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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9,1~6. 13~17. 34~38
+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사순 제4주일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목요일에는 인천 교구의 한 본당에 가서 사순절 특강을 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주님의 십자가 보목을 모시고 가서 교우들에게 친구(親口) 해드렸죠.
이미 강의는 유튜브에 올라와 있으니 잘 들으셨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또 안 들으신 분들은 반드시 들으시면서 부활 맞을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화두를 제가 던졌습니다. 많은 묵상 거리를 던졌습니다.
그중에서 열매를 구체적으로 잘 맺어야 하겠죠.
그냥 듣기만 해서 머리만 커지고 상식으로만 남아 있는다면, 제가 피정한 의미가 별로 없을 겁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 복음에는 태생 소경의 치유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장님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밤에 다닐 때 꼭 초롱불을 들고 다녔대요.
눈이 멀쩡한 사람이 그 할아버지가 행동이 이해가 안 되지요.
초롱불을 드나 안 드나 그냥 장님인데 초롱불을 들면 그 눈이 보이겠습니까?
아니죠.
그래서 궁금해서 물었다고 해요.
‘할아버지 앞도 안 보이시는데 왜 초롱불은 들고 다니십니까?’
할아버지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리라고 여러분들 짐작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앞이 안 보이는 내가 호롱불 든다고 뭐가 보이겠어?
눈 뜬 놈들이 와서 자꾸 부딪쳐서 제발 부딪히지 말라고 호롱불 들고 다녀.
눈먼 나도 사람 안 부딪히고 잘 다니는데 왜 그렇게 눈 뜬 인간들이 헤매고 돌아다니는지.’
이런 말 나오리라고 예상하셨습니까?
우리나라 말에 ‘눈뜬장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왜 넘어지고 왜 부딪히고 그럴까요?
어두울 때, 우리는 빛이 없기에 넘어지고 부딪힙니다.
눈은 두 가지, 육의 눈이 있고 영의 눈이 있습니다.
육의 눈을 갖고 물체를 바라보려면은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로는 의학적으로 이상이 없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빛이 있어야만 볼 수가 있습니다.
저도 이제 나이가 드니까 벌써 여러 해 전에 백내장 초기 그리고 황반변성 초기에 녹내장 초기까지 있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그래서 활자가 깨져 보이고 햇빛을 보면 눈이 아픈 이유가 그런 거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당시로는 수술할 단계는 아니라 했는데 그 후 좀 진행된 것은 확실합니다.
책은 거의 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무튼 육신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육신의 눈으로 뭘 보려면은 일단 눈에 병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빛이 있어야 하겠죠.
소경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도 있고, 약을 잘못 먹었다든지 아니면은 사고로 눈을 다쳐 소경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영의 눈은 어떤 상태가 돼야만 영의 눈이 뜨냐?
하나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뭔 빛을 받아야 한다고요? 성령의 빛을 받아야 한다.
오늘 이 태생 소경의 이야기는 참 드라마틱합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서 육신의 눈도 고치고 영의 눈도 열립니다.
‘육신의 눈은 고친다, 영의 눈은 열린다’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이 침을 뱉어 진흙을 개서 그 진흙을 눈에 바른 후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었더니 눈이 떠졌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진흙을 눈에 발랐더니 나았다.’
흙이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이 세상 모든 물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흙은 생명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아마 흙을 눈에 바르신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눈을 뜨고 난 후에 이 형제는 어마어마한 시련과 박해를 받습니다.
눈 뜨기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많은 사람이 눈을 뜨고 난 다음에는 별의별 소리를 다 합니다.
바리사이파들이 뭐라 그럽니까?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에 원래부터 이 사람은 장님이 아니었다고 몰아세웁니다.
그리고 오늘 짧은 복음을 읽어 생략됐지만 긴 복음에는
부모까지 불러서 정말 당신 아들이 원래부터 소경이었느냐고 확인까지 합니다.
이렇게 서슬이 시퍼런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눈을 고친 영의 눈이 열린 이 사람은 당당하게 외칩니다.
‘너는 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그분은 예언자이십니다.’ 하고 당당하게 외칩니다.
이렇게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분별력과 담대함이 생깁니다.
2독서 골로사이서 5장 9절에 나오듯이 선과 정의와 진실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의 빛을 받아 영의 눈이 열리면 악 쪽이 아니라 선 쪽으로 돌아섭니다.
그리고 불의에 맞섭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 위선을 제일 경계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자, 그러면 영의 눈이 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또 내 안에 있는 어떤 어둠이 내가 영의 눈을 못 열게 하는가?
영적으로 나를 변화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은 많습니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얘기를 드리면, 첫 번째는 영의 눈의 열리기 위해 내가 걷어내야 할 것은
죄악으로부터 해방이 돼야 합니다.
죄 중에 있는데 어찌 영의 눈이 열리겠습니까?
내면에 잠재해 있는 악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죄라고 합니다.
죄는 내 안에 있는 악을 물리치지 못할 때 나오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악을 물리치려면 철저하게 준비된 고해 성사를 봐야 합니다.
목요일 인천 피정에서도 인성의 상처를 치유하는 네 가지의 교회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올바른 성사 생활이다.
성체 성사를 잘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고해 성사를 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성모님의 메시지에 의하면 많은 사람이 모고해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거짓 고해를 하기에 지옥으로 바로 떨어진다는, 참 섬찟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실제로 고해소에 앉아 있다 보면 ‘이 사람은 지금 모고해하고 있구나’하는 느낌이 옵니다.
정말 얘기해야 할 것은 저 밑에 감추어 놓고 성체는 영이 되겠으니 그냥 ‘주일 몇 번 빠졌습니다.’
그렇게 고해할 것이 없을까?
아무튼 우리는 마귀가 우리를 모고해의 죄로 몰아가는데 단호하게 맞서야 합니다.
내 죄가 아무리 진홍색처럼 붉어도 고해소 안에는 예수님이 있으시니,
신부님에게 고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계신 예수님에게 고해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사제의 입을 빌려서 ‘너의 죄를 사하노라.’ 한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말고
내 죄의 크고 작음을 떠나서 정직하게 겸손하게 고해해야 합니다.
고해 성사를 통해서 빛이 내 안에 들어오면 어둠은 물러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고해가 아니라 가슴을 찢는 성사를 봐야 하고 준비된 성사를 봐야 합니다.
후회가 아니라 회개를 해야 한다고 그랬습니다.
후회는 죄에 떨어진 자기 자신이 그냥 미울 뿐이지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회개는 하느님의 마음,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겁니다.
내가 그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내가 그리 헤매고 돌아다닐 때 성모님이 얼마나 애태우셨을까?
내가 그렇게 죄를 지을 때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얼마나 몸이 다셨을까?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성찰하는 것이 회개고 후회는 그냥 자존심이 상한 겁니다.
죄에 떨어진 자기 자신이 그냥 미울 뿐입니다.
고해소 안에서 후회만 하다 나간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같은 죄에 얼마 후 떨어질 겁니다.
그러나 진정 회개를 통한 준비를 하고 고해본다면 그렇게 쉽사리 같은 죄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였는가를 깨닫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영의 눈이 떠지지 못하게끔 막는 두 번째 걸림돌은
지나치게 머리로만 다른 말로 이성으로만 하느님을 믿으려 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이성적으로만 하느님을 믿으려 하는 것’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하느님을 어찌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머리로 하느님을 알아야 얼마나 압니까?
그래서 하느님 쪽에서 당신 자신을 알려주신 것이 뭐죠? 그게 바로 계시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단순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를 못 봅니다.
신학교에서 그 많은 신학 공부를 하고도 저는 십자가의 뜻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꼬맹이 하나가 성당에 들어와서 십자가 앞에 제대 뒤에 있는 십자가를 보더니
‘더하기다 더하기’ 하면서 하나를 배웠다는 듯이 뛰어나갔습니다.
그 아이는 아마 학교에서 더하기를 배우고 성당에 오니까 더하기 표시가 있고,
그 더하기 표시가 어느 한 사람의 몸으로 연결이 돼 있는 거를 봤던 겁니다.
그 아이가 그렇게 떠들고 나가는 것을 뒤에 앉아서 듣고 난 다음에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맞다 더하기 표시다!’
유한성에 떨고 있는 영혼에게 영원에 영원을 더해주는 표시다.
빼는 표시가 아니라 저 십자가는 더해주는 표시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를 저는 그 어린아이한테 배웠습니다.
우리는 너무 복잡하고 너무 이성적이기 때문에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시지도 못합니다.
그냥 자기가 보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영의 눈이 떠지지 않는 겁니다.
복잡할 때는 눈을 감아야 합니다.
지나친 이성으로 하느님을 믿으려 할 때 영의 눈이 떠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진리 앞에,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태도입니다.
교만은 부족을 인정하지 않고 죄인임을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지 못 하게 합니다.
한국의 수많은 성당이 장궤틀을 다 없애버렸습니다.
신자들은 무릎을 꿇고 싶어도 꿇지를 못합니다.
전 세계 어디를 돌아다녀 봐도 성당 안에 있는 장궤틀을 없애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입니다.
그만큼 한국 천주교에 어둠이 깊이 들어와 있다는 얘깁니다.
전기를 만들고 물을 관리할 때 우리는 저수지를 만들고 발전소를 만듭니다.
수력 발전이라고 하는 것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 생기는 낙차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 높이 차이가 크면 클수록 전력은 더욱 세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이 사람에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낮고 낮아져야만 합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물일수록 요란하게 소리를 내면서 밑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점점 하류로 갈수록 소리가 잦아듭니다.
그러다 강을 지나고 바다에 가면은 햇볕이 그 물을 하늘로 끌어 올립니다.
겸손치 못한 사람은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밑으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평온해지고 평화로워집니다.
성녀 테레사에게 어떤 사람이 한탄했다고 그럽니다.
‘제 앞에 있는 이 높은 환난을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뛰어넘을 수 없다면 밑으로 빠져나가십시오.
위로만 뛰어넘으려고 하지 말고 몸을 바짝 엎드려서 밑으로 빠져나가면 환난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겁니다.
환난은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가지고 이겨내는 겁니다.’
그래서 겸손은 고난을 이깁니다.
예수님은 큰 바보이셨고 더러운 것 닦아주는 걸레셨고 밑으로 내려가는 연탄불이셨습니다.
네 번째로 영의 눈이 열리기 위해서는 영적 의심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에 대한 의심이냐?
첫 번째, 사도신경에 나오는 교회의 가르침, 천주교 4대 교리인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 상선벌악,
또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 내려온 성령이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교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의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사교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이단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미사 때마다 ‘이는 내 몸이다, 내 피다.’ 할 때마다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치 말고 믿어야 합니다.
세 번째,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과 영원히 산다는 것과 심판과 하느님 나라를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네 가지 때문에 영적인 눈이 뜨여지질 않습니다.
네 가지의 걸림돌은 첫 번째 죄와 악습,
두 번째 머리로만 믿으려고 하는 것, 이성주의입니다.
세 번째 자기를 우상화하는 교만,
네 번째 영적 의심을 품고 사는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이런 것들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지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하고, 고해 성사가 필요하고, 성체가 필요하고, 성모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겁니다.
이 사순 시기 동안 우리의 탁한 눈을 씻어주시고 맑은 영의 눈을 갖도록 예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아멘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2023년 사순 제4주일 (3/19)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