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 女僧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이 시를 읽자면 송수권 시인의 여승과 비교하여 감상하면 시맛이 더 깊어질 것이다.
때는 어느 늦은 가을 평안도 어느 깊은 산에서 예전에 본 듯한 여승과 그녀의 등에 업힌
나 어린 딸아이에 대한 추억으로 시작한다. 평안도 어느 산 금광터라는 구체적인 장소가
소개되고 화자는 나 어린 딸아이를 등에 업고 옥수수 팔이를 하는 여승에게서 옥수수를 산다.
엄마의 등에 업힌 나어린 딸아이는 옥수수를 사는 낯설은 사내가 무서웠던지 평안도 산골의
모질은 추위탓에 울었던지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여승은 금광을 캐러 간 지아비가 있는데
십 년이 되도록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나는 우연히 가쥐치 냄새가 나는
그 여승과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고 합장을 한다. 집나간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가을밤같이 차게
울던 나 어린 딸아이는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나 어린 딸아이를 차가운 돌무덤에 묻고 돌아온 그날은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었다.
여승을 보고 절을 한 나는 세월에 절은 여승의 쓸쓸한 낯이 불경을 외울때와 같이 서러웠다.
떠나간 지아비는 돌아올 생각도 없고 하나뿐인 피붙이인 나 어린 딸아이마저 땅에 묻은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 시는 당시 가난한 민초의 삶을 시인이
눈으로 보고 있는 사실 그대로 그려낸 평안도 산골 오지마을의 팔자기구한 여인네의 모습이자
국권을 잃은 우리민족의 아픈 상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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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승 女僧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 기도하며 詩를 쓴다.
1983년 시집 <꿈꾸는 섬> (문학과 지성사)
§ 백석 시인의 삶이 궁금한 독자들은 안도현 시인의 백석평전을 참조바람.
백석(白石)
19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디지털기술로 색을 입히다)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북방 정서를 통해 시화(詩化)했다. 본명은 기행(夔行). 백기연(白夔衍) → 백기행(白夔行)
1912년 7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지면 익성리에서 태어났다. 1996년 2월 15일[3] (향년 83세) 량강도 삼수군 관평리에서 卒하다 (북쪽 인사치고 드물게 생몰연대가 자세함)
배우자관계 사별 초배 이송저 (1935년 ~ 1937년 사별) 사별 계배 장정옥 (1938년 ~ 1941년 사별) 이전 삼취 문경옥 (1942년 ~ 1947년 이혼) 사취 부인 이윤희 (1957년 ~ 1996년) --좀 특이한 이력이라 한번 올려봄-- 학력 오산소학교 (졸업)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전문부[13] (영어사범과 / 졸업)
등단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 (1930,《조선일보》) 시 『정주성』 (定州城, 1935,《조선일보》)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1918년 오산소학교를 거쳐 오산중학교를 마치고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조선일보사에 입사, 〈여성〉에서 편집을 맡아보다가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함경남도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만주 신징[新京]에 잠시 머물다가 만주 안둥[安東]으로 옮겨 세관업무를 보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민족주의 지도자 고당 조만식의 비서를 지내며 솔료호프의 〈고요한 돈 강〉 등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국문학을 강의했으며 6.25전쟁 중 중국에 머물다가 휴전 후 귀국하여 협동농장의 현지파견 작가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다.
※ {남한에서는 월북작가로 분류되어 권위주의 시대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는데 백석은 월북이 아니고 그냥 자기 고향에 머물렀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석시인을 도매금으로 월북작가로 분류한것은 남한 당국이 지혜도 성실성도 없는 것들이라고 신경림시인이 그의 저작 "시인을 찾아서 1" 에서 질타 하셨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인 평안도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이용악 시의 북방 정서에 나타나는 것처럼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이후 남한에서 시집 〈백석 시전집〉(1987)과 〈흰 바람벽이 있어〉(1989) 등이 출간되었다.
백석의 여인이라는 주장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한 여인 중 하나는 법정 스님에게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김자야)이다. 길상사 시주가 언론에 널리 보도되면서, 당시 김영한와 백석과의 일화도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김영한의 호 '자야'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나오는 여인의 이름으로, 백석이 일본 제국 아오야마가쿠인에 유학하면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객관적인 사실이다.
김영한은 기생 출신이며 8.15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릿집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스님에게 대원각 전체를 시주하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당시 돈으로도 1,0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어서, 1987년 처음 제안을 받은 법정스님은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김영한이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매달려서, 결국 법정스님과 대한불교조계종은 시주를 받아들여 대원각을 길상사라는 사찰로 개조한다. 그리고 김영한은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영한은 생전에 "아무리 1,000억 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이 가장 많이 생각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따로 때가 어디 있나" 등의 말을 남겼으며, 이는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백석 측과 문학계는 김영한이 백석의 연인이었다는 설을 부인하고 나선다. 백석의 주변인들은 김영한과 백석의 교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백석은 활동 당시 셀럽처럼 인기가 있어, 그가 좋아했던 여인이나 주변 여인들은 잘 알려진 편이다. 백석이 박경련(란)을 좋아하던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김영한으로 인해 "백석이 기방 출입이 잦았다"는 설이 나오게 되고, "백석이 함흥의 기생과 동거하여, 이것이 김진세의 여동생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유가 되었다"는 설도 나오게 된다.
백석 연구가인 송준 역시 "김영한을 직접 만나보기까지 했으나, 그녀는 백석에 관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질문을 하니 백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요지로 책에 적고 있다. 김영한이 그렇게 돈이 많았으면서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도 의심했다. 그래서 "백석이 유명해지니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으로 짤막하게 맺는다. 백석 전문가인 이동순 영남대학교 교수는 말년의 김영한에게 책 <내 사랑 백석>을 내도록 독려했다.
※ 요즘에는 유명인의 아이가 있다고 주장해서 왕창 돈을 뜯어내려는 사람도 있다.(축구선수 손모씨처럼) 반대로 어마어마한 자기 재산을 내어 놓으면서 유명인과 관계를 거론하였는데 이것은 사실관계가 어떻든 자기 돈을 저 세상으로 가져가지 못할진대 아주 절묘하게 세상에 잘 남겨둔 경우가 아닐까하는 게 개인적인 생각
그의 시집 제목 "사슴" 처럼 백석시인은 사슴으로 상징되는데 생전에 교류가 있던 노천명시인의 시"사슴"도 백석시인을 노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