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너 때문이다. 묻지 좀 마라. 나는 좀은 과장되게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러냐며 되묻고 있다. 그녀는 알 듯 모를 듯 하다는 애매한 표정으로 답을 재촉한다. 단풍은 위로부터 달음질쳐 내리고 마음은 그 보다 조급하게 산을 오른는데 두 가슴이 만났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망쳐진 기분을 누가 보상해 주려는지 알 수가 없다.
참으로 오랜만에 친구들과 단풍 구경을 가기로 했다. 가족이 아닌 친구들과 넷이서 승용차를 이용해 주왕산도 오르고 주산지 근처에서 숙박도 하며 지내기로 한 약속은 어렵게 이루어졌다. 어느정도 자란 자식들을 떼어놓고 큰 염려 없이 남편의 허락 아래 가는 여행은 자주 있는 기회가 아니어서 약간의 설레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시월의 세 번째 주말에 가기로 한 여행은 승용차 제공 및 운전을 하기로 한 친구의 사정으로 출발도 못하고 끝나려 했다.
백화점 앞을 지나다 전단지 한 장을 받았다. 바로 이거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지. 가고 말거야. 단양팔경 이만 오천 원, 선운사 이만 오천 원, 다이얼을 꾹꾹 눌렀다.
“아저씨 이거 혹 약장사 하는 관광이나 묻지마 관광은 이니죠?”
“해외여행도 하는 여행산데 믿으세요. 그런 불법적인 걸 하면 큰일 납니다.”
어디서 들은 것은 있어가지고 꼼꼼히 두 번이나 확인을 한 후 못 간다는 친구 대신 다른 친구를 조달해 좌석 넷을, 예약을 했다.
처음엔 너무 좋았다. 차가 출발하자 생수 한 병씩을 쫙 돌리고, 새빨간 사과도 하나씩 나누고, 노란 바나나도 두 개씩이나 주고, 일회용 커피 두 개에 종이컵이 두 개, 마지막으로 시원한 소주가 한병 보너스로 배분되었다. 옆 좌석의 친구가 ‘소주는 필요 없어요.’ 하며 사양을 한다.
‘어휴, 저 바보.’
“이니요, 가이드님 주세요.”
재빨리 챙겨 가방에 쑤셔 넣었다. 정말 약장사나, 더더구나 묻지마 관광은 아니었다. 트롯은 트롯인데 차분히 깔려 있고 네댓 명 되는 남자는 서로가 초면인 듯 말 한마디 안 하는 모양새가 점잖하기 만 하다. 여자들은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대 초반 정도나 될까? 얌전히 앉아 도란거린다. 꽉 찬 버스가 진영 휴게소에 정차를 한다. 가이드는 시래기국과 밥이 준비되었으니 빈속을 데우라며 자상하게 일러준다.
버스 옆에 쭈그리고 앉아 나는 친구들게 자랑스레 너스레를 떨었다.
“싸게 너무 잘 온 것 같지 않니? 다음 계모임은 당첨이다.”
든든히 속을 채운 친구들은 네 덕분이라며 덕담을 건넨다.
그래 돼지도 잡을 때 물 먹여야 근수가 나가지, 실컷 먹여놓고 차가 출발하자 그제야 일정을 알려준다. 이만 오천 원으로는 도저히 경비가 나오지 않으므로 단양팔경을 가는 길에 창녕의 사슴 농장에 들리고 집으로 오는 길에 또 한 곳을, 들린단다. 앞의 말에 열을 받아 뒷말은 잘 들리지도 않는다.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한다. 네가 하는 게 그렇지 하는 눈빛에 할 말을 잃자 친구 하나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까짓거 뭐 가보자. 안 사면 그만이지. 창영 가기 전에 서지도 않는데 차 세워 달랄 수도 없잖니?”
사슴 농장에 사슴은 달랑 네 마리다. 그거도 첩첩 길을 돌아 들어가 걸어서는 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겠다. 오물 냄새가 진동하는 우리 옆 컨테이너 방 안에 빽빽하게 쭈그려 앉아 건강 강의를 듣는다. 사슴 농장 사장의 강의가 끝나갈 무렵 서너 명의 여자들이 스티로폼 받침대 위에 종이 한 장씩을 얹어 들어와 주문을 받는다. 쭈뼛거리며 아무도 사려는 분위기가 아니다. 녹용 여덟 량에 삼십이만 원, 열 달 할부도 가능하단다. 적지 않은 금액이다.
‘무슨 사슴 네 마리 가지고 날마다 녹용을 판담, 견본품만 국산이고 나머지는 혹 중국산?’
고개를 숙인다든지, 딴 사람과 얘기하는 척 하며 어색한 위기를 모면하고 빨리 나가고만 싶은 찰라 사장이 사지 않는 이유나 알자며 말한다. 말하는 투가 정말 원인을 밝혀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치겠다는 모습이 아니라 아주 협박조다. 누군가가 경제적으로 버거워서라고 답을 한다. 사장이 갑자기 사슴의 커다란 뿔을 들더니 조금 전 녹용을 자르던 기계에 뿔을 탁탁 치며 “뭐라고요 경제적으로 어렵다고요. 하루에 커피 한 잔 값만 아끼면 되는데 그게 부담이 된다고요?” 하며 아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갑자기 사방이 쥐죽은 듯 조용하다. 나는 빠져 나가지 못 할 상황을 대비해 문자로 SOS를 쳐 두었다.
‘자기야 아무래도 속은 것 같아. 녹용 안 산다고 사슴뿔로 막 협박해.’
정말 이건 아닌데 싶었다. 우리는 용감하게도 발딱 일어서 문을 열고 나왔다. 그제야 다른 사람도 덩달아 나온다. 서너 명 앉아 있던 남자들이 머쓱해한다. 아무튼, 우리 네 사람으로 인해 버스 안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하다. 가이드는 심통이 단단히 났다. 그런데 이건 또 뭔지. 갑자기 음악이 댄스 트롯으로 바뀌자 군데군데 여자들이 일어서더니 광란이 시작된다. 그러더니 남자들과 여자들의 자리 이동이 시작된다.
“저 남자들은 선수들인가 보다. 다 흩어져 앉았는데 아까 컨테이너 안에서 보니 아는 사람들이더라. 친한 사람이면 같이 앉지 왜 흩어져 앉았겠니?”
친구의 말을 들으니 일리가 있다. 춤을 추는 여자들이 우리들을 힐끔거리며 소곤거린다.
“뭔데 쟤들, 놀러 온 거 아닌가.”
‘잘못했어요. 눈치 없이 끼어서 분위기만 망치고.’
오늘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도저히 자신이 없다. 안동 근처 국도변 휴게소에서 우린 드디어 탈출을 감행했다. 콜택시를 불러 안동 하회마을을 향하며 그래도 우린 모처럼 기분이 아주 유쾌해졌다. 모두 오늘은 기념할 만한 날이라며 깔깔거렸다. 비록 여행경비는 두 배로 치렀지만 철없는 아줌마들의 가을 여행은 정말 대박이었다.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세상을 헛살았다고 초등학생처럼 고개를 숙이고 앉아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배가 다 부르다. 정말 내가 사람의 말을 너무 믿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사람 살아가는 일 두루뭉실 섞이며 살아야 하는데 우리들만 유난을 떨고 있는지 하는 마음도 든다. 그날 관광버스 안의 그녀들은 마음에 쌓인 게 무엇이며 얼마나 많기에 몸부림을 치면서 떨쳐내려 했는지 궁금하다. 하루의 일탈 후에 긴 평화가 온다면 모른 척 그녀들의 짧은 용트림을 묻지 말아주는 것이 혹 예의는 아닐까.
지인들의 모임에 오니 여행은 잘 다녀왔냐고 묻는다.
제발 묻지 좀 마세요.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