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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베드로전서 제1강
산 소망
말씀/벧전1:1-12
요절/벧전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새롭게 베드로서 말씀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드로전후서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하기 전인 대략 AD 64년경 로마의 핍박을 받아 소아시아 지역 각지로 흩어져 있던 성도들에게 쓴 격려와 소망의 편지입니다. 로마 대화재 사건을 계기로 당시의 황제였던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며 로마에서 추방합니다. 그러자 로마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자기들이 살던 곳을 뒤로하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은 소아시아 지역 곳곳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낮선 사람들 사이에서 돈 없고 빽 없어 무시 받고 눈치 보며 살아야 했을 때 인생이 참 슬프고 고달프게만 느껴졌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한 가운데 당장 가족들과 함께 먹고 마실 것, 잠잘 것을 걱정하며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더욱이 자기들이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이 현지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있다면 이는 더 고통스러워집니다. 이것이 진리요 구원의 길이라고 믿고 왔는데 이것까지 무시당하면 이제 무엇을 의지하며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하는지 신앙마저도 회의적이 되기 쉬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한명의 기독교인으로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생각처럼 그렇게 만만치만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많은 사회 분위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 각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바쁘게 일해야 합니다. 이러한 때 우리도 지치고 힘들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힘든데 꼭 이렇게 살아야하는가 신앙과 사명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서는 우리 각자의 삶속에 분명한 영적 방향을 줍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이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Ι. 나그네 인생 (1-2)
1,2절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호칭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흩어진 나그네’와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한글성경에는 ‘흩어진 나그네’라는 단어가 앞에 있지만 원문을 보면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단어가 먼저 나옵니다. 다시 번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택하심을 받은 자들 곧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하노니”입니다. 흩어진 나그네라는 생각보다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먼저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있는데 ‘택하심 받은 자’와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먼저 ‘흩어진 나그네’를 보면 ‘나그네’는 지금의 장소에 정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잠깐 들렀다가 어디론가 다시 떠나는 사람입니다. 그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 종착지가 아니기에 거기에 많은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시잠깐의 불편과 고난을 감수합니다. 잠시 머무는 곳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짐을 쌓아두지도 않습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킵니다. 신앙의 나그네들에게 있어 세상은 정둘 곳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영어로 ‘strangers’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성도들을 보는 시각입니다. 이 땅에서의 성도들의 삶은 나그네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가 정두고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본향을 향해 가는 거룩한 순례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근본적으로 세상과 섞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박해를 받습니다. 로마 대화재 사건 당시 거의 대부분의 로마 시내가 불탔을 때 황제는 이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들은 억울하게 시련을 겪습니다. 로마에서만 아니라 로마제국이 다스리는 전역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힘이 없고 무능력해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셨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이 택하심은 일개 선생이 택한 것도 아니고 황제가 택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에게 택함 받느냐에 따라 택함 받는 것의 영광과 무게가 달라집니다. 황제의 택함을 받았다면 흩어진 나그네로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으니 큰 영광이요, 이에 따르는 고난도 마땅히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왕관을 쓰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성도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으니 나그네로서의 아픔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택하심이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선택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나그네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성삼위 하나님의 섬세하신 관심과 사랑이 나타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세 전에 작정하시고 당신의 자녀삼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택하심을 받은’ 곧 ‘chosen’이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옵니다. 이를 볼 때 베드로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믿음이 있었고 또 이것을 얼마나 큰 축복으로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서 무시 받고 핍박을 받으면서 살아야할 때는 자기가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때 성도들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선택받는가가 참 중요한 일인데 천지의 대 주재이신 하나님께 선택을 받았다니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 뿌림의 은혜를 받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성화되고 주 예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입니다. 과거 우리는 어둠 속에서 죄악된 본성을 따라 살다가 심판받고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되어가며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과거에는 죄악된 욕심에 사로잡혀 사단의 음성을 듣고 살았지만 이제는 생명의 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대반전입니까?
이처럼 한 사람이 택함을 받으려면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지속적인 관심과 넘치는 사랑으로 한 사람이 택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사는 것이 더 이상 슬픈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나그네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Ⅱ. 찬송하리로다 (3-12)
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이 택하심 받은 은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원문에는 “찬송하리로다!” 이 말이 맨 앞에 나옵니다. 지금 성도들은 황제에게 쫓겨 전에 예상치도 못했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흩어져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슬퍼도 참읍시다! 참고 견디면 좋은 날도 오겠지요.” 적어도 베드로가 목자라면 그들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에 공감하는 말을 먼저 해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찬송합시다!” 이렇게 외칩니다. 사실 일이 잘 풀리고 즐거우면 찬송하지 말라고 해도 절로 찬송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는 일마다 안 되고 꼬입니다. 또 당시 성도들은 나그네로서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겠습니까? 서럽고 억울한 사람에게 “찬송하세요”하면 따귀 한대 얻어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왜 찬송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원래 죄악된 본성대로 살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크신 긍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그들을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아버지가 부자라서 물려받을 유산이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때가 되면 물려주실 유산을 생각하면서 지금은 힘들어도 소망 가운데 살아갑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박해를 받고 고생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보장된 미래가 있고 그것도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유업이 있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세상의 축복은 때가 되면 썩습니다. 좋은 차도 때가 되면 폐차 처분해야 합니다. 좋은 집도 오래되면 물도 여기저기 새고 보일러도 망가지고 처음에는 없던 벌레도 여기저기 기어 다닙니다. 많은 재물도 순간 다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젊음도 세월이 가면 사라집니다. 페이스북을 보다보면 사람들이 자기의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자랑하고자 얼마나 애쓰는지 모릅니다. 좋은 사진 나오면 무시로 자기 프로필 사진을 바꿉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곱고 아름답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어느덧 흰머리도 많아지고 젊었을 때 입었던 그 예쁜 옷들이 이제는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때가 되면 기진하여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소망이 더 이상 소망이 되지 않을 때 그 소망은 ‘죽은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기대하고 바랄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 세상의 소망들은 일시적인 희망이 되어 삶의 활력을 줄 수는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설렘과 기대와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에게 무엇이 ‘산 소망’입니까? 무엇이 지속적으로 설렘과 기대와 삶의 활력을 가져다주는 ‘a living hope’가 됩니까? 이 세상의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친히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 베드로는 이것이 성도들의 ‘산 소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 ‘산 소망’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됩니까? 계시록 20장 15절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는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우리는 거듭나서 구원 받고 우리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생명책에는 인터넷 쇼핑하다 대박 난 것 기록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떤 집에서 살았는지, 어떤 차를 몰고 다녔는지, 재산이 얼마였는지 기록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배 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고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당당히 기록됩니다. 생명책 명단에 빠지면 조금 섭섭한 정도가 아니고 절망이요 끝장입니다. 그런데 이름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 20장 12절은 말씀합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생명책은 우리 신앙의 생활기록부와도 같습니다.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고 행위 또한 기록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 헌신한 모든 것, 그리스도를 위하여 흘린 눈물, 주를 위하여 핍박 받은 것, 양들을 위하여 전도하며 희생한 나의 진심과 젊음, 뜨겁게 찬송하고 기도했던 시간들이 다 기록될 것입니다. “아무개, 아무렇게나 살다오다” 이렇게 기록되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부활의 영광으로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44a절,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부활하신 예수님의 찬란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부활의 몸으로 사랑하는 예수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외모가 좀 안 받혀주는 것, 병들고 약한 것, 머리가 나쁜 것,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그곳은 경쟁과 비교의 아픔도, 질병도, 죽음도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최연소 농구코치였던 박승일 선수가 있습니다. 농구 잘하고 또 잘생겨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루게릭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점점 심해져 눈동자만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이 있는데 첫째는 천국 가는 것이고 둘째는 루게릭 요양병원을 지어 루게릭 환자와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처음 진단 받았을 때 의사는 남은 시간이 길어야 2,3년이라고 했지만 13년째 살아있습니다. 비록 눈동자만 움직이면서 자기 의사를 표시하고 있지만 밝고 기쁨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박승일 선수처럼 정말 그 마음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고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오늘을 찬송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말세에 나타나기로 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이 유업을 생각할 때 그것을 그냥 마지막에 관한 가르침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있을 미래의 소망은 현재의 나와 분리시키고 미래는 미래일 뿐이다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살리라” 말씀하실 때 “마지막 날에 다시 살 줄을 내가 믿습니다” 대답합니다. 마르다의 대답은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대답이요, 현재 오빠 나사로가 죽은 이 마당에는 사실상 무의미한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런 지식은 오늘의 슬픔을 이기고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안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말의 벌어질 이야기를 뒤로 밀어놓습니다. 지금은 더 시급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희망은 언제나 미래의 것이지 지금의 것으로 삼기는 쉽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그의 유명한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믿음과 희망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만일 이 희망이 없다면 비록 우리가 신앙에 관해 제 아무리 재치 있고 점잖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 신앙은 희망을 세우는 기초이고 희망은 신앙을 키우고 지원한다. 희망은 언제나 신앙을 새롭게 하고 활기차게 하며 항상 거듭 더 힘 있게 일어서게 함으로써 신앙이 끝까지 견디도록 도와준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노라 하면서 분명한 소망이 없다면 그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쫓아가면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신앙인의 승리 비결은 확고한 소망에 있고 이 소망은 찬송함으로 더욱 견고해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소망과 함께 감사와 능력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5절 또한 보십시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구원 받은 성도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여기 ‘보호’라는 말은 군사용어입니다. 군인들이 든든히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우리의 구원을 철통같이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 좋은 것은 알겠는데 우리가 그것을 얻지 못하고 중간에 낙오자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연약하고 죄악되어 산 소망에 걸맞게 살지 못할 때도 많은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산 소망이 취소됩니까? 그럴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찬송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산 소망을 가진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떠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크게 기뻐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8절을 보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합니다. 신앙생활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건강문제, 학업문제, 경제적인 어려움, 자녀교육의 어려움, 요즘은 지진이나 전쟁 같은 천재지변으로 인한 고난도 추가되었습니다. 목자로 성경선생으로 살고자할 때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양들을 섬기면서 인내하고 희생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열매를 맺으면 고난도 아닐 건데 열매 맺지 못하면 고난이 아픔이 됩니다. 하지만 산 소망은 모든 시련과 고난을 온전히 극복하게 합니다. 사실, 시련 자체로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 있기 때문에 근심하지만 그러나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시련이 닥치면 근심합니다. 그게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의 근심은 근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근심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인도하고 묵상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금광석이 용광로에 들어가 시련 후에 불순물이 다 타고 순도 100%의 정금이 되어 나오듯 고난을 통해 순수하고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므로 오히려 크게 기뻐하게 됩니다(7). 고난이 주어지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정금보다도 더 귀한 명품신앙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고난을 체질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이 있지 않으면 내 속에 있는 교만, 위선, 거짓, 세상욕망 등을 털어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말씀을 통해 진실하게 회개함으로도 가능하지만 인간이 워낙 죄악되다보니 말씀을 잘 안받아들이고 변화되는데 오래 걸립니다. 그러나 시련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신앙으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하는 모든 신앙행위는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영적반응입니다. 시련 속에서 죽지 않으려고 기도도 하고 말씀도 붙들고 사명도 감당하다보니 영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우리 삶 속에서 없어지기를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일어나는 시련에 잘 반응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이런 시련을 통해 얻어지는 믿음을 소유한 성도들은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7,8). 9절을 보십시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the goal of faith, the salvation of your souls. 우리 믿음의 최종목표는 영혼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련을 통해 연단된 우리 믿음이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 영광스럽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과 시련의 때에 원망불평하기보다 그 의미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0-12절은 우리 구원이 얼마나 소중하고 오묘한 것인지 말씀해줍니다. 선지자들은 구원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임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폈습니다. 그들 당대에는 이 구원의 역사를 볼 순 없지만 후손들을 위해 예언했고 그것을 베드로 같은 전도자들이 성령을 힘입어 전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듣고 있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천사들도 곁눈질해서라도 이 구원의 비밀을 알기를 원했지만 전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임한 구원은 소중하고 오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가치가 얼마나 큰 것인가 깊이 깨닫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에게 임한 가장 큰 은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거듭나 산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산 소망이 이뤄지기까지 우리를 지키시며 여러 시련을 통해 믿음을 연단하십니다. 그러므로 시련 속에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더욱 기뻐하면서 이 시련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 받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믿음을 성장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