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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재클럽(Y-Club) 원문보기 글쓴이: 카안
진묵을 만난 두 여인, 기춘 낭자와 기녀 석란 진묵은 곡차는 즐겨했으나 평생 여인을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육척이 넘는 훤칠한 키에 당당한 체구며 수려한 외모는 출가한 스님만 아니었으면 많은 여성들이 흠모하고 따랐을 출중한 대장부의 면모를 지녔다. 그러므로 비록 출가한 스님임에도 불고하고 진묵을 흠모하는 여인이 없을 수는 없었다. 진묵은 30세 전에 운수의 길을 떠나 남해안을 따라 내려가다가 경남 땅 마산(馬山)에 이르렀다. 때는 마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무턱대고 한 대문에 이르러 사람을 불렀다. 하인이 나와서 보고는 문전박대를 했다. “허, 왜 이리 잔말이 많은고? 주인께서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안을 소제하고 기다릴 터인데?” “그야 사실이지만, 너 같은 어린 중을 모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주 귀한 도승을 기다리시는 중이지. 아니, 그런데 그걸 네가 어찌 안단 말인가?” 진묵은 하인을 뿌리치고 주인을 만나러 들어갔다. 그 집 주인은 토반(土班)으로 세력이 당당한 선비이며 남달리 불교에 심취한 사람인데, 간밤에 화엄신장이 현몽을 하였던 것이다. “오늘 석가 부처님께서 너의 집을 방문할 것이니, 집안을 청결히 하고 목욕재계를 하고 기다리도록 하라.” 주인은 종일 기다렸으나 묵어가겠다는 걸인 하나 없더니, 석양에 진묵이 나타난 것이다. 주인은 반갑게 맞아 집안 식구들을 모두 불러 진묵에게 인사를 시켰다. 안주인, 아들 , 딸, 하인들까지 차례로 큰절을 드리고 물러 간 뒤 저녁상이 들어왔다. 저녁상도 하인을 시키지 않고 이 집 막내딸이 직접 날라 와서 시중을 들었다. 식사를 하면서 그 딸과 여러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막내딸은 진묵의 인품과 수려한 외모에 그만 마음이 송두리째 빼앗겼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막내딸은 수줍게 그러나 결연한 표정으로 진묵에게 고백했다. “스님, 이 몸은 아시는 바와 같이 규중에 있는 몸으로 여태껏 외간 남자를 대해 본 적이 없다가 오늘 스님을 뵙게 되었는데, 스님께서는 제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 가셨습니다. 부디 소녀를 거두어 주시옵소서.” 의외의 고백에 당혹스러웠으나, 진묵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출가한 몸이니, 그런 농담은 아예 하지 마시오.” “농담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옵니다. 오히려 스님이시기에 더욱 좋습니다. 저를 제도해 주실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미 결심하였으니 천리만리라도 따라 가겠습니다.” 진묵은 그 낭자와 숙세의 깊은 인연임을 짐작했다. 그러나 출가 수행자가 아리따운 낭자와 더불어 연분을 맺을 수도 없고, 또한 데리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낭자는 남녀의 연을 맺을 수 없다면 출가라도 하여 스님을 모시고 싶다고 막무가내로 매달렸다. 어떻게 해서라도 진묵과의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간절한 원이었다. 그러나 낭자의 소원이 지극하고 아무리 숙세의 인연이라고는 하나 출가한 신분으로 여성을 맞을 방도는 진묵으로서도 어찌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정 그렇다면 남자로 태어나야지.” “어떻게 하면 남자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 발원하면 내생에는 남자가 될 수 있지요.” “알겠습니다. 제 이름은 ‘기춘’이온데, 지금으로부터 10여년 후에 기춘이라는 동자가 찾아오면 저 인줄 아시고 스님의 시봉을 시켜주세요.” 말하자면 스님을 따르지 못한다면 당장 자결이라도 하여 남자로 태어나서 스님을 모시겠다는 것이니, 그 지극한 숙세의 인연은 진묵으로서도 마냥 떨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스님 약속해 주세요. 저를 받아 주시겠다고.” “약속하리다.” 그 뒤 낭자는 부처님께 나아가 지극 정성으로 발원하고 이내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 후 과연 기춘이라는 동자가 12세 때에 진묵을 찾아왔다. 진묵은 그를 알아보고 시봉으로 삼아 각별히 지도하며 늘 데리고 다녔고, 기춘도 지극 정성으로 진묵을 모셨다. 이는 기춘의 원력이라기보다는 진묵의 도력이 이루어낸 일일 것이다. 기춘이 진묵의 시봉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기춘은 어언 열일곱이 되어 남달리 지혜로워서 진묵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고 언제 어디에나 늘 진묵을 그림자처럼 모시고 따라 다녔다. 어디서나 그렇지만 어떤 특정한 사람을 특별히 아끼고 총애를 하다보면 공부가 미숙한 다른 사미들이나 대중들에게 그 사람은 은근한 미움을 사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느 날 대중은 작당하여 기춘에게 혼자 점심 공양의 일을 다 떠맡기고 국수를 준비하라고 했다. 이런 기틀을 알아차린 진묵은 기춘을 불렀다. “국수를 만든다지?” “예, 스님.” “대중 것도 함께 만드느냐?” “네.” “국수를 네 손으로 대중의 발우에 담고, 이 바늘 하나씩을 국수 위에 얹어 놓아라.” “바늘을요?” “시키는 대로만 해라.” 기춘은 두 말없이 진묵이 주는 바늘 쌈지를 들고 나갔다 그리고 시키는 대로 점심 공양 시에 발우에 국수를 담고 그 위에 바늘 하나씩을 올려놓았다. 대중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조실 스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오늘 공양을 보아 하니 기춘이 혼자서 마련한 것 같다. 너희는 놀고 앉아서 기춘의 공양을 받은 셈이다. 너희가 능히 바늘을 국수로 만들어 먹을 수 있다면 남을 부려먹어도 된다. 대중은 그만한 자신이 있기에 기춘이만을 시켰을 줄 안다. 모두를 국수공양을 해라.” 말을 마치고 진묵은 국수를 휘저어 먹기 시작했다. 바늘은 어느새 국수로 화하여 후루룩 진묵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대중은 놀라서 모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일제히 엎드려 빌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큰스님 시봉을 함부로 다루면 못쓰느니라.” “예,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진묵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묵이 살던 시대의 전주는 전국 삼대 도시로서의 규모를 자랑하던 곳이었다. 조선을 개국한 전주 이씨의 본 고장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가 발달하면 유곽도 함께 발달하는 법이다. 당시 전주에 두 명기(名妓)가 있었는데 석란(石蘭)과 영란(英蘭)이다. 이들은 똑같이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한 스승 밑에서 자란 기생이다. 그래서 둘은 친자매처럼 지냈다. 그런데 영란은 어떤 한량을 만나 기생을 그만두는가 싶더니 그 한량과 오래가지 못하고 또 다른 한량을 만나 작은 술집을 내고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반면에 석란은 가무와 가야금의 명수이고 또한 학문도 뛰어난데다 화용월태의 용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조 또한 굳어서 자기의 마음을 바칠 수 있는 대장부가 아니면 어떠한 권력이나 금력에도 넘어가지 않는 지조가 있는 기생이었다. 진묵은 금산사에 있을 때 이 영란의 가게에 가서 곡차를 마셨다. 마늘쪽에 곡차를 먹던 진묵은 다른 안주를 부탁했다. 그러나 다른 안주는 별로 없고 저수지에서 갓 잡아온 싱싱한 고기만 있었다. “저수지에서 막 잡아온 싱싱한 물고기뿐 이데, 스님은 드려도 못 드시니 어쩔 수 없지요?” “내가 못 먹을 건 또 무어람. 주면 먹지.” “정말 드실 거예요?” “암, 산채로 먹을 거네.” 주인은 함지 채 내밀었다. 진묵은 서슴없이 곡차 한 사발에 잡히는 대로 고기 한 마리씩 산채로 집어 삼켰다. 주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만 볼 뿐이다. “여보, 주인. 오늘 나한테 공양 잘 했으니 아들 하나 둘 걸세.” 그러고는 진묵은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영업하는 가게에서 초저녁에 스님이 술에 취해 자고 있으니, 다른 손님들이 다 발길을 돌렸다. 장사도 못하게 된 주인은 자고 있는 진묵을 가만히 살펴보니 술값도 별로 없는 듯싶었다. 자고 있는 진묵을 흔들어 깨워서 술값과 안주 값을 지불해 달라고 했다. 진묵은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주었으나, 술값보다 더 비싼 안주 값은 줄 수가 없었다. “안주 값은 외상일세.” “외상은 안 되어요.” “그럼 없는 돈을 어떻게 준단 말인가?” “돈이 없으면 안주를 도로 물려주시지요.” “할 수 없군. 아까 함지박에 물이나 담아 오게나.” 진묵은 손을 입에 집어넣어 몇 번 꼼지락거리더니 한 마리씩 도로 다 게워 내 놓는 것이 아닌가? 함지에는 금세 싱싱하게 살아 날뛰는 고기로 가득해졌다. 주인은 물론이고 너덧 길손들도 경악하고 말았다. 진묵은 아랑곳 하지 않고 누이 집으로 향했다. 누이 정옥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에 진묵의 주선으로 전주로 시집 간지 십여 년이 되었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고 예전의 청초하던 모습은 사라진 중년의 아낙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날따라 정옥은 진묵 오라버니의 주벽을 고쳐 주리라고 마음먹고 동네에서 간수를 얻어다가 술병에 담아 두었다. 진묵은 심심하면 전주에 나와서 누이의 집에서 곡차를 먹곤 하였던 것이다. 누이는 곡차를 대접하는 것이 싫은 것이 아니라 대취하여 시내를 방황하고 다니는 꼴이 보기 싫어서 한번 크게 혼내주려고 작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진묵은 해질 녘에 누이의 집에 당도했다. 정옥은 일부러 더욱 반갑게 맞이했다. 이때 대문 밖에 어떤 여자가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오라버니 저 여자가 누군데 오라버니를 따라왔어요?” “응? 누구 말이냐?” 진묵이 대문 쪽을 보니 아까 주막집 안주인이었다. 그녀는 그 놀라운 광경을 보고 도대체 어떤 대단한 스님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몰래 뒤를 따라온 것이었다. 진묵과 눈이 마주친 아낙은 의미 있는 미소를 짓더니 이내 황급히 사라졌다. 정옥은 이미 오라버니가 전작이 있음을 알고 아주 귀한 진시황이 먹던 곡차를 준비해 두었다며 일부러 진묵 오라버니를 어둑한 방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간수임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는 이웃집에 잠깐 다녀온다고 하고는 자리를 피하는 척 했다. 진묵은 방에 들어가 병 채로 입에 대고 단숨에 몇 모금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거참 맛있구나. 진시황이 먹다 남은 것이라 그런지 맛이 일품인 걸?” 이때 정옥은 진묵이 방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살그머니 문틈으로 안의 광경을 엿보았다. 아마도 지금쯤 크게 혼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진묵은 마늘쪽을 고추장에 찍어 먹어가며 그 지독히도 짠 간수를 연신 벌컥대고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묵은 이내 다 마시고 곧 잠에 곯아 떨어졌다. 지켜보던 누이는 장난이 지나쳐 오라버니 죽는 것이 아닌가 싶어 겁이 덜컥 나서 부랴부랴 방으로 들어가 오라버니를 흔들어 깨웠다. 진묵은 눈을 뜨더니 말했다. “어허, 오늘은 낮잠도 편히 못자는 날이군. 아까 주막에서도 깨우더니 여기서도 그 모양이네”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일어나 앉는 진묵의 모습을 보고 정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사람은 몇 모금만 먹어도 목숨이 위태로운 간수를 한 되를 마시고도 아무렇지도 않으니 말이다. 진묵의 비범함과 신통을 목격한 주막집 여인 영란은 석란을 찾아갔다. 석란의 심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라 진묵 같은 신통한 도인이면 석란도 마음을 열고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소개 차 간 것이다. 영란의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보통 사람은 분명 아닌 것 같았다. 석란도 은근히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다. 석란과 영란은 의기투합하여 미리 계획을 세워두었다. 어느 날 진묵이 영란의 주막에서 곡차를 마시고 있는데 석란이 우연을 가장해서 들어왔다. 영란이 몰래 기별을 한 것이다. 이윽고 몇 잔의 곡차를 주고받다가 각본대로 석란의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란은 장사 핑계를 대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이제 진묵과 석란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천하의 자재 도인 진묵과 전주의 지조 있는 명기 석란과의 대작은 이내 흥취를 더하여 노래와 춤으로 이어졌다. 진묵의 기품은 석란의 여심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석란은 이런 큰 도인이라면 자기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주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진묵에게 점점 더 빠져들었다. 진묵은 기분 좋게 취해갔고 석란의 몸은 뜨거워져 가고만 있었다. 이윽고 석란은 진묵의 품을 파고들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춤을 덩실덩실 추는데 서로의 육체는 아주 가깝게 밀착되었다. 석란은 진묵의 몸에 자기의 온몸을 더욱 밀착시키며 유혹을 했다. 날이 더운 탓에 겉옷들을 벗은 터라 얇은 속치마 차림의 익을 대로 익은 석란의 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력은 아마 어떤 사내라고 금방 허물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석란의 흥분은 갈수록 더해갔고 애타게 진묵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이때 정자 마당에 감이 떨어지는 것을 본 진묵은 벌떡 일어났다. “어이쿠, 감이 떨어졌구나. 잘 익었구나.” 방금까지 무슨 일이 곧 벌어지기를 잔뜩 기대했던 석란은 어이없게도 진묵이 아이처럼 좋아하며 떨어진 홍시를 맛있다고 먹는 광경을 보고 그만 마음을 접고 말았다. 원래 총명한 석란은 진묵이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무애 도인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욕정이 잘못임을 깨달았다. 진묵은 홍시를 맛있게 먹고는 우물 쪽으로 가서 누덕바지를 홀랑 벗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연신 찬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석란은 욕정을 깨끗이 비우고 역시 명기답게 다가가 진묵의 등을 말없이 밀어주었다. 참으로 진묵은 술 경계에 술이 없고 색 경계에 색이 없으신 여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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