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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두려워서 사람을 믿지 않으면 행복도 없어져 버립니다.
샬롬!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혹시, 지난밤도 밤잠 설치셨는지요? 돌아오는 8일이 입추니, 조금만 더 참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잘 이겨내시길 빕니다. ‘60대 99%가 후회하는 사실 10가지’ 중 여덟 번째는, ‘일기를 쓰고 기록을 남겨라’입니다. 매일 쓰지 않아도 틈틈이 기록하면서 사진 등을 남겨놓으면, 나중에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단지, ‘피부색이나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수백만 명을 아무렇지 않게 학살하는 동물, 비행기를 몰고 도시 한복판의 빌딩으로 돌진하여 하루아침에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내는 동물, 층간 소음문제로 살인까지 저지르는 동물, 유산과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친구나 가족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는 동물, 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남의 것을 탐내는 탐욕스러운 동물, ‘남들이 고통스러워하든 말든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동물, 높은 지능으로 남들을 속이고 파괴하는데 사용하는 동물….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무섭게 돌변할 수 있는 이웃’으로부터 내 가족을 지키려면 항상 경계를 늦추면 안 됩니다. 담장을 점점 더 높게 쌓아올리고 창문을 굳게 닫은 채, ‘도시 안의 외로운 섬’같은 생활을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겁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세상은 위험하고 무서운 일로 가득 차 있으니,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된다’고 주의시키곤 합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만약 사람을 늘 의심하면 배신당할 일은 분명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매일 누군가를 경계하고 의심하면서 살아야 하는,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사람을 믿지 못하면, 고립되고 외로워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믿으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된다. 남에게 속을지언정, 불안에 떨며 지내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고 답했습니다. ‘속는 것보다, 날마다 늘 모든 사람을 의심하면서 불안에 떠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생님은 사람을 믿으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분명히 “예, 저는 사람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사람을 믿고 살면, 일단 제 마음이 편안합니다. 의심하느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그러다가 배신당하면 크게 상처받을 겁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몇 번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상처가 두려워 사람을 믿지 않으면 행복도 없어져버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출처;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김혜남 / 정신분석전문의)
우리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언젠가는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마지막 죽음의 모양은 가지각색일 겁니다. 아무튼,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언제 어느 날 어떤 모양으로 죽게 될지?’ 그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소천한 친구 목사님의 죽음은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분이 그처럼 일찍, 그리고 그런 모습으로 돌아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어떤 모습으로 언제 하늘나라에 가게 될지?’ 그야말로 전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모양이 어떠하든지, ‘죽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김 원장님의 말씀대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오늘의 행복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데려가시든지,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오늘은 주님 은혜 안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물맷돌)
[내 영혼아, 어째서 네가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네 희망을 하나님께 두어라. 나는 내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라.(시42:11,현대인)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갖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아직 눈앞에 보이지 않는 미래의 일일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히11:1,현대어)]
아이들은 반드시, 그리고 늘 ‘엄마’라는 ‘힘’으로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샬롬! 지난밤 편안히 잘 쉬셨는지요? 혹시 열대야로 인해서 밤잠을 설치신 것은 아닌지요? 8월 초하루 아침입니다. 오늘도 꽤 무더울 텐데, 잘 이겨내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60대 99%가 후회하는 사실 10가지’ 중 그 일곱 번째는, ‘평생 할 수 있는 취미를 만들라’입니다. 등산과 가벼운 산책, 독서, 음악감상처럼, 큰돈이 들지 않는 것을 취미로 갖게 된다면, ‘평생 지루하지 않고 활력이 넘치는 삶을 보낼 수 있다’고 합니다.
교도소에 들어오는 청소년들 중 80%는 엄마가 없습니다(오래전 어느 교화위원이 논문을 쓰기 위하여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엄마란 힘으로 아이들을 붙잡고 있으면, 그 아이들은 절대 휘청거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야구계의 명장이자 야신(野神)이라고 불리는 김성근 감독을 아실 겁니다. 저는 그의 부인 오효순 씨와 한때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교회도 함께 다녔습니다. 게다가, 한 분 가사도우미가 오전 오후로 나눠서 양쪽 집안일을 했으니, 꼭 한 식구 같았습니다.
어느 날, 오효순 씨가 ‘일본에서 시어머니가 오셨다’고 ‘집으로 놀러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평소 효순 씨로부터 시어머니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시어머니가 방에 자리 잡고 앉아계시는데, 꼭 궁중에 계시는 마마님이 오신 것 같았습니다. 곱고 엄격해 보이는 외모에 단정한 자세, 일본에서 교포라는 신분차별 때문에 고생하신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자식사랑은 저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분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마치 애인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더 아쉬웠습니다.
그분은 ‘혼신을 다해서 자식을 지켜내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그대로 에너지를 만들어내시는 분이었습니다. 저의 두 손으로 그분의 손을 맞잡고, 저도 그 열정을 전해 받고 싶었습니다. 며느리가 다니는 교회에, 매주 오는 교인처럼, 하나도 어색함 없이 나오셨습니다. 그분은 일본에서는 불교신자였습니다. 며느리의 종교를 존중해주는 그 큰마음, 저는 제 인생 10년을 그분께 선물로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어머니를 보면서, ‘오늘의 김성근 감독이 홀로 성공한 것이 아니다.’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서럽고 힘겹게 키운 자식이 어느 날 한국으로 떠나버렸을 때, 어머니는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이렇게 울고만 있으면 안 되지!’싶어, 산에서 새끼나무 하나를 가져와 추녀 밑에 심었답니다. 그때부터 ‘저 나무가 우리 성근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나무를 정성껏 돌봤다고 합니다.(출처; 어른공부, 양순자 / 30년간 사형수 상담가로 봉사, 저서로는 ‘인생 9단’과 ‘인생이 묻는다, 내가 답한다!’가 있음)
양순자 씨는 위의 글에서 ‘김성근 감독의 어머니가 혼신을 다해서 자식을 지켜내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김 감독의 부인이 되는 오효순 씨가 그의 시어머니에 대해서 얼마나 좋게 말했으면, 오효순 씨가 ‘일본에서 시어머니가 오셨으니, 집으로 놀러오라’고 하자, 양순자 씨는 ‘한달음에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시어머니를 존경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런 마음을 표현할 정도라면, 그들의 고부사이가 어떠한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입니다. 긴 말이 필요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위의 글에서 김성근 감독의 어머니가 어떤 분이신지 이미 다 파악하셨을 겁니다. 양순자 씨가 한 말 ‘엄마가 엄마란 힘으로 아이들을 붙잡고 있으면, 그 아이들은 절대 휘청거리지 않습니다.’라는 마음에 단단히 새겨두었으면 합니다. 아이들에게 치우치거나 지나치지 않으며 모나지 않는 사랑으로 뒷받침한다면, 그 아이는 결코 그릇된 길로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겁니다. 물론, 신앙인이라면 ‘자녀를 위해서 늘 간절히 기도하는 일’을 늘 계속해야 합니다.(물맷돌)
[아이들도 ‘엄마 최고!’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남편 역시 “뛰어난 여자들이 많지만 당신이 최고요.”라고 그녀를 칭찬한다.(잠31:27-29,현대어+쉬운성경)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와 자매이며 어머니이다.(마12:50,현대인)]
카페주인은 자기 일터를 ‘성소(聖所)’로 바꾸고 있었습니다.
샬롬!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어제 주일은 은혜로이 잘 보내셨는지요? 지난 토요일자 신문 톱뉴스는 ‘온도계 생기고 가장 뜨거웠던 7월’이었습니다. 7월 그믐날인 오늘은 얼마나 뜨거울까요? ‘60대 99%가 후회하는 사실 10가지’ 중 그 여섯 번째는, ‘배움을 멈추지 말라’입니다. 요즘엔 70대 이상도 컴퓨터를 배우는 등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고 하네요. 배우는 일은 평생 멈추지 않아야, 몸과 마음의 건강뿐 아니라, 자신감도 얻을 수 있답니다.
예산에 있는 한 자그마한 카페 주인은 새벽 일찍 가게에 나와 빵을 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카페를 시작하면서 그는 두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 빵과 커피는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서 만든다. 둘째, 카페를 찾는 모든 손님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들로 여겨 정성스럽게 대한다.’ 첫째 원칙은 ‘정직하고 성실한 마음’을 잃지 않는 한 지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둘째 원칙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고 무례한 이들도 있는데,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가 고민이었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는 자기 원칙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일까요? 그 카페는 이런저런 마음의 상처로 고달픈 이들이 찾아와 편안히 머물거나 쉼을 얻는 장소로 그 구실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문받은 빵과 드립커피를 가지고 테이블로 가서, 커피를 내린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빌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손님이 느닷없이 눈물을 흘려서, 놀랐다고 합니다.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주인의 태도에서 자기가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환대하는 일’은 그에게 ‘고향을 선물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카페주인은 자기 일터를 성소(聖所)로 바꾸고 있었습니다.
마음 둘 곳이 그다지 많지 않은 세상입니다. 경쟁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하여 버둥대다 보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외로움에 빠져들게 됩니다. 하지만, 가족이나 벗들에게도 그 외로움을 쉽게 털어놓지 못합니다. 가끔 외로움이 지극해지면 부모님의 묘소를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곳은 무슨 말이든 다 허용되는 곳이라 여기기 때문일 겁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찾아갈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야 합니다. 물론, 그 장소는 특정한 공간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공동체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곳에서는 혹은 그의 곁에서는 그저 나답게 있어도 괜찮은 장소가 있다면, 우리는 삶의 곤고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출처; 월간 에세이, 김기석 / 문학평론가)
혹시 교회에 나가고 있다면, 교회에 갈 때마다 다른 교우들과의 교제도 중요하겠지만, 그 무엇보다 먼저, 교회에서 신앙인이 취해야 할 기본적인 태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의인(義人)’이라 칭해주심에 감사하면서도,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의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다른 교우들에게서 단점이나 허물보다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교회 안에 그처럼 ‘따뜻한 사람’이 많아질 때, 교회는 삶에 지쳐 고달픈 사람들이 부지런히 찾고 싶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장소’가 될 줄 믿습니다.(물맷돌)
[무거운 짐을 지고 지친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마음)이 쉼(안식)을 얻을 것이다. 나의 멍에는 쉽고(편안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마11:28, 쉬운성경)]
끼니마다 밥상을 차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샬롬! 지난밤 편안히 잘 쉬셨는지요? 요즘 무더위로 인하여 밤잠 설치시는 일이 많으시죠? 머지않아, 곧 가을이 올 겁니다. 7월 29일 토요일 아침입니다. 주말인 오늘 하루, 삼복더위 잘 이겨내시고 즐겁게 보내시길 빕니다. ‘60대 99%가 후회하는 사실 10가지’ 중 그 다섯 번째는, ‘건강을 관리하라’입니다. ‘건강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젊을 때는 이를 모르고 몸을 혹사시킵니다. 그럴수록, 고통 받는 것은 미래의 ‘나’입니다. ‘평생 운동과 식단관리로 건강을 유지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무심하게도 아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제가 제대로 알게 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한 집에 함께 살기만 할 뿐이지, 남편이라는 작자는 그야말로 자기 어머니밖에 모르는 ‘남의 편’이었습니다. 아내가 장손 며느리로 혼자 감당해 온 세월에 맺힌 응어리가 얼마나 될는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쉰을 넘기며 비로소 철 든 남편이 해줄 수 있는 건, 지금부터라도 아내의 집안일을 줄여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아내 몸은 이미 망가졌지만, 응어리진 마음이라도 풀어주며 살아야겠다고 시작한 일이 바로 요리입니다.
‘주는 밥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끼니마다 밥상을 차리는 게 보통 일이 아닙니다. 주말과 휴일 이틀을 집에만 있는 날이면, 돌아서면 곧 밥 때가 됩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아침을 거르는 걸 탓할 수 없다’는 것을, 밥을 준비하는 사람이면 다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맞벌이로 사는 부부라면, 아침밥을 누가 챙겨야 할까요? 토스트 한 조각에 우유 한 잔이라도 먹고 갈 수 있으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우리집에서는, ‘아내가 하는 일’과 ‘남편인 제가 하는 일’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아내는 ‘제가 하면 못 미더운 일’인 빨래와 욕실 청소만 하면 되고, 나머지는 다 저의 일이 됩니다. 식자재 구입은 입맛이 까다로운 편인 아내의 몫이지만, 조리는 나눠서 합니다. 아내가 집을 비우는 일이 별로 없지만, 혹시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남편인 제가 무엇을 먹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자랑을 한다고 합니다.
이번 주말과 휴일에 ‘아침으로 차린 토마토 계란볶음’을 먹으면서, 아내는 저에게 엄지척을 보냈습니다. ‘여태까지 먹었던 남편이 만든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면서 저의 요리 솜씨를 추켜 세워줬습니다. 아내의 칭찬이 ‘고운심성’에서 나온 립서비스라 해도, 저는 다음 주말식탁을 애써 준비할 것입니다. 아내에게 바치는 저의 작은 정성이 여태껏 무심하게 살았던 죄를 얼마나 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출처; 월간에세이, 김정관/건축사)
혹시, 시아버지 되시는 분이 그 며느리에게 ‘늦기 전에 내 아들과 헤어지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지요? 자기아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며느리가 불쌍해서 이혼을 종용한 겁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말입니다. 그분은 바로, 저의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보시기에 ‘둘째아들 하는 짓이 얼마나 못마땅했으면’ 그리 말씀하셨을까요? 하지만 그때는, ‘아들이 목사 되는 것을 극구 반대하시던 분’이시니, 그리고 ‘교회를 다니지 않으셔서 목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이라서 그리 말씀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 말씀하시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섭섭지 않았고, 아내에 대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70이 넘어서 조금 철이 들고 보니, ‘저의 잘못과 부족이 무엇이었는지?’ 쪼끔은 알게 되었습니다.(물맷돌)
[아내 덕분에, 남편은 ‘성문 마을회관에서 마을 장로들과 함께 같은 자리에 앉아 마을 일을 볼 만큼’ 사람들의 존경 받는다.(잠31:23,현대어) 남편은 아내에게 그의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자기 의무를 다하십시오. 아내의 몸을 다스릴 권리는 남편에게 있고, 남편의 몸을 다스릴 권리는 아내에게 있습니다.(고전7:3-4,현대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샬롬! 밤새 편히 잘 쉬셨는지요? 무더위로 인하여 밤잠을 설치신 것은 아닌지요? 7월 28일 금요일 아침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하루도 삼복더위 잘 이겨내시고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60대 99%가 후회하는 사실 10가지’ 중 그 네 번째는, ‘자식과 많은 대화를 나눠라’입니다. 자식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았다면, 노년에 소중한 친구를 하나 잃는 것이랍니다. ‘나이 들수록 자식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요양원에 계신 큰어머님을 뵙고 왔습니다. 뵙고 왔다기보다는, ‘봤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무슨 이유인지, 큰어머님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큰아버님이 나지막이 말을 건넸습니다. “여보, 나 왔어요!” 떨림조차 없었지만, 깊은 슬픔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울컥했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계신 큰어머님은 남편인 큰아버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큰어머님의 손은 추운겨울에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처럼 앙상했습니다. 큰아버님은 그 손을 살포시 잡고서 한 번 더 속삭였습니다. “눈 뜨고 나 좀 봐요!” 하지만, 저와 엄마가 떠날 때까지, 큰어머님은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면회가 끝나고 주차장으로 가는 길,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의 울음소리만이 그 사이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조심히 가라’며 손을 흔드시는 큰아버님의 모습 뒤에 아픔과 슬픔이 서려 있었습니다. 다시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큰아버님은 올해 82세이십니다. 연로한 데다 이틀에 한 번씩 투석을 받아야 할 만큼 몸도 성치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하루도 빠짐없이 아픈 몸을 이끌고 큰어머님을 뵈러 30분이 넘는 거리를 오가고 계십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남편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를 위해서.
몸이 좋지 않거나 날씨가 궂은 날에는 집에 계셔도 될 텐데, 큰아버님은 한겨울에도 칼바람을 맞으며 길을 나섭니다. 제가 “큰아버님, 가끔은 쉬셔도 괜찮아요.”하고 말씀드리면, 큰아버님은 “내가 가야 요양사 분들이 큰엄마를 깨끗이 씻겨주고 예쁘게 입혀 준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매일 가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큰아버님은 알고 계신 듯했습니다. 큰어머님을 매일 만나러 가는 것과 먼저 떠나보내는 것, 남은 일은 그것뿐이라는 것을!
아프신 몸으로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지키는 모습에 ‘사랑이란 무엇인가?’하고 생각해봅니다.(출처; 좋은생각, 김세영 / 강원도 원주시)
이 글에다가 어떤 말을 덧붙인다면, 그야말로 사족(蛇足)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덧붙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제도(家庭制度)를 마련해주시고 바라신 뜻이 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요? 비록 할머니가 알츠하이머로 할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 누구를 막론하고, 처음 가정을 이루게 되었을 때에는 ‘이런 사랑’을 기대했으리라 여겨집니다. 혹시, 아직 두 내외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면, 이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을 서로 함께 나누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는 바입니다.(물맷돌)
[내가 흠 없이 살기로 노력하겠습니다. 주께서 언제나 나에게 찾아오시겠습니까? 내가 가정(내 집안)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시101:2,현대인) 집사는, 한 사람만을 아내로 맞아야 하며, 자녀들이 순종하는 행복하고 원만한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딤전3:12,현대어)]
‘돈 버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합니다.
샬롬! 지난밤 편안히 잘 쉬셨는지요? 7월 27일 목요일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삼복더위 잘 이겨내시고 건강한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60대 99%가 후회하는 사실 10가지’중 그 세 번째는, ‘노년을 함께 할 친구를 만나라!’입니다. 배우자 다음으로는 친구가 가장 큰 자산이 됩니다. 취미생활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 자신의 속 이야기를 가감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늙어서도 외롭지 않은 인생을 보낼 수 있다’고 하네요.
어느 정도의 돈이 있으면, 그 이상 더 많이 벌려고 안달하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인생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한 중년 남성이 어느 단체의 이사(理事)가 되었습니다. “왜, 이사가 되었느냐?”고 묻자, 그는 “보수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돈에 의하여 움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돈 때문에 어떤 일을 했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 그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더 많이 돈을 모으겠다.’고 하는 것도 하나의 선택입니다. 다만, 막대한 자산을 가진 사람이 돈 때문에 이사가 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사회에 참석하는 날은, 그 일정 하나만으로 거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그 하루를 ‘언젠가 하고 있는 기술’을 계속 갈고닦으면, 강연과 저서집필, TV출연도 하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만 ‘행하는 것’이라면, 그런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돈 벌려고 하는 일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미래를 내다보고 ‘자신에게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늘 하루, ‘언젠가 하고 싶은 일’과 ‘돈을 벌기 위한 일’중, 어느 쪽을 취하는 것이 자신에게 정말 가치가 있을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물론, 답을 내는 것은 그 자신입니다. 혹시, ‘그렇게 많은 돈을 벌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돈 버는 일보다 ‘언젠가 하고 싶은 일’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게 좋은 겁니다.(출처; 시간 연금술사, 미야자키 신지/집필가)
사실, ‘결코 하고 싶지 않은 일’인데도 불구하고 돈 때문에 부득불 하는 것이라면, 그처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은 없으리라 여겨집니다. 물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그 나름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길거리로 나설 일도 아니건만,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원치 않는 일을 행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겁니다. 특히 신앙인의 경우, ‘그 일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지?’ 여부를, 그 무엇보다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물맷돌)
[주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돈 버는 데에만 정신을 쏟고 있다. 예언자와 제사장과 같은 성직자나 신학자들이 모두 돈 벌기 위하여 백성을 속이고 있다.”(렘6:13,현대어) 돈이 여러분의 삶을 다스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진 것에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다. 내가 결코 너를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히13:5,쉬운성경)]
저의 삶을 ‘스스로 운용하고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샬롬!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7월 26일 수요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꽤 무더울 텐데, 삼복더위 잘 이겨내시고 내내 건강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60대 99%가 후회하는 사실 10가지’ 중 그 두 번째는, ‘배우자의 소중함을 느껴라’입니다. 배우자는 평생을 함께 할 ‘반려자’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소중함을 쉽게 지나쳐버리곤 합니다. 나이 들수록, 곁에는 배우자만 남게 됩니다. 배우자에게 최선을 다하면서 앞으로의 노후를 그려나가야 한답니다.
꽤 가깝게 지내던 사람과 최근에 헤어졌습니다. 기이하게도, 그 이별을 곱씹을 때마다, 제가 과거에 겪은 이별들이 산발적으로 떠올랐습니다. 동시에, ‘이별이라는 행위 또는 현상’에 대한 저의 여러 관점들도 생각하게 됩니다. 돌이켜보니, 저는 ‘어른의 이별’이라는 것을, 굉장히 빈번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렸을 땐, 모든 어른의 이별이 어른스러울 줄 알았습니다. 인간이 노화하는 만큼 성숙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의 노화가 곧 성숙’이라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저는, 제가 어른이 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몸만 큰 어른이 아니라, 저와 제가 딛고 있는 삶을 ‘스스로 운용하고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 어른이 되어 ‘마지막까지 의젓하고 호혜적인 관계’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만남도 헤어짐도, 저 혼자 하는 게 아니니, 관계붕괴의 탓을 오로지 저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건만, 얼마 전에 겪은 ‘이별의 전 과정’을 수차례 반추하면서, 저는 또다시 불필요한 책망으로 저 자신을 혹사했습니다.
누군가와 헤어질 때마다, ‘저의 부족과 불찰을 반성하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너무 많이 갖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자학의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문해봤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이별은 이전보다 성숙한 이별일까?’하고 말입니다. 행복하다는 것이 한 가지 상태가 아니듯이, 어른스럽다는 것도 한 가지 상태가 아닐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저에게 자꾸 물어보려고 합니다. 지금 저에게 ‘어른스러운 만남과 헤어짐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건강한 관계의 정원(庭園)’에서만 피어나는 꽃이 있을 겁니다. 관상용인 동시에 약용작물인 그 꽃을, 제가 계속 탐하는 것은, 지난날 제가 그 꽃을 먹고서 아주 모진 질병을 극복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출처; 월간 에세이, 박이로운 /소설가)
우리는 어릴 때부터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이별을 겪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별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되도록이면 아픈 이별은 피하도록 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글쓴이는 ‘건강한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건강한 관계 속에서 모진 질병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아름다운 만남’을 많이 가짐으로써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물맷돌)
[그들을 모두 고향 땅으로 데려다가, 예루살렘에서 다시 안전하게 살도록 하겠다. 그때에는 그들이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변함없이 진실하고 의로운 관계로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슥8:8,현대어)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똑같이 대하십니다. 유대인이거나 이방인이거나 누구든지 믿음만 가지면 하나님과 다시 올바른 관계(의롭다 인정)를 맺을 수 있습니다(롬3:30,현대어)]
새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켜내는 어미 새의 모습을 보니~
샬롬! 지난밤은 편안히 잘 쉬셨는지요? 7월 25일 화요일 아침입니다. 아무쪼록 행복하고 아름다운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무더위에 건강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60대 99%가 후회하는 사실 10가지’를 소개합니다. 그 첫 번째는, ‘더 많이 저축하라’입니다. 은퇴 후 가장 큰 고민은 ‘경제적인 어려움’이라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저축하지 않으면, 은퇴 이후에 큰 고난을 겪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출처; 마음 건강 길)
새로운 집으로 이사해서 들어가 보니, 화장실 창문가에 새(鳥) 둥지가 틀어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똥이 창문을 온통 지저분하게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집을 비워서 그런가 보다!’하고 새 둥지를 치우려고 가까이 가보니, 어린새끼 두 마리가 둥지 안에 있었습니다. ‘이크, 죽었나보다!’하고 치우려고 하자, 몸을 움찔움찔하며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새끼들은 살아 있었던 겁니다. 저는 순간 ‘어쩌나?’하고 고민하다가, 새 둥지를 베란다에 옮겨다 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모이를 주면서 길러보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좋다’고 하면서 ‘그러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다시 가봤더니, 그 어미 새가 창문가에 와서 떠나지 않고 계속 새끼들을 찾는 듯 우짖어대기에, 새 둥지를 다시 창가에 갖다놨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놓지 못한 탓이지, 둥지가 지붕 위로 떨어졌습니다. 망원경으로 살펴보았더니, 어미가 새끼들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끼들은 살아서 꼼지락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미가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혼자 다 받으면서도, 그 새끼들이 타죽지 않게 보호하고 있었던 걸로 보였습니다.
저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새끼와 함께 새 둥지’를 지붕 밑 그늘지고 안전한 곳에 옮겨놨습니다. 그리고 ‘그 어미가 다시 새끼들을 찾아오려나?’하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가보니, 어미 새가 다시 찾아와서 새끼들을 품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리고 어미 새의 새끼 사랑을 지켜보면서 새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그 새끼를 키우고자 해도, 새들이 우리 인간과 대화도 안 될뿐더러, 새끼들에게 우리 인간의 사랑을 전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과의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체감온도가 60~70도는 족히 될 지붕 위의 그 뜨거운 햇볕을 자기가 다 받아가면서 새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켜내는 어미 새의 모습을 통해서,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출처; 사역은 곧 사랑이다, 임천국 / 목사, 통일소망선교회 선교사)
우리 귀에 익숙한 격언 중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병아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큰 뱀을 발견한 어미닭이, 그 부리로 뱀을 마구 쪼아대면서 죽기살기로 물리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성애(母性愛)는 본능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보도되는 뉴스 중에는 ‘아이를 낳아서 버린 사람이 수천 명에 이른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물론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만, 그래도 그렇지, 어찌 자기 속에서 나온 자식을 버릴 수가 있을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자식사랑의 차원을 뛰어넘는 ‘부모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신문칼럼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경북 예천의 수해 실종자 수색 중 사망한 채수근 상병의 부모가 육필편지를 해병대에 보냈습니다. “진심어린 국민 여러분들의 마음을 잊지 않고 가슴 깊이 간직하겠다.” “유가족을 다독여주신 귀한 말씀들을 기억하면서 어떻게든 힘을 내서 살아가 보겠다!”고 했습니다. 해병대의 발전도 기원했습니다. 길지 않은 편지에는 ‘감사’가 네 차례나 등장합니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상황에서, 위로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지막이 기도해봅니다. 하늘의 위로가 함께하기를…〉(물맷돌)
[여러분이 이 사실에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옳게 가르치듯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신8:5,현대어)]
뭔가를 잘못해서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샬롬! 어제 주일은 은혜로이 잘 보내셨는지요? 7월 24일 월요일 아침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내내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무더위에 지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놓칠 수 있는 암 신호 10가지’ 중 열 번째는, ‘피부의 변화’입니다. 점이나 주근깨, 사마귀 등의 모양변화는 피부암의 전조증상일 수 있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단순한 피부트러블로 생각해서 발병초기를 놓친다고 하네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재의 자신을 못나게 여겨서 열등감에 휩싸이면, 그만 이상한 행동을 취하기가 쉽습니다. 한마디로 ‘오버’를 하게 됩니다. 한때 높은 자리에 있었다면서 갑질 아닌 갑질을 하려고 들거나, 젊은이들을 향하여 자꾸만 훈수를 두고, 세상을 향하여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창때의 몸을 되찾겠다면서 성형하는 일에 큰돈을 쓰기도 하고, 각종 건강식품과 운동기구에 집착해서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한물간 노인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듯, 인간도 생물학적 사회적 정점을 찍고 나면 쇠퇴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아무리 잘난 체해봐야 누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또, 열등감 속에서 자신을 괴롭힌들, 누가 연민의 정을 갖고 위로해주지도 않습니다. 냉혹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런데도, 한창 잘나가던 과거의 자신을 세워놓고, 그것을 이겨보겠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짓이 되겠습니까?
누군가 저에게 ‘반드시 필요한 삶의 기술’을 하나 들어보라고 한다면, 저는 ‘정견(正見)’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을 바로 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체력이 떨어진 사람이요, 사회적으로 협소해진 사람이요, 경제적 능력이 줄어든 사람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구나!’하고 느껴봅니다.
무엇을 잘못해서 지금(노년)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과거의 나는 그대로 멋졌고, 현재의 나는 이대로 괜찮다!’라고 생각하게 되면, ‘인생을 괴롭게 만드는 열등감’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출처;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이근후 / 이화여대명예교수)
흔히 ‘황우장사라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영원히 흘러가는 세월의 흐름 선상(線上) 위에, 우리 각자는 그저 ‘순간(瞬間)에 불과한 점(点)’을 찍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한 번 크게 이름을 내보려고 발버둥 치던 사람도, 그가 죽은 후에는 ‘잊혀진 이름’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늙어서 노인이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겁니다. 이근후 박사님은 ‘사람에게는 자신을 바로 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요컨대, 자신이 현재 놓여있는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을 고대하면서 그 준비를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주께서 오라고 하시는 그날까지 겸손히 살아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물맷돌)
[야곱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그네처럼 살아온 세월이 130년이 되었습니다. 내 조상들의 나그네 생활에 비하면 내 나이가 얼마 되지 않지만, 정말 고달픈 세월을 보냈습니다.”(창47:9,현대인) 나이 많은 사람에게 화를 내며 말하지 말고, 아버지를 대하듯이 하십시오. 나이 어린 사람을 대할 때는 형제에게 하는 것처럼 하십시오.(딤전5:1,쉬운성경)]
설령 잘해내지 못할지라도, 저는 엄마 곁에 있기로 했습니다.
샬롬! 지난밤 편안히 잘 쉬셨는지요? 7월 22일 토요일 아침입니다. 7월의 네 번째 주말인 오늘, 즐겁고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당신이 놓칠 수 있는 암 신호 10가지’ 중 아홉 번째는, ‘출혈’입니다. 기침할 때 피가 나오면 폐암의 신호, 대변에 피가 묻어 나온다면 결장이나 직장암의 표시, 원인을 알 수 없는 질 출혈을 경험한 여성은 자궁 혹은 자궁내막암에 대한 진료가 필요합니다. 만일 유두에서 피가 새어 나온다면 유방암, 소변 볼 때 피가 섞여 있으면 ‘방광암이나 신장암의 신호가 될 수 있다’고 하네요.
(어제 이어서)사실, 견딜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전 처음 겪는 일일지언정 도망치지 않기로 했습니다. 결심한 이유가 사랑이든 책임감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설령 잘해내지 못할지라도, 저는 엄마 곁에 있기로 했습니다. 엄마가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제가 아버지와 함께 돌보는 동안, 엄마가 보인 행동은 ‘말 안 듣는 어린아이’보다 더 심했습니다.
식사는 한 시간 반씩 걸렸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고집을 부리고, 중요한 물건을 아무도 찾지 못하게 숨겨놓았습니다. 어떤 날은 몇 시간 내내 엉엉 울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끝도 없이 구사했습니다. 한눈파는 사이, 집안의 화초 잎을 다 꺾어놓았고, 가족들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물구나무를 서려고 하는 등, 기괴한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그리운 엄마의 모습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저의 마음도 점점 절망으로 물들어갔습니다.
엄마의 엄마가 된 후, 저는 ‘돌봄의 순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노년에는, 누구나 어린아이처럼 불안하고 위태로워지기 쉽기에,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합니다. 언젠가는 저 또한,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돌봄을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다 공평하게 나이를 먹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돌봄 없이 성장한 사람이 없듯, 돌봄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진정한 돌봄을 완성’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살면서 제가 ‘받은 돌봄’이 당연한 것이라면, 제가 ‘돌려줘야 할 돌봄’도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불운이나 불행’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요? 억지로 거스르려고 하거나 도망치지 않는 한, 삶이 있는 곳에서 돌봄은 계속될 것입니다.(출처; 좋은생각, 유혜진 / 작가)
저도 작가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그 돌봄의 대열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4형제 중 셋째입니다. 그리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요양원에 계실 때, 그의 아내가 먼저 ‘우리가 아버님을 모시자!’고 했습니다. 물론, 그에게 부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둘째며느리’가 모시자고 하니, 따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가 목회하던 교회의 교인들도 적극 환영하는 눈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24시간 누워계신 채로 지냈습니다. 그래서 대소변 받아내는 것은 물론, 매일 세수와 목욕까지 시켜드려야 했습니다. 식사대접은 그의 아내가 담당했습니다. 가끔,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대접하던 밥그릇을 집어던지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래가 막혀 숨쉬기 곤란해 하셔서, 할부로 석션기를 구입해서 수시로 가래를 뽑아내드려야 했습니다. 어떤 땐, 대변이 나오지 않아서 비닐장갑을 끼고 손가락으로 대변을 뽑아내야 했습니다.
그 친구는, 목사관에서 그의 아버지가 소천하실 때까지 8개월 가까이, 그렇게 모셨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지금도 저를 만나면, 그 당시 그런 결정을 해준 ‘그의 아내가 참으로 고마웠다’고 말하곤 합니다.(물맷돌)
[너희가 늙더라도, 나(여호와)는 여전히 너희를 업고 다니겠다.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나는 너희를 품고 다니겠다. 나는 항상 똑같이 너희를 돌보아주겠다.(사46:4,현대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꽃들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 돌보아주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더 잘 돌보아주시지 않겠느냐?(마6:30,현대어)]
“엄마, 내가 집으로 모실게!”
샬롬!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7월 21일 금요일 아침입니다. 오늘 하루도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당신이 놓칠 수 있는 암 신호 10가지’ 중 여덟 번째는, ‘음식을 삼키기 어려움’입니다. 이 증상은 ‘쉽게 나타나지 않는 증상 중 하나’랍니다. 다만, 신경 또는 면역체계에 문제가 있거나 식도암·위암·후두암이 생길 때, 이런 증상이 동반되기도 한답니다.
어떤 여성들은 살면서 두 번 엄마가 됩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식의 엄마가 되고, 두 번째는 ‘자신을 길러준 부모’의 엄마가 됩니다. 두 경우의 공통점은 아마 ‘결심’일 것입니다. 엄마가 되려면 큰 결심이 필요하고, 시간이 흘러 부모의 엄마가 되려면 더 큰 결심과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엄마가 된다는 게 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부모의 엄마가 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제는 성인이 된 자식을 두고 있지만, 저 역시도 몹시 힘들었습니다.
수년 전, 저 자신이 ‘엄마 노릇을 잘하고 있는지?’몰라서 전전긍긍하던 때였습니다. 갑작스레 엄마한테 병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하루아침에 어린아이가 된 엄마의 엄마가 돼야 했습니다. 중년의 초입, 점점 막중해지는 인생의 무게에 버거워하던 차에 닥친 삼중고였습니다. 평소 우울증이 있던 엄마는 ‘노년기 정신분열 증상’을 보이면서 24시간 내내 보호자가 필요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원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엄마를 감당할 수 없는 아버지를 도와서 대형병원의 각종 진료과에서 온갖 검사를 다했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제대로 된 병명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여러 검사로 인하여 심신에 무리가 왔는지, 엄마의 증세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신경계 이상도 없었고, 치매도 아니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검사는 다했지만, 비슷한 사례가 없어서 갖가지 정신과(精神科)의 약을 투여하면서 반응을 살펴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수용할 수 있는 병상이 없어서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야만 했습니다. 그 사이, 증상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팔과 다리를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한시도 쉬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엄마를 지켜보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과, 그것이 바로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동시에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가족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서 선언했습니다. “엄마, 내가 집으로 모실게!” 외래진료를 받으면서 증상을 살피는 게 최선인 상황이었습니다. “병상도 없고, 다른 폐쇄병동에 보낼 수도 없고, 어린 조카가 있는 맞벌이 동생네가 맡을 수도 없으니, 별다른 수가 없지 않느냐?”는 저의 말에, 모두가 침묵으로 동조했습니다.☞내일 계속 (출처; 좋은생각, 유혜진/작가)
이 글을 읽으면서, 저의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어쩌면, 글쓴이가 처한 그 입장에 조금이나마 공감(共感)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힘든 상황에 처하면, ‘왜, 하필이면 나인가?’하고 의문을 갖게 되고, 그래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나인가?’라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일수도 있는 겁니다. 때로는, 글쓴이의 엄마와 같은 형편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글쓴이는, ‘그럴 때에 필요한 것’은 ‘결단’이라고 했습니다. 글쓴이는 그런 상황에서 얼마든지 비켜갈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글쓴이는, 대개의 부모들이 ‘그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아들’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글쓴이는 ‘엄마의 엄마’가 되기로 결단했습니다. 말로만 ‘자식의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옮겨 실천했던 겁니다.(물맷돌)
[네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오래오래 살리라.(출20:12,현대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말씀은 약속이 보장된 첫째 계명입니다.(엡6:2,현대인)]
‘저런!’
샬롬! 지난밤 편안히 잘 쉬셨는지요? 7월 20일 목요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루를 소중히 사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고 행복한 날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이 놓칠 수 있는 암 신호 10가지’ 중 일곱 번째는, ‘체중감소’입니다. 미국암학회에서는, ‘아무 이유 없이 4.5kg 정도 몸무게가 감소한다면 암을 의심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체중 감소’는 ‘췌장·위·폐·식도암 등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친구의 분석에 의하면 ‘저런’은, 바로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공감(共感)’의 언어라고 했습니다.
“보통 아이가 속상해서 울면, 아이를 안심시키려고 ‘괜찮아!’라고 말하는데, 사실 아이는 괜찮지 않거든. ‘저런’이라는 말 속에는 정확한 공감이 숨어있는 거야. 아이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놀라고 속상해하는 마음’을 알아주는 말인 거지. 그처럼 아이가 정확하게 이해받고 나면, 설명하는 다른 말이나 도움의 행동을 보이지 않아도 스스로 괜찮아져. 그래서 ‘아이가 하려고 하던 일을 다시 시도해보든지, 도와달라고 청하든지, 다른 놀이를 하던지’하는 식으로 ‘다르게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끌어낼 수 있는 거야. 정말 놀랍지 않아? ‘저런’은 정말이지 멋진 말이더라고!”
그는 ‘저런’이 단순하고 흔해 보이지만, 매우 맵시 있고 효과적인 공감의 언어이며, 아이의 마음속에 생긴 작은 생채기에 발라주는 연고와 같은 것이고, 그 짧은 한 단어만으로도 아이는 지지와 공감을 얻어서 스스로 회복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고, ‘저런’의 의미와 효과를 정리하면서 흐뭇해했습니다.
‘저런’은 당연히 할머니의 언어였습니다. 가장 간결하고 효과적인 공감과 버티기를, 할머니는 숨 쉬듯이 편안하게, 날마다 저에게 공급하셨습니다. 친구가 그것을 ‘공감과 버티기’라고 분석해서 알려줄 때까지, 저는 ‘저런’이라는 단어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저런’은, 하나의 단어이자 어떤 감탄사와도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플 때 ‘아야!’라고 외치거나, 놀랄 때 ‘엄마야!’라고 외치듯이, 사람의 몸에서 당연하게 뿜어져 나오는 ‘어떤 반응’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거나, 쉽거나, 흔한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들어본 적조차 없을 만큼 드문 말에 속했고, 그것을 흉내 내서 따라 해보려고 해도 힘들 만큼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어렵고 드문 것을 당연하고 흔하게 해주신 분이 바로 저의 할머니였습니다. 저는 그것의 ‘귀하고 소중한 의미’도 몰랐으며, 그것이 저에게 끼친 ‘편안하고 고마운 효과’에 대해서도 당연히 아무런 인식이 없었습니다.(출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 소설가)
글쓴이의 친구는, ‘저런!’에 대해서 ‘그 말 속에는 정확한 공감이 숨어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글쓴이의 할머니는 ‘공감능력’이 뛰어나신 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공감능력’은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공감능력’이 아주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공감’은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에서 충분히 생각해본 후에야 취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저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부분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오로지 내 입장과 내 형편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공감’하기보다는 ‘답답’하게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공감(共感)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덕목이지만, 그러나 심히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는 ‘공감능력’을 더욱 고양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글쓴이의 할머니처럼, ‘저런!’이라는 한 마디로 상대방과 공감함으로써 자신감을 갖게 해줘야 합니다.(물맷돌)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런즉, 여호와께서는 이런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창15:6,쉬운성경) 그분(예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참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요3:33,쉬운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