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 투구 / 보물 제904호
1936년 일제강점기 때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 일본선수로 참가한 손기정 선생은 경기에서 1등을 했지만 한국이 아니라 일본의 선수로 금메달을 딴 것을 슬퍼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생을 자랑스러워했다.
만든 때 - 약 2,600년 젼 (기원전 6세기) 만든 때 - 그리스 만든 재료 - 청동,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든 금속
청동 투구는 구체적 유입 경로를 확인할 수 있고, 서구의 유물로서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 된 것은 처음이다.
이 청동 투구는 1936년 베를린, 제11회 올림픽 마라톤 경기의 우승자인 손기정 선생이 받은 부상으로, 15년 뒤 1986년에 되돌려 받았다고 한다.
손기정 선생은 1994년 이 청동 투구를 국가에 기증했다.
손기정이 기증한 그리스 투구
손기정 선생이 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청동 투구는 우리나라 보물로 정해진 문화재이다.
손기정 선수에게 전달되지 못한 청동 투구는 50년이나 베를린 샤를로텐 부르크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었던 것, 손기정 선생이 이 투구를 돌려받으려는 노력으로 198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돌려받았다고 한다.
1987년 이 투구를 보물로 지정.
청동 투구 정면
투구의 여정
1936년 7월 27일 그리스의 '이 브라디니' 신문사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에게 그리스 청동 투구를 주겠다는 기사를 실었다.
이 투구는 1875년 독일의 고고하자 에른스트 쿠르디우스가 이끄는 조사단이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발굴한 것으로 이후, 그리스의 브라디니 신문사에서 갖게 되었으며.
투구 안쪽에는 '1936년 제11회 올림픽 마라톤경기의 우승자에게' 라는 글귀를 새겨 놓아 마라톤 경기의 우승자가 곧 주인임을 밝혔다고 한다.
그어나 투구는 마라톤 경기의 우승자였던 손기정 선생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당시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서 아마추어 선수에게 메달 의외에 어떠한 선물이나 기념품을 공식적으로 줄 수 없다는 규정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손기정 선생도 투구에 대한 말을 듣지 못한 채, 결국 투구는 독일 올림픽 위원회의 관리하에 베를린에 남았고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베를린에 있는 샤를로텐 부르크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손기정 선생이 우연히 투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나 보관처를 알 수 없어, 그러던 중 1976년 재독 교포인 노수웅씨의 노력으로 투구의 소식을 알게 되어 투구를 되찾고자 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로 198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 50주년 기념 행사에서 손기정 선생에게 투구가 헌정되었고, 이듬해 정부는 50년 만에 돌아온 투구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보물로 지정하였다.
청동 투구 옆모습
새로운 기억, 새로운 이야기
돌려받은 청동 투구를 쓰고 기쁘게 웃는 손기정 선생의 모습 결승선에 1등으로 도착하는 손기정 선수 옷에 그려진 일본국기를 가리고 있는 시상식 장면 등의 빛바랜 사진
최초의 우승, 함께한 우승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열렸다. 당시 사람들은 올림픽 종목 가운데 마라톤을 가장 주목했다. 8월9일 열린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는 2시간 29분 19초 2라는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함께 참가했던 남승룡선수도 동메달을 따면서 마라톤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동시에 따는 기록도 세웠다.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더욱 잊을 수 없게 만든 사건은 국내 신문에서 우승 소식을 전하며 사진 속 선수복의 일장기를 지워버린 일이었다. 먼저 '조선중앙일보'가 1936년 8월 13일 자 기사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 했다. 며칠 뒤 '동아일보'는 8월 25일 자에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완전히 지운 사진을 실었다. 이 기사 때문에 두 신문은 강제로 폐간되거나 휴간되었다. 이 일은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불리며 1930년대 항일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올림픽 마라통 우승과 3위라는 쾌거를 국민들에게 선물한 두 사람은 광복 후인 1947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하였다. 손기정 선수는 감독으로 남승룡선수는 코치이자 선수로 활약하여 서윤복 선수가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 하도록했다. 이는 대한민국 국적으로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이룩한 첫 우승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