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집총간 > 남천집 > 南川先生文集卷之二 > [錄]
[壬辰八月] 임진 8월。
十九日晴。 1592년 8월19일。맑음
午寧越士人高宗遠,宗吉兄弟擄入(오영월사인고종원,종길형제로입)。
낮에 영월의 선비(士人) 고종원(高宗遠) 고종길(高宗吉) 형제가 포로로 잡혀 들어왔는데,
先至吾前(선지오전)。 먼저 내 앞에 이르러
拭淚而言曰公何以至此(식누이언왈공하이지차)。 눈물을 훔치며 말하기를,
“공(公 권두문)은 어쩌다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까?”라고 하는지라,
答曰平生多積惡(답왈평생다적악)。 내가 답하기를, “평소에 악을 많이 쌓았는지
數年以來。(수년이래。) 몇 년 이래로 連喪骨肉。(연상골육。) 혈육의 상사(喪事)를 연달아 겪었는데
今又父子同入虎口。(금우부자동입호구。) 지금 또 부자가 함께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老父時年七十一。(노부시년칠십일。) 늙으신 부친은 올해 연세가 71세이지만,
方在奔竄中。(방재분찬중。) 지금 도피 중에 있으나
亦無如之何矣。(역무여지하의。) 또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惟願速死。(유원속사。) 그래서 오직 속히 죽기만 바랐으나,
而賊輩當初以亡妾冐刃覆我之致。(이적배당초이망첩모인복아지치。)
적들이 당초에 죽은 첩(강녀(康女))이 칼을 무릅쓰고 나를 감싸기 때문에
不卽殺我。(불즉살아。) 곧장 나를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厥後賊亦誘悅男𪐴之心。(궐후적역유열남주지심。)
그 후로 왜적 또한 아들 권주(權𪐴)를 달래고 기쁘게 하려는 마음으로
姑緩其殺。(고완기살。) 우선 죽이는 것을 늦춘 것인데,
今日雖存。(금일수존。) 오늘은 비록 살아 있을망정
明日何知。(명일하지。) 내일이야 어찌 될지 알겠습니까?”라고 하니,
高君曰此則命也。(고군왈차칙명야。) 고군(고종원(高宗遠))이 말하기를, ‘이는 천명입니다.
中郞,文山亦所不免(중랑,문산역소불면)。 중랑(中郎). 문산(文山: 문천상) 또한 화를 면하지 못한 것이
豈盡積惡而然哉(개진적악이연재)。어찌 모두 다 악을 쌓아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公之所遭(공지소조) 。공(권두문(權斗文))이 화를 당한 것은
與吾畧同(여오략동)。 나와 대략 비슷합니다.
吾亦有八十老父(오역유팔십노부)。나 또한 80세 된 늙으신 부친이
方竄山谷(방찬산곡)。 지금 산골짜기(山谷)에 숨어 있고,
弟宗慶始倡義旅(제종경시창의려)。아우 고종경(高宗慶)이 처음 의병을 일으켰지만
竟死非命(경사비명)。 결국 비명에 죽었고,
妻爲我圖生(처위아도생)。 아내는 나를 살리려 도모하다
捐軀石窟(연구석굴)。 석굴에서 몸을 던졌고,
兄弟被執(형제피집)。 형제가 사로잡혔으니,
公我所遭(공아소조)。 공(公)과 내가 화를 당한 것이(所遭 소조)
何其酷相似也(하기혹상사야)。어쩌면 그리도 서로 매우 비슷하단 말입니까? “하였다.
吾曰語到令季(오왈어도령계)。내가 말하기를, “말(왈 曰)이 공(고종원)의 막내 동생(고종경)에게 미치니
我心慽慽(아심척척)。 내 마음은 슬프디슬픕니다.
當時行刑(당시행형) 。당시 사형을 집행한 것은
實是曖昧(실시애매)。 실로 애매한 것이어서
吾甞食息不忘(오상식식불망) 。나는 일찍이 밥 먹고 쉬는 사이에도 잊지 않았는데,
至今思惟(지금사유)。 지금 생각해 보니
亦似我之過也(역사아지과야)。 또한 나의 잘못인 것도 같습니다.”라고 하자,
高君乃掩抑曰吾弟之死(고군내엄억왈오제지사)。고군(高君; 고종원) 이 이에 억울한 마음을 억누르며 말하기를,
雖極曖昧(수극애매)。“비록 지극히 애매하였지만,
本邑救解之牒(본읍구해지첩)。본읍(영월군) 에서 면죄되도록 잘 변호해 보낸 첩문(牒文) 도
路梗未達(로경미달)。길이 막혀 전달되지 못한 데다
營門還赦之關(영문환사지관)。영문(감영)에서 석방하라는 관문(關門 문서)도
後於行刑(후오행형)。형벌을 집행한 뒤에야 왔으니
則亦命也(칙역명야)。또한 운명인 것입니다.
公何與焉(공하여언)。공(권두문)에게야 어찌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盖高宗遠橫城世族(개고종원횡성세족)。고종원(高宗遠)은 횡성(橫城)에서 대대로 벼슬했던 집안이었다가
新寓寧越(신우영월)。영월(寧越)에 새로 터를 잡고 살았는데,
聞倭變(문왜변)。왜적들이 변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與其弟宗慶(여기제종경)。그의 동생 고종경(高宗慶)과 함께
通告鄕中(통고향중)。고을에 소식(消息)을 전(傳)하여 알리고
募兵赴難(모병부난)。의병을 모집하여 위험에 처한 나라를 구하러 나갔다.
一鄕咸以爲宗慶有文武才(일향함이위종경유문무재)。온 고을 사람들이 고종경(高宗慶)을 문무의 재주가 있다고 여겨
推以爲長(추이위장)。의병장으로 추대하자,
募鄕兵數百(모향병수백)。고을에서 의병을 수백 명 모집하여
將往洪春之間(장왕홍춘지간)。홍천(洪川 ?)과 춘(춘천(春川) ?, 영춘(永春) ?) 사이로 가서
據險遮截(거험차절)。험지에 웅거하여 왜적을 차단하려 하였다.
道伯聞而召見(도백문이소견)。도백(강원도관찰사 유영길) 이 이를 듣고 불러들여 만나고는
義而壯之(의이장지)。의롭게 여기며 장하게 생각하고서
以興原陣之單弱(이흥원진지단약)。흥원진(興原津) 의 진영(陣營)이 병사가 적어 미약했기 때문에
故使之押營軍五百(고사지압영군오백)。그에게 감영의 군사 오백 명을 단속해 가서
往助興原(왕조흥원)。흥원을 돕도록 하였다.
而以此意發關原陣營軍(이이차의발관원진영군)。그리고 이러한 뜻으로 흥원진에 관문을 미리 보냈는데,
中途潰散(중도궤산)。(감영의 군사들이) 중도에 도망치고 흩어져,
自致失期(자치실기)。(남은 군사들을 데리고) 힘을 다해 도착했으나 약속 기한을 넘기고 말았다.
陣將報營(진장보영)。진장(陳將)이 감영에 보고하였고,
營門以犯軍律(영문이범군율)。감영에서는 군율을 어겼다면서
推送本郡(추송본군)。그를 찾아 본군(영월군) 에 보내어
有行刑之關(유행형지관)。형(刑)을 집행(執行)하라는 관문(關門)을 보냈다.
宗慶初雖募兵赴難(종경초수모병부난)。고종경(高宗慶)이 처음에는 비록 의병을 모집하여 국난에 달려갔었고,
旣受營門之節制而赴陣(기수영문지절제이부진)。이미 감영의 지휘를 받아 흥원진의 진영에 달려갔으나
亡軍失期(망군실기)。군사를 잃어버린 데다 약속 기한을 어겼기 때문에
故有是關也(고유시관야)。이러한 관문(關文 공문서)이 있게 된 것이다.
適於此時(적어차시)。마침, 이러한 때에
吾以兼官到郡(오이겸관도군)。나는 겸관(兼官) 으로 영월군에 도착하였는데,
一邑大小人民滿庭呼訴曰(일읍대소인민만정호소왈)。온 고을의 모든 사람들이 관아의 뜰을 가득 채워 호소하기를,
宗慶有可尙之義(종경유가상지의)。“고종경(高宗慶)은 숭상할 만한 의기가 있었지
無可殺之罪(무가살지죄)。죽일 만한 죄가 없습니다.
營軍則今日交附(영군칙금일교부)。감영(監營)의 군사들을 오늘 내어주었지만
明日潰散(명일궤산)。다음 날에 도망쳐 흩어진 것을
非宗慶師律之不嚴(비종경사율지불엄)。고종경이 군율을 엄하게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軍心之遽失也(군심지거실야)。군사들이 싸울 의지를 갑자기 잃었기 때문입니다.
且其才器可防一隅(차기재기가방일우)。더구나 그의 재주와 국량이 한 모퉁이 정도는 막을만한데,
當此危急之日(당차위급지일)。이러한 위급한 때를 당하여
殺一無罪義士(살일무죄의사)。하나도 죄 없는 의사(義士)를 죽인다면
豈非可寃可惜之大者乎(개비가원가석지대자호)。어찌 원통하고 애석함이 크지 아니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伊時避亂人完山君李軸前府使尹勉宣傳官申景澄敎官洪湜在座
(이시피난인 완산군이축 전부사윤면 선전관신경징 교관홍식 재좌)。
이때 피난민으로 완산군(完山君) 이축(李軸), 전 부사(前府使) 윤면(尹勉) .선전관(宣傳官) 신경징(申景澄). 교관(敎官) 홍식(洪湜)이 자리에 같이 있었는데,
皆曰此時此人能先倡義(개왈차시차인능선창의)。모두 말하기를, “이러한 때에 이런 사람이 먼저 의병을 일으켰으니
可知其可用之才也(가지기가용지재야)。그가 쓸 만한 인재임을 알 수가 있소이다.
赦之自效(사지자효)。그를 용서하여 스스로 몸 바치게 한다면,
國家之利也(국가지리야)。국가에 이익이 될 것이외다.”라고 하였다.
吾乃以此論報(오내이차논보)。나는 이에 이러한 의견들을 담아 보고하였으나,
而公事使路梗空返(이공사사로경공반)。이 공적인 보고서를 맡은 사자(使者)가 길이 막혀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吾念守令之道(오염수령지도)。나는 수령의 도리로
不可久稽上使之令(불가구계상사지령)。상사(上使)의 명을 오래도록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不得已行刑(부득이행형)。마지못하여 하는 수 없이 不得已(부득이) : 마지못하여 하는 수 없이 사형을 집행하였다.
俄而道伯悟其無罪(아이도백오기무죄)。얼마 뒤에 도백(관찰사 유영길)이 그에게 죄가 없음을 깨달아
還赦之關又到(환사지관우도)。용서(석방)하라는 관문을 다시 보내왔지만,
吾雖愕然嗟惜(오수악연차석)。나는 비록 깜짝 놀라서 서글퍼하고 애석히 여겼으나
已無及矣(이무급의)。이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吾所云曖昧者此也(오소운애매자차야)。내가 애매하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高君見吾男𪐴在側扶護(고군견오남주재측부호)。誠意懇至(성의간지)。歎曰忠孝之家(탄왈충효지가)。
고군(고종원)이, 내 아들 권주(權𪐴)가 곁에서 나를 부축하여 간호하며 성의를 가지고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一氣相傳(일기상전)。“(충효의 집안에서) 하나의 기풍으로 전하여 이어받고 있으니,
天必佑之(천필우지)。하늘이 반드시 도울 것이며
倭亦不能害也(왜역불능해야)。왜적 또한 해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吾曰兄亦不忘世受之恩(오왈형역불망세수지은)。내가 말하기를,
“형장(兄丈 고종원) 또한 대대로 받은 나라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以匹夫倡大義(이필부창대의)。필부(匹夫)의 몸으로 대의를 부르짖었는데,
令季中途抱寃(령계중도포원)。막내 동생이 중도에 원통함을 품게 된 데다
兄及弟矣(형급제의)。今又至此(금우지차)。나머지 형제가 지금 또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지만,
天若保吾父子(천약보오부자)。하늘이 만약 우리 부자(父子)를 보호한다면
亦必保兄之昆弟矣(역필보형지곤제의)。또한 형장의 형제도 반드시 보호할 것입니다.” 하였다.
酬酢之際(수작지제)。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不覺夜深(불각야심)。밤이 깊어진 줄 몰랐는데,
高君喟然嘆曰(고군위연탄왈) 고군(고종원)이 긴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念我從王考翼莊公(념아종왕고익장공)。
“생각건대 나의 증조부(從王考 종왕고) 익장공(翼莊公) 高荊山(고형산)은
爲三道體察使(위삼도체찰사)。삼도체찰사(三道體察使) 가 되어
威聲遠振於殊俗(위성원진어수속)。그 위엄과 명성 그리고 풍속이(殊俗 수속) 멀리 다른 지방에까지 떨치니
倭冦自戢(왜구자집)。왜구가 저절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故敎旨若曰(고교지야왈) 그래서 교지(敎旨)에 이르기를,
惟卿學識通徹(유경학식통철)。‘경(卿)의 학식은 막힘없이 통하고(通徹 통철)
智勇邁人(지용매인)。지혜와 용기는 남보다 뛰어나도다.’라고 하였는데,
今其子孫(금기자손)。지금 그 자손이
反爲倭奴之所擄(반위왜노지소노)。도리어 왜놈에게 포로가 되었으니,
人家之汙隆(인가지오륭)。寧不寒心哉(영불한심재)。집안의 성쇠란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仍垂涕於悒(잉수체어읍)。이어 슬퍼한 나머지 눈물만 흘렸다.
吾亦感憤交中(오역감분교중)。
나 또한 감개하고 분개하는 마음(感憤 감분)이 엇갈려서
不知何辭可慰也(불지하사가위야)。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인용, 참고문헌]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남천집>남천선생문집 2권>록】
만력 임진 1592년 8월 19일 자。
申海鎭(신해진) 선생 역주 『남천 권두문 호구일록』, 도서출판 보고사.
다음사전, 네이버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