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야심
눈을 뜨는 창 밖에 어렴풋한 여명이
스며들고 있었다. 설픈 잠결에서도 나는
무슨 소린가를 들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했고 휘파람소리 같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창가에 귀를 대고
기다렸다. 아마도 새벽 네다섯 시쯤 된 것
같았다.
밖은 너무 조용했다. 바람소리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누울 수는 없었다. 수갑을
풀어보려고 더듬어 보았지만 수갑은 내
실력으로 풀리지 않을 만큼 좋은 것이었다.
휘파람 소리.
그렇다. 분명히 낯익은 휘파람 소리였다.
큰 길가이거나 골목어귀이든가 아니면
약간 침을 괴어 입을 오므린 채 멀리까지
들리도록 길게 내뿜는 휘파람소리였다.
나는 그 휘파람의 주인공이 혜민이라는
것을 알았다. 와 주었구나. 네가 내 숨겨진
말뜻을 알아차리고 와 주었구나. 여길
어떻게 찾아왔을까?
아마 접선하기로 약속한 장소에서
녀석들을 해치우고 장소를 알아냈겠지.
그래서 지금 나를 구하기 위해 이 집을
포위하고 있겠지.
대꾸할 수는 없었지만 혜민이의
휘파람소리의 뜻을 알고 있었다. 포위해
들어가는 데 몸을 사리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신호였다. 새소리처럼 들리는
휘파람소리는 바로 내가 가까이 데리고
다니는 우리들끼리만이 통하는 신호였다.
형이었다. 우리들은 언제나 위험한 지경에
빠지는 수가 있기 때문에 몇 가지 긴급한
신호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신호 때문에 위기를 벗어난 경우가 많았다.
지금 밖엔 혜민이 일행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여기저기 연락해서 내 위험을
알렸을 것이고 발 빠르고 재주 좋은
녀석들만 뽑아서 사방을 막고 때를 기다릴
게 뻔했다.
다시 새소리 신호가 들려왔다.
행패를 부려 감시하는 애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라는 것이었다.
벌떡 일어나 방문을 정신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소리를 일부러 높이고 계속
방문을 찼다. 문 밖에 있던 녀석들이 문을
열어젖히고 내 목덜미를 잡아앉혔다. 입에
했다. 한 녀석이 전화를 걸어 내가 행패를
놓는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오냐, 그 사이에 너희들이 숨어
들어와다오.
나는 몸을 뒤치며 계속 녀석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혜민이 일행이 들키지 않고
들어올 수 있도록 이들의 시선을
집중시켜야 할 순간이었다. 한 녀석이
총신이 유난히 긴 총을 내게 겨누었다.
나는 그것이 바로 나를 기절시켰던
화살총이란 걸 알았다. 아마 계속 버티면
화살총으로 내 기를 꺾어 버리라는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얌전하지 않으면 쏘겠다."
총 든 사내가 말했다. 나는 얼른 몸을
바로 세웠다.
풀어 줘라. 미치겠다."
그들도 내 사정을 알고 있었다. 두
팔목에 수갑을 채웠기 때문에 누워서 편히
잘 수가 없다는 것을. 한 녀석이 내 뒤를
살펴 수갑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총
든 녀석에게 귀엣말로 뭐라고 했다. 총 든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쪽만 풀어서 침대에 채워라."
사내는 왼쪽 수갑을 풀더니 곧바로 침대
모서리에 수갑을 채웠다. 내가 도망가려면
침대를 부수든지 침대째 들고 도망가야 할
판이다.
"됐냐?"
키 작은 녀석이 물었다.
"넌 나하고 초면인 것 같은데, 그렇게
함부로 반말을 하다간 나중에 코피 좀 날
거다."
"제발 코피 좀 터쳐다구."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그 순간이었다.
우당탕거리며 바깥이 시끄러워지더니
유리창과 문짝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의 비명 소리도 들렸고 집 안이
흔들리도록 벽이 울기도 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혜민이가 사뿐히 들어서더니
총 든 녀석을 바닥에 눕혔고 뒤따라 밀려
들어온 애들이 사내들을 무식하게
다루었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키 작은 사내의 주머니에서 수갑의
열쇠를 찾아내어 내 손목을 푼 혜민이가
씨익 웃었다.
"괜찮죠?"
"살아 있잖냐."
"했구말구."
나는 혜민이를 꼭 끌어안았다. 이런
위기에서 이렇게 완벽한 작전으로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아우가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었다.
"어떻게 여길 알았냐?"
"어떤 여자가 전화를 걸어서 여기 위치를
알려 주고는 형이 위험하다고 했어요.
새벽이면 경비가 허술할 거라는 말도 해
주더군요. 믿을 수가 없어서 다그쳤더니
나도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하기에......
밤새 망을 보고 기다렸죠."
"그녀였구나."
"누구요?"
"난 여복이 많잖냐."
"무슨 말인가 못 알아듣겠네요."
애들은 지하실에 처넣고 경비를 철저히
세워라. 잔챙이 말고 조금 큰 놈을 잡아야
한다. 내가 소란을 떨었으니까
찾아오겠지."
"알았어요."
애들이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정
신사복의 사내를 잡지 못하면 허사였다.
녀석을 잡아야만 했다.
일부러 점쳐 달라고 동전을 준 것이며
혜민이의 전화번호를 기억했다가 몰래
연락해 준 것이며가 계집아이의
기지이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집의 안팎을 다 뒤져도
계집아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어젯밤부터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으니
아마 다른 아지트로 옮겨갔거나 나를
일이었다. 애들을 족쳐 댄 끝에
검정신사복의 사내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나는 길목이며 집 주위에 애들을
숨겨놓고 아무 일없는 것처럼 신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무래기들을 아무리
족쳐 보았자 앞뒤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얼마나 비밀을 철저히 지키는 그룹인가
짐작할 수 있었다.
새소리 신호가 들렸다. 길목을 지키던
애들이 보내는 신호였다.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길은 검정 승용차 두 대가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합해서 네댓
명쯤 되리라. 내가 행패를 부리자 다급해진
사내들이 연락을 했고 급한 걸음으로 왔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명령대로
서두르던 판에 그런 연락을 받고 당황한 게
틀림없었다.
승용차 두 대가 정원 넓은 마당에 섰다.
문을 열고 내려서던 사내들이 멈칫하더니
얼른 자동차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봐, 늦었어. 움직이면 쏜다. 둘레를
한번 자세히 봐라."
우리 애들이 뺑 돌아가며 무기를 들고
사내들을 포위해 들어갔다. 수적으로
열세인데다가 그들이 창고에 숨겨 놓았던
무기를 들고 있어서 대적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더구나 내 손에는 혜민이가 들고
온 표창이 꼬나져 있었다.
"묶어라."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애들이
달려들어 사내들을 묶었다. 검정 신사복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반항을 했다. 일본
애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사내 일행을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가 방마다 나누어
가두고 일본 애와 검정 신사복의 사내만
응접실에 앉혔다.
"팔자가 이렇게 뒤바뀔 줄 몰랐겠지. 그
동안 대접을 꽤 잘 받았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우리 서로 마음 편하게 털어놓자.
내 성깔이 어떻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난 아무것도 모른다. 난 그저 지시를
받은 대로 행동할 뿐이다."
사내는 꽤 당차게 대꾸를 했다.
"저 녀석은 일본 앤데 어떻게 되는 거냐?
그리고 아직도 나는 네 이름과
출신성분조차 모른다. 신사적으로 말할 때
편하게 말하자."
단순한 심부름꾼이다. 내 이름은
일본식으로는."
그 순간 나는 사내의 턱을 매섭게
갈겼다.
"본명을 대라. 국적을 바꾼 게 무슨
벼슬인 줄 알아!"
사내는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이형섭이다."
"반말하는 건 얼마든지 이해를 하마.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어째서 우리 나라
기업들을 풍비박산 내려고 했는지 솔직하게
말해 달라는 것이다."
"얘길 했잖나. 난 할 말이 없다고."
"네가 두목이라고 분명히 말했지. 난
확실한 걸 좋아한다."
거다."
"나를 속이진 못한다. 결국 불게 될걸.
버티면 버틸수록 네 육신만 고달프다."
"이미 죽을 각오를 한 몸이다."
"그렇게 쉽게 네 맘대로 죽진 못한다.
악착같이 너희들을 뿌리를 캐고 말 거다."
"죽기밖에 더하겠나."
웬만한 사내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이렇게 딱 잡아떼는 데는 달리 믿을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았다.
"뭘 믿고 까부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장총찬이란 사실을 한시라도 잊지 마라. 널
살려서, 악착같이 살려놓고 캐내마. 이거
내 약속이다."
"나도 장총찬을 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안 되는 놈이 한 놈쯤 있다는
"내기를 하자."
"조오치."
이형섭의 뱃심은 그 정도였다. 나는
조용히 다가서서 이형섭의 두 팔을 잡았다.
그리고 살며시 혈을 짚었다. 사대육신의
마디마디가 죄 틀리고 오장육부를 쥐어짜듯
통증이 심하며 힘줄과 뼈가 뒤엉키듯
고통을 받는 혈이었다.
이형섭은 대뜸 게거품을 쏟으며
나뒹굴었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속도로
보아 혈을 제대로 짚은 것 같았다. 그
고통을 참을 수 없다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뒹굴다가 똥도 싸고 피까지
쏟아놓은 것이었다.
사내가 뒹굴다가 내 손을 우악스럽게
잡았다. 성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한
모질게 혈을 잡히면 혀조차 깨물 틈이
없었다. 천하장사인들 견디며, 혈을 짚을
줄 아는 묘기를 가진 사람인들 견딜까.
"이형섭! 말해라. 난 널 죽이지 않는다.
나는 알아야 된다."
"혈을 풀어 줘."
겨우 그가 한 말이었다.
"대답해라. 그러면 풀어 주마."
"하라는 대로 하겠다."
"너를 믿으마. 그러나 약속을 어기면
그땐 더 극악한 혈을 짚겠다."
"나도 사내다. 너한테 졌다."
"됐다. 미안하다."
나는 그가 졌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내라는 걸 알았다. 졌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내라면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짚었던 자리에 다시 생혈을 눌러 사내가
생기를 되찾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고맙소."
이형섭은 정중하게 말했다.
"나도 고맙소. 우린 시시하게 통하지
맙시다. 크게 통합시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서 죽을 놈이오. 그러니
내가 사는 땅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견디겠소? 제발 부탁이오. 이 땅은 남의
땅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조국이오. 당신이
국적을 바꾸었다고 하더라도 여기가 당신의
나라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면
당신편이 되는 게 당장의 이익이란 걸 왜
모르겠소. 도와 주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을 끝까지 돕겠소."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했다. 이
강대국이 넘본다고 쉽게 넘보이는 땅도
아니었다.
"부끄럽소. 난 졌다고 분명히 말했소.
말하리다. 무엇이든 말하리라. 아마 난
죽게 될 거요. 그래도 사내가 한번 약속한
거고 당신말처럼 이 땅은 내 뿌리요."
"정말 고맙소."
나는 조금 전의 살벌한 분위기가 아닌
정겨운 사이처럼 사내의 손을 잡았다. 열이
많았다. 혈을 짚는 바람에 신열이 높아진
탓이었다.
"나는 일본의 앞잡이요. 한국의
경제침략을 위해 경제전술단이라는
지하조직이 있소. 아마 기업가들이
비밀리에 후원을 하는 걸로 아는데 그
이상은 사실 나도 모르지요.
진출을 정공으로 침투하는 조직이 아니라
비밀리에 지하로 침투하는 조직이지요.
어떤 식이냐 하면 이번 작전처럼 국산품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깨뜨린 뒤에 일본
상품을 밀수로 대량 팔아먹는 거지요. 한번
일본 제품을 쓰게 된 사람은 그 다음에 또
같은 상품을 찾기 마련이라는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겁니다."
"이번엔 어떤 작전이었소."
"간단합니다. 최근에 협박사건이 잦자
자동차나 가전제품이 일제에 비해 부족한
점이 많다는 걸 인식시키는 방법으로
협박장을 보내 긴장을 시킨 뒤에 한국인
손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고를 자꾸
내는 것이지요. 그러면 판매가 줄고 생산도
당연히 줍니다. 그 틈에 밀수 조직에서
가전제품을 공급하여 장기적으로 일본
상품을 한국에 뿌리 박도록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집 안에 있는 국산 텔레비전이나
냉장고가 폭파되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우리 것만 그런 게 아니라 전국에서 매일
사고가 터지면 누가 국산을 쓰려고
하겠습니까."
"그런 작전은 이해가 갑니다만 자동차는
수입이 안 되니 작전대로 성공하지
못하잖소."
"자동차 수요가 급격히 줄게 되지요.
일제 자동차를 더 빨리 수입하자는 압력,
여론 조성도 중요하고 대기업이 휘청거리게
되면 언젠가는 일본 자동차가 판을 치게
되지요. 장기적으로 보는 거지, 당장의
승산을 보는 게 아닙니다."
"물론이지요. 한국 경제가 혼란하면
할수록 일본 경제는 그만큼 득입니다.
생각해 보십쇼. 일본의 제일 침략국은 한국
아닙니까. 그러니 우선 경제를 쥐고 흔들면
나머지는 쉬워집니다. 이젠 군화 발자국
남기며 침략하진 않습니다. 경제종속이
완벽해지면 그건 주권의 삼분의 이쯤은
빼앗기는 겁니다."
"이형이 책임자요?"
"그렇소."
"누구의 지시를 받소?"
"경제전술단 산하에 한국 담당부가
있지요. 책임자 이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간첩 접선하듯 그쪽에서 계속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왜 그런 일을 맡게 되었소?"
작전책임자를 뽑지요. 나는 일본에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고 떠돌다가 그들과
접선이 되었습니다."
"어떤 조건이었나요?"
"작전을 성공시키기만 하면 큰 기업체를
하나 받게 됩니다."
"당신은 이번 작전이 성공한 뒤에 그들
손에 죽게 되어 있을 겁니다. 내가
그들이라도 당신을 살려두진 않겠죠."
"그건 그렇지요."
"왜 그런 생각을 못했나요? 당신이 하던
사업도 일부러 그들이 망하게 조작했을
수가 있었지 않았을까요? 나는 그런 꼴을
많이 본 사람입니다."
"할 말이 없소."
가슴이 부르르 떨리는 일이었다. 이렇게
싶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산다는 일본이
한국의 싹을 잘라내고 속국을 만들기 위해
그리도 집요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침략전술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끝끝내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영토확장 개념에 의하면 한국이 제일
침략국이라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아닌가. 아직도 일제시대에 대한 향수로
한국 침략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그들의
야심.
"그 다음은 뭐요?"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식품과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일 거고 그
다음이 유통구조의 파괴 그러고는 아마
문화겠죠."
"그렇게 되면 어찌 되는 거요."
합니다."
"이게 어디 끔찍한 정도요."
"맞소."
사내는 아주 순순해졌다. 표정이 밝지
못한 것으로 보아 괴로운 것 같았다.
"술 한잔 주시오."
"어렵지 않소."
나는 진열되어 있는 술병을 여러 개 골라
그 앞에 놓아 주었다. 사내는 독한 술로
골라 마개를 따냈다. 거푸 두 잔을
마시더니 내게 꾸벅 절을 했다.
"용서를 바라진 않겠소. 다만 내 죄를
씻기 위해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이니 장형
일을 돕겠소. 나를 믿어 준다면 말이오."
"믿지요. 믿고 말고요."
나는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설사 나를 배반한다
하더라도 나의 그의 말을 따라가고
경제전술단의 뿌리를 잘라내야만 했다.
그의 진지한 눈빛으로 보아 거짓은 아닌 것
같았고 제 조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깨달은
듯싶었다. 혈을 짚여 고통 때문에 단순히
승복했다면 다르지만 그렇지 않고 내면의
어떤 변화라면 그의 힘이 절실한 판이었다.
"나도 한계가 있소. 내가 아는 것은 한국
담당 총책임자인 야마사키뿐이지요. 그
이상은 알 수도 없고요. 철저한
비밀조직이니까요. 야마사키가 우리 나라에
들어옵니다. 내가 작전 개시를 통보하면
즉시 달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자를 잡는
겁니다."
"그자를 잡아서 캔다고 합시다. 그자도
"물론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번에 다부지게 뿌리를 자르면 당분간은
작전을 감행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그럴까요?"
"물론 다른 작전으로 또 침략하겠죠.
그들은 결코 물러나지 않을 집단입니다."
"아......"
나는 신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형섭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일본의 야심은 이번에
완전히 뿌리가 뽑히지도 않을 것이며
언젠가는 반드시 또 침략을 감행할 게 뻔한
이치였다.
"한국인들이 정신 차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형섭의 말이었다.
"나도 인정은 하겠소."
그렇게 시덥잖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
자동차니 가전제품 일습이니가 어째서
내놓고 자랑할만한 수준이 못 되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 애들이 이 두
가지 큰 시장을 먼저 노린 것은 바로
대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멀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불신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읽은 겁니다."
왠지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내의
말은 과히 틀리지 않은 지적이었다.
"그들에게도 그럴 만한 고충이, 말 못할
사정이야 있겠지요. 그러나 일본 애들이
교묘하게 그 약점을 노린 것을 보면
국민들의 의식에 앞서서 기업들이 보다
양심적인 기업 생리로 빨리 전환해야
합니다. 일본의 강점은 바로 기업가들의
짓을 서슴지 않았지만 일본 국민들한테만은
지나치리만큼 양심을 지켰죠."
"당신 말에 별로 할 말은 없소. 그러나
내가 알기론 수출을 할 만큼 향상되었고
이젠 제법 기업의 양심을 지키는 걸로
압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 나라
기업이 당신 말처럼 양심적이다
아니다가아니라 우리 나라를 위해 우리의
기업은 지켜져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 외면해서 기업이 도산하는
것은 몰라도 남의 나라의 간섭, 그것도
비열한 술수에 의해 파멸하는 것은 용남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기업이란 우리
나라의 국부의 상징입니다. 나는 결코
기업가를 두둔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들의 나쁜 점은 냉혹하리만큼
칭찬한 적이 없습니다. 어쨌거나 우리 나라
기업은 우리 나라 국부의 상징이고 그것은
우리들의 재산이니 우리가 지켜야죠. 오해
없기 바랍니다. 나도 기업인들의 그
비양심적인 부분에 대해선 악착같이
물어뜯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정이든 기업은 우리 재산이고 우리들이
지켜야 할 겁니다."
"나도 작지만 기업주 노릇을 했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기업주일 땐
사람들이 야속했지요. 그러나 이젠 어느
정도 알 것 같습니다."
"연락을 해 주쇼. 야마사키를 잡아야
합니다."
"물론이죠. 그런데 야마사키는
외국인이고 증거를 노출할 만큼 어리석은
"나도 그를 잡아서 증거를 확보할 능력은
없을지 모르지만 다시 그따위 공작을
못하게 막을 자신은 있습니다. 혼찌검을 내
줘야지요. 그래서 일본 애들이 그따위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해야지요."
"아마 다른 방법으로 침투할 겁니다.
그리고 한가지 주의할 점은 그들이 무슨
짓을 해서든 우리 장형을 제거하려고 할
겁니다."
"여담이지만 어떤 용한 점쟁이가
그러더군요. 결코 남의 손에는 죽지 않을
거고 여든 살 이전에는 타살수가 없다고요.
난 오래 살아야 합니다. 할 일이 많아요.
남북통일도 봐야 되고 백두산에 가서 텐트
치고 잠도 자야 되고 일본 애들이 멋대로
그어 준 탓이 잃어 버린 흥안령 근처의
찍어누르고 중공과 소련 애들 멱살 잡고
흔들어 보기도 해야 합니다."
"허허허, 장형은 정말 멋집니다."
이형섭은 처음으로 기분 좋게 웃었다.
생기긴 원숭이 사촌처럼 생긴 사내인데
보면 볼수록 정이 가는 인상이었다. 사내는
그 자리에서 국제전화를 신청했다.
일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나는 사내의
통화 내용을 해독할 능력이 없었다.
다행스럽게 혜민이가 데리고 온 아이 중에
한 녀석이 내게 눈을 찡긋해 보여 녀석이
일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눈치를
했다. 사내는 통화를 끝내고 말했다.
"오후에 온답니다. 작전 개시를
알렸지요. 아마 일행이 몇 명 될 겁니다.
우리가 공항으로 마중나가기로
"그 말을 믿어도 되겠소?"
"야마사키가 도착하면 그때 믿어 줘도
됩니다."
사내의 태도는 아주 당당했다. 나는 일본
말을 아는 녀석에게 슬쩍 물었다.
"네가 통역을 좀 해 봐라."
"저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작전이
개시되는데 가능하면 현장에 와서 감독을
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쪽에서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만 오늘 밤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좋은 시기라고 강조했습니다."
"특별히 신호가 될 말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은어나 낱말은 없었냐?"
"네. 전혀 그런 눈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됐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자 사내는
"장형은 의심이 많군요. 물론 매사에
신중해야겠지만 나도 명색이 일본에서
날리던 몸였소. 내가 한번 약속하고 나를
믿어 준 그룹을 배반하기로 작정했으면
무섭게 변심합니다. 장형 말대로 내가
태어난 이 땅을 위해 한 번만이라도
무엇인가 이 땅의 사람답게 죽고 싶소. 내
마음을 이해할는지 모르지만 여긴 분명 내
조국이오. 내 피의 뿌리란 말이오. 그간
일본 애들에게 이용당할 만큼 이용당했소.
이제 깨달은 거지요. 아셨소?"
사내가 정색으로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사내의 말이 진실인지도 모른다. 일본
애들이 계획적으로 사내를 이용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을 것 같았다. 그들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한국이 제일
짓이라도 할지 모른다. 경제종속으로
침투가 되면 그 다음은 정치종속과
군사종속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군화를
신고 총을 겨누지 않고도 한국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먼저 노리는 것은 한국의
경제파탄이고 그 틈을 비집고 일본 상품을
팔아먹을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선린우호를 겉으로는 주장하면서 속으로는
침략을 시행하고 있었다. 일국의 장관이
해외의 대학 연설에서 한국의 남북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공언할 정도라면 그
저의는 이미 빤한 것이었다.
하나님. 당신의 권능을 어디까지 믿어야
합니까. 이만큼 열성으로 당신을 섬기는
한국에만 이리도 많은 시련을 주는 겁니까.
대대로 원수 척진 게 있습니까. 아니면
훗날 더 큰 영광을 주려고 이러는 겁니까.
까놓고 말 좀 합시다.
당신도 이 땅의 사람들이 선량하다는 걸
인정할 겁니다. 세상살이에서도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거나 고통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선량한 이들이 언제까지나
바보처럼 당하고 있지 않을 거라는 걸
당신은 또 아실 겁니다.
하나님.
하늘 아래, 사람 사는 곳을 한번
찬찬하게 살펴 주세요. 눈을 크게 뜨고
과연 이 세상 돌아가는 요지경판을 그냥
보고 있어야 하는지 아닌지 요절을 내야
주었잖습니가. 아직도 시련받을 일이 더
남아 있습니까?
도대체 무슨 근거에 의해 우리가 시련을
감수해야 한단 말입니까.
일본이란 나라는 그렇게 엄청난 살생의
전쟁을 촉발하고도, 그렇게 많은 인명을
무자비하게 살생했음에도 오늘날 저리도 잘
살게 내버려 두는 이유가 뭡니까?
도대체 하나님 당신의 도리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남을 못 살게 굴고 남의 권리를
침해하는 부류들이 잘 살게 내버려 두는
까닭도 당신의 그 흐린 판단 때문입니까?
하나님, 제발 당신은 우리들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 주십시오.
김포 국제공항, 아직 햇살은 투명했다.
것도 확인했다. 사내는 정장을 한 채
외국인 출구 쪽에 서 있었다. 혜민이와
혜민이가 데리고 나온 애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긴박감이
돌았다. 야마사키 일행은 야마사키까지 세
명으로 알려졌다. 한 사람은 폭파
전문가이고 또 한 명은 사내가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공항 청사 안이 오히려
바깥보다 을씨년스럽도록 햇살은 많이
따가워져 있었다. 뛰어노는 아이들의
울긋불긋한 옷차림에서도 봄날을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자동차까지는 내가 데리고
나가겠소."
사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건 괜찮지만 여기서 놓치게 되면 안
"나를 믿어보십쇼."
"물론 믿지요."
"자동차에 타는 순간 덮치시오. 그때
나는 빠지겠소. 물론 눈치채지 않게 나까지
잡으셔야 합니다. 각자 분리해서 족쳐야
하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고맙소."
비행기가 도착하고 짐 가벼운 외국인들이
두엇쯤 밖으로 나왔다.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입구에 서 있었다. 자동문이
열리고 정장 차림의 사내 세 명이 작은
가방만 든 채 걸어나왔다. 머리칼 짧은
모습이나 생김새로 미루어 일본인이
분명했고 사내가 고갯짓을 하는 것이
우리가 기다리던 그 패거리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주차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앞서서
사내의 승용차가 서 있는 곳까지 뛰었다.
혜민이가 눈치 채고 옆에 나란히 세워둔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다른 아이들도
몸도 재게 움직였다.
사내와 일본 애들이 가까이 다가섰다.
나는 사내와 눈을 마주쳐 옆으로 비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내가 몸을 비키며 접질린
듯 다리는 만졌다. 그것이 바로 신호였다.
나와 혜민이 그리고 운전사인 것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애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우리는 약속대로
사내까지도 강제로 차에 태웠다. 일본
애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한 사람씩
나누어 태우고 재빨리 공항을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게 하기 위해 일단
사혈을 눌러 기신도 못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면 일을 그르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세 녀석을 소파 위에 앉혀놓고 사혈을
풀어 주었다. 차디차게 굳어 있던 몸이
풀리고 생기가 돌았다. 일본 말을 할 줄
아는 애가 세 사내를 건드리며 뭐라고 말을
시켰지만 넋 나간 사람처럼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통역을 잘해야 한다.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하다."
"걱정 마세요."
"시작하자. 내 이름을 알려 주고 애들의
작전이 발각났다는 것과 전모를 알고
알고 있다고."
통역하는 애가 열심히 설명을 해도 일본
애들은 못 알아들은 체 했다.
그러나 야마사키는 내 얼굴을 ㅎ어보며
빙긋이 웃었다.
"야마사키한테 말해라. 내가 진짜
장총찬이라고...... 입을 열지 않으면 혈을
짚어서 아예 병.신을 만들어 버리겠다고.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그 입으로 말을 듣고
싶다고."
일본 애가 뭐라고 지껄였다.
"아무 것도 모른답니다. 그저
경제인으로서 시장조사하러 나왔답니다."
"경제전술단 총책임자가 누구냐고
물어봐라."
"모른답니다."
경제전술단이 나갔나?"
"오로지 아는 것은 한국에 와서 어떻게
사업을 할까 하는 시장조사가
목적이랍니다."
"독한 놈들이로구나. 얘들도 알 거다.
일본에서 내가 벼락대신으로 통한다는 걸.
내 손 안에 한번 들어오면 어떻게 된다는
걸 알 텐데."
"죄 없는 사람, 더구나 외국인을
불법으로 잡아두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는데요. 얘들만 온 게 아니라 뒤에
또 감시자가 따라와서 납치되는 걸 다 봤을
거고 자동차 번호나 우리들을 모두 사진
찍어 놓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못할
거랍니다. 지금쯤 이 집이 포위되어 있을
거랍니다."
나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이들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건
짐작했지만 그렇게 철저한 방비까지 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밖의
동정을 살피고 온 녀석의 얼굴이 벌개지며
집이 포위된 게 확실하다고 했다.
그까짓 것들이야 나가서 대적하면
그만이지만 문제는 우리들 모두가
불법납치에 불법감금이라는 혐의, 더구나
외국상사의 무역 담당 직원을 납치한
혐의를 벗을 길이 없었다. 그들은 교묘하게
나를 얽어넣기 위해 그런 공작을 꾸몄을 게
확실했다. 내가 너무 성급하게 움직인 것
같았다. 옆방 문을 열고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내가 씨익 웃고 있었다.
알겠소?"
"네 양심을 믿은 내가 바보였다."
나는 뒤통수를 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내를 믿고 사내의 작전대로
움직인 내가 얼마나 서둘렀는지를 알게
되었다.
"저 사람들은 한국 상품을 사려고 온
사람들이고 당신은 결국 국익을 해꼬지한
사람이 됐소. 지금 밖에서 우릴 포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약 경찰에 신고를 하면
당신은 어찌 되겠소. 이건 국제적인
문제요. 당신은 그런 게 아니고 이러이러한
음모가 있다고 주장할테지만 아무 증거도
없소. 증거를 없애기 위해 나는 당신편이
된것처럼 철저하게 위장을 했던 거죠. 이만
하면 알겠소?"
빼어물었다.
"내가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너만은
용서할 수 없다."
"장형은 할 일이 많은 사람이오. 이까짓
일에 일생을 끝장낼 참요? 앞뒤를 생각해
보시오. 난 장형을 아끼고 싶소. 왜냐면
당신만한 인물이 있어야 나도 상대할
기분이 나잖겠소. 우린 악착같이 계획대로
할 테고 당신은 악착같이 우리와 붙을 거
아뇨. 그러니 여기서 신사협정을 합시다.
우리를 곱게 보내 주면 우리도 당신들과
곱게 헤어지겠소. 다음에 만나면 그때 또
새로 시작해 봅시다. 어떻소?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소."
혜민이가 사내의 말에 기가 죽어 내 팔을
잡았다.
없습니다. 우리가 너무 서둘렀고 너무
저자식을 믿었어요."
혜민이의 말이 옳다는 건 알지만 그냥
이대로 갈라설 수는 없었다.
"저것들을 없애고 나도 당하지, 머."
내 흥분된 목소리였다.
"형님, 안 돼요. 형님이 살아 있고
뒷일을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혜민이가 악착같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장형, 우리 뒷날을 기약합시다. 나도
당신 같은 상대를 살려 놓고 붙어보고
싶소. 지금 우겨봤자 장형만 죄인으로
처벌받을 뿐이오. 우린 완벽하게 증거를
없앴고 저 사람들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무역회사 간부들이오. 이 모든 게 사전에
꼼꼼하게 계산된 작전였소. 만약의 사태에
지금이라도 우린 당신을 몰아넣을 수 있소.
그러나 참는 것은 이번에는 일시 후퇴하는
게 한국의 사정상 좋겠다는 계산 때문이오.
당신을 살려두고 내일을 기약하고 싶소. 내
말 명심하시오. 당신은 무슨 뜻인가 알
거요."
괴로운 일이지만 못 이기는 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려들어
당하다니......
"한 가지 부탁을 하자. 나하고 똑같이
생긴 녀석을 내놓고 가라."
나로서는 이 마당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였다. 나를 똑같이 닮은 녀석이
살아서 돌아다니며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고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나를 아주
궁지에 깊이 몰아넣을 수 있는
녀석이 돌아다니며 괴상한 짓을 한다면 내
신세가 어떻게 될는지도 뻔한 이치였다.
어려서 나는 나를 닮은, 정말 나를 닮은
녀석이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녀석과
같이 재미있는 일, 이를테면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걸물을 연상했었다.
어려서 생각한 것은 나를 똑같이 닮은
녀석이 내 명령과 내 뜻대로 움직여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신기한 장난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도
번갈아가며 다니고 연애할 때도 번갈아가며
하고 동시 두 곳에 나타나 사람들을
놀래키고......
그런데 막상 나를 닮은 녀석이 있다는 데
나는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내
뜻대로 움직여 줄 녀석이 아니라는 건
짓을 하든 책임은 내게 돌아올 걸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일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가짜
장총찬이 행세를 하는 녀석들 때문에 몇
차례나 골탕을 먹은 경험이 있었다. 정말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얼굴이 똑같은 녀석이 나를
골탕먹일 결심으로 일을 저지르고 다닌다면
내 신세는 형편없이 전락될 게 빤한
이치였다.
"그거야말로 들어 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장형의 덜미를 잡고 있을
허수아비 아니오."
"내가 벌어먹일 자신이 있으니까
돌려달라는 거 아니오."
"그 아이는 벌써 일본으로 빼냈소.
그러니 일단 여기서 신사 협정을 합시다.
한국에 보내 이상한 장난이나 장형을
괴롭히는 짓은 하지 않겠소. 우린 그런
조무래기가 아니오."
혜민이가 나를 끌고 옆방으로 가더니
창문 틈으로 밖의 상황을 보여 주었다.
완전무장을 한 저격병들이 집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우리 애들은
무방비인데다가 나 혼자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 수 있더라도 애들이 죽게 될
상황이었다.
"형님, 일단 다음을 생각합시다."
나는 혜민의 말에 승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작전을 짰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당했다."
내 목소리가 침통했다. 하긴 처음부터
세웠다면 내가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세상엔 그런 일이 너무나 많기 마련이었다.
인간적인 믿음 때문에 아무 대책 없이
사람을 믿었다가 큰일을 치르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면서 나도 당한 것이었다.
법정 시비를 가리는 일도 증거를 많이
만들어 가진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하긴 인간의 양심이 너무 비뚤어져
있으니까 증거로 판단할 수밖에
없겠지만......
"분명히 말해 두마.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들이 발 붙이진 못할거다. 이번엔 내가
졌다. 그러니 순순히 물러가마. 너한테 한
가지 부탁을 하마. 이 나라는 그렇게 쉽게
무너지거나 멸망하지 않는다. 잠시 타격을
입을지는 모르지만 너희들의 음흉한
생각해라. 다음엔 널 반드시 내 손으로
요절을 내 주마. 그날을 기약하자."
나는 사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내는
여유 있게 웃었다.
"좋소. 다음에 꼭 만납시다."
사내는 옆방의 일본 애들을 데리고
현관을 나섰다. 숲 속과 집 주위를 포위한
애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사내와 일본
애들을 데리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형님, 실망하지 마세요. 우린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침통해하면 안 됩니다."
혜민이가 내 손을 힘 주어 잡고 이렇게
말했다. 혜민이 생각에도 내 침통한 표정이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래, 다음엔 이런 실수를 하지 말자.
이번엔 어리석었다. 내가 너무 서둘렀다.
우리도 철수하자."
우리들은 힘없이 밖으로 나왔다. 전신에
힘이 쪼옥 빠지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
세상 일이란 정말 이런 것일까요? 인간이
인간을 믿었다가 이런 꼴을 당하는 걸
수없이 보시겠죠. 하나님, 지옥문을 활짝
열어놓고 양심 없는 무리들을 빨랑빨랑
데려가 주십쇼.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