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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얼마전 박정희와 박근혜에 대한 쇼킹한 증언을 하여 체포당한 조웅 목사의 정보라인이었던
문명자 기자의 취재 파일(단행본) 전문(全文)인데 분량이 많은 관계로 편의상 1, 2편으로
나눠 게시합니다.
1편(1~3부 수록), 2편(4~7부 수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문명자 지음
- 백악관 출입기자 문명자의 40년 취재파일
4부 박정희의 비자금
제 3장 망명 중앙정보원 김상근, 박정희에게 사기친 '로비스트' 김한조
워싱턴 주재 중앙정보부원 김상근의 망명을 주선하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에는 몇 명의 한국
'로비스트'들이 등장한다.
박동선. 김한조. 수지 박. 톰슨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80년대에 한국의
여러 기자들이 기사를 쓴 바 있다. 최근에는 본인들까지 나서 자기네 활동의 정당성을 필설로
주장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들의 진면목은 모엇일까.
그들의 활동을 조사하기 위해 열렸던 미 의회 외교위원회 국제관계소위원회(일명 프레이저위원회)에서 76년 미국에 망명한 전 중앙정보부 요원 김상근은 일명 '백설작전'과 김한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74년 9월~75년 6월 사이 나는 김한조에게 한 번에 30만 달러씩 두 번에 걸쳐 60만 달러를 전달
했다. '백설작전'이란 한국의 대미 로비활동을 위해 서울 중앙정보부의 양두원 실장이 외교행낭
으로 자금을 보내오면 내가 김한조에게 그 돈을 전달하고 김은 그 돈을 가지고 미국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공작을 한다는 것이다."
주미 한국대사관 김상근 참사관이 미국에 망명한 것은 76년 11월 26일의 일이다. 직함은 참사관
이었지만 그는 대사관에 파견된 중정 요원이었다. 그는 왜
망명했는가.
당시는 76년 10월 24일 [워싱턴포스트]의 코리아게이트
첫 보도 이후 미국 언론에 한국 관련
보도가 연이어 터지고 미 의회에 조사위원회가 구성되던 비상한 시점이었다. "이런 사태하에서
주미대사관은 대체 뭘하고 있는가" 하는 불호령이 매일 본국으로부터 떨어지고 있었다.
급기야 청와대 정무 1수석비서관 유혁인이 주미대사관에 급파돼 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그간 '백설작전'에서 김한조를 담당해 온 김상근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 희생양으로 만들기
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김상근을 동정한 누군가가 그 사실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안 그래도 김상근은 백설작전을 자신에게 지시한 양두원 중앙정보부 실장이 11월 9일 해임된데다 11월 23일자 [뉴욕타임즈]에
'김상근 서울 소환설'이 보도되는 등 자신을 둘러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불안에 떨고
있던 참이었다. 김상근이 내 사무실로 급히 전화를 걸어 온 것이 바로 그 때였다.
"문 여사님, 한국에서 나를 잡아가려 합니다. 망명할 길을 주선해 주십시오."
그는 벌벌 떨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중정의 생리를 잘 아는 그로서는 본국으로 돌아가면 어떤 일이 신변에 닥칠지 훤하게 예상하고 있었다. 김상근은 73년 주미대사관 이재현 공보관장의 망명 절차를 주선해 준 것이 나라는 사실을 알고서 마찬가지로 내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하긴 필자 역시 73년 11월 한국 중앙정보부의 체포 위협을 피해 미국에 망명했던 동병상련의 경험을 가진 처지였다. 평소에 얌전한 선비 같던 김상근과, 그와는 대조적으로 괄괄한 경상도 여자인
그의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천상 이번에도 내가 도울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리아케이트 보도 과정에서 미국 언론들은 김상근을 '동양의 제임스 본드'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아마 그를 집접 만나 보지 못해서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는 천성이 얌전한 선비 타입으로,
서울대 중문과를 나와 한문과 중국어에 능했다. 6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구직난이 심각했다.
그래서 어학 실력이 뛰어난 일류대 출신의 많은 청년들이 높은 보수와 안정된 근무조건에 끌려
61년 중앙정보부 설립 당시 그 곳에 연구직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흔히 중정 요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도 당시의 중앙정보부에는 많이 있었다. 김상근 참사관의 동기로서 중앙정보부 LA책임자로 있던 이아무개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백두진 국회의장이 LA에 있는 자기 딸에게 전해 주라면서 장농, 병풍 등을 외교행낭 편으로 부쳐오자 "외교행낭이 자기 집 우체통인가"라고 분개하며 물건들을 몽땅 한국으로 돌려 보냈
다가 목이 잘렸다.
김상근도 61년 중앙정보부에 연구직으로 들어갔다가
70년 주미대사관에 부임해 와서 뜻밖에 정치공작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김상근에게 대답했다.
"FBI에 연락해서 신변 보호를 요청할테니 안심해요. 그러나 당신이 정치적 이유로 망명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모든 증거서류를 미리 옮겨 놓으세요. 미국에서는 증거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그리고 당신 가족의 망명에 내가 관련된 사실을 절대 공개하지 말아 주세요."
김상근이 김한조에게 돈을 전달하고 받은 영수증 등 백설작전과 관련된 모든 서류들을 챙기는 동안 나는 김상근의 망명 추진을 위해 FBI와 미 국무성의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김상근과 그의 가족이 무사히 FBI의 보호하에 들어갔다고 통보 받은 후 나는 타이슨스 코너에 있는 김상근의 집에 전화를 걸어 봤다. 전화를 받은 내가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FBI 요원이었다. FBI측은 김상근 일가를 모처로 옮겨 놓고 집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모든 절차가 마무리된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지미 카터 대통령 당선자의 고향이 플레인스 조지아로 숨어 버렸다. 우선 코리아게이트 보도에 열을 내고 있는 미국 언론들의 추적을 따돌려야 했고, 다급해진 한국 중앙정보부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카터 대통령 당선자가 플레인스 조지아에 머물며 집권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악관
기자단도 플레인스 조지아의 베스트웨스턴 호텔에 진을 치고 취재중이었다. 그럼에도 일부 미국
언론들은 독자적으로 취재해 "김상근을 망명시킨 것은 쥬리 문"이라고 보도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김을 망명시킨 것은 한 한국인 저널리스트"라고 썼고 [이브닝 선] 지는 아예
내 이름까지 밝혀 버렸다.
김상근 참사관이 FBI의 보호하에 들어간 후로는 나도 그와 접촉할 수가 없었다. FBI가 제공한 안가에서 개인교사를 데려다 놓고 영어를 배우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는 중국어 전공자로 영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 김상근이 프레이저청문회에 나와 증언한 이후 나는 그를 만난 일이 없다. 당시 미국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분석관이 필요했던 상황이었으므로, 그를 교육시켜 중국에
파견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서 추방된 외교관 1호' 워싱턴 중앙정보부 공사 양두원
그러면 김한조란 대체 어떤 인물인가. 그를 박정희에게 소개한 것은 바로 육여사였다.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 김영희가 김한조를 '한 해 2천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로
집중 조명한 특집기사가 발단이 된 것이다. 항상 여러 신문을 읽고 유익한 기사가 있으면 남편에게 브리핑하는 육여사가 이 기사를 보고 "여보, 재미교포 중에 이렇게 성공한 사람이 있대요" 하고
전하자 박정희가 "그래? 한번 만나 볼까" 했다는 것이다. 박정희로서는 내심, 한 해에 2천만 달러나 버는 교포라니 정치자금이나 좀 받아 볼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74년 들어 미국 의회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1억 달러 가까이 삭감하면서 박정희에게 인권개선 압력을 넣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그 동안 '민간 로비스트'로 기용해 온 박동선은 그런 상황을
개선 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 커녕, 지나친 돌출 행동으로 미국 조야의 의심을 사서 오히려 한국 정부에 손해를 끼치고 있는 판이었다. 박정희는 새로운 로비스트를 필요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한조를 기용하는 일에 다리를 놓은 것이 양두원 중앙정보부 기획실장이었다.
그는 73년까지 주미대사관 공사(중앙정보부 지국장)로 있었는데 '미국에서 추방당한 외교관 1호'
였다.
양두원이 미국에서 추방당한 사연을 알아보자.
양두원은 워싱터 주미대사관에 중앙정보부 공사로 주재하면서 교포 사회의 반 박정희 운동세력들
을 뿌리뽑는 공작을 주로 펼치고 있었다. 그는 이상호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는데, 그의 수법은 60년대 한국에서 민주인사와 학생들을 다루던 방식과 다름이 없었다.
그는 유신반대 시위에 참여하는 교포들에게 "죽인다 살린다"하는 정체 불명의 전화를 걸어 불안하게 하는가 하면, 유학생들에게는 간첩혐의를 씌우는 식으로 협박했다. 그렇게 당한 사람 중 대표적인 이가 유병환 박사(농학)다. 그는 호남 출신으로서 김대중 씨가 73년 일본에서 납치되기 전 미국에서 유신 반대운동을 전개할 때 적극 참여했다. 그러자 양두원은 유 박사가 서울에서 미국에 올 때 베를린을 경유해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베를린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때 북한 대사관에 갔다 온
사실을 다 알고 있다. 지금 너는 북한의 지령을 받고 반한 활동을 하는 것이다"라고 윽박질렀다.
심지어 73년 5월 김대중 씨가 LA 컨벤션 센터에서 강연회를 열었을 때에는 그 지역 폭력조직의
일원으로 재미교포연합회장이라는 거창한 직책을 내걸고 있던 이민희 등을 사주해 강연장 2층에
토마토케첩 병을 박스로 쌓아 놓고 강연회를 방해 하려고까지 했다. 이민희는 중앙정보부의 자금을 받아 미국 전역의 한인회 행사에 참여하고, 선거 때에도 중정의 자금을 받아 미국 전역의 한인회
행사에 참여하고, 선거 때에도 중정의 자금 지원으로 연합회장직을 유지하고 있던 자였다.
결국 주최측인 한민통 의장 김재준 목사의 요청에 따라 경찰이 출동했다. 허가받은 집회를 폭력으로 방해하려 한 이민희 등은 출동한 경찰에 연행되었다.
그런 일이 발생할 때마다 나는 국무성 기자회견 때 중정의 불법적 활동에 관한 질문을 던져 사태를 문제화 했다.
"미국 내에 주재하는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이 시민권자는 물론이고 한국이 영주권자, 체류자, 유학생들을 공갈 협박하고 이들의 허가받은 집회를 폭력으로 제지하려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국무성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미국 정부는 그들의 안전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대변인은 대게 "그게 사실이라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변한다. 그런데 기자회견에서 일단 질문이 나오면 국무성 대변인은 반드시 그에 대해 어떤 사후조치를 취했는지를 밝히게 되어 있다. 곧 FBI가 "한국 중앙정보부로부터 공갈. 협박. 테러 등 어떤 종류의 피해라도 당한 사람은 모두 신고하라"고 발표했고, 그 결과 피해 사례가 속속 입수되었다.
[조선일보] 기자를 하다가 LA에 정착한 김운하는 훗날 프레이저 위원회에서 당시 그가 FBI에
신고했던 피해 상황을 다시 한 번 증언했다.
"한국 중정의 활동 때문에 로스엔젤레스 시장은 톰 브래들리가 아니라 한국 총영사입니다."
그는 교포신문 [뉴코리아]를 발간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보장을 주장했는데, 한국 총영사 박영은 그에게 "한국 정부를 계속 비판하면 보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고 한다.
실제로 [뉴코리아]가 비판을 계속하자 박영은 이 신문의 수많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해 광고를 해약시켜 버렸다.
그 후 김운하는 한 중정 요원으로부터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하라는 최후의 통첩을 받았다.
첫째는 비판을 중지하고 한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것.
둘째는 신문사를 팔거나 폐업하는
것.
셋째는 보복을 당하는
것이었다.
김운하가 이 통첩을 무시하자 중정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그 결과 친척. 친지들이 멀어져 갔고 신문사 직원들은 사직했으며 새로운 직원도 구할 수 없었다. 김운하 부부는 자신들만의 힘
으로 그 신문사를 꾸려 나가야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반유신 교포신문을 발행했던 송선근도 이와 비슷한 일을 겪어야 했다. 그가 한국 정부 비판을 계속하자 총영사관의 중정 요원 임만성은 신문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특히 송선근은 프레이저위원회에서 76년 한국인 거주지 베이 지역의 관리 선거 유세 기간 중 발생한 사건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저는 선거 전날 밤 한국 영사관의 지원을 받고 있는 후보자들의 불법행위를 적발하기 위해 카메라를 가지고 영사관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중정 요원 임만성이 저를 발견하고는 자기 차로 제 차를 들이 받으려 했습니다. 잠시 후에 그는 제 친구이자 그의 친구이기도 한 정태봉에게 '송선근이를 없애 버리겠다'고 얘기했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송선근은 광고해약 사태로 신문 발간을
중단해야 했다.
시카고의 제화상인 조병웅은 중정 요원들에게
"반유신 운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한국에 있는 당신 가족들이 해를 입을 것이고, 특히 귀국중인 부인이 다시는 미국에 오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
당했다. 실제로 그의 부인은 전화로 "중정에 끌려가 심문 받았다. 무서워 도저히 못살겠다. 당신이
반정부 운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선언 했다 한다.
또 반유신 시위에 참여했던 많은 한국 유학생등은 주미대사관 교육담당 파견관 강경구로부터
"시위에 참여하면 한국에 돌아가서 취직하기 힘들 것"이라는 협박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이 중 특히 김대중 씨 강연회를 폭력으로 저지하려 한 사태는 국무성 내에서도 크게 문제시 되었다. 73년 8월 17일자 국무성 비망록에는 "이상호 공사가 워싱턴에 남아 있는 한, 그는 계속적으로 한국 교포사회에서 분쟁과 미국에 대한 방해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73년 12월 국무성은 최초로 이상호 즉 양두원이 귀국해서 오히려 기획실장(이후에는 중정 차장보)으로 승진해 워싱턴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김한조와 박정희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나는 [중앙일보]의 김한조 기사를 보고 기가 막혔다. 그래서 김영희 특파원에게 물었다.
"당신 김한조가 한다는 화장품 회사에 가 봤어요? 그 사람, 2천만 달러는 커녕 하루에 1달러나
버는지 몰라요. 현재 미국의 우리 교포 중에 2천만 달러 수입을 올리는 사업가는 아무도 없어요. 대체 그 사람 누구한테 소개 받았어요?"
-"전에 이재현 공보관장(73년 주미대사관 근무중 미국에 정치망명)이 소개해 준 사람이라 믿고
썼는데요?"
결국 이 기사로 인해 김한조는 일약 박정희의 눈에 띄어 한국에 갈 때마다 청와대에서 박정희 가족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박정희가 피아노를 치면 자기는 노래를 불렀다고 자랑할 만한 깊은 관계까지 맺게 되었다.
듣고 보니 이재현 공보장관이 김한조를 김영희 기자에게 소개하게 된 경위도 짐작이 갔다. 김한조나 '코리아게이트의 주역'인 박동선 같은 부류의 인간들의 행동방식은 대체로 비슷하다.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한국의 국경일이나 경축일을 맞아 대사 주최로 파티라도 열리면 초청장도 없이 들어와서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고 자기 PR에 열을 올리는 것이 바로 김이나 박과 같은 사람들이다.
내가 김한조라는 사람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의 그 같은 활동(?) 때문이었다. 김한조는 50년대 후반 도미한 미국 시민권 소지자로서 워싱턴 지역에 사는 무명의 교포 상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75년 초부터 주미 대사관에서 열리는 파티마다 참석해 거드름을 피우는 등 수상한 점이 많았다.
당시 박동선 사건을 조사중이던 나의 취재망에
느닷없이 김한조라는 이름이 등장했던 것도 그 무렵이다.
나는 김한조의
사기 행각을 직접 목격한 일이 있다.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1600번지에 있는 백악관에서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산 스시'라는 유명한 불란서
요리집이 있다. 그 곳은 워싱턴에서 가장
유명한 불란서 요리집 두 곳 중 하나로 키신저를 비롯한 역대 미국 고위 관리들이 드나들었고 백악관 보좌관들이 기자들과 인터뷰할 때 단골로 들르는 곳이다.
하루는 내가 CBS 앵커 마빈 칼브와 함께 산 스시에 갔는데 뜻밖에 김한조 부부가 레스토랑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다가 마빈에게 반갑게 "하이" 하는 것이었다. 자리를 잡은 후 마빈이 나에게 물었다.
"저 코리언은 내가 점심 먹으러 여기 올 때마다 꼭 저 자리에 앉아 식사하면서 '하이' 하고 인사
하는데 저 사람이 누군지 아니?"
듣고 보니 뻔했다. 미국 사람들은 낯모르는 사람이 "하이" 해도 으레 웃으며 "하이" 하고 답례한다. 이를 노리고 김한조 부부는 매일 산 스시의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점심 식사를 하면서 테이블 옆
으로 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백악관 거물들이나 동행한 기자들에게 아는 척을 했던 것이다. 한국에
서 온 사람들이 김한조 옆에 있었다면 사기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나는 마빈에게 말해
주었다.
"사기꾼이다. 조심해라."
미국인들은 낯보르는 사람에게도 쉽게 웃음을 보이고 건들건들해서 사귀기 쉬워 보이지만, 어떤
이유로든 한번 상대를 불신하게 되면 차갑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데 김한조는 다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인사를 건네 왔다. 그러나 김한조의 웃는 얼굴을 대하는 마빈의 얼굴은 완전히 얼음장이었다. 미국에서 사기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나는 77년 미 하원 윤리위원회에서 증언하던 김상근 참사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한국에서 외교행낭 편으로 돈 30만 불을 보내왔을 때의 일입니다. 나는 지시대로 그 돈뭉치를
김한조의 집에 가지고 가서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내가 얼마라도 떼먹었을까 싶어서
김한조 부부가 응접실에다 1백불 짜리 지폐 30만 불을 쌓아놓고 한 장 한 장 침을 묻혀 가며 내 앞에서 세는 걸 보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 조국에는 아직도 도시락을 못 싸가지고
학교에 가는 결식아동들이 숱하게 있는데.."
그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김한조에게 갖다 준 돈이 총
60만 불이라고 밝혔다.
그러면 김한조는 이 돈을 가지고 한국의 국익을 위해 어떤 로비를
했는가.
김한조가 지금도 자신의 '로비 업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뉴욕타임스] 75년 1월 8일자 초빙
논설란에 박정희를 찬양하는 논설을 게재한 사실이다. 이것은 어떤 쟁점에 대해 찬반 양론을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미국 신문들의 전통에 따라 당시 강력한 박정희 비판 논설이 계속 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실어 준 것에 불과했다. 어쨌든 이 같은 '성과'는 박정희의 중앙정보부를 고무했고 김한조의 사기 행각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김한조의 핀들리 대학 동창으로 가이어란 사람이 있다. 74년 당시 오하이오 출신의 공화당 초선
의원이었다. 그는 김한조가 의회 로비를 한다고 설치게 된 계기가 된 사람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면 국회의원들을 백악관에 초청해 파티를 연다. 74년 8월 사임한 닉슨의 뒤를 이어 포드가 대통령에 취임한 수 열린 파티에 가이어가 김한조를 데려갔는데, 이것을 가지고 김한조는
자신이 백악관과도 통한다고 한국측에 과시하고 '로비스트'를 자청했던 것이다.
김한조는 가이어에게 "박정희는 한국의 안보와 경제 발전을 책일 질 수 있는 유일하고 훌륭한 지도자다. 미국은 한국의 혈맹으로서 한국의 안보를 위해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켜야 한다"라는 요지
의 발언을 국회 본회의장에서 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는 라이샤워 교수(하버드 대학)등 미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이 [뉴욕타임스] 칼럼 등을 통해 박정희를 독재와 인권탄압을 자행하는 악마라고 질타하던 때였고, 미국 의회 역시 박정희의 인권탄압을 문제삼아 군사원조를 삭감하는 결의안을
통과 시킨 바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본회의장에서 박정희 지지 연설을 하기가 창피했던 가이어는 연설도 안 하고 하원 국회의사록에다 김한조가 요청한 발언 내용만 올려 놓았다. 보통은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해야 그
내용이 의사록에 기록되지만 의원이 의회기록실에 요청하면 희망하는 발언 내용을 의사록에 올려 준다. 김한조는 이것을 들고 박정희에게 가서 자신의 '업적'을 선전하는 데 열을 올렸다. 외무부에도 미국 의회 담당이 있어 주미대사관을 통해 미의회에서 있었던 한국 관계 찬반 발언에 대해서는 모두 청와대에 보고하게 되어 있다.
어쨌든 박정희로서야 허구한 날 미 의회에서 독재와
인권유린으로 난타만 당하던 처지에 미국 국회의원이 본회의장에서 자신을 극구 칭송하는 연설을 했다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가이어는 가이어대로 그런 식의 어렵지 않은 '친한' 활동을 통해 적지
않은 돈을 챙기고 한국에 갔다 하면 주지육림에 빠질 수 있었으니 김한조의 요청을 사양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국회의사록에 올려놓은 가이어의 박정희 지지 발언 같은 것이 실제로는 미국의 대한정책이나 박정희 정권을 보는 미 의회의 시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75년은 미국 내에서 한국 정부가 저지른 불법행위들이 미 의회에서 줄줄이 폭로되던 해였다. 75년 6월 상원 국제관계소위원회 산하 '다국적기업소위원회' 청문회에서 걸프 사 사장은 "한국 정부의
압력으로 67년에 1백만 달러, 71년에 3백만 달러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고 증언했다. 6월 10일에는 73년 망명한 전 주미대사관 공보관장 이재현이 '인권문제 청문회'에서 "한국 중앙정보부가
미국 의회 지도자들을 매수하려 했으며 김동조 주미대사가 의회를 방문하기 전에 1백 달러짜리
지폐들을 봉투에 넣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이어의 박정희 지지 발언이
과연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김한조는 김상근에게 "가이어 의원을 통해 곧 세네타 맨스필드 상원의원(민주당 상원
원내총무)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말고도 다른 중진 상원들을 만나려면 상당한 기부를 해야 하는
데 그를 위해 내 돈을 10만 불이나 썼다. 이런 비용은 한국에서 줘야 하는것 아닌가" 라면서 계속 추가 자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의회와 법무성의 조사 결과 김한조가 의원들에게 제공한 돈은 거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그가 김상근 등으로부터 넘겨받은 한국 정부의 로비자금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 답의 일단은 코리아게이트 사건에 대한 [워싱턴 포스트] 보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보도에
따르면, 워싱턴의 고급 가구점인 '슬론'의 지배인이 [워싱턴 포스트]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김한조라는 코리언 아메리칸이 무려 3~4만 불 어치의 가구를 한꺼번에 현금으로 사 갔다. 우리도 깜짝 놀랐다."
1천 달러짜리 가구라도 3년 할부로, 그것도 신용카드로 사는 것이 미국 사람들의 소비 패턴이다. 제 아무리 백만장자라 해도 3만 불, 4만 불을 현금으로 척척 지불하는 미국인은 없다.
그러니 김한조의 행동이 얼마나 놀라웠겠는가.
내가 김한조라는 인물의 사기 행각을 파헤치는 기사를 한창 쓰고 있던 때인 76년 6월경, 김한조는 [중앙일보] 김영희 기자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필자에게 전해 왔다.
"문명자란 여자 왜 그리 까불어. 그 여자 나의 미국 전위대들의 실력을 모르는군. 더 이상 나를
건드리면 가까운 장래에 눈물을 찔찔 흘리면서 미국에서 강제 추방될 테니, 그 때 기념사진 찍을 준비나 하라고 전달하시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김한조의 사기 행각을 어느 정도 눈치 챘던 것 같다. 나는 10.26 이후 미국에 온 김부장의 동서 최세현 전 주일공사로부터 "김한조가 한국에 와서 30만 달러인가를 받아 가는데 김 부장이 영수증을 쓰라고 요구했다. 김한조가 이에 반발해 일대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김한조가 한국 정부로부터 받아 챙긴 돈의 총액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김한조는 결국 김상근이 제시한 영수증이 물증으로 채택되어 의원매수 공모죄와 위증죄로 77년
9월 27일 기소되어 78년 4월 8일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뒤늦게야 그의 사기 행각을 눈치챈
박정희 역시 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사기꾼과 떳떳하지 못한 거래를 할 때
결국 누가 손해를 볼 것인지는 뻔하다. 그 손해는 고스란히 한국 국민에게 전가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