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나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생각 없이 흘러나온 말이다. 내 말에 순
간 멍해지는 들레다. 게슴츠레 감겨있던 두 눈이 번쩍 뜨이더니 날 노려본다. 그리고는 고개를 휙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안되겠다 싶어 들레 손을 붙잡는다. 내가 왜 이렇게 공손하게 대했는지는 이 순간을 바라지 않았
기 때문이다. 예전 상황을 돌려보면 들레는 꼭 술에 취하면 발광을 해댔었다. 난잡한 노래가 나오
면 테크노를 추고, 무드가 깔린 발라드가 나오면 내 손을 붙잡고 블루스를 추곤 했었다. 또 어떤
때는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가놓고 하루 반나절 잠을 자곤 했었다.
되도록 들레에게 술을 안 먹이려는 이유가 이러한 것 때문이었다. 여러 번 다그쳐서 들레도 술을
잘 먹지 않았다. 나와 있을 때는 빼고 말이다.
"어디 가려고."
"왜? 화장실 가는 거 따라오려고? 따라오려면 따라오던지!"
또 화장실이다. 노래가 안 나오니 화장실이다. 원래 붙잡아야 마땅하지만, 지금 들레의 두 눈에서
눈물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들레의 손을 놓아준다. 방긋 미소짓는 들레는 바보 같이도 웃으
면서 운다.
휘청휘청 거리는 걸음으로 들레는 잘도 화장실을 찾아간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여러 개의 문
을 열어 보고 나서야 화장실을 찾게 되었다.
화장실에 들어간 들레에게서 눈을 때고 주위를 훑어본다. 바닥에 난잡하게 떨어져있는 음식찌꺼
기, 빈 병. 빨간 불로 변해버린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맥주병. 그 많던 아이들이 제각각 사라져버
리고 말았다. 술자리에 곤히 앉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나 혼자. 아니, 오리도 앉아있었지만, 얼마나
마셨는지 혼자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며 졸고 있다. 멍청한 새끼.
빨간 불로 변한 맥주병을 가슴에 안고 부엌으로 걸어간다. 앞이 어지러운 것을 보아 나도 조금 취
하긴 했나 보다. 냉장고 안을 보니, 차가운 맥주가 한 가득 보인다. 못해도 다 합해서 한 짝은 되
는 것 같다. 식탁 옆에 쪼그려 앉아 서로 손을 붙잡고, 킥킥거리는 옥동자와 은숙이. 쯧쯧, 어린것
들.
빨간 불인 맥주를 냉장고에 넣고 파란 불인 맥주를 대거 꺼내 들어 다시 술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언제 왔는지 지혜가 내 자리 옆에 고꾸라져 누워있다.
들레는 아직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한 번 가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아니다. 그냥 그
렇게 내버려두는 게 지금은 옳을 지도 모른다.
지혜를 안아다가 소파 위에 잘 눕혀놓는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아 파란 불 맥주를 라이터로 하
나씩, 하나씩 까기 시작한다.
잔에 맥주를 한 번 따라 마시고, 두 번 따라 마시고, 다섯 번 따라 마시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 때문에 많이 아파하는 들레. 지금 이 기분으로 들레에게 다가가 모든
걸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현실성이 너무 결여된다. 난 정말 나쁜 놈이다. 그리고 욕심
쟁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바로 옆에 두고 울고 있는데,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내
자신. 나는 늘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데, 그녀는 매일을 울고.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 싸움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던 나. 들레에게 나중에
커 꼭 행복하게 해준다고 했지만, 그럴 구실이 내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게 더 좋을 지
도 모른다. 과거의 종탁은 그냥 잊어버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냥 상재, 천상재라는 존재에게
파묻혀 들레를 다시 사랑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더 행복하게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과거의 나는 사라지는군. 저 멀리,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천상재, 씨발 새끼. 좆같은 새끼. 빌어먹을 새끼. 냠냠……."
나에게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그럼 한 번 더 맞짱 뜨던지. 자면서도 잠꼬대로 내 욕을 하는 걸
보니, 내게 상당히 불만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에라, 이 오리새끼야.
마지막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오리새끼의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고
그대로 땅바닥에 코를 쳐 박는다. 그래도 좋다고 웃으며 잠을 잔다.
시계를 보니, 밤 10시에 가까워지고 있다. 다들 집에다가 오늘 친구네서 자고 온다고 말하고 왔다
고 했으니, 그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들레도 아저씨에게 은숙이네서 자고 온다고 했다고 말
하였다.
들레가 보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 갑작스런 욕망에 내 다리는 천천히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다가
간다. 문이 잠겨있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늘 그랬으니까. 변기에 앉아서 자고 있겠지, 풋.
알면서도 난 화장실 문을 열어본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문이 열린다.
쏴아아아, 샤워기 소리가 들린다. 설마 목욕이라도 하는 건가?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망설인
다. 샤워기에서 물 빠져나가는 소리만 들릴 뿐, 들레가 움직이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망설이다 못해 난 결국 화장실 문을 연다.
쏴아아아, 샤워기가 벽에 대롱 걸린 채, 바닥에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그리고 들레는, 들레는…
물이 뿜어지는 욕조 안에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다. 물소리에 울음소리가 감춰진 것이다.
멍하니 자리에 서 있다가 천천히 들레에게 다가간다.
들레가 앉아있는 욕조에 나도 들어간다. 그리고 몸을 쪼그리고 앉는다.
물에 흠뻑 젖은 들레의 머리를 감싸 안는다. 뿜어져 내리는 물 때문에 그런지 내 눈에서도 자꾸만
물이 흘러내린다.
'울지마. 울지마, 들레야.'
넌 많이 힘들 거야. 그런데 지금 난 누구보다 행복해. 내 곁에서 아무 말 없이 떠나간 날 원망하
겠지. 시간이 흐르면 다 잊혀질 거라 생각했는데, 너를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들레야, 난 지
금도, 과거에도 죽어서도 영원히 너 하나만 사랑할 거야.
지금 나 네 옆에 있잖아. 그렇게 힘들어할 필요 없어. 그냥 내 품에 기대. 종탁이가 아니라도, 지
금의 상재에게 편히 기대. 내 목숨 다해 너 하나만은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자, 봐봐. 나 이제 너
한테 부끄러울 게 아무 것도 없다. 이제는 돈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부모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
락질도, 그런 건 이제 다 옛적 일이 되어버렸어.
난 늘 너한테 내가 박종탁이라고, 이었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겁이 난다. 그래서 말하지 못 하겠
어.
한참을 그렇게 들레를 품에 꼭 안고 뿌려지는 물을 맞았다. 이미 옷은 물에 흠뻑 젖어 더 이상 젖
을 곳은 없을 것 같다.
'물이 차갑구나. 차가워.'
그제야 난 알아버렸다. 물이 이렇게 차가운데, 그 물을 이렇게 몇 분 동안 맞고 있었으니. 난 괜찮
다. 하지만 들레는….
오른쪽 손을 올려 틀어진 물을 끈다. 그리고 품에 안긴 들레의 얼굴을 살짝 뒤로 젖힌다.
얼굴 가득 물방울이 흘러간다. 추울 텐데, 그 속에서 들레는 곤히 잠들어있다.
들레의 이마에 살짝 키스를 한다. 우리 영원할 수 있겠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 거
야.
두 손으로 들레를 들어올려 화장실을 나온다. 물방울이 뚝뚝 바닥에 떨어진다.
화장실 밖으로 나오니, 이건 그냥 난장판이 아니다. 화장실 바로 옆에는 지혜와 은숙이가 나란히
엎어져 잠들어있다. 또, 언제 저렇게 마셔댔는지, 내가 일어설 때보다 더 많은 맥주병이 나뒹굴고
있다. 그 옆으로 줄지어 애들이 뻗어있음은 물론이고.
들레를 안고 2층 계단을 올라간다. 그리고 내 방으로 들어간다.
불을 켜니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는 방이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젖은 옷을 입고 들어가면, 또 누
군가 힘들게 청소를 하겠지. 아니, 이미 일은 저질러 버렸으니.
들레를 그대로 침대에 눕힐까 생각도 해봤지만, 젖은 옷을 입고 잠이 들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
다.
"이걸 어쩐다냐."
일단 들레를 바닥에 눕힌다. 방으로 들어가 나부터 빠르게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내 옷을 들고
들레에게 다시 돌아와 그 옆에 주저앉는다. 그것 뿐 더 이상 난 어느 짓도 하지 못한다.
정말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 건지. 1층으로 내려가 단잠을 자고 있는 은숙이를 깨워볼 까도
생각해 봤지만, 술에 뻗어있는 사람이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지금 내 상태도 조금만 눈을 감
고 있으면 그대로 잠이 들것만 같다. 머리는 어지러울 대로 어지럽다. 오늘 꽤나 많은 술을 들이
켰나보다. 꼬장 부릴 상대들이 이미 다 뻗어있기에 지금 내 모습은 평소 그것과 거의 같게 보일
것이다.
자꾸만 이상한 상상이 머리 속을 맴돈다. 당연히 나도 욕정이 넘쳐흐르는 19세의 건장한 남자이니
까. 거기에 술도 취해 그 상상은 더 한다. 그렇지만 난 끝끝내 참아낼 것이다.
일단 들레가 입고 있는 노란 색 가디건을 벗긴다.
"아, 이거 진짜 미치겠네. 괜히 물에 빠져서……."
"꺄아! 이, 이게 뭐야!"
'아 씨발, 대낮부터 누가 이렇게 소리를 질러.'
너무도 졸린 나머지 난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찢어지는 음성이 그 강도를 더해 감
해 따라 난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게 됐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정말 졸려 죽겠다.
그때 머리 위로 푹신한 뭔가가 떨어진다.
"아, 씨발. 누구…! 드, 들레야!"
깜짝 놀란 나머지 침대 위에서 아래로 뒹굴러 떨어진다. 이불을 꼭 감싸고있는, 얼굴 가득 황당함
으로 물들어있는 들레의 얼굴이 보인다. 그제야 몇 시간 전 일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너, 너, 너! 나한테 도대체 무슨 짓 한 거야!"
"무, 무슨 짓이라니!"
무슨 짓이라 하면 그런 짓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난 놀란 망아지 마냥 두 손으로 땅을 짚어 뒤
로 도망가듯 움직인다.
'내가 뭘 했지. 뭐더라……. 들레 옷 갈아 입히고… 아, 이런 미친 새끼!'
몇 시간 전 그 장면이 떠오르자 갑자기 온 몸으로 흥분이 달아오른다. 나도 의식하지 못했던 상황
에 많은 일을 저지른 것 같다.
이제는 울먹거리기까지 하는 들레다.
"나, 나 아니야!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저, 정말이야. 진짜라고!"
아무리 발악하듯 소리쳐 보지만 믿지 않는 눈치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감행
했는지. 그때 그 장면이 떠오를수록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뜨거워진다. 모르고 들레의 속옷까지
내 것으로 갈아 입힌 것이다.
눈을 굴려 방바닥을 보니 들레의 옷이 활짝 펼쳐져 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빨래까지 했
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곳에 들레의 속옷까지 같이 있다.
바삐 들레의 눈치를 살핀다. 황당함에 벗어나 이제는 핏기 서린 얼굴. 난 뭐라고 말할 수 없어 버
벅거릴 뿐이다. 내 시선이 들레의 속옷에 닿는 순간 들레도 그쪽을 향해 눈을 돌린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찢어지는 비명.
"내, 내, 내 가 그, 그러고 싶, 시……."
꼭 감싸쥐고 있었던 이불을 냅다 집어 던져버리고 들레는 황급히 침대에서 빠져 나와 바닥에 펼
쳐진 속옷을 주워 품에 안는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이.
자신이 입고 있는 옷 종류를 보곤 거의 실신 상태까지 이른 들레다. 다가가 쓰러지려는 들레를 받
으려했지만, 대신 잘 펴진 손바닥이 내 뺨에 작렬한다. 짝, 꽤나 세게 맞은 것 같은데, 전혀 아프
지가 않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었는지. 난 정말 미친놈인 게 분명하다.
다시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는 들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내 흰 티셔츠를 입고 있는 들레.
거기까지는 괜찮다. 왜 아래가 사각팬티인지. 왜 또 그 하나만 걸치고 있는지.
"나가! 나가란 말야, 이 변태야!"
"벼, 변태. 내, 내가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나가! 이 변태, 저질아!"
배게 하나가 날아와 내 얼굴에 명중한다. 아픈 건 아니다. 강하게 맞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코에
서 두 줄기의 피가 줄줄 흘러나온다.
들레의 손에 이번엔 침대 위에 놓여있는 탁상시계가 잡혀있다. 저걸 던지면 아마도 난 많이 아플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난 이미 방밖으로 나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야한 장면들을 애써 고개를 흔들어 지워보려 한
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진정 난 미쳤었던가. 어떻게 시집도 안간 처녀에게 그런 짓을, 생각
만 해도 흥분이 발끝부터 머리 위까지 달아오른다. 지금 이 생각을 하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난 벼
락맞아 죽어 마땅하다.
뚝뚝, 그제야 난 바닥에 연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는 붉은 액체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달랑 사각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다는 것도. 몇 발자국 뒤에 있는 테이블에서 휴지를 뽑아 피를
닦아낸다. 휴지 두 조각을 동글동글 말아서 두 콧구멍을 막는다.
"후후, 정말 미치겠군. 아니, 넌 미쳤어, 병신아! 어떻게 숙녀한테 그런 꼴을……, 이 미친 새꺄! 그
래도 나였으니까 다행이지, 다른 새끼였으면 벌써 나한테 죽었어. 이런 미친 새끼. 술이 취했다고
는 하지만, 그 짓거리까지 하냐!"
바닥에 묻은 피를 휴지에 물을 묻혀 그 흔적을 없앤다.
어떻게든 들레의 마음을 진정시켜야된다. 조심히 1층으로 내려간다. 아침 8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깨어날 리가 없지.
정말 다행히도 아직도 그들은 몇 시간 전 그대로 뻗어있다. 조심히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겨 꿀물
을 탄다. 일단 나 먼저 먹고, 들레한테 갖다줘야지.
발꿈치를 들어 다시 조심조심 2층으로 올라간다.
방문 앞에 다가서서 다시 한 번 긴 호흡을 한다.
똑똑,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들기는 나,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다.
"들레야, 나야. 들어가도 돼?"
아무 대답이 없다. 다시 몇 번 문을 두들긴다.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 대답도 없다.
"나 그냥 들어간다."
문을 살짝 비틀어 천천히 연다. 내 몸이 들어갈 공간이 보일 때, 난 조심히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간다.
"헤헤. 들레야……."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날 똑바로 응시하는 들레, 얼굴을 마주 대하기가 정말로 무섭다. 이미
옷은 처음 그것으로 다 갈아입은 상태다. 지금 내 복장은 달란 사각팬티 한 장인데, 이 모습에도
들레의 눈에는 작은 흔들림조차 비치지 않는다. 꿀물을 앞세워 허리를 숙이고 천천히 들레에게 다
가간다.
"들레야, 이거 꿀물인데 일단 이거부터 마시고 얘기하자."
아무 말 없이 꿀물을 꿀꺽꿀꺽 단번에 마셔버린다. 뭐라고 말해야 되지? 사실은 내가 네 옷을 다
벗기고 내 속옷으로 갈아 입혔다고? 맞아 죽으려면 무슨 말을 못할까.
들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있다.
"솔직히 말할게. 네가 하도 화장실에서 안 나와서 내가 들어가 봤더니, 옷 다 벗고 쓰러져 있더라.
난 깜짝 놀랐지. 얼른 문을 닫고 다른 여자 애들한테 말하려고 주위를 둘러봤는데, 다 뻗어버린
거야. 그래서 깨웠는데, 죽어도 안 일어나데. 정말 몇 십 분을 그렇게 했는데도 질기게 안 일어나.
난 네가 걱정되니까. 설마 무슨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닐까 하고, 여린 마음에 너를 안고 내 방으로
데려왔지. 그리고 그 다음 상황은 조금 전 네 모습……."
정말이지 내가 이렇게 거짓말을 잘 할 줄은 몰랐다. 한 번 입을 열자 술술 뱉어지는 말들은 나조
차 깜짝 놀랄 지경이다.
들레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다. 넌 정말 빌어먹을 개 잡종보다도 못한 새끼다. 그런데 내가 살아나
려면 어쩔 수가 없었잖아. 내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들레를 보니, 많이 미안하다. 내가 정말
이래도 될지. 아니, 우린 원래 결혼하기로 한 사이니까, 괜찮겠지.
"나 이만 가볼게. 그리고 고마워. 그렇게까지 챙겨줘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피해 문밖으로 나가려는 들레. 내 심장은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대로
들레를 보내면 여태까지의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고, 어떻게든 붙잡아야 된다고.
난 뒤돌아 들레의 손을 붙잡는다.
날카로운 시선이 나에게 닿는다.
그 동안 꾹 참고, 하지 못했던 말, 말하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치고도 꺼내지 못했던 말, 내가 그렇
게도 소망했던 바람. 감정에 휩싸여 난 결국 그 말을 뱉어낸다.
"민들레, 나랑 사귀자!"
바로 앞에 들레의 얼굴이 있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른다. 지금은 그저 모든 것을 몸에 맡기고
있을 따름이다. 난 망설이지 않고 말을 끝낸 즉시 들레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어떻게든 나를 때어놓으려는 들레의 발버둥이 있지만, 곧 그 움직임도 시간이 갈수록 멈춰진다.
들레의 몸이 축 쳐진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서 있지 않아. 널 힘들게 바라만 보고 있지도 않을 거야. 이 한 수에 내 모든
걸 걸겠어. 난 네가 없으면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니까.'
바람이 한 여인의 머리카락을 스쳐지나갔다. 하늘은 높고 파랗다. 거리의 소음도, 도로 위의 자동
차 소리도, 거리의 많은 사람들도, 하늘 높이 솟은 건물들의 그 형태도, 모두 어제와 같은 모습이
었다.
"나 속 쓰려서 죽겠다. 술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아우, 속 쓰려. 민들레, 넌 아무렇지도 않아?
술도 약한 년이 그렇게 먹어댔는데……."
은숙의 말에 들레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상재네 집에서 나온 다음부터 쭉 이랬다. 은숙 혼
자만이 긴말을 늘어놓고, 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여태 말 한마디 없는 들레였다.
은숙의 말이 바람을 타고 귓가로 전부 전해 들려오지만, 지금 들레는 그 뜻을 헤아릴 정신이 없었
다. 지금은 오직 한 사람 생각뿐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상재라는 남자가 들레의 아픈 마음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들레는
알 수 없었다. 상재가 생각나면 곧잘 머리를 뒤흔들어 지워버리곤 했었다. 1분 1초, 늘 종탁이 생
각나곤 했었는데, 이제는 그 시간이 점점 길어져갔다. 어떤 때는 30분에 한 번씩, 1시간에 한 번
씩…….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나 혼자 다 말하려고 하니까, 입이 다 아프다. 너 혹시 오늘 그날인 거
야? 야, 이 지지바야, 무슨 말 좀 해봐! 가뜩이나 속 쓰려죽겠는데, 너 때문에 터져 버릴 것 같다.
이그, 이그! 넌 그렇게 계속 걸어라. 난 혼자 말할 테니."
은숙의 짜증 섞인 말투가 들리고서야 고개를 돌리는 들레였다. 그것 뿐, 들레는 살짝 웃음 짓곤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려버렸다. 은숙의 짜증 섞인 말은 그 정도를 더해 갔다.
'난 종탁이 뿐인데……. 왜, 왜 자꾸만 상재가 생각나지? 종탁이하고 같은 느낌이야. 늘 그랬어. 처
음 내게 다가올 때도, 조금 전 헤어질 때까지도 말이야.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냐. 점점 상재가 좋
아져. 아니, 솔직히 지금 상재가 너무 보고싶고, 곁에 있고 싶어.'
어떻게든 들레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그럴수록 더해져만 갈 뿐이었다. 상재
의 미소와 종탁의 미소가 겹쳐지기도 하고, 상재의 음성과 종탁의 음성이 겹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레의 귀에 들려오기도 하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종탁이한테 많이 미안한 건데. 나 정말 바보 같다. 그치, 종탁아. 나 정말 바보
같아. 금방 너 잊고 이렇게 다른 남자 좋아하는 거 보니까. 나 정말 나쁜 여자야. 상재가 자꾸만
너랑 같게 보여. 어떡하지? 나 어떡하면 좋을까, 종탁아…….'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바닥에 떨어졌다. 한참 긴 연설을 내뱉고 있던 은숙은 그런 들레의 모습에
급히 입을 닫았다.
들레와 은숙이 걸어가는 길거리. 그 옆 조그마한 은행나무에 달린 노랗게 물들은 잎사귀 하나가
조용히 바닥에 떨어졌다.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그 잎사귀를 들레의 곁으로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