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되어서 하고 싶은 일하고 살려면 학생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설명을 하지만 애들 입장에서는 잘 와닿지도 않고 긴가민가합니다. 사실 애들은 자기가 언젠가 어른이 되리라는 것 자체가 잘 상상이 안된다고 합니다. 당장 놀면 재미있고 공부하는 것은 지루하니 놀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은 당연합니다. 살아보지 않아 예측도 안되는 불확실함에 전력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고 현실로 느껴지는 것이야 당연 그러한 것이지만 (其然) 눈에 안보이고 짐작만 되는 불확실함 (未然)을 추구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당장 체감하는 돈과 권력의 힘과 욕망의 충족이라는 현실적 메카니즘이라는 생생한 기연(其然)함 앞에 생명의 근원이나 생을 초월한 영원성에 기반한 도덕적 삶이라는 불확실한 미연(未然)함은 우선순위를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태초의 우주적 신성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그 우주의 마음이 천지의 가운데에서 끊임없이 작용하기에 모든 물질적 법칙과 정신적 활동이 작용을 하며 삼계 우주가 돌아간다는 것이 성인들의 말씀입니다.
세상에 만연한 서구 휴머니즘적 세계관 속에서 영적 가치라는 것은 도덕적 삶을 살기 위한 가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철학은 우주전체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해석에 머뭅니다. 마음은 물질적 뇌활동의 부산물로 여겨집니다.
말단적 기연(其然)함에서 시작한 수많은 귀납적 추론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적 파워를 발휘하면서 그 과학적 기연(其然)함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미신시하고 배제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자기 안의 완전한 신성의 존재를 못미더워하며 말단적 기연(其然)함에 치중한 다수의 흐름에 맞춰 살아가려 합니다.
현재의 상식은 너와 나는 분리된 몸을 가진 서로 다른 에고라는 기연(其然)적 인식이지만 성인의 말씀은 너와 나는 다 하나의 신성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현재로서는 미연(未然)적 인식입니다.
어떤 인식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역사를 당연시하게 만들고 어떤 인식은 사람들을 서로 존중하며 함께 어우러질수 있게 합니다. 정심성의와 수제치평에 앞서는 것이 격물치지이듯이 근본적 인식이 잘못되면 그 말단에서는 한없이 엇나가게 됩니다.
감각기관을 통한 상식적 인식을 넘어 근원적 신성의 존재에 대한 각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수행을 통한 깨달음입니다. 악행을 멈추고 감각을 잠재우고서야 에고를 초월한 자신의 신성을 느끼고 드러내어 내가 바뀌고 인간의 삶을 바뀌어 가게 할 수가 있습니다. 내 신성에 대한 각성을 통해 보이지 않는 신성이 또한 기연(其然)함으로 다가오는 확신에서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시대인 선천이 끝나고 후천이 되면 모두가 그 근원적 신성인 태을로 원시반본하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길을 모두 태을주를 읽으며 함께 가게 되겠지요.
마음닦고 태을주입니다.
첫댓글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시대인 선천이 끝나고 후천이 되면 모두가 그 근원적 신성인 태을로 원시반본하는 동귀일체(同歸一體)의 길"
한뿌리에서 나와 개별적인 성장을 마무리하고 이제 원시반본하여 원뿌리로 되돌아 가 하나가 되어 완성됩니다. 비로소 하나이면서 전체임을 자각합니다.
천하창생은 모두 천지부모님을 모시는 동기간(同氣間)입니다. 내 가족만 동기간이 아니고 천하창생이 모두 태을일맥으로 연결된 동기간임을 깊이 깨우쳐 알아야, 공근하고 온화하게 말과 글이 달라지고 행실이 바뀝니다. 천지부모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마음닦고 태을주를 읽어 독기와 살기를 풀어없애 천주의 성품을 되찾고 태을성령이 충만한 시천주 봉태을의 태을도인으로 재생신되어, 천하창생이 한몸인 동기간 의식을 깨달아 상생생활을 실천하여 세계일가를 이루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깨침의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