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집마다 가족의 생일과 제사가 겹칠 때가 있다. 우리 집은 나와 딸, 부녀간에 생일이 같은 동짓달에 들었다. 딸, 사비나는 12월 11일이고 나는 12월 20일이다. 딸바보 아들은 11월 1일이고 손녀, 리아는 11월 9일이다. 일 년이 고작 열두 달이라 겹칠 확률이 높겠지만 우리 집은 한 해를 마감하는 동지섣달에 기쁜 날이 겹쳐 더없이 즐거운 성탄을 보낸다. 호주에 사는 아들과 손녀의 생일을 앞두고 작은 선물을 마련하고 가족들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적은 돈을 송금한 뒤 생일 저녁에는 이산(?)가족들처럼 컴퓨터 앞에 모여 앉아 화상채팅을 통해 축하 케익에 촛불을 밝히고 노래와 인사로 축하의 정을 나누었다.
사비나가 생일을 앞두고 피아노 콘서트에 우리를 초대했다. 나는 저녁 콘서트를 위해 투석치료를 받은 뒤 미리 낮잠을 자두었다. 나는 젊은 날 취재일상에 쫒기는 기자생활 중에도 아이들을 위한 음악회와 전시회 여행 등 가족문화나들이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요즘도 아이들은 간혹 말한다. “우리가 어릴 때 가족과 함께 한 문화나들이가 결혼을 해서도 그 때가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지 새삼스럽습니다. 그 때의 일들이 저희들에게 넉넉한 감성을 키워준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고마운 말이다. 그런 말을 전해들을 때면 타임머신을 타고 40여 년 전으로 날아가 꿈같았던 그 때를 회상하게 된다.
부산에 첫 영하의 강추위가 닥친 12월의 두 번째 주말 오후 5시 딸 사비나의 초청으로 우리 가족은 수영강변 망미동 옛 외이어를 만들던 고려제강의 폐공장을 헐고 돈이 되는 아파트를 짓지 않고 새로 문을 연 지역복합 문화공간 ‘F1963'에서 열린 피아노 콘서트『클래식, 시간을 열다』에 갔었다. 그 공연의 모든 수익금을 아프리카 문화 예술 지원 사업에 사용한다고 밝힌 음악회가 열린 폐공장의 높은 천정에는 주최측의 꿈처럼 샨델리아가 영롱하게 빛났다. 쇳가루와 기름, 소음과 땀을 뒤집어쓴 지난날의 고려제강이 옛 공장을 리모델링한 연주장에서 손열음을 비롯한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에서 함께 공부한 문재원과 박종해 그리고 작곡가 손일훈이 출연했다. 서로 악보를 넘겨주는 가운데 진행과 해설을 손열음이 직접 맡았다.
연주회장을 들어서면서 원두를 제대로 로스팅해서 커피를 드립한 테라로사에서 커피를 받아들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중앙 무대에는 그랜드 피아노 두 대가 마주 보게 놓이고 넓은 공장 좌우에는 8대의 대형 글래스 파티오히터가 열기를 내뿜는 가운데 가족과 연인 등 수많은 청중들이 객석을 메웠다. 첫 곡은 크리스마스 때 자주 들어 귀에 익은 바흐 칸타타 147번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이여(Jesu, Joy of Man's Desiring)’를 손열음이 부드럽게 연주해 의(義)로운 하늘나라를 참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선물이 되었다. 이어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운명’ 1악장을 손열음과 박종해가 연탄으로 들려주고 리스트의 항가리 광시곡 제12번과 라흐마니노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제1번을 문재원과 박종해의 듀오로 연주해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다.
마지막 연주곡은 손일훈의 창작곡 ‘스무고개’를 연주했다. 스무고개는 한 사람이 어떤 물건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면 상대가 스므 번까지 질문하면서 알아맞히는 놀이다. 문제를 내고 답하는 형식의 전위적인 듀오연주로 귀를 모았다. 마지막 연주가 끝나자 손열음이 ‘스무고개’를 함께 연주할 희망자를 즉석에서 청했다. 그때 객석에서 피아노 공부를 한다는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오른쪽 피아노에는 작곡자 손일훈이 맞은편에는 그 초등학생과 손열음이 나란히 앉아 예, 아니오로 답하는 듀오연주로 스무고개를 넘어가는 피아노 연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연주를 성공시켜 환호하는 관객들에게 선물이 되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청중들이 지원 사업에 동참하는 기부의 줄을 이었다. 지난날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를 지낸 라흐마니노프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제1번 작품번호 5'를 들을 때는 그 선율이 지난달 중순부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타르코프스키와 소쿠로프 영화제’에서 본 시베리아 자작나무숲의 겨울 이미지가 되살아나 기자생활 때 시베리아횡단 열차를 탔던 기억이 새로웠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민락동 ‘초록식탁’에서 저녁을 함께 하며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과 지금 그리고 살아갈 미래를 이야기한 ‘클래식, 시간을 열다’의 선율을 마음에 되새겼다. 프랑스에서는 기차역이 미술관이 되고 이탈리아에서는 자동차 공장이 문화공간으로 거듭 태어났듯이 부산의 새로운 지역문화공간 ‘F1963'은 공장을 뜻하는 Factory의 첫 글자와 1963이라는 숫자는 고려제강이 설립된 연도다.
첫댓글 참으로 삶을 맛나게 즐기시는 그리움님, 늘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제가 만약 한 번 더 자리를 옮긴다면 부산으로 터전을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이 글을 읽으며 문득 해보았습니다.^^
국장님 사순시기 잘 지내시는지요. 성탄이 가까이 왔습니다.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십시오. 생신 미리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클래식음악을젊은시절의나의꿈의전부였기에 장소를불문하고울려퍼지는음악의아름다움을느낄것을알기에글속의감동또한남다르지않습니다
즐겁고 기쁜 성탄절이 있는 12월이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그리움님의 성가정이
너무 아름답게 그려집니다.^^
멋진 아빠로, 남편으로, 영성카페에 그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글을 올리시고,
감동도 주시네요.^^
기쁜 성탄과 생신을 거듭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