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물이 되어
명향기
캐나다 매니토바주, 다이아몬드 광산 폭발로 26명의 광부들이 갱도에 갇혔다. 이들을 구출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이스 로드’를 30시간 안에 횡단해 구조용 파이프를 운반하는 것뿐이다. 제한된 시간 안에 임무를 수행하려면 가장 빠른 길인 ‘아이스 로드’를 통과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 길이 이미 해빙기에 들었다는 것이다. 해빙기에 무거운 장비를 싣고 달린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위험한 일이기에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마침내 대형 트레일러 3대가 장비를 싣고 영하 50도에 달하는 위니펙호 빙판 위를 달리며 사투를 벌이며 산소부족으로 죽어가는 광부들을 구출해내는 영화 <아이스 로드>를 보았다.
이 영화는 리암 니슨, 로렌스 피쉬번 주연으로 조나단 헨슬레이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로 2021년 신작이다. 제목으로 쓰인 ‘아이스 로드’란 실제로 캐나다뿐 아니라 남극, 북유럽 등 추운 국가에서 지금도 값비싼 항공 운송료를 절감하기 위해 두꺼운 빙판이 된 2월에서 3월 사이에 잠시 개통되고 있는 임시 도로를 말한다.
눈보라를 헤치며 위니펙호 빙판길을 달리던 얼음 위에 저 멀리 자박자박 고인 덧물이 햇살에 반짝 비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얼음이 출렁이며 갈라져 2대의 트레일러가 벌어진 틈새 밑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때 얼음에 금이 가게 만든 시발점이 덧물이라니.
덧물이란 순우리말로 강이나 호수 등의 얼음 위 웅덩이에 괸 물을 말하는데 햇빛을 많이 받은 어느 지점에 물이 고이면 그곳이 먼저 녹으며 틈을 만든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물이 얼음층에 균열을 일으키며 얼음덩이를 쪼개어 다른 얼음덩이를 밀어내게 되는데 이렇게 밀려난 얼음덩이는 도미노처럼 퍼져나가며 호수나 강을 녹이는 것이다. 리암 니슨과 피쉬번은 이런 위험을 알면서도 다른 목숨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갈라지는 얼음 위에서 사투를 벌인다. 3대의 트레일러가 출발하였지만 간신히 1대만이 목적지에 도달해 거의 죽음 직전에 처해있는 갱 속의 광부들에게 산소를 공급해 주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얼음 위에서 반짝이던 얄팍한 덧물이 광활한 호수의 두터운 얼음판을 갈라 사람을 공포에 떨게 하는 모습은 작은 것으로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백인 우월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서구의 문화계에 한국말로 된 영화나 노래가 상을 타기 시작했다. BTS나 아이돌 그룹들,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 게임’ 등,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가 영어권의 틀을 깨고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여기에는 한 번 한다고 하면 두터운 얼음장도 깨며 끝장을 보고야 마는 덧물 같은 한국인의 기질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BTS가 오늘의 그들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는가. 노래 한 곡을 위한 안무를 위해 마룻바닥이 시커멓게 될 정도로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고 한다. 마약과 폭력이 주류를 이루던 세계 문화 컨텐츠 시장에서 BTS의 신선한 노랫말과 겸손한 태도는 듣는이에게 즐거움뿐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주기에 열광을 받는 것이리라.
한국 문화콘텐츠 시장 규모는 약 709억 달러(2023년 전망치)로 세계 7위의 수준이며, 지난 20여 년 동안 글로벌 시장에서 ‘한류’의 명성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K-콘텐츠 수출액의 68.7%를 차지하는 것은 게임이고 그다음이 캐릭터, 지식정보, 음악, 방송, 출판, 컨텐츠솔류선, 만화, 영화 등의 순으로 다양한 장르에서 우리나라의 위상과 부가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문화 컨텐츠의 부가가치는 자동차산업을 뛰어넘을 만큼 경제적 수익을 창출하기에, 선진국들은 벌써부터 정부의 지원하에 문화 컨텐츠 산업에 힘을 쏟고 있다. 한국 콘텐츠가 확장되며 전 세계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자 디즈니플러스는 한국에 대한 투자를 공격적으로 늘리겠다는 방침을 내어놓았다. 앞으로는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서로 투자를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BTS 나 아이돌그룹, 영화, TV드라마와 온라인 카지노게임 등이 덧물이 되어 세계장벽의 틈새를 비집고 K-열풍이 계속 뻗어 갔으면 좋겠다.
얼음 위에 고인 덧물처럼 작은 것들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 가늠하기 어려운 큰 힘이 발휘되는 것을 본다. <아이스 로드>에서 본 것처럼 작은 덧물의 내재 된 힘을 믿기에,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긍정적인 마음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자신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은 “우리의 부력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이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그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문화에 대하여 이런 안목을 가지셨던 김구 선생의 뜻이 덧물이 되어 세계 속의 코리아가 될 수 있으리라 자부한다. 하여 우리도 글을 쓰며 사랑과 위로의 가교역할을 자처하는 것이 아닐까. 삭막해진 이 세상에 우리의 문화컨텐츠가 덧물이 되어 세계인들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는 긍정의 힘이 되리라 믿으며 치솟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