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바람의 혁명사
이령
어둠과 나, 빛과 나 부르카 너머의 시선, 빨강 루즈의 혁명환희의 오르가슴, 철학이 사라진 골목 같은배리의 공식이 빛나고 있기에 나의 새벽은 왼쪽으로 깊다
신의 소관에 대해 궁금한 귀그림 이면의 그림자를 쫓는 손비루함이 불러오는 거짓의 눈 쓴맛에 익숙한 입달콤함에 길든 들창인 코까지 육감의 향합이 봉인된 채
나는 무엇인가?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耳目口鼻를 촉으로 전하는 바람의 몸명징한 바람의 문장사루비아 꽃잎으로 입을 닦는 습성무감자처럼 맛있는 이야기를 담은 귀기게스의 반지를 낀 손가락 나비 없는 모란의 향기에 걸린 코
바람의 혁명사는 새벽이 내게 전하는 헌사며부록은 백색의 어둠이다나는 눈 뜨고 자고 있다
인간 사이에서만 신이 태어난다는 확신 같은 것, 몰라도 되는 것까지 알게 되는 슬픔 같은 것, 보이는 것만 믿게 된 나이의 안착 같은 것, 태초 선택적 출생이 내게 주어졌다면 촉각적 속지주의를 표방하는 바람으로 태어났으리. 바람은 스스로 그림을 그리지 않기에.
모티브
게글스럽다의 동의어는 외롭다는 말
달고나 소주에 휘핑 된 맥주 거품 같은
잘 익은 젖가슴을 출렁이며 단추 틑어진 블라우스를 입은
게우다 넘친 보도블록에 밀착된 어! 어! 저 아가씨 왜 저러고 있나
무단횡단이 범람하는 4차선
차창으로 밀려드는 뭉클한 도안 앞에서 난 골똘하다
장미가 피는 유월은 취하기 좋은 계절
레이스 뜨기를 기억해야 하는 시절
무중력을 견디고 있는 그녀의 엉덩이에서 피어나는 무늬 리버레이스
겹 꼬임이 골치 아픈 레이스 뜨기처럼
실밥이 풀릴 때 아차 하던 기억
다시 풀어야 하나 한 코를 버리고 그냥 지나쳐야 하나
오일 게이지 쪽에서 보면 아직 그녀의 뒤태는 레이스 무늬건만
그 무늬를 벗어나지 못한 그림자가 불온하다
폭음의 내막은 그림자의 몫,
매듭을 풀어주고 싶다
핸들 커브에서 거미들이 s자로 기어 나오고 난
그 거미들을 초고속으로 그녀에게 던진다
갈아 끼운 코바늘이 정지선에서 멈칫하다
속도를 벗어난 가을쯤, 차 대부에 새겨진 처음이라는 기억
남자에게서 레인지로버를 꿈꾸던 난
그 해 겨울 첫아이를 지웠지
탈선의 대로에 그 누가 레이스 뜨기를 기대할까 하겠지만
그림자의 배후를 파고들면
저 아가씨처럼 누군가는 생의 코를 놓치고
또 누군가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풀어 버리고 싶은 시절을 떠올릴 것이다
차를 세우고 아가씨의 그림자를 길게 두고 보는 동안
모퉁이의 거미가 짓이겨진 몸으로 거미줄을 마저 짜고 있다면 좋겠다
한 코, 한 코 잇다 보면 완성되는 리버레이스
그녀도 나도 레이스 뜨기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
<근작시 >
꽃을 기억해
1.
가지가 휘었다 꽃차례로 화분에 칼자국이 늘었다 여자는 엄마의 손가락을 잘라 흙 속에 묻었다 비 오고 바람 불고 달빛 창을 넘는 사이 썩은 손가락에서 별빛 새순이 돋았다 여자는 양철지붕에 비드는 날이면 피 냄새에 놀라 꽃잎을 뚝 뚝 뜯었다
꽃 핀 자린
무한, 유한, 복합, 어긋나기, 돌려나기, 마주나기
꽃 핀 자린
비밀, 어둠, 잘린 손가락 속에 숨어있던 기억들의 아우라
꽃을 오래 보기 위해 여자는 화분을 음지로 옮겼다 핏기 없는 엄마는 침대에 누워 파라미타를 꿈꾸었다 아상, 인상, 중생상 너머 보살이 되려 했지만 되레 화분에 새겨진 빗금 하나 지워내지 못했다
2.
빛이 사라졌다 화분에 칼자국이 지워지고 있다 여자는 흙 속에 묻어둔 손가락을 까맣게 잊었다 그림자 없는 창으로 화분을 돌렸다
꽃 지고 잎 피나 잎 지고 꽃 피나 무릇 사랑이라 부르던 것들은 까마득 사라졌다 사이 나무는 하늘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 구름에 앉았다 느닷없이 동인(動因) 하는 꿈, 새 화분을 들였지만 더 이상 꽃 필 기미 없다
꽃 진 자린
자웅동주, 자웅이주할 것 없이 진물이 흐르고
꽃부리, 꽃덮이 그 흔적마저 거두었지만
꽃 진 자린
소멸, 침묵, 환생, 한때 스스로 빛나던 것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오랜 기다림 이란 걸
여자는 깨진 화분 파편을 가슴으로 모으고 있다 화분과 여자는 동숙이다 기꺼이 잘린 손가락을 지탄(指彈)하지 않던 엄마, 꽃 진 자리는 새로 필 꽃을 위해 휘어지도록 우거졌다
<시작노트>
나는 꽃을 연모합니다. 그 뜨거움에 오래 눈을 두면 오! 슬프게도 역류하는 피의 솟구침이 찬란한 슬픔을 게워냅니다.
꽃은 빛과 빗의 빚음입니다.
장막을 젖히고 나오는 최후의 발악, 꽃은 슬픔의 다른 이름입니다.
내가 세상과 사람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도 어떠한 경험 사실들이 도해자로 하여금 그렇게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지를 먼저 알아야 했습니다. 왜냐면 오늘의 나는 경험에서 도출된 것이지 어떤 철학적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와 미래의 공간적 배열 형태, 즉 알 수 없는 어떤 인력이 있음을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인지의 중심체인 엄마는 나의 가장 강력한 인력 권력 이고 사랑입니다.
이령 2013년 「시사사」로 등단. 한국문학비평가협회이사, 웹진시인광장 편집장, 문학동인 Volume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