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발한다. 에밀 졸라
J'ACCUSE(나는고발한다), 에밀 졸라 1840-1902 프랑스
개정 1판 4쇄 2025년 10월 15일 판 본
자유와 평등을 선언했던 프랑스혁명(1789)의 나라에서
정의가 침묵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19세기 말, 한 유대인 장교가 국가와 여론에 의해 희생된 드레퓌스 사건입니다.
오늘은 이 사건을 다룬 책을 소개해보겠습니다
https://youtu.be/vZR0p-Z_dmM
<나는 고발한다>를 읽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된 주제이고,
그 사건을 계기로 그 사건이 프랑스 상류층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주제로 다루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나는 고발한다.는 1894년 프랑스 군부에서 있었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군부 재판의 오심을 고발하고자,
당시 작가 (에밀 졸라)가 대통령 (펠릭스 포르) 씨한테 보내는 편지를
일간지 신문에 기고한 내용이다.
이 내용은 6회 투고문으로
나는 고발한다! - 공화국 대통령 펠릭스 포르 씨에게 보내는 편지란
제목으로 1898년 1월 13일 로로르 일간지에 발표했다.
에밀 졸라의 기고문은 11회가 있었고, 그중 초기 3편은 보수 일간지
<르 피가로>에, 다음 2회는 팜플릿으로, 나머지 6회는 일간지 <로로르>에 게재했다.
드레퓌스 사건
이 사건은 군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1894년 9월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청소부로 위장해 일하던, 프랑스 스파이(바스티앙 부인)가
쓰레기통에서 명세서(프랑스 군사 기밀을 을 넘겨주겠다.)를 주웠는데,
그 명세서 작성자가 프랑스 군인 드레퓌스 중령으로 밝혀져
12년간 군사재판을 다룬 사건이다.
당시 프랑스는 1870년 독일과의 보불 전쟁에서 패한 후 독일에 대한
공포로 '군대라'는 '수단'을 국가 안보라는 목적과 혼동하게 했고,
이 혼동에 보수파는 반유대주의와 내셔널리즘이라는 열풍에 불을 붙이게 된다.
이 사건으로 드레퓌스는 1894년 비공개 재판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공개 군적 박탈,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는다.
세 명의 필적 감정사가 참여했고 모두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발견된 명세서를 바로 수령했던 정보국장인 상데르 대령이 사망하고,
그의 후임 피카르 중령이 취임한다.
피카르 중령은 이 사건에서 가장 먼저 범인을 알았지만,
그 사실이 묵살되면서 범죄자로 몰렸다.
가장 많은 고생을 한 인물이자 후에 국방부 장관까지 오르게 된 인물이다.
피카르 중령 하에 있던 에스테라지 소령이 배속 신청서를 제출하는데,
그 보고서를 보고 유출 명세서 필체와 같음을 인지하고
필적 감정을 받고 직속상관에 보고하고, 국방부 장관에게까지 보고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군을 위해 보고를 무시하고
피카르 정보국장을 튀니지로 발령 낸다.
1897년 프랑스로 돌아온 피카르 중령에 의해 이 사건의 내용이
변호사를 통해 알려지게 되면서,
드레퓌스파들은 이 사건을 바로잡으려 의기투합한다.
드레퓌스를 위한다기보다는 프랑스를 위한 일이었다.
드레퓌스 사건 진행 과정
드레퓌스 재판과 유죄 판결→피카르의 문제 제기→에스테라지 재판과 무죄 석방→
에밀 졸라 <나는 고발한다!>→드레퓌스 사건의 재심과 사면→드레퓌스 사건의
재심과 완전한 복권
1894. 12. 19 드레퓌스 비공개 재판/ 1895. 1. 5 공개 군적 박탈식/
1896. 3 피카르 중령 정보국장 취임/ 1896.10 국방부에서 재심 기각,
피카르 튀니지로 좌천 발령/ 1897. 7 피카르 중령 귀국, 재심 운동 시작,
외국에 있던 에밀 졸라 귀국 합류/ 1898. 1. 11 에스테라지 무죄 석방/
1898. 10 파기원 원심 파기, 재심 개최지로 렌 선정됨/
1899. 9. 9 드레퓌스 재판 5:2로 유죄 판결/
1899. 9.19 새 대통령 에밀 루베는 드레퓌스를 사면(건강상)/
1900. 12 사면법 통과/ 1904. 3 드레퓌스 사면 혜택 반납 재심 요구/
1906. 7 .12 원심 환송 없이 파기 - 유죄 선고 오류였음을 선언/
1906. 7. 13 드레퓌스, 피카르 군대 복귀,
에밀 졸라 유해 팡테옹으로 이장 법안 가결/ 1
906. 10 피카르 국방부 장관 임명/
1908. 6. 4 에밀 졸라 이장, 12년간의 드레퓌스 사건이 종결됐다.
마리 조르주 피카르(1854-1914) 위키백과/ 알프레드 드레퓌스(1859-1935) 할라스의 책에서
재심 무죄 판결 후
이 사건은 12년간의 재판으로 밝혀진 건 드레퓌스(4년 복역)와
피카르(3년 복역)의 무죄다.
피카르 중령의 양심이 드레퓌스와 프랑스를 구했다.
이 사건의 진짜 반역자들인 에스테라지, 사건을 오도한 뒤 파티 드 클람,
앙리 그리고 관련 장군들은 법적인 단죄가 없었다.
앙리 중령은 1898년 8월 31일 허위 문서 날조자(증거 조작)라는
사실을 자백하고 자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계 유태인 여류 사상가인 아렌트 (Hannah Arendt)는
군중과 민중을 착각하지 말라는 조언을 한다.
"민중이 올바른 변화를 위해 궐기할 때,
각 사회 계급의 찌꺼기로 형성된 군중은 대개
자신의 계급을 증오하면서 강력한 지도자를 찾는다."
보수와 진보가 둘로 나뉘어 격렬하게 싸우던 시절이었다.
드레퓌스가 사면을 받자,
그를 위해 재심 운동을 했던 피카르 중령은 역으로 감옥에 갇혔다.
드레퓌스는 피카르를 생각했으면 사면 받으면 안 되는 거였다.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드레퓌스는 다소 융통성이 없는 성실한 군인이었다.
그의 맹목적 군인정신으로 볼 때 만일 자신의 사건만 아니었다면
드레퓌스는 틀림없이 반드레퓌스파의 일원이 되었으리라고 평가했다.
이는 곧 드레퓌스 사건의 진정한 의미는
'사법'이나 '연민'이 아닌 '역사'라고 평가한다.
진정 반역자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앙리 중령이 문서 위조로 자살하자,
영국으로 망명해 런던에서 무위도식 생활을 하다가 1923년 사망했다.
에밀 졸라는 1902년 방에서 가스중독으로 사망했다.
1950년대 한 범인에 의하면 누군가의 지시로
졸라의 집 굴뚝을 외부에서 막았다는 자백을 했다고 한다.
생전에 문학으로 받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이 취소되고,
징역 1년에 벌금 3000프랑을 선고받는다.
그 날로 런던으로 망명하여 11개월 후에 돌아온다.
훗날 찬반이 갈리는 의견이 있지만
드레퓌스 재심이 무죄로 선고되고 그의 고발정신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있는 그의 기념 매달에는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라고 적혀 있다.
에밀 졸라 (1840-1902)
에밀 졸라의 어록
진실이 행진하고 있고,
아무것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넘어진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일어서지 않는 것은
당신의 잘못이다,
당신이 어둠 속에 있을 때
등불을 들고 찾아 와 준 사람을
절대로 잊지 말라.
세가지 과오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
당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당신 뿐이다.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