의 소굴을 발견했다."어디에 사느냐? 신고하면 너와 너희 마을을 박살 내 버리겠다." 공비들의 서슬 퍼런 위협에 "박사리에 삽니다"고 대답했다. 공비에게 풀려난 그는 바로 지서에 신고했다. 당국은 군경 합동작전을 펼쳐 공비 78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 잔당은 동료의 원수를 갚고자 운문산 공비들과 합세하여 우리 마을을 습격했다. 소위 보복성 공격이었다. 사건이 끝나고 와촌·하양지서의 경찰과 영천 주둔군 병력이 출동하여 팔공산으로 추격전을 벌인 결과 공비 20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하였다.'(경산시지. 매일신문 1975. 6. 25) 증언에 따르면 생포한 한 명을 유족과 주민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했다. 유족들의 원한을 풀어주려는 당국의 배려일 성싶다. 나무꾼이 엉겁결에 둘러댄 대답으로 말미암아 박사리가 엄청난 피해를 보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무꾼 도달권은 왜 박사리에 산다고 대답했을까? 당사자는 세상을 떠나 말이 없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 당국은 군경 합동작전을 펼쳐 ‘공비 78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 역사 기록에 오류로 인정 됨.
# 박사리는 공비들이 주둔한 팔공산 양시골에서 직경 5.5킬로 떨어진 마을이다. 사건 이전에도 공비들은 박사리에 자주 내려와 양식과 옷가지를 약탈하는 등 행패가 잦았다. 마을에서는 의협심이 강한 청년을 중심으로 그들을 경계하며 반공정신을 키워나갔다. 공비들의 동태를 신고하는 무전기를 최중환의 집에 설치해 두고 있었다. 가까운 신한리에 간이학교가 있었고, 동사에서 청소년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신문물을 일깨우고 있었다. 박사교회에서는 박용묵 목사가 주민을 계도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눈에는 박사리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터다. 여기에 "박사리에 산다"는 나무꾼의 대답은 그들의 야만성에 불을 질렀으리라.
# 무장공비들의 작전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났다. 그들의 작전은 주도면밀했다. 시국 강연을 한다는 것을 빌미로 습격조·학살조·보초조·방화조를 짰다. 기운이 세고 강단 있는 사람을 습격·학살조로 편성하고,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사람을 방화·보초조로 편성했을 것이다. 공비들의 학살 방법은 잔학했다. 몽둥이로 먼저 뒤통수를 치고, 뒤이어 일본도로 목을 내리쳤다. 반항하면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시간에 쫓긴 공비들은 마지막엔 총을 사용했다. 총알을 최대한 아꼈을 터다. '부욱'과 '홰나무보' 에서 학살당한 청·장년 상당수는 총을 맞고 죽었다.
글을 쓰면서 자료를 수집하고자 애를 썼지만, 관련 기록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국가기록원’조차 '해당 기록이 확인 안 됨'이란 통보를 받았다. 아무리 혼돈의 시대였다고 하지만, 국가적으로 엄청스레 큰 역사적 사실이 기록으로 보존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역사는 흘러가 버린 것이 아니라 현재를 조명하는 거울인 것을.
공비들의 협박에 못 이겨 현지 주민 일부가 동참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하고 불편한 진실 앞에 마음이 아팠다. 전국에 무장공비사건이 많았다. 그러나 박사리만큼 잔인할 수 없었다. 공비들이 각지에서 일으킨 사건은 아성공격牙城攻擊 형태로 주로 관공서, 공무원, 지주 계층을 지목했다. 여타 분쟁이 좌·우익 사상의 대립으로 빚어졌다면, 박사사건은 이념 다툼과는 거리가 멀다. 순수한 양민 학살사건이다. 단지 보복적 차원에서 한 마을 청·장년을 몰살하고, 마을을 온통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그들의 노림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서받을 수가 없다.
- 고인들의 명예회복 운동, 시동을 걸다
기회 닿을 때마다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을 당국에 청원했다. 그때마다 정치인과 당국은 "힘써보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실행이 없었다. 당연히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다. 다만, 경산시에서 1961년 대동초등학교 모롱이에 반공혼비를 세웠다. 세월이 흘러 비문이 훼손되어 1985년 박사리 도로변에 ‘반공희생자위령비’를 건립하고, 2015년 3억5천을 들여 추모공원을 조성했다. 위령비와 추모공원을 만드는 과정에 어려운 과정은 략略 하기로 한다. 경산시는 매년 10월에 열리는 추모제에 제사 차림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다. 와촌면사무소에서 위령비와 추모공원을 관리하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결심
나는 우리 마을의 참혹한 일이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릴 것 같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2014년 겨울, 자료 수집에 들어갔다. 경산문협회장을 회장을 맡으면서 공인으로서의 사명감이 불을 댕겼다. 단순한 글쓰기를 떠나 살아 있는 글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논픽션 소설《체르노빌의 목소리》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레시예비치가 동기 부여를 한 셈이다. 약 2년 걸쳐 전국에 흩어진 사망자 38명, 중상자 16명의 유족, 사건을 목격한 이웃을 일일이 찾아 그들의 아픈 소리를 들었다. 조사할 때는 부상자 두 사람만 생존한 상태였다.
#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출간
책을 발간하기 전, 사망자 38명의 증언을 엮어 2016년 실시한 대구매일신문이 주최한 '제2회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응모했다. 수상 보다는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릴 수 있다면.' 하는 마음에 방점을 찍었다. 요행히 논픽션부문 최우수상을 받게 되어 매일신문은 14회에 걸쳐 전면 게재함으로써 우리 마을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 바로《박사리의 핏빛 목소리»다. 자비로 출판한 책은 유족, 자유총연맹경산시지회, 국회도서관, 국립세종도서관 등에 무료로 나눴다. 책값 명목으로 간간이 들어온 격려금 전액은 유족회와 모교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2020년 11.2. 국내 최대 가독율을 자랑하는 조선일보(최보식 선임기자)가 ‘박사리사건’을 취재, 조선일보 전면에 게재함으로서 박사리사건이 전국에 이슈화 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유수 문고에서 책 주문이 쇄도했다. 재발행에 들어간 책은 전국에 고루 배포 되었다. 최근(2022. 2.22)에는 매일신문 김태형 선임기자가 취재한 박사리 이야기를 2022.2.22 신문 전면에 게재함으로서 많은 국민이 박사리의 아픈 역사를 충분히 공유했다고 본다.
# 명예회복을 위한 탄원서 서명운동
2018년 1월부터'명예회복 탄원서 서명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우선 와촌면민을 상대로 시작했다. 이어 '경산시이통장연합회'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여 동참을 호소했다. 행사장(자인단오축제장·갓바위축제장·초·중고등학교·각종단체)을 찾아 약 5000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2018년 10월, '박사리사건' 추모제에 참석한 최영조 경산시장은 "돈으로 보상은 약속 못하지만, 탄원운동은 적극 지원하겠다."며 경산시민, 약 20.000명의 서명을 받아주었다. 경산시는 5.000 페이지에 달하는 탄원서 서명지를 제본, 6질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 2021넌 11월 25.000이 서명한 탄원서와 함께 관련 자료를 '국가권익위원회'에 보냈다. 한 동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 시점이 제2차'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발족과 겹친 셈이다. 소위 업무가 진화위로 넘어가는 단계였다. 권익위원회에 관련 서류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접수된 문건은 돌려주기 어렵다. 후속 부서에 넘기겠다." 는 답변만 받았다.
# 제2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발족에 따는 신청서 접수
2005-2010년 실시한 제1차'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진실규명이 있었지만, 박사리 유족들은 정부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진실규명에 응하지 않은 셈이다. 단체로 접수할 수 있었지만 '박사리사건유족회' 회장 윤성해는 "혼자 힘으론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술회 했다. 막중한 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유족회장의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제2차 진화위가 추진하는 이번 기회는 놓치지 말자." 유족회장과 의기투합했다. 탄원운동에 참여한 시민 25,000명의 정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 보상 여부를 떠나 진실규명을 받는 것이 영령들에 대한 후손의 기본적 예의라 믿었기에. 2021. 9월, '박사리사건유족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뜻을 모았다. 약 3개월 동안 서류를 접수, 작성했다. 2022. 2. 14. 현재 사망자 38명중, 33명. 부상사 16명 중, 15명. 合48명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진화위에 접수 시켰다. 피해자와 신청인 사이 소명하는 과정이 무척 어려웠다. 행방불명, 연락이 닿지 않은 나머지 6명도 계속 추적하여 진실규명을 받게 할 계획이다.
#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수행원 박사리 방문
2021. 11. 27.정근식 위원장과 7명의 수행원이 우리 마을을 찾아왔다. 고위직이 방문한 것은 '박사리사건'이 발생한 이후론 처음이다. A4 용지 80쪽에 해당하는'박사리사건 보고서'를 토대로 당시의 참상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하루 빨리 진실이 규명되고, 국회 입법화를 통해 소송비 등으로 인해 유족에게 2중적 피해 없이 보상을 받도록 해 달라."라는 것이 청원 요지였다. 정근식 위원장은 "유족들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하고 적극 대응하겠다." 고 말하고 유족들을 위로했다. 같이 참석한 경산시 지역구 윤두현 국회의원은 "관련법 제정에 힘쓰겠다."고 말했다.
# 생전 처음 찾은 국회
1월 초순 진화위에서 연락이 왔다. 1. 20일 '진실·화해위원원회' 주관, 입법화 설명회에 '박사리사사건' 유족회는 꼭 참석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전국의 수많은 유족 가운데 '박사리사건유족회' 를 초청한 것은 ‘박사리사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비중 있게 다루려는 것은 틀림없겠다. 사진으로만 봐 왔던 국회의사당 앞에 섰다. 왠지 우쭐해진다. 현관 앞 포토죤과 의원회관, 국회도서관 앞에서 폼을 잡았다. 왠지 어께에 힘이 들어간다.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비워내고 겸손해져야겠다.' 는 마음이 한 순간에 무너졌다. 잔디 밑에 가서야 철이 들 모양이다.
# 국회의원실 방문
유족회장 윤성해와 경산지역구 윤두현 국회의원실을 찾았다. 역시 고향까마귀다. 윤두현 의원은 세미나로 인해 자리를 비웠지만, 실시간 우리의 동정을 살펴주셨다. 시골 사람이 바로 찾아 올 수 있을지, 실수는 하지 않을지 걱정 되는 모양이다. 비서관의 안내에 따라 법안 발의자인 김용판 의원(대구 달서병)실에 들렀다. 김동훈 수석비서관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는 고향 후배(김종길)의 아들이다. 김종길은 명예 와촌면장을 역임한 나의 초등학교 후배다. 뭔가 조짐이 좋았다. 들고 간 책 《박사리의 핏빛목소리》를 ‘행정안전위’ 소속 9명의 국회의원실마다 돌리며 읍소했다. 국회식당에서 5000원짜리 점심을 떼우고 2000원 짜리 커피를 마셨다, 착한 가격이다. '민초들도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어 좋았다. 선량들도 이처럼 검소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국회 도서관 참석
국회도서관은 생각했던 것 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행사장에는 행자위 소속국회의원 서영교 김용판 김민철 김형동 백해련 오영훈 이명수 임호선 한병도 9명, 토론자 5명, 진화위·행자부 직원, 유족 합하여 50여 명이 참석했다. 행정안전위원장 서영교 의원의 개회사, 입법 발의한 김용판 의원의 입법의 당위성, 소속 국회의원들의 축사에 이어 정근식 진화위원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송상교 진화위 사무처장의 주제 발표에 이어 5명의 열띤 토론이 있었다. 토론자 모두 입법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진실규명 후 배·보상법 필요성에 대해서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지금까지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된 양민에 대해서는 소송 후 일정액의 보상을 받았지만, 적대 세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은 진실규명을 받았다 하더라고 2022. 1. 20. 현재 한 건의 보상이 없었다고 한다. 토론의 핵심은 ‘가해 주체가 국가이건, 적대세력을 불문하고 꼭 같이 보상을 받게 하자’는 것이 주제였다. 질의응답 때, '박사리사건유족회' 윤성해 회장은 “비록 늦었지만 입법 가능성에 고맙다고 말하고 보상을 받을 때까지 꼭 살아남아야겠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 2022. 2월 현재 진실 규명 진행 상황
진화위는 2022. 2. 11. 서울에 거주하는 희생자 유족부터 조사했다. 2. 23-24일 대구시청 별관에서 유족(12명)에 대해 진실규명 작업을 마쳤다. 진화위는 약 40개 항목을 설정해 놓고 질문에 들어갔다. 조사 방법은 치밀했다. 사망자 규명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부상자들의 사실관계 확인이다. 73년 전 일인지라 병원기록(당시 도립병원, 현 경대병원)은 당연히 없다. 카메라가 없으니 입증될만한 사진도 있을 턱이 없다. 오늘을 예상하고 증거자료를 갖춰놓아야 하겠다는 유족이 누가 있었겠는가? 부상자들은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남았을 뿐이다. 진하위에서는 그 당시 10살 이상(현재 나이 84세 이상)목격자의 증언을 요구한다. 마을 전체가 알고 있는 터라 별 문제가 될 성 싶지 않다.
조사관들의 책상 위에는 《박사리의 핏빛 목소리》가 놓여 있었다. 책을 토대로 기초 조사가 되었음은 틀림없겠다. 정근식 위원장은 나의 책을 꼼꼼히 읽었다고 한다. '나의 졸저가 요긴하게 써 먹히는 구나!' 이틀 동안 현장에 참석하여 유족들이 놓치는 부분을 보완 설명했다. 향후, 경산지역 거주 유족들은 3.16~18. 와촌면사무소에서 조사한다. 마지막 일정도 동참하여 유족을 대변할 계획이다.
# 최종 목적
내가 추구한 일련의 일들은 고인들의 명예회복이다. 73년 동안 어렵사리 살아온 유족들을 위로하고, 사회통합에 기여하는 일이다. 진화위에서 설정한 신청접수 기일, 2022.12.9 까지 나머지 6명의 유족을 찾아내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진실규명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배·보상법이 국회상임위·법사위·본회의를 통과하여 유족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받게 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이제 7부 능선을 밟은 것 같다. ‘지난 6년 동안 외쳐온 나의 ’핏빛 목소리‘가 희망의 메아리로 되돌아올 수 있다면!’ 이것이 나의 간절한 소망이다.
첫댓글 여러 선생님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혹여 주위에 유사한 사건으로 고민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대응방안을 친절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널리 전파하겠습니다.
수고많으십니다.
진정한 애국자십니다.
출력해서 자세히 읽어 보겠습니다.
박기옥 선생님,
정말 존경합니다.^^
박기옥 학장님 대단하십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8부9부 능선에 빠른시일내에 다다르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