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부터 즉위 초기]
황제의 황룡포를 입은 고종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이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흥선 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신
정왕후)의 후원으로 1863년 음력 12월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성군의 군호를 받고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형인 이재
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청정을 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즉위 후 10년은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권은 흥선 대원군이 장악하였다. 즉위 초기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시
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화되어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 미국(1871년 신미양요)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을 겪었으나, 흥선 대원
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탄받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기
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였다. 1866년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곧 명성황후이다.
제너럴셔먼호사건이 일어난 뒤 증기선 복제 계획을 흥선대원군이 수립하여 김기두 등이 실행했으나, 1867년 완성된 목탄 증기선은 매
우 느리게 움직여 사실상 실패하였다. 이에 팔도에서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개항과 친정]
1868년 음력 12월 19일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
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
성은 1873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
다.
1873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소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
는 그해 음력 12월에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끝났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
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5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명령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음력 9월 21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 결국 1876년 음력 2월 3일(양력 2월 27일) 강화도 조약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6]
강화도 조약이 성립하고 난 뒤부터 조선 정부는 세계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바 이러한 노선에 따라 내정개
혁을 실시하였다. 내정개혁에서 고종이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였다. 즉 고종은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
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케 했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1881년 초 서양의 군함을 구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때 이동인이 일본과 협상하였으나 실패하고 잠적한다. 그해에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된 경기도 향시를 치르려고 모인 유생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몰
아내려던 사건이 발생한다.
[청의 간섭과 정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
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
이 청나라의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 만에 고종은 복권하였으며, 그 뒤로부터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다.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미국 수호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고, 1883년에는 민영익 등 보
빙사(報聘使)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1882년)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해 서재필 등
16명을 일본 토야마 사관학교에 보내어 신식군사기술을 배우고 돌아오게 하였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철종의 사위) 등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급진 개화파의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은 이 일로 말미암아 급진 개화파와
그들을 후원한 일본을 경계하며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여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점령하는 사건
(1885~1887년)이 잇달았다. 1886년 사노비 세습제의 혁파를 천명하였다.
1890년 다시 일본 정부에 군함 구입을 타진하였으나 일본 측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며 청나라에서도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 1893
년 독일과 일본을 통해 증기선 3척을 도입하였으며, 이것은 주로 세미(稅米) 운반선으로 쓰였다.
[동학 운동과 갑오개혁]
이후 소강 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1894년 음력 6월 23일
(양력 7월 25일) 새벽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무렵 한양을 점령한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1894년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중
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
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때 친일 정부는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
흥선대원군이 1894년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 받는다. 개국 기원(開國紀
元)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으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1894년 음력 12월 12일(1895년 양력 1월 7일) 홍범 14조를 반포함으로써 개혁이 본격화된다.
한편 1894년 흥선대원군이 도승지에까지 오른, 큰아들 이재면의 아들로서 장손인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려다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준
용은 1895년 음력 4월 19일 종신 유형에서 10년 유형(流刑)에 감형하여 강화 교동도로 유배되고, 대원군은 마포 공덕리 별장(아소정)
에 유폐된다. 그 뒤 이준용은 음력 6월 12일 특전으로 풀려나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아소정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을미사변]
한편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서양 삼국, 곧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것이 삼국간섭이며,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서방 정책을 강화했다. 특히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도록 했다. 일종
의 이이제이(以夷制夷)로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또는 수원책(綏遠策)으로 불렸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독점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된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견제하려는 명성황후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위해 명성황후와 갈등을 빚고 있는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황후 시해에 이용하게 된다.[8] 일본은
1895년 낭인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 뒤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9]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
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10] 이것이 국민 감정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아관 파천과 도시 정비]
1896년 2월 11일(1895년 음력 12월 28일)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끈질긴 종용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
고 있던 고종의 의지로 왕태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이때 왕태자비는 경운궁으로 거처
를 옮겼다. 아관파천한 그날 고종은 을미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내각은 붕
괴되었다.
러시아 공관으로 주필(駐?)한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 경운궁(오늘날 덕수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를 명한다.
1896년 9월 29일 조칙(내부령 제9호)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 이채연·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한다. 그에
따라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로 하여금 추진토록 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광장 위
치이다. 그때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 예컨대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독립신문》 1896년 11월 7일자 논설에서 이를 “조선이 이제 문명 진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
다. 그러한 경운궁 중심의 도시 정비는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통감부에서는 남산 밑에 소재한 통감부의 북쪽 정면 방향으로 도로
를 놓는 계획(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도)과 1919년 6월 25일에 공개된 총독부안(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선도)에 따라 파괴되며, 경운
궁 앞 광장도 도로와 로터리가 설치되었다.[6]
[대한제국 성립]
고종이 황제로 즉위할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환구단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
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 협
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모두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1898년에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노면전차를 운행한다. 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
장하는 이도 있다.
[일본의 침략과 강제 퇴위]
고종 황제의 어진1900년 9월 27일 육군 참위 김규복(金奎福), 노백린, 어담 등 19인에 일본 유학을 명하였다.
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여 1902년 6월에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고,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
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1903년 3월 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五衛)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예정하고 그에 따라 협력을 당부한다. 또한 1903년 시위대 1만2천(최종적으로 1만6천) 병력을 갖추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군대 창설 및 그와 관련한 일련의 성과는 을사조약 이후에 계획 자체가 없어지거나 성과는 철
거되었고, 급기야 1907년 군대가 해산된다.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대한제국의 황성을 침탈하게 된다는 점을 예견하고,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
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 고종은 그 뒤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으
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이처럼 일본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물론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전쟁 기간 중에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을 침탈하는 등 한국 정부를 압박하여 을사조약 등 각종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고종이
이를 척결하기 위하여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
은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고종 양위 사건).
한편 1905년 4월 29일 근대적 형법전인 《형법대전》을 편찬하여 반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이것을 1906년 2월 2일 법률 1호로
제1차 개정하고, 1908년 7월 23일 법률 19호로 제2차 개정하였다. 이 제2차 개정에서 총 880개조였던 법률 가운데 100개조를 개정,
252개조를 삭제하여 원래 모습을 없애 버렸다. 결국 1910년 《한국법전》에 형법으로 개명 삽입하였다. 일본 제국은 《형법대전》이
민권 신장의 성과였으므로 도리어 삭제해 버렸다.[6]
이후 일본의 영향력 증대가 가속되었으며 마침내 일본의 강압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죽음]
대한제국 고종의 장례 행렬 - 고종의 독살설로 일본 식민 지배의 반대 여론이 높았다. 고종 독살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경 경운궁에서 붕어하였는데, 이를 놓고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사인이라는 자연사 설과 그날 한약
이나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
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에 공개된 일본측 자료(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에 따라 고종의 독살설은 확실시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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