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서론 ( 3 )
(3) 바울의 근심
* 롬 15: 30-31 - 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① 유대인들과 관련된 바울의 두려움과 바울의 인생 전환
이전-유대인 : 율법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판단함.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함.
* 갈 3: 13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갈 1: 16-17 –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② 인생 전환 이후
유대인과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반역자, 율법 파괴자. -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운동 마감, 헌금 전달 여행에 참여.
* 갈 2: 10 -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 고전 16; 1-4 – 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 고후 8-9장
예루살렘 원교회가 그와 그의 교회들의 헌금을 받아 줄 것에 대해 불안. ( 김판임, 고린도후서 주석, 대한기독교서회 100주년 기념 성서주석 39, 1999. )
(4) 역사 재구성을 위한 질문
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운동은 사도회의의 결정사항인가?
* 갈 2: 10 -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 행 15; 1-20 – 예루살렘 회의 –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9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②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모금 운동의 목적은?
예루살렘 교회의 경제적 궁핍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인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 원교회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유대인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교회의 통일성을 의미하는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승인하는 차원인가?
③ 로마교회의 상황
클라우디우스 칙령(49년)과 네로의 그리스도인 박해(64년) 사이 기간. 가정교회들이 눈에 띄게 많아짐. 박해 상황 예상. 로마교회가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롬 1: 10-15. 15: 20-22).
사도 베드로가 이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매우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을 때(A. D.50년경), 베드로는 아직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로마교회는 A.D. 49년 이전에 존재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에 바울이 로마교회에 로마서를 보냈을 때 그곳에 베드로가 있었다면, 분명히 그 사실을 언급했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예 서신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가 사도들에 의해 세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그렇다면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는 누구에 의해서, 그리고 언제,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 사도행전 2: 10에 따르면, 오순절에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중에 '로마로부터 온 유대인과 유대교 개종자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들이 로마로 돌아가 그곳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수고한 결과, 로마에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가설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로마서를 보냈을 당시, 로마교회는 이미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이러한 추측은 교부 클레멘트(Clement of Rome, A.D.96년)의 증언에 의해 뒷받침되는데, 그는 A.D. 60년 중엽 네로 황제의 박해 때 '무수히 많은 성도들'이 순교했다고 말했다.
로마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섞여 구성되어 있었으며, 수적으로는 이방인들이 우세하였다. (참조. 1: 1-15; 15: 14-16; 11: 13-16장에 언급된 인물들의 대부분은 로마나 그리스 출신이다). 한편, 로마서에서 바울이 어떤 특별한 권위를 지닌 인물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로마교회는 아직 중심적인 조직 기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롬 12: 9-21 (특히 14절) 롬 13: 1-7)
(5) 로마서의 주제와 특수성
① 전체의 흐름
로마서는, ‘복음’과 함께 길게 바울 자신을 소개한 후(1: 1-7) 후에 로마의 성도들을 칭찬하고 감사하면서(1: 8-17) 시작한다. 바울 서신이 대개 그러하듯이, 본론은 크게 복음에 관한 원리적인 설명(1: 18 – 11: 36)과 그 원리에 기초한 실제적인 권면(12: 1 – 15: 13)으로 나누어진다.
복음의 원리적인 설명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이다. 이 하나님이 의가 죄로 인해 죽을 운명에 있던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으며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먼저 말하고(1: 18 – 8: 39), 이어서 선민 유대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는 어떻게 그 ‘의’가 드러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9-11장).
12장부터는 이 복음에 합당한 삶을 ‘거룩한 산 제사’로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요약한 후(12: 1-2), 공동체 안과 밖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12: 3 – 13: 14), 그리고 특별히 음식과 절기 문제를 둘러싼 공동체 안의 이견에 대해서(14: 1 – 15: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주셨듯이 서로 받아주는” 사랑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끝으로 다시 자신의 선교계획을 밝힌 후 기도를 부탁하고 안부를 전하는 긴 인사와 함께 펜을 놓고 있다(15: 14 – 16: 27).
② 로마서의 핵심 메시지
복음의 두 얼굴: 기독론적 복음 vs. 구원론적 복음
‘복음’을 잘 설명하여 전해주고 싶은 것이 바울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두 번이나 복음을 설명하는 긴 서두를 보면서 알 수 있다. 한 번은 그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기독론적으로(1: 2-4), 다른 한 번은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의(義’)라고 하여 구원론적으로(1: 16-17) 설명하고 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로마서에서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이것은 그분을 초월자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그 뜻을 실행하는 이로 보는 것이며, 또한 약속한 것을 지키시는(1: 2)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으로 보는 것이다.
이 초월적이고 아들을 죽음까지 내어주시는 신실한 사랑만이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삶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뿌리 뽑힌 나무처럼 죽음의 권세 아래 있던 우리들을 다시 자녀의 자리로 회복시키셔서 이제는 창조주의 부요함을 의존하여 사는 관계로 회복시킬 수 있다.
바로 아들을 통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 노릇의 의무를 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의’이고, 이것이 바로 로마서가 전하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이다.
하나님의 의(義)와 우리의 의(義), 그리고 믿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약속을 지킨 것이 이방인인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는 하나님과 피조물 전체와의 관계를 위한 대표성을 띠고 있다. 창조주를 의존하여 사는 자에게 하나님은 하나님 노릇해주실 의무가 있음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이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먼저 약속(언약)을 깨뜨렸고 하나님은 그럴 의무가 없었음에도, 아들을 죽음에 보내시는 사랑을 통해 그 관계를 회복하시고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하여 다시 언약의 파트너로 불러 주셨다. 그래서 아무도 자랑할 수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를 통해 언약의 파트너로 회복된 것을 ‘칭의’(Justification)라고 한다.
‘의’는 우선적으로 관계론적인 의미이지만 또한 마지막 심판 때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재판장 앞에서 무죄 선고를 받는다는 법정적인 뜻도 있다. 바울은 5: 1-11에서 이 칭의의 현재와 미래의 결과를 소개하면서 그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자고 초대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신실한 의(faithfulness justice)는 아들의 신실한 순종(faithful obedience)을 통해 성취되며(3: 22), 우리가 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자기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을 새 주인으로 모시는 신실함(faithfulness, 믿음)으로 화답할 때(1: 5; 16: 26; 3: 22) 이 은혜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게 된다(5: 2).
그 삶은 다시는 자기 욕망을 따라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삶이며(6장), 이제는 내가 주인일 때는 육이 연약하여 할 수 없고 오히려 사망만 가져다주었던 율법의 요구까지도(7장)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이룰 수 있게 된다(8: 4). 신실한 아버지와 아들의 신실한 순종이 우리로 신실한 자녀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 바로 복음, 로마서가 전하는 기쁜 소식이다.
이스라엘의 구원(9-11장)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해왔던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들이 이대로 멸망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신가?
첫째, 하나님은 처음부터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씨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신 적이 없다.
오직 선택하여 은혜를 받은 자만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니 피조물이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 혼탁한 호세아와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었듯이 지금도 유대인 중에는 선택 받아 구원 받을 자가 있다.
둘째,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저버렸으니 핑계할 수 없다.
말씀(율법)이 아주 가까이 있었고 복음 전하는 자의 아름다운 발이 있었다. 그들이 미련하고 강퍅하여 그 약속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를 외면한 것이다.
셋째, 이방인을 많이 부르시는 것은, 이를 통해 이스라엘을 시기케 하여 이스라엘 중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전략이다.
이스라엘처럼 이방인들도 언제든 불순종하면 버림 받을 수 있으니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듯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한 번도 포기된 적이 없고 꼭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 기쁜 소식이다.
아멘 & 그러므로(12: 1 – 15: 13)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는 긴 장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주권을 찬양하는 장엄한 시로 마무리한다(11: 33-36). 이 고백(‘아멘’)이 다음에 이어지는 공동체를 향한 권면의 근거이다(‘그러므로’). 그 핵심은 이제 우리가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이니 스스로 왕노릇 하라고 부추기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날마다 주인의 뜻을 잘 헤아려 순종함으로써 우리 삶이 하나님께 산 제사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12: 1-2).
그 삶이 공동체 안에서는 ‘사랑으로’ 자기 은사를 따라 공동체를 세우고 어두운 세상을 거스리는 것으로 나타나며(12: 3-13; 13: 8-14), 밖으로는 핍박하는 자에게 선으로 대하며 세상 권력을 인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12: 14 – 13: 7).
더욱 구체적으로 바울은 음식과 절기 준수 문제를 두고 갈등하는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스도인 그룹을 향해,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받아주셨을 뿐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연약한 인간이 되신 예수님처럼, 그들도 서로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랑(15: 7)을 보이라고 권면한다(14: 1 – 15: 13).
하나님의 신실함과 아들의 신실함으로 구원 받은 자는 세상을 향해서는 거룩함으로, 공동체를 향해서는 자기를 비우는 사랑으로 반응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태도라고 로마서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