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고을의 필수요건 객사·관아·향교
왕권의 상징, 친일 앞잡이에 헐린 날
"누백년 존숭하던 대구객사 어데갔노"
대한매일신보는 울분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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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유형문화재 제1호 경상감영공원 내 선화당. 팔도의 감영에는 모두 선화당이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곳은 경상감영 대구 선화당, 충청감영 공주 선화당, 강원감영 원주 선화당인데 대구 선화당이 가장 양호하다. 선화당 앞에서 경상감영의 위엄과 수위 격식을 보여주는 '수문병 교대의식'. 〈영남일보 DB〉 |
조선 중기 경상도에는 71개 고을이 있었다. 대구·경북 41개, 부산·경남 30개 고을로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가 고을을 다스렸다. 고을마다 왕권의 상징인 객사, 고을 수령 집무처인 관아, 유학을 가르치는 향교를 세웠다. 이 세 기관은 고을이 되기 위한 필수 건물로 반드시 있어야만 했고 경상도 고을도 한 곳 빠짐없이 지어져 오백년 왕업을 유지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객사와 관아는 멸실되거나 훼손돼 온전하게 남아있는 곳은 거의 없다. 반면 향교는 옛 모습 그대로 비록 퇴락했을지언정 멸실되지 않고 대부분 남아 있다. 대구·경북에도 경상도 고을 41곳과 강원감영 소속 울진·평해향교 2곳을 포함해 43곳에 향교가 있다.
왕권의 상징 객사
왕명 전하고 국가의례 치르는 곳
고을에서 터 가장 좋은 곳에 건립
전패 분실·훼손시 책임관리 문책
순조 때 고을 전체가 벌 받은일도
조선이 멸망하자 팔리고, 헐리고…
경상도 71개 고을 중 소수만 남아
◆왕권 상징인 객사
객사는 국왕에게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해 왕조통치술의 일환으로 지어졌고 고을에서 격이 가장 높았다. 객사의 모습은 정청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익사(翼舍)를 만들었는데 전면이 11칸 또는 13칸, 측면이 3칸으로 매우 웅장하며 정청 지붕은 좌우 익사보다 높게 만들어 위엄을 세웠다. 정청은 국왕, 좌·우익사는 문·무관으로 이미지화했다.
정청에는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고을 수령은 아전을 이끌고 '망궐례(望闕禮)'를 올렸다. 국왕과 왕비 생일, 명절에도 국가의례를 치렀고 고을 수령은 부임과 이임 시 객사에서 배례를 했다. 1763년 영조 때 조엄이 일본 통신사로 가면서 영천 신녕객사에서 관복을 갖추고 망궐례를 올렸다고 그의 '해사일기'에 썼다. 정청에서 왕명을 전달하고 교지를 낭독했고 익사에는 문서를 보관하는 협실을 만들었다.
객사는 풍수사상에 의해 고을에서 가장 터가 좋은 곳에 세웠으며 이름도 고을의 옛 지명에, 건물을 나타내는 한자어 중 묵직한 관(館)을 붙였다. 대구객사는 달성관, 경주객사는 동경관, 상주객사는 상산관, 성주객사는 성산관, 영천객사는 영양관, 청송객사는 운봉관, 청도객사는 도주관이다. 울산객사는 학성관, 동래객사는 봉래관, 나주객사는 금성관, 남원객사는 용성관, 전주객사는 풍패지관이다. 풍패는 조선왕조 탄생 고을임을 의미한다.
전패는 국왕을 상징하므로 분실·훼손·불경 시 엄한 벌을 받았다. 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 2년에 함경도 성진진에서 전패 훼손 사건이 일어나 첨사와 상관인 길주목사가 파직당하고 함경감사까지 문책을 받았다. 순조 때 충청도 덕산현에서 같은 사건이 일어나 현감은 물론 고을 전체가 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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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당시 대구객사 위치 지도. 대구객사는 종로초등 자리에 있었는데 조선왕조가 멸망하자 친일파 박중양의 주도하에 헐리고 사진 한 장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규장각 제공〉 |
◆객사의 훼손
고려 시대부터 세워졌던 객사는 조선왕조가 멸망하자 하나둘씩 훼손되기 시작했다. 대구객사가 시발점이 됐다. 경상감영을 대표하던 대구객사는 종로초등 자리에 있었는데 1908년 관찰사서리 친일파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허물고 객사를 일본인에게 매각하려고 하자 대구부민은 결사반대하며 객사에 운집해 야간에 횃불을 들고 지키려 했으나 수비대를 앞세운 일본인에게 팔려 헐리고 지금은 사진 한 장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 분함으로 대한매일신보는 '누백년 존숭하던 대구객사 어데 갔노, 대구성곽 솜씨 좋은 물건을 일시에 팔아 먹는다'고 울분을 토했다.
경산에도 객사가 셋 있었다. 1912년 경산객사가 팔려 헐리게 되자 그 목재로 임란 때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재실 모명재를 수성구 만촌동에 세웠고, 자인객사는 일본인이 매입해 일본 불교 일련종 사찰인 혜성사를 지었다. 하양객사는 은해사에서 매입해 불교 포교당을 지었다. 경주객사는 1952년 교육청 지을 터를 마련하면서 퇴락한 정청과 좌익사는 허물고 우익사만 남겨 놓았는데도 대단히 웅장하다.
이처럼 일본강점기를 거치며 민간인에게 매각돼 헐렸고 일부 객사는 건국 후 초등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되면서 학교 교사로 많이 사용됐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낡은 객사 건물은 개발의 방해물이 됐고 문화재 인식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쉽게 훼손했다. 지금은 객사터마저 찾기 어렵고 영남우도를 대표했던 진주객사 터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흔적조차 사라졌다.
국보 문화재가 된 객사는 전라좌수영 객사인 여수 진남관(304호), 경상우수영 객사인 통영 세병관(305호)으로 수영에도 객사를 만들었고 충무공 승전관을 겸하고 있어 훼손되지 않았다. 경북에는 상주·청송·청도·선성현·선산객사가 남아 있거나 복원됐다. 감영객사로 전주객사 풍패지관이 유일하게 남아 보물 문화재가 됐다.
◆객사·객관·역참
당나라 시인 왕유의 '객사청청류색신(客舍靑靑柳色新)' 구절이 유명한 탓인지 객사는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이고 안내문에 간혹 숙박소로 적혀 있다. 객사는 숙박시설이 아니다. 옛날 숙박은 고을마다 만든 객관이나 역참을 이용했다. 고려사에 객사는 관아, 객관은 여관으로 분명하게 구별돼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객사는 전패나 국왕 관련 이야기만 나오고 사신이나 출장 관리의 숙소로 객관이 수백 번 넘게 언급된다. 중국 사전에도 객사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있었던 중앙정부의 지방관아로 돼 있는데 관아를 왜 숙박소 의미인 객사로 불렀는지 유래는 알 수 없다.
먼 길을 온 사신이나 관리가 하룻밤을 유숙하면서 한 잔 술로 여독을 달래는데 국왕 전패가 모셔진 건물에 여장을 풀고 한 잔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 조선 시대에 객사는 고을 수령이 직을 걸고 관리하는 곳이며 좌·우익사를 객관으로 사용하기에 너무 크고 웅장하다. 사료를 검증하지 않고 한자풀이로 객사와 객관을 혼용한 듯하다.
객관은 고을마다 지어져 남관·북관이라 부르고 부산포 객관이 너무 외진 곳에 있어 이건해 달라는 소청이 있다. 김성일이 함경도 순무어사로 나가 명천객관에 머물며 '빈 객관에 날은 저물고 홀로 앉아~'로 시작되는 시를 지었고, 일본통신사로 가는 길에 경산 장산객관에서 대구부사의 전송을 받은 기록이 있고, 선교사 아펜젤러가 부산으로 가면서 인동객관에 유숙했다는 대목이 여행기에 남겨진다.
객관이 없는 곳에서는 역에 묵었다. 김종직이 성주 답계역에서 잠을 자다가 지은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정약용도 경안역과 금정역을 지나며 지은 시가 있다. 이덕형이 임란 직후 삼남체찰사로 내려와 가장 먼저 한 일이 역참의 복구였다. '역참(驛站)'이란 용어는 오늘날 우리는 역, 중국은 참으로 이름으로 남았다. 기차역 이름이 우리는 서울역, 중국은 북경참(베이징잔)이라 하는 식으로.
수령의 집무실 관아
팔도감영 관아의 명칭은 선화당
남은 3곳 중 대구 보존상태 최상
포정동, 경상감영 출입문서 유래
일제강점기 사라질뻔한 경주 동헌
갑부가 매입해서 기림사에 희사
현재 대릉원 후문 건너편에 존재
◆관아(동헌)
고을은 규모에 따라 수령의 품계를 달리했다. 경상도에는 관찰사(종2품)가 가장 높고 그다음 경주부윤(종2품), 대도호부 안동부사(정3품), 그 아래 정3품의 진주·상주·성주목사이고 그 아래는 부사·군수·현감 순이다.
경상감영 관아의 명칭은 '선화당'이다. 팔도감영에는 모두 선화당이 있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곳은 경상감영 대구 선화당, 충청감영 공주 선화당, 강원감영 원주 선화당인데 대구 선화당이 가장 양호하다. 수령 집무실인 관아를 '동헌(東軒)', 살림집을 '내아(內衙)'라 하는데 서로 이웃해 있고 동헌 출입문은 삼문(세칸문)으로 돼 있는데 경상감영 외삼문이 포정문이다. 그래서 '포정동'이란 동명이 생기게 된다.
경상도 두 번째 고을, 경주 동헌이 1938년 민간에게 불하되자 경주갑부가 매입해 자기 땅으로 건물을 옮기고 이를 기림사에 희사했다. 현재 대릉원 후문 건너 대로변에 있는 붉은색 삼문과 전면 7칸 대웅전이 바로 그것으로 옛 경주 동헌이고 지금 불국사 포교당 법장사다. 내아는 일제강점기 때 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현재 경주문화원이 됐고 경찰서 뒤편에 있는 경주객사는 우익사만 남아 있는데도 고색창연하다. 웅장했던 대구객사를 떠올리게 한다.
경상도 세 번째 고을, 안동 동헌도 청사로 사용하다가 멸실된 것을 2006년 정면 7칸 측면 4칸의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영가헌 현판을 달고 문루인 대동루를 함께 복원해 웅부공원으로 조성했다. 안동댐 수몰로 성곡동 문화단지로 이건한 선성현객사는 안동객사가 아니고 예안객사다. '선성'은 예안의 옛이름이다.
유학 가르치는 향교
성현 모시는 지역 유림의 근거지
제향건물은 대성전, 교육은 명륜당
대구·경북 41개 고을 온전히 남아
경주·영천·상주·성주, 보물 지정
◆향교
근대화 과정에서 객사와 관아는 거의 멸실되었지만 향교는 온전하게 남아 있다. 향교는 지역유림의 근거지로 성현을 모시고 있어 함부로 훼철할 수 없었고 최근까지 지역마다 유림이 존립했고 성리학의 뿌리가 깊었으며 위치도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 훼손되지 않았다. 향교 마을이 '교동'이다.
향교는 제향과 교육을 담당했는데 제향 건물이 대성전, 교육 건물이 명륜당으로 모든 향교가 동일하다. 서원은 서원마다 강당과 사당의 이름을 달리하는데 도산서원은 전교당과 상덕사이고, 병산서원은 입교당과 존덕사다. 향교의 제향 공간을 '사당'이라 부르지 않는다. 사당은 조상을 모시는 곳이고 대성전은 성인을 모시는 곳이라 하여 당호를 궁전·대웅전과 같이 '전(殿)'을 붙였기 때문이다. 명륜당은 사당과 같이 '당(堂)'이다. 건물 당호를 위세에 따라 전·관·당·헌·각 등 다르게 표시하는 것은 한자문화의 뽐냄, 현학성이다.
향교 건물로 국보 문화재는 전국적으로 한 곳도 없다. 보물 문화재가 된 경북의 향교는 경주향교, 영천향교, 상주향교, 성주향교 등 4곳이다. 나머지 39개도 시도문화재이며 시군별로 포항이 4개, 대구·김천·영주·경산이 3개 등으로 관리가 어렵고 발길이 줄어들어 점차 퇴락하고 있다.
성리학이 과학에게 자리를 물려준 오늘날, 이제 발상을 전환해 대성전 문을 활짝 열고 시대의 흐름에 맞게 젊은이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해야 하지 않을까.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입력 2021-07-02 발행일 2021-07-02 제35면ㅣ수정 2021-07-02 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