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같은 비가 쏟아지던 오늘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머물던 큰 비구름들이 아랫지방으로 내려와서 쏟아붓고 있었습니다.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은 잠시일뿐,
비가 오니 더 읍에 가지 못할 지역분들을 위해 부랴부랴 준비해서 출발합니다.
9시 15분,
비가 퍼붓는 그 순간에도 우산쓰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어머님.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 엄청난 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댓병 두개~~" 하면서 돈을 건네시는데,
건네는 과정에 돈이 다 젖습니다. 저도 차에서 내리고 타는데 우산이 필요없습니다. 잠시의 찰나 동안 웃옷과 바지가 모두 젖었습니다.
이 비가 쏟아지는데도 우산쓰고 기다려주시는 어머님, 얼마나 고마운지.
9시 35분,
어르신께서 집 현관에서 손짓하십니다. 마당으로 들어와달라고 하십니다. 마당으로 들어간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공간이 괜찮을 것 같아서 들어가봅니다. 어르신은 평소에 밀차가 있어야 걸을 수 있는데, 비오는 날에는 우산까지 쓰고 밀려니 녹록치 않습니다. 아니 불가능해보였습니다.
어르신 집 마당으로 차를 들어가서 최대한 가깝게 오실 수 있도록 주차를 해드립니다. 그러곤 우산 씌워드리고 오실수 있도록 합니다.
기후 위기가 올 수록 어르신들의 삶이 펺치가 않습니다. 약자일수록 기후 위기가 더욱 치명타로 오고 있습니다. 비가 오는것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폭우로 쏟아지는 비. 어르신들 일상이 어려워집니다.
9시 45분,
불가리스를 갖다드리러 가는 길, 윗집 어르신이 급하게 부르십니다.
"이거 막 햇어~ 갖다 먹어~~" 하시며 주십니다.
비닐 위로 잡았는데, 얼마나 뜨거운지... 후라이팬에서 꺼내자마자 바로 주셨나봅니다. 그러곤,
"공병 갖고 간다면서? 공병도 좀 갖고가게~" 하십니다.
조합원은 아니시지만, 공병 처리가 필요하셨나봅니다. 지금은 공병창고가 꽉차서 갖고 갈 수 없지만, 어르신 집도 체크해서 다음번에 갖고가는 것으로 말씀드렸습니다.
10시,
아까 어르신께 받은 전을 갖고 나갔습니다. 집에 누워계시는 어르신 내외.
바로 막 구운 전 갖고 가니 어르신들께서 좋아라하십니다.
어르신과 함께 마루에 앉아 비오는 모습 보며 이런 저런 이야이 함께 나눕니다. 그러는 사이 뒷집 삼촌 오셔서 물건 달라고 하십니다.
어르신께 인사드리고 물건 팔러 갑니다.
10시 20분,
오랜만에 마을에 어르신들이 나오십니다. 오늘은 윗 동네를 안가셨나봅니다.
어르신께서는 "오늘 좀 많이 사야하는데..." 하시며 줄줄이 부르십니다.
"계란 2판, 국수 하나, 식용유 2개, 간장 맛난 놈으로 2개, 홈키파 1개, 라면 2개..."
"그리고.. 음 간식거리... 제리 하나" 달라고 하십니다.
한 번에 다 들고가기 힘드시니, 집까지 들어다드립니다. 때마침 비가 잠시 멈췄습니다. 고마웠습니다.
10시 55분,
매일 마을을 다니며 살피는 젊은 이모님. 오늘 처음으로 물건을 사셨습니다.
'빵 1개, 구운 계란 1개.'
간식으로 드실것이 필요하셨던것인지, 식사 대용인진 모르겠으나, 오늘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1년 만입니다.
11시 15분,
시정에서 점빵차를 기다리고 계셨던 어르신. 장아찌를 담으시려나봅니다. 장아찌용간장 찾으십니다. 일전에 점빵차에는 진간장, 양조간장만 있었는데, 장아찌 간장을 놓은 이후로 어르신들이 많이 사십니다. 장아찌 반찬을 만들어야 상하지 않고 오래오래 두고 드시겠지요.
11시 30분,
"여 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가게요~" 하시는 이모님. 2층집 이모님이셨던듯 싶습니다.
윗집가서 어르신댁 가니 어르신이 계시지 않습니다. 지팡이도 있고, 다 있는 것 같은데... 이모님께선,
"여 고무신이 없네~ " 하시며 어디 나가셨구나 바로 아십니다. 다른 신발이 있었는데 어르신이 신고 다니시는 신발을 알고 계신가봅니다.
신발만 봐도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이웃이 있는건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11시 45분,
오랜만에 시정 밥솥에 소리가 나기 시작합니다.
"밥이 될려면 한 30분 남았는데, 먹고갈텨?" 하시는 어르신.
맘 같아선 먹고 가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음만 받고 나섭니다.
13시 10분,
"늦었죠?" 하시는 어르신 전화. 아이스크림 배달 요청이었습니다.
"지난번 붕어는 너무 달던데, 다른 것으로 좀 해서 보내주세요~" 하십니다.
어르신 말씀에 부랴부랴 보냉백 넣어 움직입니다.
버스 정류장에 계시는 어르신. 어르신 사시는 김에 다른 어르신들도 함께 장보십니다.
때마침 오후 비는 개였습니다. 다행이지요.
13시 40분,
부녀회장님 남편분께서 뒤에서 오십니다. 오늘도 술을 사러 오시나 싶습니다.
"댓병 한 박스하고...가만보자... 음... 콩나물 하나랑...저거 하나 주세요."
술 안주거리와 반찬거리 하나 추가로 사십니다.
집에 있는 동안 어르신들은 다른 문화여가 활동이 없어서 그러는 것인지, 홀로 술을 드시거나, 마을분들 같이 술을 마시는 일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다른 문화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다면 술먹는 일이 줄어들까요?
13시 50분,
자전거 끌고 오시는 어르신.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늘은 좀 많이 사실려나봅니다. 맘 잡고 무럭ㄴ 고르시는 어르신.
"쌈장, 계란 두판하고...햄, 참치, 매운컵있나? 그거 하나랑, 육개장 컵하고... 그리고 물 있지? 물 세 묶음 줘!" 하시는 어르신.
전동 자전거에 모두 실고서는 바로 집으로 가십니다. 어르신은 동네에 다니실 때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데 아직까지도 튼튼한 두다리로 썡쌩 달리시는 모습이 대단하시다 싶습니다.
13시 55분,
"내가 지난번에 왕면을 샀는데... 어디갔는지 도통 보이지가 않아... 시정에 뒀었나..."
그러시며 왕면을 다시 사시는 어르신. 저도 기억이났었는데 아마... 놓고 가시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14시 20분,
오늘도 8천원이 놓여져있습니다.
이건, 두부 2모와 추가로 멸치를 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500원이 부족하지만 어르신의 꾸준한 구매력으로 생긴 포인트로 차감해드립니다.
다음번엔 8500원을 두시겠지요?
14시 40분,
오늘은 어르신 집에서 모이는 날인가봅니다.
윗집, 뒷집 어르신들 다 같이 모여계십니다. 어르신께서 오늘 맛난거 해먹어야 한다며 이것저것 말씀하십니다.
"갖고 왔지? 지난번 주문한거."
"불가리스 3묶음, 부침가루 1개, 밀가리 한개, 계란 1판, 그리고 화장지도 한 통"
"언니 콩나물도 하나 사!!" 하는 뒤에 계신 어르신.
먹지도 않는 콩나물이지만, 동생 무쳐주신다며 한 봉지 더 사십니다. 어르신 집에 모여서 함께 맛난거 먹는 날.
비오는 날 전 부쳐먹고 좋은 시간 보내시는것이 보기 좋아보이셨습니다.
15시,
회관에 요즘들어 자주 모이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회관에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일은 언제나 좋아보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일엔 음식이 있고 술이 있습니다. 그안에 관계가 생기고 안부를 확인하며 서로의 경조사를 함께 나눕니다.
15시 20분,
어르신 댁에 가니 남자 어르신은 늘 말씀하십니다.
"오늘 살거 없어~~"
하지만, 나와서 조금 내려오면 여자 어르신은 붙잡으십니다. 역시 집안 살림에 필요한건 여자 어르신들이 다 꿰고 있을까요~
어르신 물건 고르고 있던 찰나 어르신 뒤 밭에서 아랫집 어르신 손 인사해주십니다.
밭을 함께 일구시는지 여쭤보니,
"지나가는 길에 도와주러 왔어~" 하십니다.
90살이 넘는 어르신의 밭을 70살이 넘는 젊은 어르신이 함께 돕습니다. 지나가는 길 손 하나라도 보태주는 어르신의 마음이 고맙습니다.
16시,
마지막 어르신 댁, 어르신 팔 곳곳이 피멍 투성입니다. 왜그런가 싶었더니, 조금만 부딛혀도 멍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괜찮다 괜찮다 하시는 어르신. 홀로 계시는 시간이 점점 길어집니다. 회관에 가는 것도 일이 되고 있습니다. 모시고 가는 것도 어렵습니다. 어르신의 삶에 자유와 결정은 어르신에게 있습니다. 그 시간을 누리는 것도, 보내는것도 온전히 어르신의 몫이겠지요.
폭풍우가 쏟아지는 오전임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이동장터 하라는 하늘의 뜻인지 오후엔 비가 많이 개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안오는 날에도 언제나 점빵차를 기다려주는 어르신들이 계신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