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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와 몇 가지 궁금한 점
1권이 리진이 조선에서의 생활을 그린 것이라면 2권 중 전반부(3장)는 프랑스에서의 삶이고 후반부(4장)은 리진이 다시 조선에 돌아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리진은 1권 서두에서 보듯이 제물포항을 떠나 50여일의 기나긴 항해 끝에 드디어 남편 콜랭과 함께 프랑스 파리로 가서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안정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2권 전반부(3장)에서의 특징은 이야기 전개를 함에 있어 각 부분마다 리진이 궁중마마인 명성황후에게 쓴 서간문으로 시작되거나 글 중간에 서간문이 삽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서간문은 대체적으로 프랑스에서의 생활과 보고 느낀 점 - 특히 처음 보는 서구의 도시 파리의 모습과 문물들과 풍습, 문명화 된 생활양식들을 알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나 리진은 한번도 이 편지를 왕비에게 부치지 않는다.
리진은 성탄절을 앞둔 어느 겨울날 저녁 백화점에서 개최하는 <낭독회> 행사에 남편과 함께 참석하게 된다. 그날 낭독회의 주인공은 한창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작가 <모파상>이었는데, 모파상은 자기의 작품 <여자의 일생>을 낭독하는 낭독회에서 동양의 여인으로 불어를 구사할 줄 아는 리진을 소개 받고 일부를 낭독하는 기회를 준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문호 모파상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한편, 그 행사에서 조선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는 리진이 콜뱅과 황철 촬영국으로 기념사진촬영을 하러 갔다가 만났었던 홍종우다. 홍종우는 프랑스에 먼저와 서양문물을 익히는 동시에 그들에게 조선을 알리려 하는 - 기개가 넘치고 야심이 있는, 그래서 늘 위압적이며 고답적으로 보이는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서 속으로는 리진을 연모하면서도 결국은 악연으로 만나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후에 조선과 왕을 위하는 충정으로 후에 개화파의 김옥균을 상해에서 암살한 후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고 홍문관의 교리로 출세하는 등 정치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이 자리에서 홍종우는 리진에게 조선을 프랑스에 알리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자기가 서툴게 번역하기 시작한 <춘향전>을 함께 번역할 것을 제안한다. 낭독회가 끝난 후 모파상은 리진에게 다시 만나 줄 것을 요청하고 그 후에 몇 차례 만남을 통해서 파리의 몇 몇 곳을 둘러보는 등의 각별한 교유를 맺게 된다.
리진과 홍종우를 통해 미지의 조선이 파리 사교계에 알려지게 되고 리진은 사교파티에서 유명 인사들과 관계를 맺으며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던 중 리진은 콜랭과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각종 전시물들을 관람하게 된다.
여기서 이집트의 스핑크스, 미로의 비너스상 등 외국에서 가져와 전시한 작품들을 자랑스럽게 설명하는 콜랭에게 리진은 반감에 싸인 듯 반문한다.
- 왜 이것들이 프랑스 박물관에 있어야 하는가? -
콜랭의 대답은 - 이것들이 현지에 있으면 보존되기 어렵고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 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곳에 있어야 제대로 보존되고 또 루브르 박물관에 있음으로 해서 가치를 발하게 되었다는 대답이다.
이러한 콜랭의 의식 속에는 외교관으로서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는 입장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적인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콜랭의 이러한 대답에 대해 리진은 병인년에 프랑스 제독이 함대를 끌고 와 무력으로 강화도의 외규장각 도서들을 전리품으로 탈취해 간 것은 침략행위에 불과하다고 항의하며 - 필요한 것은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한다 - 고 강조하면서 이 사실을 두고 왕비가 굉장히 애석해 하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리진의 이러한 태도를 통하여 우리는 그녀 자신이 조선인임을 잊지 않으며 그 의식의 기저에는 열강의 세력 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과 왕비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겨케 있음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더더욱 리진은 파리에서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결국 자기 자신도 콜랭이 조선에서 가져온 수집품처럼 구경거리에 불과하다는 의식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터였다. 그러한 리진은 결국 - 나는 누구일까? - 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첫 번째의 의문점이 있다.
그것은 리진이 콜랭과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서 개선문과 드골광장을 보았다는 대목이다. - 72 쪽
필자가 알기에는 개선문은 나폴레옹의 명에 의해 착공하여 그의 사후인 1792년 4월에 완공되었으며 그 곳은 개선문광장으로 불리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드골광장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1970년에 서거한 드골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하여 명명된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100 여 년 전에 드골광장은 없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심하기 이를 데 없는 작가가 이를 간과하였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얼마 후 리진은 프랑스의 외무장관이 초대한 파티에 참석하였다가 복통을 일으키고 미처 임신인줄을 알지 못했던 상황에서 임신된 아이를 유산하기에 이른다. 아기의 유산은 두 번째로, 조선에 있을 때 유산한 경험이 있던 리진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쇠약해 져서 두문불출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3년 10월 9일에 리진은 왕비에게 편지를 쓴다. - 128~129 쪽
편지의 내용은 프랑스에는 학교가 많으며, 세계 각국의 책들이 프랑스어로 번역된 것을 설명하거나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가 얼마나 소설쓰기에 밥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열심히 썼는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여기서 두 번째로 궁금한 것이 있다.
얼마 전 리진은 홍종우를 도와서 <춘향전>까지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간문에서는 각국의 책들이 번역된 것을 알리고자 하면서도 자기 손에 의하여 불역된 춘향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루는 두문불출하고 있는 리진에게 조선의 논당골 고아원에서 블랑주교를 도와 일하던 수녀가 귀국한 길에 찾아와서는 조선의 소식도 전해 받는다.
소식은 - 서 씨와 강연의 근황, 고종황제 일가족이 일본군에게 연금되었었다는 것과 농민봉기가 일어났었다는 것,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다는 엄청난 사실도 전해 준다. - 134 ~135 쪽
여기서 세 번째의 의문점이 있다.
조선에 파견되어 프랑스의 초대 공사를 역임한 외교관 콜랭이 민감한 국내외 정세, 특히 조선의 역사적 격변에 대해 몰랐을리가 없을 것이고, 역시 그의 아내인 리진이 조선과 관련된 그런 역사적 사건들을 몰랐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외교관인 콜랭 자신이 공사로 주재하였던 조선의 일을 몰랐을 리 없다. 설령 콜랭이 병약한 리진에게 조선의 일을 전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안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안 알려 주었다는 것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 당시 리진은 프랑스에서는 <신문>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 신문을 통해 세계에서 일어나는 소식들을 알게 된다는 것을 서간문을 통해 왕비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따라서 세계열강이 조선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때에 이러한 조선의 격변이 신문에 안 났을 리도 만무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독방에 두문불출하고 있었던 리진이라 하여도 조국 조선과 왕비에 대한 생각이 유달랐던 리진에게 있어서 청일전쟁이나, 농민전쟁이라는 조선의 운명과 결부된 역사적 사건에 무지하였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더더구나 그 때까지 조선인 홍종우가 파리에 머물러 있을 때이고 보면 그런 소식들이 리진에게 알려지지 않을 수 없을 터인데,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라도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는 사실에 의문이 간다.
한편, 이 때 리진은 강연이 쓴 서찰도 받게 된다. 사실 수녀가 리진을 방문한 목적은 강연의 부탁을 받고 서찰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강연의 편지는 리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애절하다.
얼마 후 홍종우가 귀국할 것이라 하며 인사차 리진을 찾아와서는 초역한 <심청전>등을 전해주며 번역을 마무리 해 줄 것을 당부한다. 리진도 역시 귀국하는 홍종우 편에 모파상의 작품 <여자의 일생> 중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번역한 원고를 왕비에게 전달하여 줄 것을 부탁하고 전달 방법은 악공 강연이나 곤당골 고아원의 서 씨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일러둔다. 이 때에도 조선의 격변에 대해서는 두 사람 간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이후에 리진의 병세는 점점 악화된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 진 리진은 한 달 동안이나 새벽마다 집을 나가 불로뉴 숲을 헤매고 다니게 된다. 불로뉴 숲은 한 달 전 콜랭이 리진의 기분전환을 시킬 겸 해서 구경시키다가 아프리카 이주민 구역에서 그들의 처참한 생활 모습에 오히려 상처를 더 받게 한 사실이 있었던 공원이다.
리진은 소위 자유와 평등을 말하고 이를 헌장으로까지 제정한 나라가 이토록 인종차별을 하고 구경꺼리로 삼는 것이 이해가 안되었을 뿐만아니라 그런 약소민족의 비애가 조선과 조선인인 자기 자신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리라.
그 사실이 있었음을 뒤 늦게 생각한 콜랭은 후회를 하며 리진을 따라가 데려온다. 리진의 몽유병 증상은 몽유적 시간이 지나면 멀쩡한 정신으로 돌아와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몽유병 증상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때 리진이 콜랭에게 한 말은 -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다 - 는 말이었다.
결국 리진의 몽유병을 치료하기 위해 콜랭은 장기간의 휴가를 내어 리진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프랑스에서의 생활 4년 만의 일이다.
조선에 돌아 온 리진은 곤당골의 고아원을 방문하고 그리던 서 씨와 해후하는 자리에서 어머니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날 저녁 궁중악사인 강연을 만나게 되고 옛날 어릴 적 함께 지냈던 반촌의 집으로 가서 리진은 긴긴 빔을 강연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게 된다.
그날 밤 리진은 가방을 열고 악기 목관악기인 <오보에>를 선물한다. - 204 쪽
여기에서도 네 번째 의문이 있다.
오보에는 클라리넷과 같은 모양의 목관악기이다. 이 악기의 크기는 50 ~ 60㎝의 길이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런 길이와 크기의 악기를 가방에 넣고 왔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클라리넷의 경우 몇 토막으로 분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오보에>의 경우 통째의 악기인지, 분해할 수 있는 형태였는지 알 수가 없기는 하지만, 혹여 분해되는 악기라면 그 상황을 설명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리진과 콜랭이 치료차 조선에 온 것이 오히려 불행의 서막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이로 인해 이들에게는 영원한 이별이 되고 엄청난 역사적 사건 속에서 비극의 운명으로 치닫게 된다.
그 비극의 배후에는 과격하고 단호한 홍종우가 있었고 간악한 일본이 있었다.
홍종우는 조선에서부터 프랑스에 있을 때에도 리진을 연모하였던 인물이다. 프랑스에서도 리진에게 연심을 드러내 보였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었을 정도인 인물이다. 그런 홍종우의 심사를 콜랭도 리진에게 드러낸 적이 있었는데 그 것이 사실로 들어났던 것이다.
김옥균을 암살한 공로로 귀국후 훙문관 교리가 된 홍종우는 리진과 콜랭이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사실을 들어 어디까지나 리진은 왕의 여자인 궁녀의 신분임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프랑스로 돌아 갈 수 없도록 족쇄를 채우고자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리진은 왕비의 부름을 받고 콜랭과 더불어 궁궐로 입궁하게 된 자리에서 아직까지 치루지 않은 혼인문제와 관련하여 리진이 궁녀의 신분임을 강조하는 왕비의 뜻을 알게 된다. 그날 콜랭은 혼자서 퇴궐하고 리진은 왕비의 배려로 왕비의 침소에서 함께 잠을 자게 된다.
그날 밤 리진이 만난 왕비는 옛날의 꿋꿋한 기품과 위엄을 갖춘 왕비가 아니었다.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오랜 반목,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정치적 불안과 신변의 위험에 시달려서인지 잠자리에 누워 있는 리진에게 이런저런 말을 물어도 왔다. 리진이 잠든 척하고 있는 새에 외롭고 고단한 심사를내 보인다. 태어난 왕자를 잃어버린 어머니의 심정, 백성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치에 간여하였으나 결국 백성들을 힘들게 만들어 버린 작금의 상황에 대한 자책, 어디를 보아도 헤어날 길 없는 형국에 갇혀 있는 왕비는 끝내 - 고립무원이로구나 - 라는 독백을 내뱉는다.
엎치락 뒤치락 불면하는 왕비를 보면서 리진 역시 왕비에 대한 연민으로 밤을 새우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일이 있은 얼마 후 콜랭 자신도 어머니의 반대로 결혼식을 올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으로서의 장래를 현실적으로 받아드릴 수 없는 상황을 그 전부터 헤아려 왔던 콜랭은 리진을 조선에 남겨 둔 채 프랑스로 귀국하게 되고 곧 이어 다른 나라에 외교관으로 파견된다.
이것으로 홍종우는 리진에 대한 일차적 목적을 이루게 된다.
홍종우의 상소에 불문하고 리진 역시 프랑스에 돌아갈 생각을 접었던 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홍종우의 집요함은 이에 끝나지 않고 <강연>에 대한 질투심으로 이들의 관계를 단절시키기로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강연에 대한 상소를 올린다. 리진이 반촌 집에 살게 되면서 강연도 함께 기거하게 된 것을 홍종우가 문제 삼은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저녁 강연은 악기를 구하러 청나라에 다녀오게 되었다면서 리진이 <춤> 추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리진은 왕과 왕비 앞에서가 아닌 <춘앵무>를 강연 앞에서 춘다. 그리고 둘은 처음으로 한 방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다. 작가 신경숙은 그 광경을 - 두 사람은 한 줄기에 열린 오이들처럼 그렇게 누워 있었다 - 고 묘사하였다.
그리고 날이 밝자 리진은 강연이 자리를 뜬 것과 강연이 편지를 써 논 수첩과 만년필이 자리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내용은 - 다시는 자기를 찾지 말라 - 는 것이었다.
사흘 후 서 씨로부터 강연의 대금을 전해 받은 리진은 의아하였으나 그 것이 곧 홍종우에 의해 손가락이 절단되었다는 의미였음을... 못하는 말 대신 글로써 표현하는데 요긴하였던 만년필을 두고 간 심사를... 알게 된 리진은 또 다시 절망에 빠진다.
홍종우는 궁중법도라는 명분을 내세워 2 차의 연적을 제거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그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호방한 성격의 이면에는 굴절된 야욕의 본성이 드러났을 뿐이다.
리진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강연은 리진에게 무려 1,200 통이나 더 되는 서찰을 써 두었음을 벽장에서 발견하고서는 이틀을 넘게 그 편지들을 읽었으나 미처 다 읽지 못할 분량이었다.
거기에 말 못하는 강연의 리진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리진은 다 읽지 못한 강연의 편지를 들고 읽어가며 세달 동안이나 강연을 사방으로 찾아 헤맸지만 자취를 감춘 강연을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할 수없이 한양에 돌아 온 리진은 강연을 찾아다닐 때에 걸식하는 어린아이들을 많이 보고서 이들을 구제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왕비를 알현키로 한 날 입궐하게 된다.
서상궁에 의하면 악공 강연의 손가락을 자른 홍종우의 처사를 알게 된 왕비가 진노하여 홍성우를 청국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입궐하여 여러 시간을 지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왕비를 끝내 알현하지 못하고 서상궁의 방에서 기다리던 때에 경복궁에서 변이 났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서 순간적으로 위급함을 느낀 리진은 단걸음에 왕비마마가 있는 궁으로 달려간다.
거기서 일본 낭인들이 궁중에 난입하여 왕비를 찾고자 고종황제를 위협하고, 상궁들을 위협하는 광경을 목도한다. 왕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치욕적인 수모를 당하고, 궁중나인들은 무참히 살해 당한다. 그리고 결국 아수라장이 된 궁궐 안에서 왕비가 무참히 시해되고 궁 뒷전에서 기름 부은 나무더미 위에 불태워 지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리진은 혼절하고 만다. 리진이 이런 와중에서 목숨을 부지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서양 옷인 드레스를 입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가 일인 낭인들에 의하여 참담히 짓밟히고 왕비마저 시해 된 후 불에 태움을 당한 치욕을 보며 혼절했던 리진은 반촌 집에 며칠을 머무르다가 다시 입궐하여 왕비의 침소였던 교태전에 들어가 3일 동안이나 그 곳에서 왕비의 숨결을 찾아 헤맨다. 낭인의 칼에 난자를 당해 죽는 왕비의 모습을 통해 리진은 왕비가 그의 또 다른 어머니였음을 느낀다. - 외롭고 고단하고 다정하고 힘이 세고 강건한 어머니 - 로 여기고 또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리진은 아무도 없는 교태전에서 생전의 왕비의 숨결을 느끼며 왕비를 위해 마지막 춘앵무를 춘다. 그리고 이른 봄 햇빛 속의 궁궐 후원의 석등에 기대어 앉아 블랑 선교사가 주고 간 불한사전을 한 장 한 장 찢어 입에 넣고 삼킨다. 리진은 이미 낱장마다 비상을 발라 놓았던 터였다. 리진 역시 그렇게 고단했던 삶을 끝냈다. 뜯겨진 종이 조각들이 봄볕 속에서바람결에 나비처럼 날듯이 죽음으로서 리진의 영혼도 나비처럼 자유스러졌다고 할수 있을까?
필자는 1권에 이어 2권에서도 위에서 작가 신경숙이 간과했을 법한 몇 가지 궁금한 점을 지적하여 보았다. 또한 작품의 상황전개에 있어도 문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전후사정을 이해 하는 데 상당한 애를 먹었음을 말해두고자 한다.
요즘 소설쓰기의 기법이 그런지 몰라도 상황의 변화는 물론 단락의 구분조차 되지 않고 계속 이어쓰기를 하고 있다. 단락이 구분되는 부분은 오직 리진이 왕비에게나 쓰는 서간문이거나 콜랭이나 강연이 서간문으로 쓴 부분에 국한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읽는 것은 물론 이해하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 자신이 서술방식을 의도적으로 그리하였다면 그 이유가 있을 것이나, 필자로서는 읽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쓸 일이지, 장절은 무엇 때문에 구분하였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감히 이런 지적을 하면서도 작가로서의 신경숙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앞서의 글에서나 위에서 잠간 언급한 대로 신경숙은 아주 치밀하고 세심한 작가로 이해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점이 이 작품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 당시의 궁궐들의 이름과 배치관계, 프랑스 파리의 시가지 전경과 분위기 묘사 등은 픽션과 사실의 경계가 어디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리얼하게 독자들에게 다가 온다. 더우기 역사 소설은 고증이 뒷받침 되어야한다는 전제를 가정할 때, 과연 픽션과 사실에 대한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리얼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애매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픽션을 사실로 느끼도록 하는 힘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새삼 작가의 재능과 노력에 많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마찬가지로 제물포항구에서 프랑스로 떠날 때의 리진에 대한 묘사라든가, 왕비의 침소에서 왕비와 함께 자던 날의 왕비에 대한 묘사, 그리고 왕비가 시해당하는 광경에 대한 묘사들은 신경숙의 탁월한 솜씨를 다시 확인시켜 주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특히 왕비 시해 장면의 묘사는 긴장은 물론 일말의 전율을 자아내게 하는 클라이맥스라고 할 것이다.
1권이나 2권은 시간적 연대기가 바탕에 깔려 있긴 하여도 굳이 역사소설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없지 않으나 2권의 말미에 가서 보여주는 왕비시해 장면을 통해 그런 시각을 뒤집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작가 신경숙은 왕비를 민비나 명성황후로 지칭하지 않고 단순히 왕비로, 그리고 고종황제를 왕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 것은 순전히 작가 신경숙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이 역사를 민비시해 사건으로 다루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나 요즈음은 대원군과 알력으로 대한제국의 정치를 농단한 민비가 아닌, 또 다른 시각적 접근 - 명성황후로 재 조명하고 있는 것을 대비하여 볼 때에 신경숙은 후자의 관점에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또 다른 하나의 특징은 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서두 또는 문장 중간 중간에 잠언이나 경구와 같은 간결한 문장을 배치하여 그 상황을 아주 함축적으로 절묘하게 표현하여 주고 있는 작가의 솜씨는 박수 받아 마땅한 일이라 할 것이다.
후에 시간이 되면 이 것 만을 간추려 소개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 2007. 8. 12 새벽 4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