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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승하
1960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6년 중앙대에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풍자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화가 뭉크와 함께」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계간 '한국문학평론' '시안' '시로 여는 세상', 월간 '문학사상'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문학나무' 편집위원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10대 명제'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집 떠난 이들의 노래—재외 동포문학 연구' 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ㆍ지훈상ㆍ중앙문학상ㆍ시와시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문혜원
1965년 제주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6년 서울대에서 「한국 전후시의 실존의식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 '문학사상'신인상 평론부문에 「한 모더니스트의 갈등과 지향—김수영론」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계간 '시작' '다층' '열린 시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시인수첩' '시와 시' '시와 사상' 편집위원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 현대시와 모더니즘' '한국 현대시와 전통' '흔들리는 말, 떠오르는 몸' '돌멩이와 장미,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말들' '우리 시의 넓이와 깊이' '문학의 영감이 흐르는 여울' '한국 근현대 시론사' '한국 현대시와 시론의 구조' 등이 있다. 현재 아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재복
1966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1년 한양대에서 「이상 소설의 몸과 근대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6년 '소설과 사상'에 「동양적 존재의 숲—윤대녕론」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계간 '한국문학평론' '열린 시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본질과 현상' '쿨투라' '시와 사상' '시로 여는 세상' '오늘의 소설' 편집위원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몸' '비만한 이성' '한국문학과 몸의 시학' '현대문학의 흐름과 전망' '한국 현대시의 미와 숭고' '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등이 있다. 고석규 비평문학상ㆍ젊은평론가상ㆍ편운문학상ㆍ애지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 한국언어문학과 교수 겸 한양대 미래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재직중이다.
홍용희
1966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8년 경희대에서 「김지하 문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사랑을 향한 열림의 언어—정현종론」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계간 '작가세계' '내일을 여는 작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계간 '시인' '시작' '쿨투라' '한국문학평론' 편집위원으로 있다. 주요 저서로 '김지하 문학연구'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 '한국문화와 예술적 상상력'(편저) 등이 있다. 젊은평론가상ㆍ편운문학상ㆍ시와시학상ㆍ김달진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대담>
영원무궁 늙지 않을 시인들의 등장을 꿈꿔 온 세월
대담 일시:2014년 1월 4일
장소:계간 『문학나무』 대학로 사무실
대담자:이승하(사회), 문혜원, 이재복, 홍용희
이승하:2014년은 국내외 정치ㆍ경제 상황에 있어서나 우리 문화ㆍ예술계에 있어서나 여러 가지 지각변동이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일단 6월 4일에 지방선거가 있지요. 우리가 편집을 하고 있는 '젊은 시'의 경우 올해 열 번째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열 권째 발간을 기념하여 지금까지 낸 아홉 권의 '젊은 시'를 총정리하는 대담을 세 분 선생님을 모시고 가져보려 합니다. 재창간의 포부를 펼쳐보고자 제10호는 지금까지 지켜왔던 표지 디자인도 바꾸면서 분위기를 일신했습니다.
황충상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젊은 시'가 시작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제안을 받고 제가 문혜원, 이재복 두 분께 전화를 드린 것이 2004년 10월이었지요. 2004년 11월에 인사동에서 만나 첫 기획 모임을 가졌고, 이후 해마다 사당동 경양식집에서 만나 편집회의를 했던 지난 9년 세월의 일들이 가로등처럼 한꺼번에 제 기억의 거리에서 켜집니다. 이재복 선생님은 '2005 젊은 시' 창간 준비를 하던 그 시기에 대학 임용 절차를 밟고 있지 않았던가요? 문혜원 선생님도 '젊은 시'를 만들기 시작한 지 몇 년 안 되어 대학 전임이 되셨지요? 두 분 선생님께 먼저, 지난 9년 세월 동안 '젊은 시'를 만들면서 겪은 일들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문혜원:참 오랜 세월이네요. 그래도 시간은 그냥 가는 법은 없어서 우리가 뽑은 시인들이 이미 시단의 중요한 한 경향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열 번째 '젊은 시'를 묶어낸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감회가 새롭네요. 날마다 어려워지는 출판 시장에서 팔리지 않을 것이 뻔한 앤솔로지를 만든다는 것은 무모하기까지 한 일이지요. 여간한 사명감과 문학에 대한 애정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선 10년 동안 해마다 적자를 감수하면서 출판을 해주신 황충상 선생님께 경의와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저야 좋은 시를 선정하고 글을 쓰는 일이 즐거웠지만 출판사로서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10년 동안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 작업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낍니다. 첫 번째 출간된 '2005 젊은 시' 표지에 ‘젊은 평론가가 뽑은 신춘문예ㆍ전통문예지 당선 시인’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10년 전이니 ‘젊은 평론가’라는 말이 가능했었지요. 이제는 선정위원 모두 ‘젊은’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지난 듯한 느낌이……(웃음).
이재복:인사가 만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2004년 말부터 2005년 초까지 하루도 마음 졸이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두문불출했지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이승하 선생님으로부터 ‘젊은 시 기획’에 대한 이러저러한 제안을 받고 어떻게 그것을 승낙했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어떤 이상한 끌림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것이 무엇이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비평가로서의 자의식을 앓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가 등단 10년이 되던 해인데 무언가 열심히는 했지만 내가 정말 비평가로구나 하는 비평가로서의 그런 위상과 자부심을 크게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요. 비평의 도태와 역도태 현상을 지켜보면서 비평에 대한 회의를 절감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어요. 아마 이런 잠재된 생각들이 저를 ‘젊은 시’ 선정에 참여하게 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참으로 당돌한 생각 아닙니까? 이미 정식으로 선정된 신인을 다시 평가하겠다는 ‘젊은 시’의 모토가 부정이나 삐딱하게 보기와 다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이런 정신으로 ‘젊은 시’를 꾸려왔기 때문에 모든 신인들이 이 앤솔러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굉장히 신경을 쓰고, 출간될 때마다 예의 주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현상은 알게 모르게 좋은 시, 다시 말하면 다른 여러 외형적인 조건들에 상관없이 시만 좋으면 좋은 시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우리 시인들에게 심어준 것 같아요. 등단지의 권위도 시인의 외형적인 조건도 배제한 채 ‘젊은 시’를 뽑은 지 10년이 되면서 제대로 된 비평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분명해지고, 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해서 만난 시인들이라서 그런지 더욱 각별하고 애정이 갑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황충상 선생님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없는 살림에 ‘젊은 시’ 출간은 물론 출판기념회를 열어 독려해주셨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생각 같아서는 앞으로 10년이고 20년이고 우리 ‘젊은 시’가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것이 제 욕심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평가로서의 어떤 절실함이 ‘젊은 시’를 볼 때마다 자꾸 생겨나는 것은 이것이 비평가로서의 자존심 혹은 위상을 세워주는 하나의 중요한 통로이자 상징 때문이 아닐까요?
문혜원:개인적으로는 내가 눈여겨본 신진 시인이 개성 있는 시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이 작업을 하고 있나 봅니다. 누가 봐도 잘된 시를 좋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이지요. 이런 경우는 시 자체가 비평의 질을 어느 정도 보장하기도 하구요. 그에 비하면 등단한 지 3년 안쪽의 시인들을 그것도 다섯 편의 시를 가지고 판단하고 비평하는 일은, 비평가로서는 잘해야 본전인 일이기도 해요. 확신을 가지기에는 아직 이른 시인들의 시에 평을 붙이는 것은 빛이 나는 일도 아니고 가끔 실망으로 끝날 때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선정한 시인들이 좋은 시인으로 자리 잡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은 아마도 겪어본 사람만이 알 거예요.
이승하:홍용희 선생님과는 '2010 젊은 시'부터 어언 다섯 권째 같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세하게 된 연유와 그간의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홍용희:시단이란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지속적인 각축 속에 형성되는 역동적인 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젊은 시' 선정은 여기에서 특히 우리 시단에 새롭게 솟아오르는 잠재적 힘들의 성격, 감성, 표정을 읽는 일입니다. 오늘 속에 움트고 있는 내일의 정신을 첨단에서 느끼고 발견하는 것이지요. 특히 '젊은 시'의 대상 시인들의 경우 시에 대해 가장 진지하고 순결하고 비장한 자세로 무장된 출발의 시기이지요. 그래서 이 시기의 작품은 일생의 고유한 시적 방향성과 형질이 가장 집중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젊은 시'에 발표되는 작품은 아직 다소 미숙하고 어설픈 감이 있다고 할지라도 매우 뜻 깊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문학나무에서 간행하는 '젊은 시' 작업에 깊은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이재복 선생님의 선정위원 권유에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지난 5년간 참여하면서 젊은 시인들이 출현하는 역동적인 무대를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문학평론가로서의 삶에 젊은 활력과 소명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으로 작용해왔다고 생각됩니다.
이승하:'젊은 시'의 편집 과정은 조금 특이합니다. 4명의 선정위원이 지난 3년간('2014 젊은 시'의 경우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 동안) 문예지 신인상 당선작과 2011~2014년 4개년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나누어 살펴봅니다. 그중 주목할 만한 신인의 당선작들을 복사해 와서 만나지요. 돌려보면서 점수를 매겨 합계 고득점(?) 20명을 선정합니다. 선정된 시인들에게 등단작 2편(신춘문예 당선자는 1편), 기 발표작 2편(신춘문예 당선자는 3편), 신작시 1편 등 총 5편을 싣고 선정위원이 선정의 이유를 10매 이내의 해설 식으로 쓰는 편집체제를 지켜왔습니다. 이런 편집 스타일의 특장점에 대해 문 선생님께 여쭤봅니다.
문혜원:저는 이런 선정 방식이 마음에 들어서 선정위원을 계속하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품은 많이 들어요. 이번만 하더라도 선정 예비작들을 찾기 위해서 국회도서관에서 꼬박 하루를 책들을 보고 있었거든요. 다른 세 분 선생님들 또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젊은 시'의 선정 과정이 객관적이고 투명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비시인들 혹은 선정되었거나 되지 않은 시인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니까, 과정을 좀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지요. 1차로는 중앙과 지방의 문예지와 신문들을 선정위원 4명이 나눠 맡고 각각 선정 예비작들을 추려냅니다. 해마다 선정위원들이 담당하는 대상 지면을 달리 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특정 지면에 대한 편파성을 방지하지요. 2차로 선정위원들이 만나서 예비작들을 놓고 1점부터 5점까지 각각 점수를 매겨 합산합니다. 중간에는 A+, A0처럼 학점 형식의 평가를 한 적도 있었는데 좀 더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도록 점수제로 바꾸었지요. 그 후 총점 순으로 순위를 매겨서 상위 20명을 선정합니다. 동점자가 나올 경우 토론을 하고 그래도 판정이 안 나면 동점자를 같이 선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정반대로 작품의 편차가 너무 심할 경우는 20명이 안 되는 선에서 선정을 끝내기도 합니다. 수록된 시인 수가 20명 안팎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선정이 끝난 후 평설은 각 선정위원의 선택을 우선적으로 고려합니다. 시적인 경향의 유사성이나 개인적인 호감도, 중앙과 지방 지면의 균형 등등이 선택의 기준입니다. 가능하면 시의 장점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선정위원이 평설을 맡는다는 것이 암묵적인 동의 사항입니다. 아, 이 경우도 궁극적인 원칙은 있습니다. 개인적인 친분 등 평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작품의 평은 맡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가장 단순하고 기계적인 방식인데 저는 이 방식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만큼 공정하고 객관적이니까요. 문예창작 전공으로서 직접 예비시인들을 지도하는 선정위원이 두 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선정 방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제자를 지도하고 계신 두 분 선생님께 이따금 죄송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선정위원 어느 누구도 특혜를 바라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런 합의들이 가능했기 때문에 10년간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이 가능했을 겁니다. 크고 작은 심사를 해왔지만, 그중에서 가장 투명하고 공정한 심사를 진행한다고 자신합니다.
이승하:저희들 나름의 선정 기준이랄까, 아무래도 전통서정시보다는 실험정신이 가미된 참신한 감각과 발랄한 상상력의 시를 선호해온 경향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 이재복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이재복:‘젊은 시’라고 할 때 그 ‘젊다’라는 말 속에 우리의 의도가 잘 드러나 있지요. 이때 젊다라는 말은 단순히 새롭다라는 의미를 넘어 기존의 것을 답습하거나 무조건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저항하고 또 그것을 부정하는 의미에 가깝지요. 자칫 이것이 우리 ‘젊은 시’는 전통서정시보다 실험정신이 강한 모던한 시를 선호한다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지요.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뽑아놓은 시를 보면 실험성 혹은 모던함이 강한 시도 있지만 전통지향적인 시도 있어요. 문제는 전통이냐 모던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정신의 새로움에 있는 것이죠. 새로운 낡음도 있을 수 있고 또 낡은 새로움도 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새로운 시를 쓰려고 온갖 실험적인 언술을 구사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기교나 어설픈 시도로 그치고 마는 경우라든가 아니면 전통적인 시풍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지금, 여기’에 대한 미적 충격과 반성의 문맥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젊은 시'에 이러한 생각들이 반영되어 있어요. 만일 우리가 실험성과 모던함의 외피만 보고 뽑았다면 여기에 선정된 많은 시인들이 우리 문단의 주목받는 시인이 될 수 있었겠어요? 보다 중요한 것은 시인들이 지니고 있는 시적 태도에 있다고 봐요. 시적 태도는 시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요. 시가 감동을 주고 그것이 커다란 매력의 대상이 되는 것은 시인이 보여주는 시적 대상이나 세계에 대한 치열한 탐색이나 발견의 태도 혹은 기존의 체계에 물들지 않으려는 저항적인 태도나 부정 정신 같은 것이라고 봐요. 우리가 시를 보면 그것이 우리의 지각을 통해 총체적으로 드러나죠. 그래서 정말 좋은 시는 개인적인 취향이나 이념을 넘어 누가 보아도 좋게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떤 시에서 작품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이러한 시인의 시적 태도까지 보게 되는 것이죠. 가령 김수영의 시가 주는 둔중함의 아름다움은 작품을 넘어 그 시인의 위대함과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결국 우리는 ‘젊은 시’에서 작품 그 자체를 넘어 시인의 이러한 점까지 염두에 두고 그것을 선정해 왔다고 할 수 있어요. 이점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이승하:홍용희 선생님께는 보다 포괄적인 질문을 드립니다. 작년까지 네 번, 이번에 다섯 번째 '젊은 시' 선정에 참여하면서 신인 등단작들을 죽 살펴보셨을 텐데, 어떤 기류 같은 것이 보였습니까? 신춘문예 당선작들은 심사위원의 고령화 때문인지 ‘정통’을 고수하고 있는 듯하고, 문예지 일부 당선작은 참신성이 돋보이기도 하는데요. 6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역량 있는 신인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지만 이제는 문예지 등단자 중에서 주목에 값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습니까?
홍용희:지난 5년간 어떤 새로운 기류의 선명한 부각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첫째는 우리 시대가 격동적인 변화와 전환기의 특이점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1970〜80년대처럼 이념적 대결 구도나 변혁 논리가 첨예할 때는 시대정신을 선도하고 예언하는 시적 지성이 단연 눈길을 모을 수 있었지만 후기산업사회의 지배 논리가 일상성은 물론 미래가치까지 포섭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제시하기는 결코 쉽지 않겠지요. 실제로 지난 5년간 특이한 시적 기류라면 주로 불온한 냉소, 허무, 비탄, 단절, 자폐 등의 불협화음의 미의식이 다채롭게 확산되고 재생산되는 양상을 지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한 이러한 불협화음의 미의식의 음역은 일률적으로 그리 높게 솟아오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소극적 능동주의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등단 매체로서는 이승하 선생님의 지적처럼 근자에 들어 과거 신춘문예의 영화가 문예지로 대폭 이동한 것 같습니다. 신춘문예 출신 시인으로 근년에 시집 출간을 한 시인은 이우성ㆍ이은규ㆍ이혜미 정도가 떠오르네요. 이것은 신춘문예라는 제도적 장치의 문제라기보다는 급변하는 세태에 둔감한 운영의 문제로 이해됩니다. 시적 변주와 확산의 스펙트럼이 그 어느 때보다 넓어지고 있는데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섬세한 시단의 현장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신춘문예에도 교과서적인 정통성, 원로 중심의 심사위원, 기존 서정시의 권위 담론 등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연성이 요구된다고 생각됩니다. 신문사마다 다양한 개성을 강조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작년부터 시ㆍ장편소설ㆍ시나리오ㆍ게임스토리 네 분야에 걸쳐 만 34세 이하로 나이 제한을 두고 공모하는 ‘한경 청년 신춘문예 공모’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신춘문예는 잡지와 달리 등단 이후 막막한 벌판에서 스스로 생존하고 개척해야 하는 어려움도 없지 않지요. 오늘날 문예지가 더욱 많아지고 더욱 편 가름을 하게 되면서 문제점들이 좀 더 심각하게 노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승하:가히 문예지의 춘추전국 시대, 아니 천국 시대입니다. 작년에 시전문계간지 '시인세계' '시안' '시평'이 정간 내지 종간 선언을 하긴 했지만 50종이 넘는 문예지가 매 계절 간행되고 있지요. 세 분은 모두 과거와 현재 문예지의 편집에 간여하고 계신데, 신인들의 신춘문예 등단과 문예지 등단의 차이가 있다고 보십니까?
문혜원:2014년도 신춘문예 당선작이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주요 계간지들은 이제 신인 응모작들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메이저가 아닌 문예지까지 합치면 사실상 시단은 사시사철 새로운 시인을 맞이하기 위해 열려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예비시인들이면 누구나 신춘문예와 주요 계간지로 쏠리지요. 예전과 달라진 상황이 있다면 신춘문예와 주요 계간지의 응모 시기가 분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간지의 신춘문예는 말마따나 ‘신춘’을 겨냥하고 있어서 중앙일보를 제외하면 대부분 연말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해가 바뀌면서 치르는 일종의 이벤트와 같은 성격이 있고 수상 시인들 또한 다수의 독자 앞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다는 매력이 있지요. 문예지들은 시기상 신춘문예보다 먼저 그 해의 신인들을 챙겨갑니다. 응모 편수도 대부분 5편 이상으로 많은 편입니다. 응모 경향으로 보면 젊은 층은 문예지 쪽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등단 후 지면을 보장받을 수 있고 시집 출간까지를 염두에 둔다면 훨씬 안정적이니까요. 주요 계간지로 등단한 시인들은 이후에도 지면과 평설 등에서 지속적인 후원을 받게 되므로 출발부터 유리한 조건을 가지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재능 있는 예비시인들이 점점 문예지로 쏠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예지들이 각 분기마다 우수한 신인을 독식하다 보니 연말에 치러지는 신춘문예는 상대적으로 시들해지는 느낌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2군 경기인 것 같은 인상을 줄 때도 있어요. 이번 작품을 선정하면서도 나왔던 이야기이지만, 신춘문예 당선작들의 수준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노쇠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홍용희 선생님 말씀처럼 시스템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신춘문예라는 제도의 문제점과 기능 등을 검토해볼 시점이 아닌가 해요.
이재복: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둘 다 등단의 엄격함이 없어요. 시인의 등단이 도제식이 아닌 대량생산체제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추천제가 마음에 들어요. 그것도 초회 추천이 아니라 3회 정도의 추천을 통해 등단하는 것이 여러모로 등단의 엄격함을 유지하는 데는 좋다고 봅니다. 하지만 요즘 이렇게 등단을 하는 데가 없지요. 이벤트성이 강하고 심사위원의 물갈이가 거의 없는 신춘문예가 가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누누이 쓴소리를 해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1914년 '매일신보'에서 시작되어 백년을 이어온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이 제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하지만 이 등단 제도는 상업적인 매체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요즘 우리 문학잡지는 신인 늘리기를 통해 생존을 모색하고 있는 데가 많아요.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데는 큰 출판사를 끼고 있는 몇몇 잡지들밖에 없어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신인들 수준을 기대하기에는 한계가 있어요. 각 잡지별로 등단자들을 중심으로 무슨 무슨 ‘회’ 같은 모임이 있어 이들이 잡지의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에서 등단의 위의나 엄격함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난센스 같아요. 시인으로서의 등단이 자기만족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고, 이것이 우리 시를 점점 왜소하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라고 봐요. 시대와 현문명이나 문화에 대한 고민과 그것에 대한 정신을 내재하고 있는 시를 만나기가 어려운 것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홍용희: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오늘날의 우리 시단은 특정 주류 담론은 물론 주류 독법 역시 두드러지지 않고 있지요. 과거의 이항대립적인 진영론이나 담론 중심의 계보학의 틀은 시효를 마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생태주의ㆍ페미니즘ㆍ몸 시학ㆍ정신주의 등의 기존의 담론 중심의 문제의식들이 일상성의 언어와 생활 감각 속에 흩어지고 스며들고 확산되고 내면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주제론적 담론이 생활 감각의 언어로 확산된 것이지요. 이것은 또한 이들 주제론적 담론들이 심화되면서 서로의 경계가 무화되는 연속성이 확대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점차 내용 중심의 시적 유형학이 상호텍스트성, 문화주의적 감각, 인터넷 매체의 무중력 공간의 혼성성에 자리를 내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신춘문예의 기성 권위의 엄숙주의 영역을 좁힌 배경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약하면, 기존의 권위 담론보다 하위 주체가 전면화 되면서 신춘문예보다 미시적 생활감각의 순발력이 앞서는 문예지의 역할이 신장되었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자기만의 시적 개성과 양식을 시도하는 젊은 모험가들은 문예지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지요.
이승하:네,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제 이재복 선생님께 먼저 여쭤봅니다. 지난 10년 동안 '젊은 시' 편집에 관여하면서 특별히 주목했던 시인이나 우리가 ‘잘 뽑은’ 시인으로 어떤 이들이 있을까요? 그들이 우리 시단에서 어떤 역할을 지금 하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재복:우리가 ‘젊은 시’에서 뽑은 시인들 중에 또 시인을 뽑으라는 말씀이군요. ‘젊은 시’가 등단한 신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비교적 최근에 뽑은 시인에 대해서 ‘이들을 잘 뽑았다’거나 ‘이들의 시단에서의 역할이 이러이러하다’를 이야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지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등단한 지 일정한 기간이 지난 시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겠는데요. 말하자면 이들은 ‘젊은 시’가 주목하고 응원하는 우리 시단의 스타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들이야말로 우리 시단의 ‘젊음’을 이끌고 있는 시인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젊음에 걸맞은 많은 시인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황병승ㆍ장석원ㆍ김성대ㆍ박장호ㆍ서대경ㆍ강성은ㆍ서효인ㆍ이이체ㆍ황인찬ㆍ박준ㆍ박성준ㆍ김승일 같은 시인들은 앞서 제가 말씀드린 낡은 새로움을 포함한 새로움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여기에 언급한 시인들은 적어도 자기 시의 문법 혹은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봐요. 아울러 이들이 보여주고 있는 시적 태도가 단순한 포즈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시가 곧 우리 시의 미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는 이들이 우리 문단의 속되고 사악한 흐름으로부터 자유롭고 또 여기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해요. 무엇보다도 시인을 속악한 자본의 논리에 줄 세우려는 그런 음험한 논리로부터 시인 자신이 자유롭고 또 그것에 저항했으면 해요. 시인의 위대함은 바로 그런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요?
문혜원:저는 최근 젊은 시인으로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박준ㆍ김상혁ㆍ황인찬의 시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합니다. 박준과 김상혁은 '젊은 시'에 두 차례 선정되기도 했었지요. 어쩌다 보니 지난해 이 세 명의 시인에 대해서 한 차례 이상씩 비평을 쓴 적이 있네요. 사실상 이들은 ‘미래파’로 불리는 시인들 다음 세대에 해당합니다. 미래파가 하나의 유파나 경향으로 설명되기는 힘들지만, 소통되지 않는 실험과 언어유희, 국적 불명의 다양한 장르의 차용, 다층적 주체의 분열적인 발화 등 비슷한 특징들로 설명될 수 있는 것에 비해, 이들은 아직 미흡하기는 하지만 각자 독립된 개성을 보여주며 시단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박준의 시는 이들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서정시에 가깝습니다. 시의 형식이나 내용이 파격적이지 않고 온건하면서 어투는 오히려 고어적이지요. 미인이나 병, 잠 등 자주 차용하고 있는 소재들은 이상이나 고은의 초기 시, 이성복 등 선배 시인들의 시를 연상시키면서, 동시에 이들의 시와 구별되는 미묘한 아우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종 가난이 시적인 배경으로 깔리면서 사회성을 지향하는 특징도 가지고 있지요. 최근에 발굴한 새로운 개성이 아닌가 합니다. 김상혁과 황인찬의 시집을 비교해서 서평을 쓴 적이 있어요. 김상혁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아버지가 부재한 공간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어린 화자가 등장해서 금기와 소외의 유년 시절들을 보여주지요. 이는 성인이 된 화자가 겪는 세상과의 불화의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상징이나 성적인 코드 역시 중요한 특징인데, 이것은 화자의 깊은 슬픔과 아픔을 은폐하는 전략으로 기능합니다. 최근 발표된 작품들은 한결 정제되면서 은폐의 전략이 더 교묘해지고 있더군요. 황인찬의 시는 김상혁과는 정반대입니다. 김상혁의 시는 어둡고 탁한데 황인찬은 모노톤이라고 할까. 이 시인의 시는 한눈에도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에 여백이 많습니다. 비단 형태만이 아니라 낮게 뇌까리는 어조와 천천히 진행되는 시공간의 변화, 현실과 꿈을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경계 등이 특징이지요. 반복되는 진술들은 의미를 선명하게 하거나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암시와 예감을 전이시키는 역할을 하지요.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신비스러운 분위기, 다른 세상으로 이끌려가는 듯한 독백체, 수식이 별로 없는 단순한 문장과 행간의 여백이 주는 안온함 등은 독자를 감염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지요.
홍용희:근자의 우리 시단을 좀 더 근거리에서 집중적으로 조망해보면, 2000년대 초반 ‘미래파’ 이후 눈길을 집중시키는 이슈가 없습니다. ‘미래파’의 엽기ㆍ환상ㆍ복고 등이 엇섞이면서 증폭된 소통 불능의 혼돈이 스스로 혼돈을 먹으면서 질서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혼돈으로부터의 질서가 시적 수사, 기교, 상상 등의 입체적 진화는 분명 이루었으나 ‘추’의 미학이 도달한 어떤 ‘숭고’의 지점을 열어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미래파’의 들끓던 폭발력이 새로운 시적 차원을 배태시키지 못한 채 스러져간 모습으로 이해됩니다.
오늘날에는 80년대 중․후반 태생 시인들이 시단의 중심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박성준ㆍ김승일ㆍ황인찬ㆍ이혜미ㆍ주하림 등이 그 전위에 서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시편들에서도 내적 분열과 미적 자의식, 연극적 다성성, 매체적 상상, 파행적 형식 실험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미래 가치를 열어갈 수 있는 미적 날카로움과 부정의폭발력을 얻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사적ㆍ사회사적 층위에서의 소외, 냉소, 허무의 정서를 최소 주체의 자리에서 관망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망의 거리감이 좀 더 치열하고 분명한 음역을 열어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세대가 남성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여성적이지도 않은, 미소년의 초식성의 언어의식에 기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의 행로를 좀 더 지켜보면서 ‘초식성의 언어’의 역동성은 어떻게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차례인 것 같습니다. ‘초식성의 언어’는 자칫 대중적 순응의 윤리의식과 섞이면서 보수적 우경화로 치우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경계하면서 말입니다.
이승하:저희들은 2013년 연초에만 '젊은 시' 출판기념회를 하지 않았을 뿐 매년 젊은 시인들과 1차(회식), 2차(호프집), 3차(기억이 안 남)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학평론을 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들과의 어울림이 무척 즐거운데, 개인적인 친분 형성이 평 쓰기에 애로를 주지는 않던가요? 잘 아는 시인을 혹평하기도 그렇고. 우리 평단의 한 문제점인 ‘정실비평’은 몇몇 대표적인 계간지를 생각해보면 더욱 심각한데 차제에 이 문제에 대한 여러 선생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문혜원:선정된 시인들과의 뒤풀이 자리는 '젊은 시' 출간기념회를 겸한 자리였기 때문에, 이미 평설을 쓰고 난 후였습니다. 즉 친분이 형성되기 이전에 평설을 쓰고 지면으로 만난 후 비로소 안면을 익히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친분이 글을 쓰는 데 애로사항이 된 적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피하려고 친분을 잘 안 쌓는 것이 제 소신이기도 하구요(웃음). 오히려 평설을 쓴 후의 자리라서 불편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제가 평설을 쓴 시인 중에는, 선정해놓고 가혹한 평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직접 불만을 표시하는 시인도 있었고 기분이 상해서 뒤풀이 자리에 아예 참석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황충상 선생님께서 대신 마음고생을 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선정된 시인들은 그 많은 시인들 중에 ‘선정’된 상대적으로 우수한 시인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대에 못 비치는 부분에 대해서 미흡하다는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시인에 대한 애정과 기대의 표현인 셈이죠. 혹시라도 제 혹평을 받은 시인들은 이 대담을 보면서 오해를 풀었으면 좋겠습니다(웃음).
홍용희: 정실비평은 분명 비평의 본래 정신과는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두 가지 정도 층위를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나는 비주류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격려가 앞서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세간의 권위나 사적 친분이 앞선 경우일 것입니다. 전자는 신인들이나 지역 문인 그리고 해외 동포문인들을 대상으로 할 경우, 소외지역에서 시단의 중심부로 나와서 스스로의 역량을 신장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따뜻한 선의가 작동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가장 경계해야 할 폐단이겠지요. 사실은 어느 정도 이력과 위상이 있는 시인일수록 엄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자기 발전을 위해 더욱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단의 풍토는 그렇지 못한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비평가도 문제이지만 비평가들을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지원부대 정도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시인들도 문제이지요. 그러나 시인의 위상은 궁극적으로 작품의 우수성으로만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을 지나간 시사가 웅변으로 증거하고 있는 점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지요.
이재복:정실비평의 문제가 어디 어제 오늘의 얘깁니까. 비평에 정의 문제가 개입되면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모호해지고 그 시의 실체를 드러내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죠.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늘 얼굴을 대하고 친분이 있는 시인들을 혹평하기란 쉽지 않죠. 하지만 친분 때문에 고평을 한 그러한 비평이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요? 누가 봐도 뻔한 시를 어느 비평가가 친분 때문에 고평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런 것은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시가 아닌데 그 사람이 가지는 권력이나 친분 관계 때문에 고평되고 있는 경우랄까 뭐 그런 것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혹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무의식을 거느리고 있는 고평이라고 봐요. 이런 시인들 우리 주변에 많이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 역시 자신의 시가 형편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자신의 권력이나 친분 관계를 동원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죠. 다른 것은 몰라도 특히 시는 그것으로 가치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다만 문제는 우리 시인들이 요즘 자신들의 시의 가치를 출판사의 이름을 통해 계급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문지나 창비에서 시집을 냈기 때문에 일류시인이고 너는 무슨무슨 출판사에서 시집을 냈기 때문에 2류, 3류 시인이라고 많은 시인들이 그것을 무의식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시인으로서 당당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해요. 출판사라는 상징화된 기표가 아니라 시인이 위대해야죠.
이승하:맞습니다. 예전과 달리 유명 출판사에서 나오는 시집도 옥석이 뒤섞여 있고, 애지시선, 지혜사랑, 시와사상 시인선처럼 지방에서 나오는 시집 중에 좋은 시집들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 푸른사상 시선, 시와세계 시인선, 시산맥 시인선, 문학의전당(시인동네)으로 나오는 시집 시리즈 중에도 썩 괜찮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제 경우 등단 30년 만에 시집을 10권이나 내어 이런 말씀 드릴 자격이 없었습니다만 등단 2〜3년 만에 시집을 내고, 5〜6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두 권 이상의 시집을 내는 시인들을 보면서 우리 시단이 언제부터인가 속전속결주의로 가게 되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라는 장르는 예전부터 자본주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근년에는 자본을 쏟아 붓는 식으로 출판시장이 형성되고, 조금이라도 잘 팔리는(?) 시인이 보이면 출판사에서 팔을 끌어당기는 식으로 시집이 금방 나오곤 하는데, 첫 시집의 긴장감을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이 지니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번에는 좀 다른 질문을 드려볼까요? 저나 홍용희 선생이나 문창과 교수인데 ‘시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해 이재복 선생님은 불만이 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언젠가 '젊은 시'출판기념회 때 한국 시단에 ‘문창과’가 끼친 해독이랄까 불건전성에 대해 이재복 선생이 개탄한 적이 있었는데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짚어주실 수 있을까요?
이재복:시를 가르친다는 말 속에는 시인보다 시가 우선한다는 논리가 숨어 있다고 봐요. 저는 시보다 시인이 우선하고, 시인이 위대해야지 시가 위대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최근에 '시로 여는 세상' 겨울호에서 김상환 교수와 대담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이 대담의 요점 중에는 요즘 우리 시가 수사적인 차원은 굉장히 세련되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작 세계에 대한 치열함 혹은 그것과의 진정성 있는 싸움에 있어서는 빈곤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요. 제가 한국 시단에 문창과가 끼친 해독이라는 말을 했다면 그것은 분명 이런 맥락에서 한 이야기일 겁니다. 시보다 먼저 시인이 위대해야 한다거나 언어 직전까지만 가자라는 말, 김수영 식으로 이야기하면 온몸의 시학은 시에서 중요한 것이 세계와의 치열한 싸움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시가 한낱 딜레탕트라든가 도락의 차원으로 이해된다면 시의 빈곤을 면할 수가 없겠죠. 제가 보기에 한국 대학의 문창과에서 시를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너무 성급하게 일반화한 것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문창과가 혹여 제도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불안할 때가 많아요. 이것은 제도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 이전에 인간 혹은 인간의 몸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이렇게 해야만 빈사지경에 있는 세계도 구하고 또 삶도 구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승하:네 참고할 만한 좋은 지적이었습니다. 대학 문창과에서 키워내는 시인들이 정신의 시를 쓰지 않고 기교의 시를 쓰고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저의 은사이신 서정주 선생님은 시란 머리로만 써도 안 되고 가슴으로만 써도 안 된다는 말씀을 줄기차게 하셨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의 감성과 주지주의자들의 이성을 균형감 있게 지녀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자, 이제 세 분 선생님 모두에게 질문을 드려봅니다. 우리 시단의 작금의 흐름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시집 독자는 없고 시인과 문예지와 시집은 넘쳐나고 있습니다. 작년에 어느 시인은 선거법 위반으로 법정에 섰고 어느 시인은 교사직을 뜻하지 않은 일로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베스트셀러 시집은 개인의 창작시집이 아니라 유명시인이 편집한 ‘모둠시집’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시인들의 시를 인터넷상에 제멋대로 올려 운영하는 사이트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일본의 고령 시인 시바타 도요(1911〜2013)의 '약해지지 마'와 출판기획자 하상욱의 '서울 시' 1, 2권이 지난해 최고의 판매부수를 올린 시집이었습니다. 이런 답답한 현실에 대한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문혜원:작년과 재작년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교양 강의를 맡았습니다. 우리 학교 재학생 전부를 대상으로 한 강의였으니까 인문대부터 의대, 공대까지 판이한 전공의 학생들이 수강을 했지요. 시와 소설 텍스트를 골라서 감상문을 쓰게 하는 과정에서 하상욱의 시집(?)을 알게 됐습니다. 4~5명의 학생들이 감상문을 쓰겠다고 신청을 해서요. 학생들과 대화하기 위해 일부러 책을 주문해서 받았는데, 시집을 열어보는 순간 화가 치밀더군요. 시가 아니었으니까요. 강의 시간에 만나는 학생들은 시에 대한 이해가 꽤 높았기에 어떻게 이런 책을 골랐는지 의아했는데, 나중에야 그 답을 알게 됐습니다. 저처럼 그 책을 산 학생은 없었습니다. 심지어 감상문을 쓴 어떤 학생은 저한테 “교수님, 그건 살 만한 책은 아닌데요. 그냥 SNS로 보시면 돼요”라고 직접 이야기하더군요. 스마트폰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세대에게는 이것이 시인가 아닌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재미있고 톡톡 튀는 발상을 보고 웃고 그 순간 소비하면 끝나는 거지요. 한 학생은 정색을 하며 이게 왜 시가 아니냐고 묻는 겁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진짜(?) 시를 가르치고 토론을 시켜봤더니 상당히 우수한 질문과 대답이 오가더군요. 상황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과연 시인과 시를 비평하는 우리들은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하는 반성도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방금 전에 문창과의 폐해 이야기도 나왔는데, 엇비슷한 시를 양산하면서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고 유지하는 것에만 치우치지 말고 좋은 시를 알리고 읽게 하는 일에 좀 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재복:후기산업사회와 시라는 장르 사이의 불화를 반영한 여러 현상들이겠죠. 후기산업사회의 예술의 근간은 벤야민이 적절하게 지적한 것처럼 ‘기술복제’라고 할 수 있죠. 예술에서 아우라가 제거되고 복제된 세계가 그것을 대체하는 상황에서 시의 정체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지금 음악이나 회화 같은 경우 테크놀로지에 의해 그것의 형식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문학에서도 소설의 경우 데이터베이스적인 상상력에 기반한 라이트노벨이다 장르소설 같은 경우에는 이러한 영향권 하에 있다고 봐야죠. 하지만 시는 달라요. 시는 태생적으로 복제다 데이터베이스다라는 조건하고는 대척점에 있는 양식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이런 후기산업사회에서의 소모적인 순수 혹은 순결로서 존재할 때 그 존재성이 드러난다는 것이죠. 이 말은 가령 시에서의 키치성을 이야기할 때도 그것이 싸구려적이고 통속적인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비판과 실험, 달리 말하면 아방가르드적인 속성을 드러낸다는 것이죠. 우리 시에서도 오규원ㆍ황지우ㆍ장정일ㆍ유하 등의 시를 보면 여기에서의 키치성은 상당히 아방가르드적이죠. 이것은 키치에 대한 비판과 반성 혹은 키치에 대한 향유와 동시에 그것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하죠. 하상욱의 '서울 시' 같은 것은 온전히 싸구려적이고 통속적인 키치예요. 우리 시인들이 견지해온 키치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봐야죠. '서울 시' 같은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문화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는 그런 대중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시가 여기에 물들거나 함몰될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은 시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봐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러한 시대이기 때문에 시가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가치, 진정성, 비판적이고 반성적인 감각 같은 것들이 더욱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이러한 현상에 대해 과도하게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봐요.
홍용희:이승하 선생님의 지적처럼 시인과 문예지는 넘쳐나는데 정작 시집 독자는 없는 다소 기이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문예지가 늘어나면서 신인들의 인원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1980〜90년대를 합한 수보다 2000년대 등단한 시인이 더 많다고 합니다. 생산자는 많으나 소비자는 별로 없는 형국이지요. 물론 시인이 많아서 해로울 것은 없습니다. 김현 선생님 말씀처럼 문학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는 않지요. 그러나 양적 증대가 질적 증대와 무관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시적 소명의식과 염결성을 떨어뜨리고 있지 않는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면 문제는 달라지겠지요. 문예지가 너무 제 식구 늘리기에 치중하기보다는 시정신의 본도를 견지하는 노력을 반드시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새삼 조선시대 선비들의 학문하는 기본자세를 떠올리게 됩니다. 성리학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통해 ‘구극’에 이르는 방법론을 강조했지요. 격물치지(格物致知)란 사물에 다가가 모든 지식을 극진히 하여 형이상의 원리와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시가 쓰여지는 자리 역시 바로 이와 같은 구극의 지점이 아닐까요? 이것은 무엇을 소재로 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고 했던가요, 근원을 향한 깊은 사색과 탐구의 고전 정신이 새삼 우리 시단에 요구되는 중요한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승하:세 분 선생님의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시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점들을 타개해나갈 수 있을까요?
문혜원:시들이 다 그만그만하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시인들이 들으면 엄청난 항의가 쏟아지겠지만 사실입니다. 특히 젊은 시인들의 시가 그렇습니다. 미래파 열풍은 사그라들었지만 많은 시인들의 시가 아직도 미래파적 성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까 말한 문창과의 영향도 큽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리겠지만 학교에서 황병승의 시를 배우고 익히니까요. 모더니즘 작품들을 박물관에 보관해놓고 교양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과 같은 형국이지요. 거기에 무슨 전위성과 실험성이 있겠습니까? 반복과 모방만 있는 거죠. 시는 시인의 사유와 세계관을 언어로 표출하는 것인데, 베낀 시는 사유와 세계관은 삭제한 채 언어의 모양만을 답습하지요. 이름을 덮으면 누구의 시인지 구별할 수 없는 시가 대부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비평가들 또한 막중한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사유가 성숙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시들에 비평적인 언술이 따라붙으면, 이 시는 대단한 철학적 사유와 뚜렷한 자각에 바탕한 전위적인 시로 둔갑합니다. 하지만 비평가들이 호명해낸 그 많은 시와 시인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시인이나 비평가나,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쓰는 이 글이 과연 나의 진실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시대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자신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부풀려가며 그것에 다시 속박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진정한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끊임없이 이것이 맞는지 과연 내 생각은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또 물으면서 자신만의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홍용희 : 앞에서도 잠시 언급이 있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 시단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경화’ 라고 말해보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우경화’란 진보와 대조되는 보수화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설령 부정의 상상력을 노래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관습화되고 패턴화되면 보수적 성향으로 변질되는 것이지요. 우리 시대의 고유한 시적 언어, 어법, 양식, 수사, 리듬 등에 대한 탐색과 실험이 요구된다고 보입니다. ‘미래파’ 이후가 ‘미래파’의 잔영이 아니라 이를 안고 넘어서는 포월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미국의 사진 작가 만레이는 이런 말을 했지요. ‘사랑에 진보가 없듯이 예술에도 진보란 없다. 그것을 하는 다른 방식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 시대에 맞는 시적 사유와 어법과 양식의 차별화된 ‘다른 방식’ 찾기에 좀 더 깊이 골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오래된 새로움’일 수도 있고 ‘낮선 새로움’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억압적인 지배질서를 충격, 교란, 부정하는 차별화된 언어, 어법, 양식을 찾아가는 적극적인 모험이 시도되었으면 합니다.
가령 1970년에 김지하의 「담시」가 발표되었지요. 당시 시단에서는 보지도 듣지도 못한 전복적인 파천황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답답한 가슴을 통쾌하게 해방시켰지요. 우리 시대의 억압된 상처와 집단 무의식을 해방시키고 치유하는 시적 모색이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와 같은 새로운 미적 양식이 새로운 미래가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란 말도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재복: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시가 지나치게 수사적인 차원의 화려함에만 몰두해 있는 것 같아요. 과거에 비해 시들이 무척 수사적으로 세련된 것이 사실이에요. 매끈하고 화려한 시적 기교가 어느 시인할 것 없이 두드러지죠. 저는 이것이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 보일 때가 많아요. 진짜 시, 그 알맹이를 가득 채우는 것은 시인의 세계에 대한 진정성 아니겠어요. 좀 울퉁불퉁하고 거칠지만 이 세계에 대한 진정성이 드러나는 시들을 만나기가 점점 어려워요. 이것은 강의실에서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인 스스로 몸으로 세계와 부딪히면서 획득되는 것인데, 점점 몸이 사라지고, 다시 말하면 세계에 대한 깊은 관조와 그것으로부터 촉발되는 내 안의 의식의 충만함 혹은 의식의 심심함 같은 것이 사라지고 얄팍한 기교나 감성(감각)만이 난무하는 형국이에요. 우리 시가 너무 왜소해 졌어요. 이 세계에 대한 진정성은 곧 시대정신이나 문명이나 문화에 대한 시인의 깊은 관조와 여기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죠. 시가 지나치게 개인의 감성이나 감각의 차원만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시의 위상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겠죠. 저는 우리 시인들이 이러한 시대정신을 회복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히 우리 젊은 시인들이 그것을 늘 염두에 두었으면 해요.
이승하:지난 9년 동안 우리가 뽑아서 등단 초기에 재조명을 했던 시인들이 이후에 좋은 평가를 받고 시집을 내고 상을 받고 하는 것을 보면 ‘우리한테 선견지명이 있었지’ 하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가 있지요. 하지만 금방 문단의 미아가 되어 문예지상에서 작품을 전혀 볼 수 없는 시인들이 있어 안타까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앞서 대체로 말씀들 해주셨지만, 우리 각자가 '젊은 시'에서 평을 썼던 시인 중에서 기대에 값하거나 기대를 했었는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겁니다. 이들 시인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격려일 것이고 듣기 껄끄러워할 것은 질책일 텐데, 여러 선생님들의 격려도 질책도 다 고마워하지 싶습니다. 저는 해마다 지방 신춘문예와 지방지를 도맡았기 때문에 이후 이분들의 활약상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중 '시평'으로 등단한 조명을 재조명한 것, '시인세계'로 등단한 한우진과 '애지'로 등단한 양해열의 꾸준함은 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조명은 '여왕코끼리의 힘'을 민음사에서, 한우진은 '까마귀의 껍질'을 문학세계사에서, 양해열은 '아, 공중사리탑'을 지혜사랑에서 펴냈는데 시단에서 이런 좋은 시집을 왜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시와 반시'로 등단한 김지유의 '액션페인팅'(천년의시작)과 '즐거운 랄라'(천년의시작)와 '푸른 시'로 등단한 김현욱의 '보이저 씨'(애지)도 시집이 참 좋더군요.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심인숙의 '파랑도에 빠지다'(푸른사상)와 한석호의 '이슬의 지문'(천년의시작), '작가세계'로 등단한 전영관의 '바람의 전입신고'(세계사)도 마땅히 주목되었어야 할 좋은 시집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연과 지연, 혹은 등단지면의 응원을 못 받은 경우가 아닌지, 문학평론가들의 재독을 저는 요구하고 싶습니다.
'젊은 시'에 고등학생이 뽑힌 적도 있었지요. '2012 젊은 시'에 뽑힌 강화고등학교 3학년 이승혁은 <경인일보> 신춘문예 출신인데 소년답지 않은 원숙함이 기억납니다. '2013 젊은 시'에 뽑힌 박혜민은 고3 때 '작가세계'에 가작 입상한 뒤 '용인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는데 숭실대 문창과에 입학했지요. 문창과보다는 다른 과에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개인적인 소회인데, 제가 수업시간에 잡아먹을 듯이 꾸지람을 했던 송승언ㆍ황인찬ㆍ황혜경 등이 시단에서 좋은 활약을 하고 있어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윤설은 2006년 <조선일보><세계일보> 두 군데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된 유망주였는데 희곡 쓰기에 주력하고 있어 약간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고요(웃음).
자. 이제 문혜원, 이재복 두 선생님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평을 쓰시면서 했던 당부가 잘 받아들여져 자기세계를 확보한 경우나 그렇지 않은 경우나 각자 평을 했던 시인들의 후속 작업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문혜원 선생님께서는 전반적인 특징을, 이재복 선생님께서는 웬만한 시인들은 시집을 한두 권씩 냈으므로 시집 중심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문혜원:첫 해에 선정된 문성해ㆍ박후기ㆍ송승환ㆍ장석원ㆍ조동범ㆍ황병승 등은 이미 시집을 두세 권 이상 출간한 중진급 시인이 되었지요. 이 시인들은 등장할 때부터 무서운 신예로 주목을 받았고 그 후에도 꾸준히 탄탄한 시를 보여주면서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주역들입니다. 이는 황병승을 필두로 하는 ‘미래파’ 시인만이 아니라 서정적이며 사회적인 시선을 잘 녹여내는 박후기나 단단한 시적 구조를 바탕으로 해서 여성성의 재발견으로 넘어가고 있는 문성해 같은 시인들의 활동까지를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젊은 시'는 처음에 ‘전위적이고 실험성이 강한’ 시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실험적인 시인들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서정이나 사회적인 실천을 염두에 두는 시인들까지를 두루 포함시켰습니다. 예컨대 첫 해에 선정된 김광선은 등단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사회적 실천성이 강한 시를 쓰고 있지요. 사실상 우선되는 기준은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전위적이고 실험성이 강한’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모순되는 일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것은 전통적인 것을 숙달해서 그것이 자신의 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이것이 얄팍한 테크닉과 진정한 실험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젊은 시'의 시인들은 시대의 유행보다 자신의 개성을 탄탄하게 다져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재복:2005년부터 '젊은 시' 앤솔러지를 냈으니까 이백 명에 가까운 시인들을 우리가 가려 뽑고 또 네 사람이 나누어 평을 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과의 인연이 각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이들을 바라보는 입장은 아마 네 사람이 비슷할 겁니다. 우리가 뽑은 시인들이 잘 나가면 기쁘고 뿌듯함을 느낄 것이고, 생각보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안타깝고 의기소침해 할 겁니다. 후자에 속하는 시인들도 많지만 저는 전자에 속하는 시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리 '젊은 시'의 모토가 젊고 모던한 시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제가 평을 썼던 시인들 중에 여기에 해당되는 시인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최근 우리 문단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주목받고 있는 황병승ㆍ송승환ㆍ조동범ㆍ박후기ㆍ서대경ㆍ강성은ㆍ김안ㆍ김성대ㆍ박준ㆍ황인찬ㆍ이이체ㆍ이혜미ㆍ김승일ㆍ이은규 시인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황병승은 이제 우리 젊은 시, 더 나아가 우리 젊은 시인들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육체쇼와 전집' 등에 이르기까지 거칠고 혼돈스러운 우리 문화의 저변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냄으로써 시대적인 징후의 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징후가 송승환ㆍ조동범 등에서도 엿보이지만 시대적인 징후를 담기에는 그 고민이 좀 더 깊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서대경ㆍ강성은ㆍ김안ㆍ김성대 등은 최근 우리 젊은 시인들 중에서 가장 미학의 전위에 있다고 봅니다. 김성대의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에서 보여준 언어의 소리와 몸짓에 대한 탐색이라든가 서대경이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에서 보여준 세계의 경계에 대한 혼돈, 그리고 강성은이 '단지 조금 이상한'에서 보여주고 있는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언어와, 김안의 새로운 서정에 대한 탐색 등은 분명 우리 시의 한 미적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박성준의 '몰아 쓴 일기'와 김승일의 '에듀케이션', 이이체의 '죽은 눈을 위한 송가', 이혜미의 '보라의 바깥' 등에서 보여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과 구축, 내밀하고 밀도 있는 언어의 미적 놀이 또한 주목에 값하는 성과라고 봅니다. 이들과는 다른 차원에 박후기ㆍ박준ㆍ이은규 등이 있는데 이들의 저변에 흐르는 것은 서정입니다. 그런데 이 서정이 섬세한 감각을 동반한다는 것이죠. 박후기의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이은규의 '다정한 호칭', 박준의 '그녀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등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서정입니다. 특히 박준의 시에서는 ‘가벼운 심연’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서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의 시의 신선함이 있습니다. 황인찬의 '구관조 씻기기'는 최근에 가장 주목한 시집 중의 하나입니다. 뭐랄까? 미감 자체가 독특하다고 해야 하나요. 사물에 대한 깊은 관조가 돋보이는 그런 시편들입니다.
이승하:10권째 ‘젊은 시’인 '2014 젊은 시' 선정 작업을 하고 나서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요 3년, 특히 작년도 문예지와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들의 특징에는 뭐가 있다고 보십니까? 이재복 선생님께서 대표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재복: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해가 갈수록 시가 점점 하향 평균화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중에서 뽑아야 하는 입장은 정말 곤혹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정말로 제 마음에 드는, 다시 말하면 우리 젊은 시의 모토에 맞는 시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2010년 이후부터 급격하게 진행되어 온 것 같습니다. 가령 2005년 우리가 뽑았던 김안ㆍ박장호ㆍ박후기ㆍ송승환ㆍ이현승ㆍ장석원ㆍ장승리ㆍ조동범ㆍ황병승 등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우려스러울 만한 일이라고 봅니다. 해마다 혹은 세대마다 일정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좀 심하다 할 정도로 그 차이가 큽니다. 아마 제 생각으로는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문화의 흐름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매체에 기반한 영상문화란 깊이와 느림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깊고 느린 사색이 아니라 감각과 속도가 지배하는 문화적인 환경 속에 우리 문청들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죠. 그것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가 있어야 하는데 요즘 우리 시인들이 그것을 잘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깊고 느린 사색 속에서 깊이 있고 문제적인 시가 탄생하는 것 아닙니까? 이번 문예지와 신춘문예 당선작들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하향평균화 속도와 감각에 지배된 감성, 이로 인해 시인 특유의 아웃사이더적인 기질과 세계에 대한 지적 모험의 부재 등이 전경화했다고 봅니다. 특히 신춘문예는 그 존폐 여부를 하루빨리 결정해야 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하:이제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시의 영향력 약화는 한국 시단의 현상만은 아닙니다. 그래도 젊은 시인들의 등장과 활약에 기대를 걸게 되는데, 이 땅의 젊은 시인들에게 이 시대의 문학평론가로서 당부의 말씀 한두 마디라도 해주시면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홍용희:시란 기본적으로 생명의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무정한 마당의 돌도 시인이 노래하면 밝은 빛 터의 현존으로 깨어 나오지요. 그래서 시인은 시적 대상의 본성을 물질세계의 어둠으로부터 깨워내어 인격화시키는 주술사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시는 또한 부정의 언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로 인해 깨어난 대상을 통해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대상을 감금시키고 억압시켰던 일상성의 관습적 질서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인은 궁극적으로 혁명가적 속성을 지니기도 하지요. 이쯤 되면, 시인은 참으로 대단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질 만하다고 하겠군요. 시적 출발점에 서 있는 ‘젊은 시’의 주인공들에게 시인의 비장한 사명과 자부심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말을 건네고 싶군요. 시가 왜소해졌다는 지적을 들을수록 말이지요.
이재복: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시인들의 감각이 지나치게 수사적인 기교에 치우쳐 있다고 봅니다. 수사적인 기교가 개인적인 절망이나 시대적인 절망에서 나와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요즘 우리 시인들의 기교는 제도화되고 상투화된 체계 속에서 길들여진 그런 수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사적인 기교에 앞서 세계에 대한 치열한 싸움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 싸움에서 언어가 혹은 수사가 만들어질 때 공통감각이 만들어지고 일정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시 자체보다 시인으로서 위대해야 하고 언어 직전까지 가는 치열함이 전제되어야 좋은 시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시인들 중에는 시를 딜레탕트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것이 마치 지금 이 시대의 시의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딜레탕트한 의식에 함몰되어 버리면 시인은 혹은 시는 더 이상 시인(시)으로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김수영이 이러한 딜레탕트한 시인들이나 문인들에 대해 가진 적대감과 비판의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혜원:앞에서 여러 가지 비판적인 지적을 했지만, 사실 제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격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시를 쓰기 때문에, 그 시를 읽고 반응하는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아직 세상이 살 만한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시인으로서 긍지와 자존심을 지켜가기를 바랍니다.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시를 쓰는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젊은’ 시인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승하:세 분 선생님, 장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가는 빈대떡 집에 가서 막걸리로 목이나 축입시다.
문혜원ㆍ이재복ㆍ홍용희:좋습니다.
(연초인 1월 4일에 만나 20명 시인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다. 우리가 조명하기로 했던 시인 중에는 모 신문사 신춘문예 당선자가 있었는데 당선작에 대한 표절의혹이 선정과 원고청탁이 이루어진 이후에 제기되었다. 네 명 선정위원은 신중히 논의한 결과 작품에 문제가 있음을 직시하였고, 결국 그분을 대상으로 제외시키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부득불 19명만을 모시게 되었다. 앞으로도 '젊은 시'은 시인이 창작행위를 하는 데 있어 순수하지 않은 면이 드러날 때는 엄정한 시각을 갖고 대처할 것임을 다짐해본다.)
- 계간『문학나무』2014.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