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후명은 이전에 이상문학상 수상집에서 <하얀 배>를 읽었는데 카자흐스탄인가에 여행가서 만난 고려인 처녀에 관한 이야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드넓은 초원에 가득 핀 흰꽃을 바라보며 고국을 떠올리는 처녀의 이미지가 슬픈 고려인들의 삶과 연결되어 아득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것 같다.
근데 이상하다. 나는 그 소설을 아주 재미없게 읽었다. 내가 소설에서 기대하는 재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갑자기 의심스러워지고 창피해지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이런 소설이 이상문학상을 받다니 알 수가 없군, 당시 페레스트로이카니 뭐니해서 소연방공화국이 붕괴되고 연방에서 풀려난 공화국들이 제각각 나라를 다시 세우는 분위기여서 그 와중에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는 카자흐스탄이니 하는 공화국들이 자주 텔레비전 화면에 소개되던 때였으므로 시류에 맞춰 쓰여진 소설이라 상을 주나보군, 간단히 생각해 버리고 말았었다. 그런데도 그후에 나는 그 <하얀 배>를 읽었을 때 느꼈던 묘한 분위기를 꽤 자주 떠올리곤 했다. 드넓은 초원에 가득 핀 흰꽃과 고려인 처녀가 자아내는 서글프달까, 아련하달까, 딱히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이상하게도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내가 재미라고 하는 기준은 뻔해진다. 뭔가 얽히고 섥힌 이야기가 강렬하면 빨려들어가는 맛에 재미가 있다고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배경에 깔린 분위기나 그 작가만이 그려낼 수 있는 독특한 이미지 따위는 내게 재미의 축에도 못 끼는, 오히려 재미를 잡아먹는 지루한 '문학이라는 것'이 내 고정관념이었다. 그런데도 그 재미있게 본 소설들은 어쩌다 그 책을 다시 펼쳐보거나 우연히 누가 읽었다해서 기억해내지 않고서는 거의 잊어버리고 산다. 따라서 그 책들을 다시 들춰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지 않는다. 그런데 <하얀 배>만은 그 좋아하는 '재미'도 없으면서 유독 잊히지 않고 어떤 느낌으로 남아 언제 한 번 그 소설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만들었다.
그런 걸 이미지라고 할 것이다. 이미지가 던져주는 어떤 느낌.
윤후명은 그런 면에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특출한 작가인 듯하다. 그럴 것이 내가 윤후명의 소설중 읽은 유이한 작품에서도,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유독 어떤 이미지만이 또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꽤 알려진 소설이라 들으면 바로 아, 할 소설이다. 한 남자가 애인과 함께 소도시의 여관에 들렀는데 예전의 애인과 함께 들렀던 추억의 장소이다. 점잖은 애인과 밤을 지새는 동안 옆방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교성소리에 남자는 사뭇 신경이 쓰인다. 다음날, 여관의 계단을 내려오면서 앞서 나가는 팀의 여자를 바라본 순간, 바로 자신의 옛애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더불어 어젯밤의 그 소음이.. 하는 내용이다.
물론 내용도 특이하다면 특이하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내용보다 묘사된 그 여관의 이미지였다. 그렇다고 지금 나더러 그 여관의 이미지를 그려내라면 곤란하지만 언젠가 수안보 온천에 휴양갔을 때, 아침 일찍 시내를 한바퀴 뛰어돌다 우연히 눈에 띈 골목길 끝의 여관, 묘하게 낭만적인 분위기에 감싸여져 있는, 을 보다 바로 윤후명 소설의 그 여관이 실재한다면 저랬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후에도 나는 지나치다 골목 깊숙히 들어가 있는 목조 여관을 보게 되면 바로 소설 속의 여관과 연관시켜 나도 모르게 기이한 인연의 만남과 이별이 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렇듯이 내가 기억하는 윤후명의 소설은 잊혀지지 않는 이미지를 반드시 하나씩 남기고야 만다.
왜 그럴까. 오늘 <북회귀선을 넘어서>를 읽고 나서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바로 그리움이었다. 다소 거친듯한 작가의 말투 속에 곱고 섬세한 명주실로 직조해낸 듯한 그리움의 느낌들이 하나씩 둘씩 쌓여져 결코 잊혀지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학의 본질은 그리움이라고 하는 걸 어디선가 본 것 같다. 그리움의 대상이 옛 애인이든, 신이든, 피안의 세계이든, 어머니이든, 어린 시절의 옛 고향이든, 찬란한 상고시대의 전설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마음 속에서 아련하게 피어나는 그리움이야말로 현실이라는 고통의 사막을 건너게 해주는 환상의 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후명은 그리움의 느낌을 언어로 직조해내는 진정한 마술사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뭐, 다들 그렇게 얘기하는 모양이다. 뒷표지에 써있는 비평을 보니까.)
그런 그가 이 소설에서는 그리움을 향기, 향내로 그리고자 했다. 지금은 직접 전달되는 힘이 약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이 소설의 어느 부분인가가 내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가 어느날 문득 어떤 느낌의 이미지로 불쑥 떠오를지 누가 알랴. 벌써,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여자가 이십 오년 전에 함께 묻은 유리병 속의 추억을 찾아온 남자에게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편지를 엊그제 남겼다는 별난 이야기가 잉태되기 전의 흐릿한 형태로 어떤 느낌의 이미지를 향해 뭉쳐들고 있는 걸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