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원고는 충남 청양군 문화원에서 발간하는 '칠갑문화' 2023년도 33호에 실려질 원고입니다.)
지금 고향사랑하기 위한 운동이 청양군청에서 벌리고 있다. 청양군에서 출생하여 살다가
외지에 나가 살고 있는 사람이 고향발전을 위해 기부하는 행위이다. 이와는 결은 다르지만
훨씬 이전에 아무 조건 없이 고향을 사랑한 독지가가 있었다.
이런 선구자의 이야기는 고향 살리기에 역사적 힘이 될 것이다.
그 주인공은 13세까지 청양에 살다가 서울로 주거지를 옮겨 살았고 죽은 후 고향인 청양 읍내 송방리
자신의 부모 산소 아래에 안장된 서병훈(1913~2000) 선생의 이야기다. 선생은 고향사랑을 실천으로
옮긴 분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전부 고향의 후진 양성을 위해 장학 사업에 사용한 분이다.
‘상길육영회’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바로 그 ‘상길육영회’의 혜택을 듬뿍 받은 사람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저서 “우리 어머님”(2008. 지식산업사 출판)이라는 책에서 이미 공개적으로 소개되었지만
육영회에 대한 전모를 밝히는 것은 이 글이 처음이다. 청양신문을 검색해 보아도 그분의 이야기나
‘상길육영회’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얼마 후에는 이는 잊혀 질 이야기일 같아 역사학자인
나는 이에 기록을 남겨야겠다는 학자적 사명감으로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서병훈 선생은 아버지 상길(1890~1956)씨와 어머니 선산 김씨 사이에서 2녀 1남으로 1913년에 태어났다.
상길 씨는 원래 청양출신이 아니고 전라도에서 처가를 따라 청양으로 주거지를 옮긴 분이다.
본관은 대구 서씨이고 처가는 선산 김씨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없는 것으로 제적등본에 실렸다.
여자가 이름을 호적에 남기지 않은 것은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다.
선생은 13세까지 청양에서 살았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청양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큰 누님이 살고 있던
홍성으로 나가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이에서 중퇴하고 서울로 옮겨 5년제의 보성 중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의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수리물리학과에 진학하여 1935년에 졸업했다.
수리물리학과는 후일 이과대학으로 발전하였다.
선생은 25살 때에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창원 황씨 (1917~2009) 여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5녀의 자녀를 두었다. 모두 훌륭하게 키워 각 방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선생은 주로 광산업에 종사했다.
서병훈 선생은 아버지로부터 1953년경에 청양양조장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이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전부 쏟아 선친의 이름을 따서 ‘상길육영회’를 만들어
당시 군내에 있었던 두 개의 중학교 즉 청양중학교와 정산중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1년에 한 명씩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공과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는 고등학교 졸업까지 연속되었다. 대학교의 문제는 각자가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였다.
즉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는 중고등학교의 중간 징검다리를 놓아준 셈이다.
이 장학사업은 청양읍내 핑구재에 살던 선생의 외사촌 김기만(당시 초등학교 교사) 선생의 역할이 컸다.
이는 청양에서는 처음 있었던 고향발전을 위한 기부행위였다. 후생의 교육에 쏟은 장학사업은
당시로서는 전국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일로서 길이길이 기억될만한 값진
고향사랑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첫 해(1954)에 청양중학교에서 뽑은 장학생은 중학교 과정에서 중도 포기했고, 정산중학교에서
청남면 청소리에 살던 황의갑 씨가 뽑혔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국방부 안기부에서 근무하여
서기관에 승진하였고, 일생을 바쳐 국가 발전에 헌신했다.
2기 장학생은 1955년에 청양중학교에서 장재천 씨와 정산중학교에서 정구복이 뽑혔다.
장재천 씨는 대전 시청에서 열심히 봉직하다가 정년 퇴직했다. 그 후 ‘국민고충처리위원회’
대전 상담소장으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은퇴했다.
정구복은 우리나라 역사를 전공하였다.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육군사관학교, 전북대학교, 충남대학교
교수를 거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정년퇴임하였고, 현재는 한국사학사학회 명예회장으로
학회 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고향을 위해서 “장평초등학교 60년사”를
1995년에 집필 편찬한 바 있다.
제3기(1956) 상길 육영회장학생은 청양중학교에서 김건진 씨와 정산중학교에서 안병산 씨가 선발되었다.
김건진 씨는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 기자로 크게 활약했고, 현재는 퇴임하여 미국에 체류하고 있다.
안병산 씨는 1979년 ‘동방의료기상사’를 설립하여 사업가로 성공하였다. 2007년에 모교인
청남초등학교에 4000만원 상당의 컴퓨터 기기 등을 기증했다(대전일보 2007.12.25.일자 보도 기사).
또한 정산중학교에도 5천만원 상당의 교육용 기자재를 사서 기부했다.
제4기(1957) 상길육영회 장학생은 청양중학교 출신은 중학교 과정에서 포기했고 정산중학교에서는
목면의 황광석 씨가 선발되었다. 황광석 씨는 중고등학교 교사로 헌신하다가 퇴임하여 작년에 작고했다.
이들 장학금을 받은 사람 중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이상 6명이었다.
장학생 6명은 1975년경에 ‘상길육영회’를 복구하기 위해 기금을 매달 모았다. ‘상길육영회’라는
임의 단체를 만들고 기금이 2천만 원을 모은 후 다시 고향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는 서 선생으로부터 받은 은공을 본인에게 되갚기에는 당시 선생의 생활이 어렵지 않았기에 의미가 없었다고
판단하여 선생이 만든 ‘상길육영회’를 되살리는 것이 뜻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daum/cafe/allsamoo 2012, 9.16 일 자 “생활일기”란에 올린 391번 ‘서병훈 선생 탄신 100주년 축사:정구복 참조)
1984년 경 우리들의 장학사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첫해는 두 명이나 다음 해에는 네 사람, 그 다음 해는
여섯 사람으로 늘어나 이를 우리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당시 중학교 공과금이 없어지는
상황이어서 이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이는 3년간 계속하다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우리는 매년 서선생 댁에 세배를 갔다. 선생님과 사모님은 우리를 따뜻하게 반겨주셨고,
선생님의 항상 온화한 얼굴에 우리들의 이야기를 조용히즐겨 경청하셨다. 선생은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고,
고향 청양을 깊이 사랑했음을 느꼈다.
우리들 6명은 형제 다음 가는 동창으로 가까운 사이이다. 지금까지 1년에 한 번씩 만나고 있다.
우리는 언젠가 모두 서병훈 선생처럼 고향에 돌아가 묻힐 것이다.
우리는 고향과 고향 사람들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너무나 많은 혜택을 입었는데 고향발전을 위해
별로 힘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게 생각한다. 마음만은 고향을 사랑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서병훈 선생의 자녀와 연락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다섯째 막내 따님인 서정신 여사(철학박사, 스프링 문화컨설팅 대표이사)로부터 상길 옹의 제적등본 등 정보를 얻어 이용하였음에 감사를 드린다.
요컨대 서병훈 선생은 자신이 어렵게 자란 것을 생각하여 청양의 고향 발전을 위해 6년 간 육영회 사업을 했으니 그 공덕은 대단히 큰 일이다.. 선생의 지극한 고향사랑의 정신은 청정 무구하여 아무 조건이 없었던 점에서 더욱 값지며 우리들에게 길이길이 계승될 정신적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서병훈 선생이 고향에 뿌린 ‘상길육영회’ 사업은 알게 모르게 많은 인연을 만들어 청정한
고향 발전에 뿌리가 될 것이다. 청양의 문화발전에 헌신하는 청양문화원의 ‘칠갑문화’를 통해 고향 사랑의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서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청양에서 더 나오기를 깊이깊이 염원한다.
첨부하는 사진은 “우리어머님” 308쪽’에 실린 1963년 서병훈 선생의 회갑 때 두 분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필자 소개: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한국사학사학회 명예회장
첫댓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서병훈 선생의 고향 사랑 이야기를
청양문화원에서 발행하는 《칠갑문화》에 소개해 주셔서 뜻깊게 생각합니다.
연간지 《칠갑문화》는 현재 교정 작업 중이라고 합니다.
칠갑문화 33호에 실릴 글을 미리 카페에 올리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윤선생이 첫 독자가 되었습니다. 그 의미를 높게 평가해주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