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쉿! 비밀이야
저자 : 마리안느 머스그로브
역자 : 김호정
출판 : 책속물고기 2012년판
쉿! 동화는 어른들의 이야기래
1
열두 살 켄지와 탈리아 자매는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부모님은 켄지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고 할아버지께서 두 자매를 거두어 키우셨다. 그리고 켄지에게는 막 결혼해서 임신 중인 이부자매인 리디아 언니가 있다.
2
어린 켄지와 탈리아는 할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모른다. 또한 치매가 어떤 병인지도 잘 모른다. 단지 기억을 잘 못하시고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시려 들거나, 어린 켄지를 돌아가신 엄마의 이름 ‘메레디스’라고 부르는 등 이상한 행동을 자주 하셔서 이웃과 친구들 보기에 난처하다는 사실에 그만 휩싸여 버린다. 그래서 둘은 아예 주변에는 비밀로 붙이고 서로가 돌아가며 감시하듯 할아버지를 돌보기로 한다.
3
탈리아는 위태한 가족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이기주의 성향이 강하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발레 활동에 전념하느라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동생 켄지에 떠맡기듯 내팽겨치기 일쑤다. 결혼하고 나서야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된 리디아가 이젠 부모님이 안계시긴 하지만 소중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뭔가 역할을 맡고 싶어 하지만 자매는 마치 약속을 한 듯 철저히 배격한다.
4
어린 켄지는 친구들과 만나 즐겁게 노는 일도 자제해야 하고 밤늦게까지 잠을 설쳐가며 할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혼자 감당해나간다. 오랫동안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 없어 켄지 가족은 시에서 지급하는 보조금에 의존하지만 그마저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 때문에 지갑을 어디 뒀는지 모르거나 거리에서 자선사업가에게 생활비의 대부분을 기부하는 등의 엉뚱한 행동으로 다른 가족처럼 집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해나갈 수가 없다. 어떤 날은 끼니를 때울 걱정을 해야 하는 지경까지 내몰린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드러내놓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자매는 이미 이 모든 일들에 대해 비밀로 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5
인간, 특히 가족의 사랑 앞에서 동서양은 큰 차이가 없다. 막내 켄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로부터 지금껏 받은 사랑으로 아픈 할아버지를 돌보려는 마음에 또래 아이들과 다른 행동 양상을 내보인다. 친구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돌봄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안다고 여기는 서양 사람들의 보편적 이기주의와는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예부터 나이 든 어른을 공경하고 봉양하는 동양적 정서와 부합되어 낯선 듯하면서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감동을 선사한다.
한편으로 두렵기도 한 것은 이 어린나이의 소녀가 할아버지를 혼자서 잘 돌볼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연민 때문인데, 탈리아 언니가 자신의 일로 만 하루를 비우는 동안 어린 켄지가 모든 판단과 결정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오는 두려움을 과연 어떻게 극복해 나갈지 하는 우려가 컸던 탓이다.
6
‘역사의 연구’를 저술한 영국의 석학 아놀드 토인비는 말년에 한국의 어느 저널리스트의 방문을 받았다. 그의 저술에 대한 대화가 한 차례 끝나고 난 자리에서 아놀드 토인비는 한국의 저널리스트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토인비는 그의 저술 ‘역사의 연구’를 집필하게 된 동기의 하나로 이제 세계는 문명간 차별, 경쟁, 전쟁과 같은 과거 개별 민족주의적 입장을 떠나 하나로 결집되는 공동 문명체를 향해 나아가는 도정에서 세계인적 시각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며, 그 중 하나가 나이 든 사람을 공경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견지를 피력했는데 한국인 저널리스트는 그 사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에 있어왔던 것으로 ‘효’정신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7
지금은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일찍이 어떤 지면에서 하신 말씀이 있다.
-이제 어른들은 동화를 읽어야 한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겪어오지만 대부분 삶의 현실에 눌려 쉬이 잊어버리고 마는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보존해야 할 필요성과 가치를 오랜 작가생활을 거치며 절절히 깨우치신 것이다.
8
오늘날은 어떤가. 세계가 더욱 가까워진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국가 간의 경계가 물리적으로도 가까워져 가지만 공감각적으로도 더욱 좁혀져 마치 이웃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현실 곳곳에서 쉽게 마주하고 있다.
일상으로 들어와 이웃처럼 살고 있는 외국인들의 숫자가 늘어가고, 인터넷, 통신, TV와 영화 매체를 통해 접하는 외국 문물들은 더 이상 새롭지가 않다. 이웃에 마실가듯 외국으로 여행가는 사람들의 숫자도 점점 늘어가고 있으며, 외국인의 이름과 지명, 도로와 각종 문화 요소들을 떠올리며 소비하고 만끽하는 것이 더 이상 부자연스럽지 않은 일상들이 나날이 펼쳐지고 있다.
9
아이를 기르는 가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문제와 교육, 어린 가장의 가족, 노인들의 치매, 가족의 소중함, 현대 국가체제에서 수반되어야 할 복지정책 등의 문제는 세계 어느 나라를 돌아보아도 해결되어야 할 동일한 과제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동화는 인간의 보편적인 시각에서 읽어질 수 있는 우리의 문제이며 관심사가 된다.
어린 켄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친구 마헤시(국적이 다르다)와 교류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진정한 친구가 되고, 이부형제인 리디아 언니와 화해를 하여 다시 가족의 소중한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탈리아 언니의 반성과 분발을 일으키고, 치매의 할아버지를 사고의 위기에서 구해내어 안정된 여생으로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는 등 일상 속에서 여느 어른들도 해내기 힘든 맹활약을 펼치며 모든 역경을 극복해낸다.
<쉿! 비밀이야>는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을 조바심치게 만든 쉽지 않은 동화였다.
(202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