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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보라, 마음으로 보라(삼상 16:7)
작년 말, 국회에서 이력서 사진 부착금지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억제책의 일환입니다. 기업이나 관공서 등의 단체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받습니다. 사람을 뽑는데 제일 먼저 그의 얼굴부터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관행이었으니 당연한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사진뿐 아니라, 과거에는 키와 몸무게 등을 기재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가족관계를 기록하게 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사진은 그 사람의 얼굴 모양이 잘 생겼는지 못 생겼는지만 드러나는 게 아니지요. 미국 같은 다인종 사회의 경우에는 그의 인종이 드러납니다. 만약 회사의 경영자가 인종차별주의자일 경우, 사진은 그의 채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더구나 면접을 위해 얼굴까지 뜯어고치는 세태에서는 이력서의 사진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법으로 이력서 사진부착을 금지시켰지만, 사람의 외모와 학력, 그의 사회적 배경 등은 여전히 한 사람을 평가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진 말씀이지요.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 말씀은 교회가 사람을 보는 기준이 세상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할 때에 많이 인용되고는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말뿐, 실제로 교회도 사람을 뽑을 때에 보면, 이력서에 사진을 요구하고, 심지어 가족관계에 신체 특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담임목사를 뽑을 때에 가장 선호하는 것을 보면 외국 유학 경력, 박사학위, 대형교회 부목사 경력 등이 많이 작용합니다. 부목사로 일할 때에 교인들로부터 교회를 선택한 이유들을 종종 들었습니다. 그때 가끔 ‘목사님이 은혜롭게 생겨서요, 목사님의 음성이 은혜로워서요.’라고 하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이는 그의 외모가 잘 생겼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심지어는 어떤 목사에 대해서는 ‘강남 사랑의 교회의 오정현 목사를 닮았다.’며 좋아하는 교인도 있었습니다.
교회든 일반 사회든 사람을 보는 데에, 사람을 뽑는 데에 이토록 외모나 경력이나 지위나 학력 등이 크게 작용하는 것도 언뜻 이해가 갑니다. 사람 뽑는 데에 외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사람의 중심을 보는 데에 서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중심, 즉 그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데에 매우 서툽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여기서 ‘중심’은 ‘마음’(레바브)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 즉 그의 존재의 본질, 참 본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한 사람의 본질, 한 사람의 참된 가치는 얼굴 모양이나 그의 이름이나 경력, 지위, 피부색, 성별 등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참된 본질 참 가치는 그의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에 있다는 것은 그 어떤 평가나 판단이나 구분이 외적인 요소에 의해 결정되거나 영향 받기 이전의 원래 있는 그대로를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데에 매우 서툽니다. 사람의 마음이나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줄을 거의 모릅니다. 사람을 볼 때에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일 먼저 보는 것이 그의 얼굴이고, 그 다음 그의 이름을 통해 다른 이를 인식합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도 전혀 무능합니다. ‘내가 누구인가’ 할 때에도 사실은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안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자기를 안다고 할 때, 기껏 말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이름, 자기의 얼굴, 자기의 직업, 자기의 생각 등입니다. 조금 진지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생각, 사상, 종교적 입장, 정치적 입장 등을 자기라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과 이름과 경력과 지위에 쉽게 혹하고 흔들립니다. 자기가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집안을 가졌으면 쉽게 자만합니다. 또 그 반대의 경우에는 쉽게 좌절하고 열등감에 빠집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는 데에 있어서도 외모에 걸려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신 분입니다.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마음을 보신 분입니다. 사람을 보는 데에 그 어떤 외모, 외적인 기준, 즉 얼굴이나 이름이나 그의 신분이나 인종이나 심지어 그의 도덕성이나 종교적 신념조차도 예수님께는 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서는 너무나 기뻐하며 자신의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자랑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한 그 분을 만났다. 그분은 나사렛 예수다.”고 나다나엘에게 소개하자 나다나엘은 비웃듯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는가.’(요 1:46)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의 비웃음에 걸리지 않으시고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오히려 나다나엘을 보시자 그를 칭찬하며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47)며 기뻐하셨습니다. 한 과부가 헌금함에 두 렙돈, 즉 동전 두 닢이라는 아주 적은 액수의 헌금을 했습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100원짜리 동전 두 개 2백 원, 기껏해야 5백 원 동전 두 개 천원.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그 여인이 자신이 가진 전부를 드렸다는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그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로 씻자, 모두들 그 여인이 얼마나 부정한 죄인인지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도 예수님은 그 여인이 얼마나 부정한지, 그의 외모를 따지지 않고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눅 7:36-50) 수많은 세리와 죄인들, 간음한 여인, 사마리아 여인 등의 마음을 보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그들과 어울리지도 그들을 향해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외모나 이름이나 지위가 그 사람을 보는 마음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지위나 경력, 학력 등을 보는 즉시 마음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생각의 습관, 즉 판단과 평가와 편견 등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지요. 마음에 걸림이 전혀 없이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가라앉히고, 그 생각으로부터 나오는 무수한 판단과 평가를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본봅니다. ‘가만히 있음’의 능력, 즉 참된 고요함 속에서 그의 존재에 대한 어떤 판단도 없이 있는 그대로 봅니다. 누군가를 이름 짓기 이전, 판가름하기 이전의 ‘모르는’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빈 마음으로 본다.’는 뜻입니다.
동물들의 마음을 읽는다는 사람들, 동물들의 정서를 알고 동물들과 대화한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별로 그런 일에 전문가입네 하는 이들을 믿지는 않지만, 어쨌든 동물들이 잘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동물들이 원하는 것을 잘 헤아리고 동물들을 있는 그대로 좋아해준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날마다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의 눈곱을 떼 주고 씻겨주고 똥오줌을 치워줄 때에는 아무런 불평을 안 합니다. 너무나 좋아서 그렇게 고양이에겐 잘 하는 사람이 아기를 돌보는 일은 아주 싫어합니다. 동물들도 그런 이들을 신기하게 잘 따릅니다. 얘들도 자기를 있는 그대로 예뻐해 주는 마음을 아는 것이겠지요.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식사하는 것을 발우공양이라고 합니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 불교를 접할 때 제일 힘들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발우공양입니다. 왜냐하면 발우공양 마지막에는 자신이 먹던 밥그릇, 즉 발우에 물을 부어서 그것을 다 마시는 것인데, 그때 밥찌꺼기가 함께 섞여 둥둥 뜹니다. 서양 사람들에겐 이게 비위생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의미를 듣고 이해하면 금세 적응을 합니다. 마음을 고쳐먹는 것입니다.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있던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럽다는 선입견, 그것이 더럽다는 고정된 생각을 내다 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승려라면 바로 원효대사일 것입니다. 그가 젊은 시절,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 죽고 온 세상이 난리 통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승려가 된 그는 더 큰 깨달음을 찾아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길을 가던 그는 어느 날 저녁, 지친 몸을 쉴 곳을 찾아 헤매다가 황량한 평원에 몇 그루의 나무와 물이 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여행에 지쳐서 그대로 쓰러져 자다가 밤중에 너무 목이 말라 물을 찾았습니다. 사방을 더듬는데 마침 조롱박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것을 들어 마셨습니다. 물맛이 너무나 달고 시원했습니다. 너무 시원해 탄성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 원효는 놀라 기겁을 하고 말았습니다. 시원한 물이 담긴 조롱박은 알고 보니 아직도 피딱지가 붙어 있고 살점도 남아 있는 끔찍한 해골이었던 것입니다. 해골에 들었던 빗물엔 이상한 벌레들이 둥둥 떠다녔습니다. 그것이 해골이라는 것을 보자 구역질 하며 속에 있던 것을 다 토해냈습니다.
힘겹게 구역질을 하는 순간 그는 갑자기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간밤에 눈으로 보지 않고 아무 생각도 안하고 마셨을 때에는 그 물은 엄청나게 달고 시원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그것이 해골이라는 것을 보고 즉시로 그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구역질이 나는 끔찍하게 더러운 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원효는 이때 ‘아!’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이란 놈은 좋고 나쁜 것, 삶과 죽음을 만드는구나. 이것이 우주를 만들어 주인 행세를 한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주도, 부처도, 법도 없을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하나, 그 하나가 바로 텅 빈 자리로다.’
다윗의 형들은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겨서 꼭 영웅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무엘조차 감동할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나는 그것을 버렸다.’ ‘버렸다’는 말은 ‘경멸한다, 싫어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외적인 기준으로 보는 것을 버리시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아주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이 경멸해하실 정도로 아주 싫어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잘 생긴 사람, 잘난 사람을 싫어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십니다.
어느 교회가 부활절에 교회를 청소하고 예쁘게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교인들은 각자가 자신이 준비한 선물이며 헌물들을 가지고 와서 교회를 꾸몄습니다. 그 중 한 여교인이 자신이 배워 정성껏 만든 조화를 가지고 담당목사에게 맡겼습니다. 담당목사는 속으로 ‘그래도 부활절인데 생화도 아니고 조화를 가져오시다니.’하며 몰래 다른 선물들 속에 감춰두었습니다.
나중에 도착한 꽃꽂이 담당 집사가 그 조화를 보더니 ‘아 예쁘다.’하며 그 조화를 가지고 강단을 정성껏 장식했습니다. 그걸 본 담당목사는 속으로 짜증이 나서 담임목사에게 찾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부활절인데 조화를 장식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치우고 갖다 버리면 안 되겠습니까?” 담임목사 왈, “목사님, 당신의 마음이 조화로군요. 당신에게는 온 세상이 조화, 가짜이군요.”하며 이렇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보십니다. 마음이 진심이면 세상이 진실한 것입니다. 해서 마음이 깨끗하면 온 세상이 깨끗한 것이고, 마음이 더러우면 온 세상이 더러운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그들의 마음이 불행하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는 모든 것이 불행합니다. 대신 마음이 행복하면 온 세상이 행복한 것입니다. 내 마음이 ‘조화는 싫어’ 한다는 것은 당신의 마음이 만들어진 조화와 같고, 그러면 당신에게 온 세상은 만들어진 조화일 뿐입니다.”라고.
모든 것이 마음에 걸리지 않게 하십시오. 마음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세요. 걸림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꽃이 조화든 생화든 상관이 없습니다. 예배당을 예쁘게 가꾸는 데에 생화가 더 좋다는 것은 우리의 시각입니다. 물론 생화면 거기서 향기도 나고 생화가 주는 생생함이 우리의 기분을 더 좋게 하기는 하겠지요. 누군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생화를 가져왔다면 하나님은 물론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조화를 드려도 드린 이의 마음에 기쁨으로 드렸다면 하나님도 그의 마음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세 가지 ‘마음’이 있다고 말합니다. 실심(失心)과 일념심(一念心), 그리고 명명심(明明心)입니다. 실심은 어떤 조건에 따라 쉽게 좌지우지 되는 마음입니다. 원하는 게 이뤄지거나 주어지면 좋아하고, 잘 안 되면 낙심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외모를 보는 것이 바로 실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좋고 저건 나쁘고, 모든 것을 보자마자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이 꽉 막아서서 사람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어떤 외적인 조건들이 마음에 쉽게 걸려서 거기에 따라 마음이 쉽게 흔들리는 마음입니다.
일념심은 한마음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확고한 신앙심이나 신념을 가리킵니다. 아무리 세상이 흔들려도 자신의 마음은 믿음으로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명명심은 ‘맑고 분명한 마음’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마음을 말합니다. 내 마음에 슬픔이 있다면 단지 나의 원함이나 소원이 틀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즉 다른 사람들이 슬프기 때문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병든 이들이나 죄인들을 보시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마음을 말합니다. 지난주 광화문에서 분신자살한 분이 정원스님이란 승려였습니다. 이를 두고 자살이니 뭐니 하며 비난하는 이들도 있을 텐데, 불교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불 수 없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정원스님은 명명심, 즉 맑고 분명한 마음을 가졌던 것이지요. 그의 유언처럼 ‘일체 민중이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자신을 불살랐습니다. 그의 행적을 보면 그는 항상 국민들의 슬픔이 있는 현장에 함께 했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에 유가족들과 아픔을 함께 했고, 위안부 할머니들, 광주 학살 현장 등에 그가 있었던 것이 그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가 보기에는 세상이 불행해 보였고, 세상이 슬퍼보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의 마음 또한 고통스럽고 슬펐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명명심, 맑고 분명한 마음인 것입니다.
미국 스님인 현각의 스승인 숭산스님은 “이 마음이 거울과 같아서 빨강을 비추면 빨강이 되고, 흰 것을 비추면 희게 된다. 중생이 슬프면 내가 슬프고, 중생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 중생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맑고 분명한 마음이다. 욕망에 젖은 작은 마음을 집착하는 마음이라 하면, 한마음은 텅 빈 마음이고, 맑고 분명한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큰마음이다.”이라고 설명합니다.
마음으로 보십시오. 이는 마음에 생각을 비워버리고 보라는 말입니다. 그 생각은 외모에 집착해 판단하고 평가하고 차별하려는 마음입니다. 그 생각을 버리고 마음 그대로, 마음이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침묵이 있는 곳에는 마음이 없다. 움직임만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침묵은 무엇이 결정되고 이름지어지고 판단과 평가가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 즉 모르는 상태, 개념이나 생각이 일어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순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 하셨던 그 ‘가만히 있음’의 상태가 바로 이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는 그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때는 생각이 지배하지 않습니다. 움직임, 즉 있는 그대로의 실상만 있을 뿐입니다. 그게 무엇인지 어떤 일인지 규정되기 이전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돕고자 하는 그 자비의 마음으로 보십시오.
외국의 어떤 부부가 몽구스 새끼 한 마리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몽구스는 뱀도 잡아 죽이는 동물로 유명하지요. 마침 그 부부에겐 자식이 없었기에 몽구스를 애주중지하며 자식처럼 사랑하고 돌보았습니다. 몽구스도 그 마음을 알았는지 부부를 부모처럼 몹시도 잘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부부에게 아기가 생겼습니다. 아기가 생기니 아무래도 몽구스가 신경이 쓰였겠지요. 하루는 남편이 외출을 하며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식사 준비를 하다가 필요한 게 있어서 남편이 한 말을 까맣게 잊고 아이를 둔 채, 이웃으로 급하게 빌리러 나갔습니다. 이때 방안에 혼자 누워있던 아기에게 독사 한 마리가 기어왔습니다. 함께 있던 몽구스는 그 뱀을 보고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날카로운 이빨로 물어뜯어 두 동강이를 내버렸습니다. 몽구스는 부부에게 칭찬이라도 바랄 양으로 문간에 나가서 그들을 기다렸습니다. 마침 퇴근 하던 중 아내와 함께 들어오던 남편은 입에 시뻘건 피를 묻히고 문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던 몽구스를 보고는 기겁을 하고 놀랐습니다.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은 남편은 불같이 화를 내며 몽둥이를 들어 몽구스를 때려 죽였습니다. 몽구스가 자기 아기를 물어 죽였다고 순간 생각을 한 것이지요. 분이 안 풀려 죽어 자빠진 몽구스의 시체가 으스러지도록 때리고 또 때렸습니다. 그 순간 먼저 방으로 들어간 아내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보, 아기가 살아있어요!” 방으로 들어간 남편의 눈에 띈 것은 생글생글 웃는 아기와 그 옆에 두 동강 난 독사의 몸뚱이였습니다. 그걸 본 남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마음을 보십시오. 빈 마음으로 보십시오. 또 맑은 마음, 자비의 마음으로 보십시오. 입에 새빨간 피를 묻힌 몽구스를 보고 이성을 잃은 남편의 모습은 우리들 대부분의 모습일 겁니다. 우리의 생각이란 이런 것입니다. 쉽게 흔들리고 뭔가를 보고는 그와 관련된 기억이나 생각이나 판단들이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을 지배해버립니다. 우리가 마음을 보는 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데에도 역시 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생각이 아닌 있는 그대로 마음에 비추는 것을 말합니다.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지요.
어떤 심리학자가 뇌파 실험을 했습니다. 15초마다 신호음을 들려주고 이때 사람의 뇌가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관한 실험이었습니다. 실험대상은 선 명상에 훈련된 선사들과 그런 훈련이 없는 일반인들이었습니다. 일반인들도 처음 몇 번의 신호음에는 뇌가 반응을 했습니다. 하지만 3, 4번 반복해서 들려주자 그 뒤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익숙해져서 다들 생각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반면에 선사들은 실험이 끝날 때까지 15초마다 뇌가 반응을 했답니다. 매번마다 그것을 처음 대하듯이 반응을 한 것이지요. 그들은 끝까지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는 맑고 분명한 마음. 내 마음에 무슨 생각이 이는지 항상 깨어서 바라보십시오. 그 생각이 나의 마음에 너무 섣불리 확정되지 않도록, 너무 쉽게 그 생각이 마음에 걸리지 않도록, 항상 마음에 대로가 놓이게 하십시오. 그 마음에 자비만이 남아 있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보십니다. 외모로 나타나는 어떤 것으로 우리에 대해 확정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확정된 생각이 아닌 마음으로 우리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으로 보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외모와 상관없이 자비롭게 대하셨던 예수님의 눈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