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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게시판 스크랩 파수꾼들을 죽이라 / 사도행전 12장 13-19절- 이재철목사
익명 추천 0 조회 53 10.04.19 23: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파수꾼들을 죽이라 / 사도행전 12장 13-19절- 이재철목사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 동영상 자료를 은혜롭게 보았습니다. 설교 본문이 사도행전 12장의 베드로의 탈옥사건을 기록한 부분입니다만 처음 동영상을 시청하였을때의 서론 부분에서 최근 뜨거운 감자로 부상한 양화진과 백주년 기념교회와 이재철 목사의 통합교단에서의 이단고소문제와 관련한 소회를 비교적 담담하게 그러나 자랑스러운 듯한 뿌듯함을 담아서 언급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얼마나 고충이 심하였을까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이재철 목사를 뜨겁게 지지하는 청년 교우들의 메일과 쪽지와 게시판을 달군 성원에 감사를 전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청년으로부터 한가지 질문을 받았다는 말을 시작하면서 오늘 본문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려운 환경과 시련속에서도 당황하지 않으며 평정심을 잃지 않을수 있을까 라는 요지의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이재철 목사님이 지금 곤욕을 치루는 가운데 처했지만 흔들림이나 두려움이나 불안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기억력이 부족해서 온전하지 못하지만, 대략 그런 의미의 내용일 것입니다. 그 청년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감옥에 같혔던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으로 살아나왔다는 것을 적용하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충분히 공감도 가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설교였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공감이 가고 설교자의 상황을 종합했을 때 충분히 자신을 베드로와 동일시한 것으로 격려하고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대한 결단의 차원에서 적용할 수도 있다고 보여 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성경이 말하는것은 정말 설교자가 지적한것과 같이 그러한것일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아래는 설교원문입니다.

 

투옥된 베드로가 참수형을 당하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요새와도 같이 철통같은 감옥으로부터 베드로를 구해내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즉시 마가라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베드로의 구명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음에도 베드로의 생환을 믿지 못하던 교인들에게 베드로는, 주님께서 그 삼엄한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구해내셨는지를 소상하게 설명해준 다음, 마침 그곳에 부재중이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비롯한 다른 교인들에게도 자신이 말한 진상을 일러줄 것을 당부한 뒤, 또 다른 곳을 향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튿날의 상황에 대해서는 본문 18절-19절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날이 새기가 무섭게 감옥 속에서는 일대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감방 안 두 군사의 틈에서 양손이 두 군사의 손과 함께 쇠사슬에 묶여있던 베드로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감옥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어디에서도 베드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탈옥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파수꾼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건이 파수꾼들의 실수나 태만으로 인해 일어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신비스런 역사였기에, 파수꾼들에겐 그 어떤 잘못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평소처럼 자신들의 임무와 책임에 충실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감옥에서 사라진 사실을 알고 대노한 헤롯 아그립바 1세는 파수꾼들을 심문한 뒤에, 그들을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헤롯이 얼마나 철저하게 베드로를 지키게 했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16명의 군사를 특별히 차출하여 네 조로 나눈 뒤, 그들로 하여금 교대로 베드로의 감방만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한 죄수의, 손바닥만한 감방만을 위해 16명의 군사를 동원한 예는 전무후무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구출하시던 밤에도, 그 중의 한 조인 4명의 군사가 그 감방만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만약 헤롯이 베드로가 사라지던 시각에 감방파수를 보던 조원만을 죽였다면 처형당한 자의 수는 4명일 것이요, 특별히 차출된 네 조의 군사를 모두 죽였다면 그 수는 16명에 달할 것이요, 나아가 그날 감옥전체에 배치되어 있던 모든 파수꾼들을 다 죽였다면 그 수는 엄청날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죽인 파수꾼의 숫자는 최소 4명에서 최대 16명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두매인으로 유대인의 왕좌를 물려받은 헤롯 아그립바 1세는 단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도 야고보를 참수형에 처했고, 내친김에 베드로마저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무고한 다수의 자기 군사들마저 살해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목적을 위해 혹은 감정에 따라, 사람 죽이기를 전혀 꺼려하지 않던 그의 인생말로가 어떠했었는지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군사들의 생명과 베드로의 생명을 맞바꾸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날 밤 구해내신 사람은 베드로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목숨을 잃어야만 했던 군사는, 가장 작게 잡아도 4명이었습니다. 단 한 사람의 단수를 위해 다수의 복수가 희생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마10:29)에 비추어본다면, 이것 역시 하나님의 허락 하에 이루어진 일임을 알게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베드로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단수에 불과한 베드로의 생명을 복수에 달하는 파수꾼의 생명과 맞바꾸실 정도로 말입니다. 이 사실을 장본인인 베드로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후에 베드로전서 1장 5절-6절을 통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마지막 때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잠시동안 여러분이 여러 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어쩔 수 없이 슬픔에 빠져있더라도, 이것을 기뻐하십시오(표준새번역)'

 

   베드로는 어떤 시련이 닥치더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는, 믿는 이에게 닥치는 시련이란 기쁨으로 끝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당신의 능력으로 베드로 자신을 보호하고 계심을 삶의 경험으로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수에 지나지 않는 자기 한 사람의 생명을 복수에 달하는 파수꾼의 생명과 맞바꾸실 정도로 자신을 완벽하게 책임지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득했기에, 하나님의 그 능력 속에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시련도 반드시 기쁨으로 귀결됨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우리의 삶 또한 책임져주고 계심을 생각할 때,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누군들 감격치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바로 여기에서 질문을 제기치 않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과 복수에 달하는 파수꾼의 생명을 맞바꾸시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이 아니시냐는 질문입니다. 더욱이 파수꾼들이 잘못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경비임무에 평소처럼 최선을 다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유한한 인간이었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신비스런 역사를 자각할 수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인함이었을 뿐, 파수꾼들의 허물이나 태만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베드로의 구출과 관련하여 파수꾼들이 잘못한 것이라곤 단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가 살아났기 때문에 무고한 그들은 어이없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이 어찌 정의로운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논리적이고도 합리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질문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같은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치 않든 상관없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파수꾼들과 자기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구출 받은 베드로와 일치시키는 사람에겐 그 같은 질문이 솟구칠 리가 없음은, 구출된 당사자인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밝히 알 수 있습니다. 구출 받은 이튿날, 자기로 인해 다수의 파수꾼들이 처형당한 사실을 알게 된 베드로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 단정하고서 하나님을 성토하거나 매도하고 나선 적이 있었습니까?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으면 했지, 결코 하나님을 비난할 이유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본문 앞에서 자신을 베드로와 동일시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반응 역시 베드로와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베드로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자는, 오직 자기 살았음을 하나님 앞에서 감격해하기만 하면 족한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우리를 이기심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할지언정, 어떤 경우에도 우리로 하여금 이기심에 천착케 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을 핍박하는 우두머리가 되어, 크리스천들을 색출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무려 240Km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멀다않고 찾아 나섰던 바울이, 바로 그 길 위에서 주님의 신비스런 구원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곳에 바울 한 사람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엔 바울의 일행이 분명히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이 단수라면, 일행은 복수였습니다. 그러나 복수인 일행은 제외되고, 단수였던 바울 단 한 사람만 그날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언뜻 그것은 불공평한 처사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 한번도, 단수인 자신만을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은총을 비난한 적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3-6)

 

   바울은 복수의 사람 중에서 단수인 자신만 구원받은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그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창세 전부터 예정해 두셨던 은혜라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날 그 사람들 중에서 자신 홀로 구원받은 것은, 그로서는 그만큼 신비스런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처럼 감격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것만으로 그쳤더라면, 바울은 결코 성경이 전하는 바대로의 사도 바울이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4절-16절을 통해, 또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요즈음 말로 모두 인종차별주의자들이었습니다. 소위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은, 그들 민족 외엔 그 누구도 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문명인이든 야만인이든, 지식인이든 무식꾼이든 구별없이 똑 같이 사랑하면서, 그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복수의 일행 중에서 단수인 자신만을 구원해내신 것은 자기 홀로 주님의 구원을 즐기라심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해내시는 주님의 도구로 자신을 쓰시기 위함임을 바울은 바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구원받은 단수로서 복수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빚진 마음으로 살았는지는 그의 고백이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b-27)

 

   하나님과 사람에게 빚진 마음이 아니고는 결코 가능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빚진 마음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복수의 파수꾼 생명과 맞바꾸어주셨다고 해서,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자기개인의 안일을 위한 전유물로 삼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역시 사람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그가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향했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다른 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스스로 주님 구원의 도구로 쓰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빚진 마음 때문에, 그 빚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다른 곳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발자취-바로 그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된 크리스천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란 가야할 다른 곳과 만나야할 다른 사람이 있는 자라고 말입니다. 크리스천이란 하나님께 사랑을 빚진 자요, 그 빚을 사람에게 갚으려는 채무감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십시다. 우리는 언제나 복수의 무리 속 일원으로 살아왔습니다. 학창시절엔 학생 무리 중의 한 사람으로, 직장인이 되어서는 같은 직장에 속해 있는 무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있었던 그 많은 무리, 그 숱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그 복수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단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복수의 사람들에 비해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비천하기 짝이 없었던 베드로나, 그릇된 자기신념의 노예였던 바울처럼 전혀 무자격자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인함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적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뿐이건만, 도리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힘을 다해 온갖 애를 다 써주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고,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알게 해주려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들을 도구로 삼아, 마치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불러내시고 감옥으로부터 베드로를 구해내시듯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빚진 자요, 그 빚을 다른 누군가를 위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으로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수 중의 단수에 불과했던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은 그 은혜를 사유화하라심이 아니라, 우리를 도구 삼아 그 은혜를 다른 곳 다른 사람에게도 베푸시기 위함인 까닭입니다.

 

   지난 시간에, 참된 사랑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은 사랑의 종착역일 수가 없습니다. 가정은 그곳에서 시작된 참된 사랑이 다른 곳 다른 사람을 향해 확산되는 시발역이 될 때에 진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고인 물은 반드시 썩기 마련이듯, 가정이 사랑의 시발역이 되기를 마다하고 종착역으로 안주하려하면, 거기에서 생성되는 것은 자신과 타인을 동시에 해치는 이기심일 뿐 참된 사랑일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역시 생명과 사랑에 관한 한, 박물관이 아니라 발산지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생명을 우리끼리 즐기고 누리며 우리 속에 가두어 단지 전시키 위함이 아니라, 매 주일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거듭 공급받아 다른 곳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교회란 하나님과 사람에게 빚진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그 빚을 갚기 위해 모인, 채무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것이 곧 우리 주님을 좇아 살아가는 길입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38절의 증언입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주님께서 이처럼 다른 곳 다른 사람을 위해 오셨기에, 주님 오셨던 땅에서부터 머나먼 극동 한반도에서 살던 우리에게마저도 생명과 사랑의 은총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다른 곳 다른 사람을 향해 확장되지 않고는, 그분을 따르는 그분의 제자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빚진 마음으로, 다른 곳 다른 사람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로운 삶인지 모릅니다. 다른 곳 다른 사람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확장되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이미 진리의 등불, 생명의 빛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온 사방이 캄캄할지라도, 아니 캄캄할수록, 오직 빛만이 다른 곳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을 위해 오셨던 주님께서는 세상의 빛이셨고, 주님을 좇아 다른 곳 다른 사람을 향해 나아갔던 베드로와 바울 역시 진리의 등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로 우리의 차례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다 함께 눈을 감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십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리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4-16)

   주님!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의 이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채무감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다른 곳 다른 사람을 향해,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확장되게 하옵소서. 그 마음을 통해 진리의 실체가, 사랑과 생명의 열매가, 복음전파의 과실이 거두어지게 하옵소서. 누군가를 위한 생명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보다 더 가치로운 삶이란 있을 수 없음을, 결코 망각치 않는 지혜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아 멘

 

 

어떻습니까? 매우 감동적이며 은혜롭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본문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설교자는 배드로의 구출 사건을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틀린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감옥에서 나온 것이 구원의 전부인것으로 오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믿는자들을 부르시는 방법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면서 오직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복수의 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바?다고 하는 것도 어쩌면 그동안의 기독교의 지독한 배타주의적인 구원관이나 교리적인 관점의 우물안 개구리식 구원관이지 않나 싶습니다.

 

예전에 뉴스앤조이 기사에서 인상적인 칼럼을 본적이 있습니다. 매가처치논박에서 한 부분인데 ' 세 개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 구원론 '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다시 발견한 기분이라 아쉽습니다. 저만 착각한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설교자는 베드로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적어도 파수군 4명이 죽었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부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아무런 죄도 없는 파수군들 4명의 생명과 맞바꾸었다는 논리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설교자의 해석을 별로 지지하고 싶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자못 흥분한 어조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면서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식으로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통합 교단으로 부터 당하는 수모와 이단 시비하는 것을 핍박을 당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서도 결국은 감옥에서 구해낸 베드로와 같이 백주년 기념교회와 설교자는 승리할 것이기에 흔들리지 말고 감사함으로 오늘의 시련을 이겨 내자는  취지로서 무리하게 본문을 적용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물론 충분히 지금의 백주년 교회의 입장에서 가능한 적용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적용은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교회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의 적용은 조금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만일 설교자의 논리라면, 그러면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죽은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기 예수의 탄생을 방해하기 위하여 헤롯왕이 예루살렘근방에서 태어난 유아들을 학살한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있을까요?

 

잠시 쉬어 갑니다.

베드로사도가 감옥에 잡혔을 때 위하여 교회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의 교회는 오늘날 현대식의 교회와 매우 다릅니다만 그것조차 구분을 하지 않고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그런 설교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교회 설교에서 초대교회의 교회와 현대교회를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보는 것을 말하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도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고 교회 나오자 새벽기도를 위하여 교회나오자를 강조하는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무사 귀환을 위하여 기도한 교회가 어딘가 하면 ' 마가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서는 많은 사람이 모여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한것처럼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교회였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베드로가 감옥에서 깊이 잠이 들었다는것을 대부분 믿음이 좋아서라고 가르칩니다. 믿음이 있으니까 걱정없이 염려없이 감옥속에서도 천사가 발길로 옆구리를 차서 깨울정도로 담대하였다면서 우리들도 그러한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고 합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제가 좀 삐딱한 성질이라서 같은 성경을 읽어도 항상 부정적이라 송구합니다. 물론 베드로의 믿음이 좋아서 감옥에서도 평안하게 꿀잠을 잘 수 있었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조금은 달리 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나 바울이나 우리들의 성정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성정이 우리와 별로 차이가 없답니다. 너무 기죽지 마시라고 그러는 중입니다. 먼저 베드로가 깊이 잠을 잘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문맥의 앞뒤를 보면 보입니다.

 

그는 유대 사람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베드로까지 잡으려고 하였다. 때는 무교절 기간이었다. 그는 베드로도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사인조 경비병 네 패에게 맡겨서 지키게 하였다. 유월절이 지나면, 백성 앞에 그를 끌어낼 속셈이었다.(행12:3-4)

 

베드로가 잡힌 때가 하필이면 무교절 기간이었기에 즉시 처형할 수가 없었습니다. 무교절은 칠일동안 무교병을 먹으면서 출애굽의 유월절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무교절 기간이 지나면 유월절을 지킵니다. 제가 독해력이 부족해서 무교절 기간이 유월절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약 7일간은 꼼짝없이 지하 감옥에 있는것입니다. 땅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빛을 볼 수가 없기에 횃불의 흔들거림이라 어둡고 칙칙하고 냄새나고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곳입니다. 베드로의 환경이 어떤지 알 수 있는 구절입니다.

 

베드로는 두 쇠사슬에 묶여, 두 군인 틈에서 잠들어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꾼들이 옥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첫째 초소와 둘째 초소를 지나서, 시내로 통하는 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래서 그들은 바깥으로 나와서, 거리를 하나 지났다.(표준새번역)

 

베드로가 처형당하기로 예정된 바로 전날 밤이었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인 틈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옥문 앞에는 다른 군인들이 경비를 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환한 빛이 감방 안에 비치면서 주님의 천사가 베드로의 앞에 나타나 옆구리를 찔러 깨웠다. "빨리 일어나라!" 그러자 곧 쇠사슬이 그의 두 팔목에서 벗겨졌다.(현대어성경)

 

두 팔목을  쇠사슬로 묶인 상황에서 한시간만 앉아 있는다 해도 곤욕스러울 것입니다. 대소변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마음껏 걸어다니거나 두 손을 위 아래로 흔들수 있는 스트래칭을 할수도 없습니다. 적어도 일주일동안 그렇게 좌 우에 두사람의 군병들이 항상 붙어 있는다는것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병사들은 교대하기라도 하지요? 어지간한 건강이 아니라면 견딜 수 없는 육체적인 상황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더구나 유월절이 끝나면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믿음으로 편안하게 잠을 잘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그렇게 베드로의 믿음이 탁월하다고 볼수 있을까요? 주의 부활하심을 듣고도 믿지 못해서 고기 잡으로 간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주께서 잡히시고 심문당하는 현장에서 세번이나 여종앞에서 주를 저주하며 욕을 하면서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입니다. 물론 지금은 성령충만해서 성전 미문의 장애인을 예수 이름으로 회복시킨 체험도 한 베드로입니다. 당연히 이전과는 다른 새사람입니다. 거듭났습니다. 그러나 역시 인간입니다.

 

거듭나기만 하면 전부 초인적인 능력자가 되는 것일까요? 거듭나면 밥도 안먹어도 살고 물도 안마셔도 목 안마르고 잠을 못자도 괜찮을까요? 죽음이 두렵지 않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거듭나고 은혜안에서 살아도 배고프면 먹어야 하고 다리 아프면 쉬어야 하고 졸리우면 하품도 하고 깊은 잠에 골아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상처가 생기면 아픕니다.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거듭나면 천사와 동일한것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속에서 세상의 문화와 도구들을 사용해야 하며 사회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났다고 해서 애녹처럼 하늘로 올리워 가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역시 거듭났고 분명한 믿음이 있었지만 열악한 감옥속에서 몇일동안 군인들 틈에서 생활하는것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피곤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하는것처럼 배짱 있게 코를 골며 잠을 깊이 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지나는줄도 모르는체 밖에서는 유월절이 끝났습니다. 공개처형을 당하기 전날...드디어 베드로는 그동안 쌓인 피로와 수면 부족으로 인하여 거의 실신상태와 동일하게 잠에 취한것입니다. 아마도 두 군인들의 사이에서 쪼그리고 잠을 잤을 것입니다. 군인들도 이제 익숙해져서 잠이 들었겠지요. 문 밖에서 지키는 파수군들이 있으니까 안심하고 말입니다.

 

그 순간에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의 옆구리를 찔러서 깨운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베드로는 비몽사몽입니다. 자기의 의지로 반응한것이 아니라 무아의 지경입니다. 믿음이 좋아서 쿨쿨 잠이 든것이 아니라 그렇게 깊이 잠이 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무엇때문에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일까요?

베드로의 생명을 파수군 4명의 생명과 바꾼 하나님이 정의로우시냐? 공평하신 하나님인가?를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공평하시다면 우린 지금 전부 구원에서 결코 합당한 대상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이들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는것은 모두들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신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하심으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이 공평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라면 구원은 없습니다. 불공평한 하나님이기에 우리가 오늘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역사입니다. 이미 이루신 구원과 대속하신 십자가의 공로에 의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복음이 어떤 어려움과 세상의 배후에서 계속해서 반역하고 대적하는 사단의 궤휼을 뚫고 기어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에 대한 보고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위하여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심으로까지, 결국은 반드시 이루시고야 말겠노라는 증언의 현장이 누가의 기록에 절절하게 묻어있는 것입니다.

 

같은 감옥의 사건이 또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잡혔습니다. 그들도 죽도록 매를 맞아 아픈 상처가 있었지만 역시 감옥의 문들이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아무도 탈출하지 않았습니다. 간수는 전부 죄수들이 탈출한것으로 알고 스스로 자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때 바울이 소리쳐서 말립니다. 우리가 전부 여기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간수와 가족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 사건에서는 한사람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죽고 사는 문제는 우리의 어떠함과는 상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요 구속사의 한 장면이며 사건일 뿐입니다. 그 속을 우리가 전부 알수도 없지만 비록 모른다해도 문제될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때로는 죽이기도 하시며 살리기도 하십니다. 모든것을 하나님의 원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왕의 간증을 통해 미래적인 신약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려 주십니다.

 

그는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와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뜻대로 하시지만, 아무도 그가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하고, 무슨 일을 이렇게 하셨느냐고 그에게 물을 사람이 없다.(다니엘4:35)

 

이제 하나님의 모든 어떠하심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안에 전부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안에서만이 하나님이 주신 모든 신령한 복과 충만하신 긍휼을 맛볼 수가 있는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하심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예수안에 두셨습니다. 예수안에서만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영화로움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심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은 당신의 원대로 심판하시고 살리시고 복주시고 세우시고 부르십니다.하나님의 공의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 그 아들 예수 안에서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얻은 자로서 살아가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의 삶으로서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무죄한 파수군 몇명의 생명을 바꾼것으로 인하여 그들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억울하다고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인류사를 보면 삶과죽음은 필연적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인간의 소관이 아니라 창조주의 권한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그러므로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구원 받았을까 못 받았을까에 대하여 걸음을 멈출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와 바울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돌맹이들이라도 들어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악인들도 적당하게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온 세계를 힘으로 무력으로 정복하고 평화를 주겠다는 로마의 잔인한 십자가 형을 통해서도 구원을 이루시는 도구로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모세가 태어나자 수 많은 아이들이 나일강에 던져진체 죽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바꾼 이스라엘의 패역과 반역을 오래 참으시기까지 참으셨습니다. 애굽의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이시면서까지 홍해를 갈라지게 하면서 까지 구출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흩으시기까지 하시면서 구원을 이방인들에게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은 마귀를 멸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고, 때가 차면 이제 불못과 무저갱으로 하나님을 대항하고 불신하고 거절한 악에 속한 모든것들을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복음을 담은 그릇으로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으로 인하여 감격하면서 매일 매일 매 순간 순간 주님의 말씀에 촉각을 세우고 영적인 안테나를 세우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여전히 불의하고 어두움이 가득한 혼돈의 시대입니다. 교회란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입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로마의 폭정아래서 신음하던 유대인들과 정통 유대교에 의하여 고통하던 시대속에서 십자가에 공개처형당한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며 사는 자들로 부름을 받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사는 자들이 감옥에 있던 감옥 밖에 있던 여러 곳으로 도망을 다니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함이 비록 억울한 일을 당할수 있으며 모함을 받을 수도 있으며 모든것을 다 빼앗길 수도 있으나 사도들과 초대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힘을 내라는 것입니다. 나의 정체성이 비록 베드로와 다르고 비울과 비교해서 초라할 지라도 오늘 내 안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환경을 당당하게 수용하되 복음으로 말하고 복음으로 해석하고 복음만을 듣고 전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만 베드로처럼 귀하게 보호하심에 들뜰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감사할 수 잇다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발견되는 삶이 곧 증인으로서의 삶이며 사랑에 빚을 진 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를 비평하는것이 아니라 같은 본문을 이렇게도 보는 관점이 있겠구나 하는것으로 보시기를 부탁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졸고를 끝가지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2009/09/25.ⓒ사랑그리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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