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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1월 29일 금요일
[(녹) 연중 제34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요한 사도는 천사가 사탄을 결박하여 천 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하며, 어좌에 앉으신 분이 죽은 이들을 그 행실대로 심판하고, 새 예루살렘이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본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무의 변화를 보고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아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20,1-4.11―21,2
나 요한은 1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지하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2 그 천사가 용을, 곧 악마이며 사탄인 그 옛날의 뱀을 붙잡아
천 년 동안 움직이지 못하도록 결박하였습니다.
3 그리고 그를 지하로 던지고서는 그곳을 잠그고 그 위에다 봉인을 하여,
천 년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민족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에 사탄은 잠시 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4 나는 또 어좌들을 보았는데, 그 위에 앉은 이들에게 심판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상에 경배하지도 않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11 나는 또 크고 흰 어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보았습니다.
땅과 하늘이 그분 앞에서 달아나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12 그리고 죽은 이들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어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책들이 펼쳐졌습니다.
또 다른 책 하나가 펼쳐졌는데,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은 책에 기록된 대로 자기들의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3 바다가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고,
죽음과 저승도 그 안에 있는 죽은 이들을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14 그리고 죽음과 저승이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 못이 두 번째 죽음입니다.
15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습니다.
21,1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2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29-3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29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30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31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3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33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과거의 선택과 행동이 지금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과거의 좋았거나 나빴던 경험들은 나에게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이 과거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과거만이 나를 결정짓지는 않습니다. 지향하는 이상과 가치, 곧 미래에 대한 전망도 지금의 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렸고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나를 바꿀 수 없다고 단념하고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기보다는, 이상을 지향하고 추구하면서 나를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진다면 과거는 다르게 다가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저 깊은 곳에서 나를 괴롭히고 있는 부끄러운 과오, 상처, 실패들도 나아가야 할 이상을 향한 밑거름이 됩니다. 과거에 버림받았던 경험이 불신과 폐쇄적인 성격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미래의 전망 안에서, 그 아픈 체험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는 따뜻함을 이끌어 낼 수도 있습니다. 연중 시기의 막바지에 우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장차 다가올 종말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종말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교적 종말에 대한 미래의 전망이 지금 우리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의 선택과 행동이 지금의 내 삶을 이루고, 지금 우리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과거만이 현재를 만든다면, 우리는 미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섭리에 대한 믿음, 미래 종말에 주실 위로와 희망, 미래에 감당해야 할 심판 등 미래에 대한 전망이 나의 과거를 다시 볼 수 있게 하고, 지금의 나와, 나의 삶을 바꿀 수 있게 합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찬 기쁨의 날, 종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흘 내내 강풍을 동반한 비와 진눈깨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늘 잔잔하던 바다도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표지판이 넘어지고, 그간 용케 버티고 있던 단풍들도 모두 떨어져 내렸습니다. 순식간에 가을에서 한겨울로 넘어온 느낌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이 세상 것 무엇 하나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물건들도, 죽고 못 살던 인연들도, 목숨처럼 중요시 여겼던 일도, 직책도, 사랑도, 젊음도 다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끝도 없이 순환을 거듭하는 자연, 부침을 거듭하는 인간사야말로 인생의 참된 깨우침을 주는 큰 스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진리를 명확히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변화무쌍한 이 세상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에 더 큰 가치와 우위성을 두고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은혜롭게도 하느님은 변화무쌍한 우리 인간과 달리 언제나 한결 같고 든든하십니다. 영원불멸하십니다. 언제나 그곳에 서 계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세월의 흐름 앞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천천히 사라져갑니다.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고 태초의 상태, 무(無)로 돌아가고 맙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도 가고, 꽃다운 청춘도 다 지나갑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권세도 잠시입니다. 모든 것이 떠나가고 인간 세상과 인류 역사의 끝에 오직 한 분만 남을 것인데, 그분은 바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그분의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끝, 종말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겠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사랑은 끝까지 남아있을 것이라는 말씀,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세상의 끝, 재림의 시기에 하느님을 거슬러 살아온 사람들, 하느님을 거부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때가 확실하다.
그러나 반대로 하느님 말씀 안에 살아온 사람, 하느님만 신뢰하며 그분만 붙들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해방의 날이자 구원의 날, 기쁨과 환희의 날이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종말이 공포심에 부들부들 떠는 날이겠지만, 하느님 말씀 안에 산 우리들, 그분 말씀을 열심히 실천하며 살아온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시작,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찬 기쁨의 날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뜻밖에 등장하면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거기에서 왜 나와?’ 사제들의 모임에 스님이 있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이슬람 사원에 교회의 목사님이 있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지난번 미국 대선이 있었고,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 연설에 뜻밖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호명하면서 이번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일등 공신’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트럼프 대통령 후보에게 2,000억 원 이상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트럼프의 공약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매주 복권을 추첨해서 100만 불을 주었다고 합니다. 언론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2,000억 원을 투자했지만, 2조 원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 저는 예전에 일론 머스크의 강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화성에 인류가 이주해서 살 수 있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구는 소행성과 충돌할 수 있고, 지구 자체의 원인으로 큰 재앙이 닥칠 수 있습니다. 지구는 여섯 번의 멸종을 이미 겪었습니다. 화성에 인류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면 언젠가 다가올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화성으로 가는 방법을 찾으면서 인류의 과학 기술은 더 발전할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일론 머스크의 꿈이 인류에게 준 긍정적인 요소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꿈은 여러 방면에서 인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비전은 단순히 기술 발전을 넘어서, 인류의 미래와 지속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답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테슬라를 통해 머스크는 전기차와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을 대중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화석 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이바지를 했습니다. 머스크의 비전은 단순히 수익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기술의 상용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스페이스X를 통해 우주 탐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미래의 화성 이주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우주여행을 넘어서,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지구 밖으로 확장하려는 장기적 목표로 인류의 존재와 미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습니다.
머스크가 추진하는 다양한 혁신 기술들은 단순히 미래를 꿈꾸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이퍼루프와 같은 교통 혁신, 인공지능 연구, 뉴럴링크와 같은 신경 과학 기술 등은 인간의 삶을 더욱더 효율적이고 편리하게 만들려는 노력입니다. 테슬라 특허 공개와 같이, 머스크는 기술을 독점하기보다는 인류 전체의 발전을 위해 공유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는 개인적 성취보다 공동체의 발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실천한 사례로, 기술과 지식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머스크의 도전적인 꿈과 비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청년층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성공 사례는 개인의 꿈이 사회와 세계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열망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꿈은 단순한 기술 개발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00년 전에 묵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선을 만들어서 새로운 별을 찾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죽어서 가는 나라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꿈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도 우주선을 타고 새로운 별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참된 자유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생명은 죽음이 있기에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주어진 삶에 충실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며, 그것은 죽음을 넘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미도록 가까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31)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듯이
하느님의 나라에
우리가
가까이 갑니다
깊어가는
믿음으로
피어나는
희망으로
타오르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스미듯이
하느님의 나라에
우리가
스미도록
오늘의 성인
성 쿠트베르토 메인(Saint Cuthbert Mayne)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지역 : 영국(UK)
활동년도 : 1544-1577년
같은이름 : 구트베르토, 구트베르투스, 구트베르트,커스버트, 쿠트베르투스,쿠트베르트, 쿳베르토, 쿳베르투스
영국 데번셔(Devonshire)의 율스턴(Youlston)에서 태어나 삼촌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신자로 성장한 성 쿠트베르투스 메인(Cuthbertus Mayne, 또는 쿠트베르토 메인)은 옥스퍼드(Oxford)의 성 요한 대학에 재학 중이던 1570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가서 수학한 후 사제품을 받고 1575년경에 영국으로 돌아와 콘월(Cornwall)에서 성 요한 페인(Joannes Payne, 4월 2일)과 함께 은밀히 가톨릭 사제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년 만에 체포되어 1577년 11월 29일 교수형과 사지가 찢기는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두에에서 성직수업을 받은 첫 번째 영국인이자, 두에에 세워진 영국 신학교 출신 중 최초의 순교자이다. 그는 1886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다. 그래서 10월 25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하기도 한다.
세 프란치스칸 수도회의 모든 성인들 축일
1223년 11월 29일 교황 호노리오 3세는 작은 형제회의 회칙을 인준하였다.
그리하여 이날을 세라핌 수도회 모든 성인의 날로 정하게 되었다.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곧 우리의 연약함이며 매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권고5)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하신 착한 목자를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통과 박해, 모욕과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그리고 다른 갖가지 시련 가운데 주님을 따랐기에, 주님한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업적을 이룩한 분들은 성인들이었지만 우리는 그들의 업적들을 그저 이야기만 하면서 영광과 영예를 받기 원하니,이것은 하느님의 종들인 우리에게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성프란치스코의 영적권고6)
1209년,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회칙을 인노첸시오3세께서 구두 인준하며 회개의 설교를 할 수 있는 탁발수도회가 탄생되었다.
작은 형제회(Ordo Fratrum Minorum
프란치스칸 강좌에서1.17. 이런 획기적인 사건들 중 하나는 1208년 2월 2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에 맞추어 일어났다. 프란치스코는 미사 시간 중에 복음 말씀을 들었는데, 그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지팡이나 지갑도 없이 사도들을 맨발로 설교하러 파견하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순회자 혹은 순례자가 되어, 그들의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설교해야 했다.
프란치스코는 너무 기뻤다.
그것이 바로 그가 오랫동안 찾아왔던 바였던 것이다.
그는 그가 들은 것을 글자 그대로 실행하려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와, 신발, 그리고 은수자의 허리띠를 벗어버리고, 타우(T) 모양으로 된 겉옷을 입고 허리에는 허름한 띠를 매고 맨발로 나갔다.
그는 회개의 은수자 삶에서 사도적 설교가의 삶으로 자신의 삶의 양식을 바꾸었다.
이것이 바로 장차 프란치스칸 운동을 도래케 한 이상이었다. 1.18. 프란치스코가 뽀르찌운꿀라에서 첫 번째 형제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몇 주 후의 일이었다.
그들 중 첫 번째 사람은 아시시의 부유한 젊은이인 Quintavalle의 베르나르도였다.
그는 프란치스코를 자기 집에 초대하여 (우연히도 그의 집은 아직도 아시시에 남아 있다)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밤에 프란치스코는 그 친구의 집에서 묵었는데, 베르나르도는 프란치스코가 밤새도록 기도하고 있었던 것을 알아차렸다.
그 다음날 아침 베르나르도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는 아시시 광장에 있는 성 니꼴라오 성당으로 가서, 함께 하느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복음서를 들춰보았다.
세 번이나 책을 펼쳤는데, 다음의 구절들이 나왔다: “너희가 완전한 자가 되려거든 가서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서 보물을 갖게 될 것인데, 그런 다음 나를 따르라”(마태 19.21); “여행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루가 9,3);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루가 9,23). 이 성서 말씀들은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복음 운동에 있어서의 삶과 회칙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같은 해인 1208년 4월에 2명의 형제가 더 프란치스코와 베르나르도의 삶에 가담하였는데, 그들은 대성당 참사위원이었던 Pietro Cattani와 Egidio 혹은 Giles(영어식 이름)였다.
이날은 4월 23일이었다. 그들이 합류하자마자 그들은 둘씩 짝지어 설교 여행을 떠났다.
프란치스코와 Giles(에지디오)는 Ancona의 Marches(마르키아 혹은 마르케)로 갔다. 1.19. 이 작은 형제 공동체는 그 숫자가 꾸준하게 늘어갔다. 1208년 가을에 형제들은 리에티 계곡으로 설교하러 갔는데, 그들은 Poggio Bustone라는 불리는 작은 마을에 들르게 되었고 프란치스코는 거기에서 “buon giorno, buon gente”(좋은 하루, 좋은 사람들) 이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인사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몰두하여 기도하는 시간에 자기 자신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느낌을 심오하게 체험하게 되었다. 1.20. 1209년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을 위해 간단한 회칙을 써 주었다. 이것은 주로 앞에서 인용한 복음 내용과 비슷한 복음 구절들로 구성되었다.
그는 대담히도 동료들을 데리고 로마에 가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을 만나 자신들의 생활양식에 대한 인가를 청하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용감한 행동이었다.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그런 평신도 설교가 그룹에 대해서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사실 교황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단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설교하였고, 제도 교회의 성직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측면에서 복음적 가치들을 살았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비윤리적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대해서와 추문이 될 만한 그들의 예식들에 대해서 비난하였다.
당시 많은 이단파들이 있었는데, 특히 프랑스 남부 지방과 이태리 북부 지방에 많이 있었다.
이들 중 카티리파 이단이 가장 위험한 그룹이었다.
마치 평신도가 교회의 제도에 대항하여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통찰력이 뛰어난 정치가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의 머리였다.
그는 San Paolo의 Giovanni Colonna 추기경이 데리고 온 이 거지 그룹에 대해서 많은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후 프란치스코가 이단에 빠지지 않고 평신도들과 성직자들 사이에서 순수한 개혁을 시도하는 데 있어서 도구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전통에 의하면 교황이 꿈에서 교회를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프란치스코이다.) 그래서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의 회칙과 생활을 구두로 인준해 주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형제들을 작은 형제들이라고 불렀는데, 그는 형제들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진정한 형제들로서,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minores”로서 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21.
12명의 형제들로 구성된 이들은 기쁨에 넘쳐 아시시로 되돌아 왔다.
그들은 Orte에서 잠시 머문 후, 뽀르찌운꿀라에서 약간 떨어진 Rivo Torto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몇 달간 극도의 가난 속에서 머물렀다.
한 번은 황제로 선출된 Otto 4세 황제가 교황으로부터 왕관을 받기 위해 가는 중에 가까운 길을 지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이 때 형제 한 사람을 보내어 황제의 영광은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는 걸 대담하게 알리게 했다.
이 힘없는 형제는 황제 경비대에 의해 곧 저지를 받았으며 황제의 경비대는 이 형제가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지만, 이 형제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것에 대해서 매우 기뻐하였다.
어떤 농부가 형제들이 머물던 그 척박한 장소를 사용하기를 무례하게 요구했을 때에 프란치스코와 그의 형제들은 Rivo Torto를 떠나 뽀르찌운꿀라로 돌아갔다.
복자 프레데리코(Frederick)
활동년도 : +1329년
신분 : 증거자
지역 : 레겐스부르크(Regensburg)
같은 이름 : 프레데리꼬, 프레데리꾸스, 프레데리쿠스, 프레드릭, 프리데릭
독일 바이에른(Bayern) 지방 라티스본(Ratisbon, 오늘날의 레겐스부르크)에서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프레데리쿠스(Fredericus, 또는 프레데리코)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의 평수사로 입회하였다. 수도원에서 그는 주로 목수 일을 하며 땔감 나무를 준비하는 직책을 맡았지만, 놀라운 신심으로 하느님께 감사하는 법을 깨달았다. 그는 천사의 손으로 성체를 받아 모신 적이 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공경은 1909년에 승인되었다.
복자 디오니시오 (Dionysius)
활동년도 : 1600-1638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복자 레뎀토 (Redemptus)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1638년
같은이름 : 레뎀또, 레뎀뚜스, 레뎀투스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옹플뢰르(Honfleur)에서 베르틀로(Berthelot)가의 10남매 중 맏이로 태어난 ¹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는 피에르(Pierr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12살부터 선원 생활을 하던 피에르 베르틀로는 커서 프랑스 선박의 선장이자 상인으로서 활동하던 중 1635년 인도의 고아(Goa)에서 카르멜회의 한 원장을 만나 그 길로 카르멜회에 입회하여 디오니시우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서약을 한 후에 포르투갈계 부원장이 대사를 태우고 가는 배의 조타수로 일할 것을 요청받고 수마트라(Sumatra)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자 카르멜회 장상은 그에게 사제품을 주고 사목자로서 활동하도록 하였다.
이때 그는 평수사인 ²레뎀투스(Redemptus)와 함께 항해하게 되었는데, 레뎀투스의 세속명은 토마스 로드리게스 다 쿠나(Thomas Rodriquez da Cunha)였다.
레뎀투스는 카르멜회에 입회하기 전에는 인도의 군인으로 활동했었다.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아친(Achin)에 당도하였을 때 수마트라인들이 대사와 그의 부하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 학살당했는데, 특히 그리스도교 신앙을 끝까지 고수한 ¹디오니시우스는 코끼리에 의해 짓밟혀 순교하였고, ²레뎀투스 역시 살해되었다.
탄생의 ¹디오니시우스와 십자가의 ²레뎀투스는 1900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