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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홀로 문화의 시대] 나 홀로 문화의 시대가 오고 있다
혼족의 시대가 열리다
모둠별 과제를 요구하는 수업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협력하며 배운다는 기대감보다는 낯선 관계에서 비롯되는 불편함과 불확실함이 두렵기 때문이다. 바쁘고 각기 다른 일정으로 함께 모이기도 어렵고, 무책임한 팀원을 만나면 한 학기가 고생으로 점철될 수 있다.
학기말이 되면 무임승차한 수강생을 고발하는 투서가 담당 교수에게 전달되는 일이 흔히 발생한다. 혼자 공부하고 혼자 답하는 시험을 통해 평가받는 것이 학생들에게는 편하고 익숙하다.
‘밥터디’라는 모임이 있다. ‘밥 먹을 때만 만나는 스터디 그룹(공부 모임)’을 뜻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임의 목적이 함께 어울려 공부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이다. 공부는 혼자 알아서 하고 밥 먹을 때만 잠시 만날 뿐이다. 누군가 시험에 합격하거나 취직을 하면 이 모임은 자연스레 해체되거나 다른 사람이 충원된다.
공부와 상관없이 그냥 밥을 먹으려는 밥터디도 흔하게 만들어진다. 어울릴 친구가 없어서, 혼자 식사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밥터디에 가입하는 것이 주된 이유라고 한다. 정기적으로 함께 식사하지만 밥터디 사람들과 친밀한 친구로 발전하는 경우는 드물다.
타인과 어울리지 못하는 삶은 20대 대학생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 ‘혼밥족’(혼자 밥 먹는 사람)과 ‘혼술족’(혼자 술 마시는 사람)의 증가는 한국 사회에서 인간관계의 변화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혼족’(혼자 사는 사람)에 대한 오해와 논쟁도 적지 않다.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피하는 혼족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비사교적이고 비사회적인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인간적인 공동체의 모습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제기된다. 그 반면, 복잡한 대인 관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어서 좋겠다는 부러운 시선도 동시에 존재한다.
혼족이 늘어난 배경을 찾아서
주거와 일상을 먼저 살펴보자. 2015년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1인 가구의 비율은 전체 가구의 27.2%(520만 가구)를 차지한다. 한국인 4명 가운데 1명 이상이 혼자서 취식과 취침을 하면서 살아가는 셈이다. 주목할 점은 가파른 증가 추세이다. 1980년 4.5%, 1990년 9%에 불과했던 1인 가구는, 2000년 15.5%, 2010년 23.9%로 급격히 증가했다. 1990년 이후 25년 사이에 18.2%가 증가한 셈이다. 급격하게 증가한 1인 가구를 통해 홀로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혼족이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혼족의 삶은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일까, 아니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의 구조적 원인이 존재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인이 경험하는 사회적 단절과 고립은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얼마나 심각한 수준일까?
우리가 거주하는 건물의 구조와 배치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류에 영향을 준다. 집과 가옥의 변화를 통해서도 사회적 단절이 증대하는 배경을 찾을 수 있다. 2015년 한국의 전체 주택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60%에 이른다. 1980년대 10%이던 아파트는 지난 30년 동안 가장 지배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인들의 사회적 단절을 증대시켰다.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듯이 한국의 아파트는 이웃과의 만남과 교류를 어렵게 하는 폐쇄형 구조다. 현관문을 닫고 집 안에 들어오는 순간 누군가 집에 찾아오기 전까지 외부와의 교류는 단절된다. 아파트 단지에 살아 본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지인이 사실은 이웃 주민이었던 경우도 있다. 그만큼 한국의 아파트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살더라도 출입구나 동, 단지가 다르면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 형태로 설계되어 있다.
시간 빈곤이 문제다
1인 가구로 살거나 아파트에 살더라도 여유 시간이 충분하다면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시간 빈곤’ 국가이다. 시간의 부족은 타인과의 교류나 교제를 가로막는 주요인이다. 2014년 한국 고용정보원과 미국 레비경제연구소와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의 42%는 시간 빈곤을 경험한다고 한다. 시간 빈곤이란 일주일의 168시간 가운데 생존에 필요한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이 주당 근로 시간보다 적은 경우를 말한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시간 빈곤을 경험하는 주된 이유는 장시간 노동과 장거리 통근 때문이다. 2014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의 평균 근로 시간은 1년에 1,770시간인 반면, 한국은 2,163시간으로 멕시코 다음으로 최장의 노동 시간을 가진 나라다. 통근에 사용하는 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길다.
2016년 OECD 회원국의 직장인들이 통근에 사용하는 시간은 평균 28분에 불과했지만 한국은 58분으로 회원국 가운데 가장 긴 시간을 통근하는 데 할애한다. 장시간 노동에 장거리 통근은 시간 빈곤을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높여서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우려는 경험적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2014년 한국인들의 여가 시간은 하루 평균 4시간가량이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떤 활동을 하며 여가 시간을 보낼까? 여가 시간 가운데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한국인의 여가 시간은 대부분 텔레비전 시청(51%)과 인터넷 검색(12%)에 사용하고 있다.
반면 타인과 함께 사용하는 시간은 43분에 지나지 않으며, 교제 시간도 최근 들어 감소하는 추세이다. 2007년에 여가 활동을 친구나 지인과 함께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35%였지만, 2014년에는 8%에 지나지 않았다. 같은 기간 혼자서 여가 활동을 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44%에서 57%로 증가하였다.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 활동이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함께 보내는 시간도 감소했다. 이와 같이 시간 사용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도 사회적 단절이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는
자발적 결사체와 단체 활동에 대한 장기간 연구를 통해서도 사회적 고립이 관찰된다. 지난 30년 간 진행된 조사에서 한국인의 사회 결사체 참여는 상당히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1980년대 초반부터 실시된 조사에서 노동조합, 정당, 시민 단체, 전문가 협회 등과 같은 결사체에 가입한 한국인의 비율은 10%를 넘어서지 않았다.
결사체 참여는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더욱 낮아지고 있다. 비슷한 기간에 진행된 다른 국가와 비교해 보면 한국인의 자발적 결사체 참여는 상당히 낮은 편이다. 결사체와 단체 참여라는 지표를 통해서도 한국인의 사회적 단절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사체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류 이상의 의미와 결과를 가져온다. 결사체에 가입하고 참여를 통해 사람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며, 정보를 교류하고, 공동의 행동을 기획한다. 때로는 갈등을 해결하고, 타협하는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과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형성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국인들의 자발적 결사체 참여는 매우 낮고, 타인과의 교류도 감소하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향은 한국인들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가지는 신뢰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을까?
1980년대 초부터 전 세계 100개국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세계 가치관 조사(World Value Survey)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하는가?”라는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1982년에 처음 실시된 조사에서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고 응답한 한국인의 비율은 38%였지만, 1990년 34%, 1996년 30%, 2010년에는 26%로 꾸준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2010년 현재 한국인 4명 가운데 3명은 타인을 믿을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한다. 타인에 대한 한국인의 신뢰는 매우 낮은 편이다.
그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신뢰는 지난 30년간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한국 사회의 신뢰가 매우 우려할 만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같은 기간 동안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고 응답한 노르웨이 국민은 74%였고, 스웨덴 국민은 68%였다. 동일한 시기에 일본과 미국의 국민 40% 정도도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응답하였다. 한국은 OECD 회원국 가운데 타인에 대한 신뢰가 아주 낮은 편이다.
이웃과 교류가 적고, 결사체에 가입하지 않으며, 타인을 신뢰할 수 없는 사회에서 이어 가는 삶은 어떠할까? 2015년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평소 이야기할 상대가 없는 한국인이 18%이고, 몸이 아플 때 집안일을 부탁할 사람이 없는 경우는 23%라고 한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에 놓여 급하게 돈을 빌릴 사람이 없는 경우는 50%에 달한다. OECD 주요 국가들은 응급 상황에서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는 경우가 10% 내외에 불과하다. 이러한 국가 간의 차이는 한국 사람들의 삶이 그만큼 외롭고, 서글프며,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국인들은 고립된 삶을 이어 간다. 통계청의 조사에 따르면, 저소득층, 노인, 학력 수준이 낮은 계층에 속할수록 더욱 심한 사회적 단절에 놓여 있다. 한국의 자살률은 지난 15년 동안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를 차지한다. 전체 OECD 회원국 평균의 두 배를 상회하는 자살률은 한국인들의 삶이 그만큼 외롭고 절박하며 이를 해결할 제도적 장치가 취약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취약 계층일수록 자살을 택할 위험이 훨씬 높아진다. 혼밥과 혼술을 개인적 삶의 취향으로만 바라보기엔 한국 사회가 당면한 상황은 너무나 심각하다. 각자도생하여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하루하루는 외롭고 고달프다.
[ 나 홀로 문화의 시대] 나 홀로 시대, 문화인가 문제인가
‘나 홀로’ 문화의 어두운 그림자
한 조사에 따르면, 2025년에는 1인 가구가 30%를 넘어설 전망이다. ‘혼족’, ‘혼밥족’, ‘솔로 이코노미’ 등 1인 가구를 표현하는 신조어가 범람하고 있다. 대가족 제도에서 핵가족 제도를 거쳐 독신의 시대인 1인 가구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흐름이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새롭게 정착될 문화 현상이라는 점이다.
‘문화’라는 말의 가장 폭넓은 정의는 인간 삶의 틀이다. 따라서 문화가 바뀌면, 우리는 격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한때, 우리는 집안 어른이 중심인 대가족 문화 속에서 살았다. 그때는 충효(忠孝)가 가족 공동체의 최고 가치였다. 이어서 부부 중심의 핵가족 문화가 뒤따르며 부부간의 인격적 존중과 자녀 양육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런 뒤 느닷없이 1인 가구 시대가 등장했다. 1인 가구는 독신, 이혼, 사별, 자발적 · 비자발적 자립이나 고립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문화의 급속한 변화는 개개인의 자아 정체성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온다. 어쩌면 500년 넘게 이어 온 조선 시대의 사람들이 훨씬 안정된 문화적 틀 속에서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경제적 · 정치적 여건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 홀로’ 문화는 이제 세계사적 대세이다. ‘나 홀로’ 문화는 서구의 개인화나 개인주의를 거쳐 성립된 문화이다.
개인화는 우리 삶의 울타리였던 지난날 전통과 관습, 기성 제도와 종교 등의 부정에서 성립한다. 지난날의 문화적 틀의 전반적 부정에서 출발한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를 ‘고향 상실’이라 한다. 이제 각자는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살면 된다. 이런 개인화 현상은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에서 도래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문화적 틀이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개인에 대한 존중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오랜 기간 숙성되어 정착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날 아무런 준비 없이 개인주의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 까닭에, 진정한 개인주의가 뿌리내릴 틈도 없이 이기주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인화 시대는 왔지만, 개인화의 주체인 우리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미성숙하다. 그 결과, 사회적 무질서(아노미)상태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논의는 증가 추세에 있는 정신 질환과도 관계된다. 정신 질환의 증대 현상은 많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개인화와 개인주의는 고도의 이타성과 수준 높은 지성을 전제로 한다. 이타성과 지성은 보편적 사회 복지 사회를 실현하는 전제이다. 이 양자는 맞물려 있다. 곧, 혼자 살 수 있는 사회 복지적 여건이 되어야 하고, 이런 여건은 고도의 이타성과 지성을 전제로 하는 동시에, 이타성과 지성을 그 결과로 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 하나 제대로 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나 홀로’ 문화는 도도히 밀려오고 있다.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나 홀로’ 문화를 자립성의 신장으로, 사회적 고립으로, 국가미래의 파탄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논의에는 인간 내면의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들어 있지 않다. 돈을 많이 버는 인기 위주의 스타가 성공의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큰 대가성 없이 일하는 많은 예술인은 불행한가? 경제적 척도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인기 스타는 타인 의존적인 경향이 높은 반면, 가난한 예술인은 자립적인 성향이 높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이어 나갈 때 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갖고 사는가?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는가? 그런 삶에 만족하는가? 마음 편하게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가? 우리는 자기만의 인생을 편안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고 말았다. 외적 척도인 돈이나 미모, 사회적 성공만이 절대시되는 문화적 틀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틀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 계층이 끊임없이 확대되고 재생산된다. 이른바 양극화 현상이다. 한마디로 외적 척도를 절대시하는 경쟁 위주의 사회는 가진 자든 못 가진 이든 상관없이, 내면적 삶의 중요성을 깡그리 망각하는 쪽으로 내몬다.
행복은 안정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자신의 삶을 누리는 데 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유는 자기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다. 「주역」의 점사(占辭)는 길(吉), 흉(凶), 회(悔), 린(吝)이다. ‘길’은 편안한 마음 상태, ‘흉’은 극도의 불편한 마음 상태, ‘회’는 ‘길’ 쪽으로 가고자 하는 불편한 마음 상태, ‘린’은 후회하면서도 고치지 못해 ‘흉’으로 다가가는 불편한 마음 상태를 뜻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회’와 ‘린’의 상태 속에 산다. 어떻게 하면 ‘길’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
‘길’의 마음 상태는 안정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살 때 도달할 수 있는 상태이다. 자기 정체성이 안정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리적으로 살고자 노력할 때일까? 그런데 윤리적으로 살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더 절망감에 빠진다. 곧, ‘린’의 상태에 빠진다. 거기에 교만과 독선이 덧칠해진다. 그렇다면 감각적 즐거움에 따라 살면 될까? 이때 찾아드는 손님은 ‘흉’이다. 곧, 정신적 질환이다.
나머지 대안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사는 것이다. ‘회’와 ‘린’의 상태에 있는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나를 이미 다 알고 계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그럴 때 ‘길’한 마음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마음이 편해지면, 자신과 세계의 모습이 마음속에 저절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고도의 지성인 영성(靈性)에 도달할 수 있다. 고도의 지성은 학력과 별 관계가 없다.
최근, 집사람을 존중하면서 사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기 정체성은 혼자 노력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다. 인간은 이미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래서 우리가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나는 너 속에, 너는 나 속에 들어 있다. 그래서 ‘나’와 ‘너’라는 말보다 ‘우리’라는 말이 인간 실존에 더 맞는 어법이다. 고도의 지성은 이타성과 이미 관계를 맺고 있다.
나도 너도 다 같이 자신에게 솔직해질 때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 나 혼자만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상대에게 편안해지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자신에게 솔직해져서 편안한 상태가 지속되면, 상대도 편안해지는 쪽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나는 전보다 더 편안해진다. 이로부터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은 동시에 나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정식이 성립한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존중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경전은 타인 중심주의의 삶을 보편적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행복해져야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나 홀로’ 문화의 방향성
‘나 홀로’ 문화는 수도원이 아니라 도시에서 형성된 문화이다. 개인주의와 개인화의 토대 위에서 직업의 지속적 불안정성,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 여성의 지위 향상 등이 덧붙어 성립된 도시 문화이다.
스웨덴의 경우 인구 47%가 1인 가구이다. 수도 스톡홀름에서는 60%가 혼자 살고 있다. 스웨덴은 개인주의와 자립을 강조하는 뿌리 깊은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원자화나 사회적 고립을 해소하고 공동체를 강화하고자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그곳에서는 혼자 산다는 것이 자기 혼자 편하게 살자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때로는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은 혼자만의 거주 공간을 갖지만, 동시에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공동 주택을 갖고 있다. 이들은 같이 식사하거나 운동하고 사우나를 하면서 함께 논다. 한마디로 혼자 자립적으로 살 수 있을 만한 지성과 이타성, 그리고 최대의 사회 복지가 구현되어 있다.
6년 전,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1년간 연구만 하며 지낸 적이 있다. 그곳 교수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자기 돈’과 ‘자기 시간’이었다. 이를 침해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옆방 교수도 미리 약속해야 만날 수 있다. 만나도 잠시 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승강기를 타면, 돌아서서 벽만 쳐다보고 있는 교수도 많았다. 같은 층에 살면서도 말이다. 또 식당에서는 말없이 혼자 밥을 먹는다. 그것이 일상이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방식이다. 일본인 대다수는 ‘나 홀로’ 삶을 마치 인생의 목적인 양 여기고 있는 듯했다.
일본의 경우, ‘고독사’(孤獨死)에 놓이는 사람이 1년에 3만 2천 명이라고 한다. 일본의 문화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문화를 자기 방식대로 합쳐 만든 습합(習合) 문화이다.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면, 신도(神道)일 것이다. 신도는 현세 기복적인 샤머니즘에 바탕을 두는 문화이다. 샤머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적인 길흉화복에 대한 관심이 거의 전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상호 존중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부유해도 개인은 가난하다. 사회 복지 이념은 인간 존중보다는 최소한의 생존 확보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했다.
일본의 이 모습이 한국의 미래 자화상이 아닐까? 한국은 젊은이들의 불안정한 취업 구조, 노인 인구의 급등, 현세 기복적 의식 구조 등에서 일본과 닮았다. 게다가 한국은 복지 제도의 측면에서 일본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다. 그러니 한국의 앞날은 일본보다 밝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이성주의적인 유학 전통과 단절되었다. 일제 식민 시대의 문화적 공백, 이어서 서구 사상이 이 땅에 거칠게 밀려왔다. 그리고 서구 사상을 제대로 소화하기도 전에 1인 가구 시대가 되었다.
서구 개인주의의 뿌리는 그리스도교적 이념이다. 그래서 그들의 개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율성의 존중이라는 이념의 실현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서구는 이런 이념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복지 공동체를 실현했다. 하지만 샤머니즘에 바탕을 두는 한국과 일본은 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이념이 없다. 보편적 이념이 있을 때 고도의 지성과 수준 높은 이타주의도 가능하다. 그리고 복지 국가의 실현도 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나 홀로’ 문화는 내용이 텅 비어 있는, 속 빈 강정의 문화가 아닐까?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편치 않아서, ‘내 코가 석 자’여서 ‘나 홀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경제적·정신적 여유가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제 국가도, 교회도, 학교도 바뀌어야 한다. 안정된 자기 정체성의 확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 인간의 자율성 신장 등을 교육해야 한다. 국가나 교회나 학교는 즐거운 모임의 장을 열어 주어야 한다. 더불어 사는 행복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이때, 보편적 사회 복지의 사회도 무리 없이 실현된다.
나의 행복은 우리가 같이 행복할 때나 가능하다. 지옥은 타인과 고립되어 사는 것인 반면에 천국은 타인과 연대감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이는 ‘홀로’ 사는 사람이나 더불어 사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린 ‘나 홀로’ 문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나 홀로’ 문화는 문제를 넘어 화(禍)를 불러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갈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
[ 나 홀로 문화의 시대] ‘따로 또 같이’ 문화를 위한 교회
요즘 누리 소통망 서비스(SNS)나 연예 프로그램에서 자주 회자되는 용어로 ‘혼밥’(혼자 먹는 밥), ‘혼술’(혼자 마시는 술), ‘나 혼자 산다.’ 등이 있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1인 가구 생활자들의 생활 풍속을 드러내는 용어들이다. 결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비혼, 이혼 등), 개인 중심 가치관의 가속화, 그리고 고령화 등의 요인으로 1인 가구가 늘면서, 가족의 형태와 기능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 이는 한국만이 아닌 세계적인 변화상이다.
가톨릭 신자의 상황도 전체 통계 수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1인 가구 맞춤형 소형 가구나 생활용품, 간편 식품 등 ‘솔로 이코노미’가 발달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자 1인 가구를 부추기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2015년 기준 단독 가구는 총 506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26.5%에 해당한다. 네 가구 중 하나는 1인 가구인 상황이다. 2000년에는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의 15.6%였는데, 15년 만에 두 배 정도 증가한 수치다.
1인 가구 중에선 30대가 18.3%(95만 3,000가구)로 가장 높고, 70세 이상이 17.5%(91만 가구), 20대가 17.0%(88만 7,000가구)이었다. 남성(49.8%, 259만 3,000가구)과 여성(50.2%, 261만 가구)의 비율은 비슷했다. 남성 가운데는 30대(23.5%) 1인 가구 비율이 가장 높았고, 여성은 홀로 사는 노인 인구가 많아서인지 70세 이상(27.6%)이 높았다.
1인 가구의 비율은 앞으로도 꾸준히 증가해서 20년 뒤에는 34.3%에 다다를 것으로 예측된다. 물론 선진국 대부분의 1인 가구 비율은 이미 30%를 훨씬 넘는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1인 가구 비율 30% 초과는 꽤 긴 세월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한국 사회의 1인 가구 증가율은 지나치게 빠르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혼밥이나 혼술이 문제인가
최근에는 혼밥이나 혼술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해 ‘사회적 자폐’라고 운운하는 논쟁도 벌어졌다. 청년 1인 가구 증가를 ‘N포 세대’의 상징으로 보고, 청년 세대의 열악한 현실을 걱정하면서 비롯된 논쟁일 터다. 그런데 혼자 먹고 마시는 밥이나 술, 혼자 놀기를 즐기는 현상을 ‘문제’로만 볼 일은 아닌 듯하다. 필자 같은 386세대 가운데 혼자 밥이나 술을 해결하고, 혼자 영화 감상을 즐기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본인은 고사하고, 비슷한 또래의 사람(특히 남성)이 배우자 없이 아이들만 데리고 와서 밥을 먹는 일에 대해서조차 이러쿵저러쿵 편견의 날개를 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 면에서 특히 청년 세대들의 혼술이나 혼밥은(사정이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자기표현이 정확하고 남의 눈치 안 보는 당당한 모습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문제는 혼밥이나 혼술이라는 1인 가구의 피상적인 면만 바라보는 태도로부터 한 걸음 더 파고들어, 1인 가구가 체감하는 물질적, 사회적 고충은 물론 정서적 고충까지 들여다보고 어떤 대처가 필요한지 연구하는 노력 여부다.
청년들의 팍팍한 삶은 혼인 연령이 갈수록 늦어지고, 미혼 또는 비혼의 청년들이 늘어 간다는 사실로 반증된다. 몇 년 전부터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30-40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 사목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교구마다 ‘선택’(Choice)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마저도 35세 미만으로 연령 제한이 생겨, 35세 이상의 청년을 위한 프로그램은 마땅히 찾기 어렵다.
9월 2일부터 토요일마다(오후 7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35-45세의 기혼(미혼)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늘 푸른 청년’ 미사를 시작한다는 고무적인 소식이 들린다. 일시적인 행사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청년 모임의 장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또 혼인했든 하지 않았든, 또 연령과 무관하게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도 절실하다.
가정 사목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016년에 발표한 결혼과 가정의 문제에 관한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은 젊은이들이 혼인을 꺼리게 된 추세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다양한 가정 형태에 대한 사목적 배려가 담겨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교황님이 가정을 대하는 교회의 방식이 오늘날의 위기 상황을 일으키는 데 일조했다는 점을 인정하시면서, 먼저 교회가 반성해야 할 점부터 제시하셨다는 점이다(36-37항 참조).
첫째, 혼인에 대해 유독 자녀 출산의 의무만을 강조해서, 사랑을 키워 나가라는 부르심과 상호 도움의 이상이 가려졌다.
둘째, 혼인을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인위적인 신학적 이상, 곧 실제 가정의 구체적 상황과 현실적 가능성에 동떨어진 것으로 제안했다.
셋째, 은총에 열려 있도록 권장하지 않은 채 교리적 · 생명 윤리적 · 도덕적 주제들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교회가 이미 가정에 충분히 도움을 주고 부부 유대를 강화하며, 부부가 함께하는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넷째, 혼인을 개인의 성장과 완성의 역동적 여정으로 제시하기보다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짐으로 더 많이 제시했다.
이런 솔직한 자기반성 뒤, 교황님은 혼인과 가족의 문제를 추상적 사변이 아닌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풀어 보려는 방식을 준비하신다.
「사랑의 기쁨」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교황님이 통상적인 가정 상황에서 조금 빗겨나 있는 사람들, 예컨대 ‘사회적인 혼인 계약을 맺은 이들, 이혼하고 재혼한 이들, 또는 단순히 동거하는 이들’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신 점이다. 이런 상황들을 ‘irregular’로 지칭하시면서, 이들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틀에 맞추려 하지 말고, 사목적인 식별을 우선하자고 제안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기쁨」 한국어 번역본에는 ‘irregular’가 ‘비정상적’으로 번역되었는데(78항, 296-305항), ‘irregular’ 가정의 상황을 ‘비정상’으로 지칭하는 게 온당한지 의문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양친과 자녀가 함께 생활하는 가정만이 ‘정상’(normal) 가정이고, 편부모(single parent), 조손 가정, 혼합 가정, 입양아를 키우는 가정 등을 ‘비정상’(abnormal) 가정이라고 지칭하다가, 최근에는 가족 구조에 관해 정상이나 비정상 등의 차별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마 교황님도 이런 경향을 의식하여 조심스럽게 선택하신 용어가 아닐까? 또 부모와 자녀로 구성되며 신앙생활을 잘하는 가족을 ‘성가정’으로 지칭하는 교회의 태도로부터 1인 가구들이 느낄 소외감을 생각한다면, 용어 선택 하나에도 더 세심한 주의가 요청된다.
‘따로 또 같이’ 문화를 지향하는 교회
1인 가구 500만 가운데, 20-30대 청년층이 3분의 1이 넘는 35%를 차지하고, 20% 가까이 차지한 1인 가구는 홀로 사는 노인층이다. 특히 노년층과 남성 장년층의 자살률이 더욱 증가하는 상황을 보면, 장·노년층 1인 가구의 삶은 앞으로 더욱더 심각한 사회 문제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지자체마다 장년층 이상의 홀로 사는 남성을 대상으로 한 생활 지원 프로젝트(경제·사회·정서적 안전망)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노년층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어떨까? 일부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노인 사목’은 교회가 가장 손대기 힘들어하는 부문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실제로 평일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 절반 이상이 60대 이상인 본당이 많고, 본당에서 갖가지 활동에 참여하는 이른바 ‘열성’ 신자들이 고령화되어 가는 추세지만, 교회가 노년층(홀로 사는)의 현황을 파악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특히 가부장적이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한국 사회에서 홀로 사는 장·노년 남성 신자들은 대부분 교회와 담을 쌓고 있는 상태일 것으로 추측된다. 나이 듦을 일종의 ‘질병’으로, 노인의 존재를 ‘사회적 부담’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어떻게 전환해 나갈지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시급하다.
혼자 살든 여럿이 살든 누구나 가정 공동체를 벗어나 살 수 없다. 따라서 혼인과 가정에 관한 교황님의 권고는 신자 개개인과 가정 관련 사목자 모두를 향한다. 1인 가구의 급증은 말할 것도 없고, 낮은 혼인율과 출산율, 높은 이혼율, 노인층과 장년층 자살의 증가 등, 한국의 가정은 불안정한 상태를 넘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불안정한 사회 속에 존재하는 한국의 가정은 ‘불안정한’ 가정들이 ‘일반적’(regular)이라고 말해야 할 지경이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교회가 이런 현실을 구체적으로 자각하고 몸으로 나서서 살피는 실천이 긴요하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많은 우리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의 기쁨」, 49항).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회의 사명은 종종 야전 병원의 사명과 비슷하다.”( 「사랑의 기쁨」, 291항)고 말씀하신 것은, 세계 각지의 가정 상황이 말 그대로 전쟁터 한복판에서 피 흘리고 있는 환자들을 위한 치료소에 비유될 지경이라는 현실 진단에 기초한다. 또 교황님은 “가정은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기회”( 「사랑의 기쁨」, 7항)라고도 말씀하신다.
혼자의 삶을 즐기는 것처럼 보여도 너무도 자주 외롭다고 하소연하는 청년에게도, 여럿이 살지만 각자의 방에서 SNS로나 소통하는 가족들에게도 채워지고 치유되어야 할 부분은 있게 마련이다. ‘따로’도 괜찮지만, ‘어울려’ 지내는 일에도 스스럼없는 사람이 되도록 격려하고 동반하는 교회, ‘따로 또 같이’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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