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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0.28. 05:07조회 3
박지원
1. 교과서 속 주개념
박지원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소설가, 평론가이다. 자는 미중(美仲), 호는 연암(燕巖),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22세 되던 해부터 거처였던 원각사 근처에서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등과 이웃하며 교우 관계를 맺어 훗날 북학파가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다. 실학의 대가였던 홍대용과도 교우를 터 북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제 방법론에 대해서도 깊은 토론을 나누었다. 관직에 올라 출세의 길을 달리지는 못했지만 재야에서 실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 소설 집필에 매진하여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거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박지원의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의 나이 44세 되던 해(1780년, 정조 4년) 삼종형 박명원을 수행하여 청나라의 열하까지 갔었던 일일 것이다. 이때의 견문 경험을 기록하여 청나라의 지리, 역사, 학문, 경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연구한 저서가 바로 〈열하일기〉이다. 〈열하일기〉는 단순한 견문록이 아니라 당시 박지원이 지녔던 이용후생에 관한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는 저서로 그 중요성이 크다. 여기서 보면, 그는 무엇보다도 이용후생을 먼저 실천한 다음에야 덕을 쌓을 수 있다는 입장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이(理)·덕(德) 곧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가 먼저 바로 서고 다음에 실제 삶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박지원은 이와 같은 입장에서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경제, 문화 전반을 혁신하는데 이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 조선사회의 위정자들이 지니고 있던 잘못된 가치관과 타성에 젖은 사고,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제도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그 개선책을 강구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비판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북벌론으로까지 이어졌던 중화주의적 사대주의(숭명배청 : 이미 망한 명나라를 아직도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국가적 분위기), 허위의식에 젖어버려 생산적·창조적 능력을 잃어버린 사대부 계급의 무능함, 당시 개성 지방을 중심으로 관리와 결탁하여 행해졌던 부정한 상공업 행위 등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와 같은 비판의식은 이론적 서술 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을 통해서도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허생전〉이나 〈양반전〉, 〈호질〉과 같은 작품들이다. 〈허생전〉은 두 가지 중요한 현실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북벌론의 허구성과 매점매석을 통한 상행위의 부도덕성이다. 〈양반전〉은 조선 왕조 봉건사회의 와해 과정에서 아직도 과거의 지배체제에 사로잡혀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는 사대부 계급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으며 〈호질〉, 〈광문자전〉, 〈역학대도전〉 등에서도 사대부 계급과 도학자들의 도덕적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박지원의 현실 비판과 개혁 의식, 사회 각 분야에 걸친 구체적 개혁의 방법 등은 다른 북학파 실학가들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힘을 얻어 실천되지는 못하였다. 결국 정조가 죽고 60여 년에 걸친 세도정치 시기가 이어지면서 실학 사상가들이 주장하였던 개혁과 변화의 물꼬는 닫혀버리고 오히려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친 퇴행이 일어나게 되고 만다. 그러나 박지원의 사상은 완전히 묻혀버린 것이 아니라 그의 손자인 박규수에 의해 개화사상으로 이어져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이론적 바탕을 이루게 된다.
2. 확장 개념
북학파
홍대용·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우수한 기술을 받아들여 낙후된 조선 사회를 개혁하고 민생을 일으키고자 한 실학 사상가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이들이 주장한 이론적 기치인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따 ‘이용후생 학파’라고도 불린다. ‘북학’이라는 말은 박제가의 저서인 〈북학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 북학파는 중농주의적 실학사상보다도 더 혁신적인 면모를 보이는데 전통적인 주자학적 성리학의 화이관(華夷觀 : 중화와 오랑캐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중화를 추종함)·명분론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조선 시대의 사농공상(士農工商) 네 분야 가운데 가장 말단으로 멸시받았던 상인·상업의 역할을 강조하여 물품의 유통을 통한 경제의 발전과 민생 안정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또한 서서히 접근하여 오던 서구문명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고 발달된 서구의 기술과 제도를 배워 실생활에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북학파의 현실 개혁론은 당대 조선의 사상적, 학문적 경향과 비교했을 때 그 의의가 더욱 선명해질 수 있다. 조선 후기 사회는 왜란과 호란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민생이 어지러워진 상태였다. 그러나 사대부 지배층은 이와 같은 국가적 위기를 현실 개혁을 통한 방법이 아닌, 예전보다 더 강화된 화이관, 주자학적 성리학의 고수라는 퇴행적 방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청나라를 배격하는 정치 논리는 새로운 문물의 유일한 수입 통로를 막아버린 것이나 다름없었으며 일부 지배층은 오히려 명분론에 입각한 북벌을 주장하여 피폐한 국력을 더욱 도탄에 빠질 수도 있게 만들었다. 민간에서는 자영 상공업자의 성장으로 민생 경제가 활성화될 가능성이 움트고 있었지만 사(士)와 농(農)을 제외한 분야에 대한 천시는 오히려 이전 시기보다 더욱 거세졌다.
이러한 때에 북학파에서 주장한 학중국(學中國 :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워야 함)의 이념은 폐쇄적인 소중화의식(小中華意識 : 망한 명나라의 전통을 조선이 이어받았다는 인식)과 전통적인 화이관에 대한 정면도전이나 다름없었다. 북학파에게 중국은 더 이상 사대주의적 입장에서 무조건 숭배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배움과 비판이 동시에 가능한, 우리 조선과 다를 바 없는 동등한 위치에 놓인 하나의 국가에 불과했다. 때문에 북학파의 사상은 한편으로 국가적 자립, 주체성을 주장한 이론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북학파는 특히 상업을 통한 경제의 활성화를 강조하는데 이는 북학파가 가장 활발하게 민간 경제가 성장하고 있던 수도 한양을 기반으로 하였던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들은 여러 상인과 수공업자들을 접하면서 상공업 발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물류 교환이 갖는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다. 북학파는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있던 절대적 빈곤의 원인을 두 가지로 파악한다. 먼저 낮은 생산력에 따른 절대적 빈곤과, 다음으로 물자가 특정 지역에만 편중되어 전국적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발생하는 상대적 빈곤 두 가지이다.
〈허생전〉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물류의 지역적 편재에 따른 폐해는 상업의 발전과 유통시장의 활성화를 통한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북학파는 전국적인 시장망을 형성하고 지역 간의 물류 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수레의 혁신, 도로정비를 통한 육상유통망의 강화, 강과 연안을 이용한 해상유통망의 개선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과 함께 서울의 관 소속 어전 상인들의 독점과 특권을 혁파하고 지방의 중소 상공업자들의 성장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이론은 오늘날 무역을 통한 국가 이익과도 연결되는 것으로 국내의 물류 품목 가운데 시장 경쟁력을 갖춘 품목을 분석하고 대중국 및 대일본 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득까지 전망한 것은 실로 탁월한 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 북학파가 오로지 상공업의 육성에만 혈안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조선 사회의 절대적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농업 분야의 개혁과 생산력 증대의 방법까지 다각도로 검토하였다. 박제가는 농기구나 비료 등 농업에 필요한 기술의 혁신안을 비롯하여 파종·영농·목축·잠업 등 실제 농업과 목축업에 필요한 여러 기술적, 제도적 지침까지 제시한 바 있다. 박지원도 한전론(限田論)을 주장하며 사대부 계급의 대토지 소유를 전면 비판하고 농구의 개량과 도량형의 개량 등 실제 농업 분야에 필요한 제도적 개혁과 보완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3. 관련 지식
1) 홍대용
북학파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주자학적인 공리공론을 비판하고 민중의 생활안정과 번영을 상공업의 발달과 기술혁신을 통해 이룩하려고 하였다. 중국에서 본 바를 조선의 문물과 비교하면서 그 실익을 취하고자 하였고, 중국은 어디까지나 외국이므로 조선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의 주 관심사는 유교적인 원리론보다는 군국과 경제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는 봉건적 신분제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놀고 먹는 자는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형벌을 주며 재주와 학식이 있는 자는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중직에 임명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어떤 신분이라도 교육의 기회를 주고 과거제 대신 공거제를 실시하여 능력 있는 자를 중용하며 공적인 발언권을 허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균전법을 주장하여 전국 토지를 기혼 남자에게 각 2결씩 분배할 것을 주장했으며 저축을 강조했다.
그리고 100만명의 병력 보유와 각 지역의 성곽의 정비, 무력적인 준비성을 강조하면서 부병제를 실시하여 농민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는 동시에, 국가재정의 기반인 세원과 국방의 기반인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는 또한 자연과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과학기술을 ‘정신의 극치’라고 보았다. 특히 천문학과 수학에 관심을 기울여 지전설을 주장하였고, 〈주해수용〉을 저술하여 일반 산술에서 대수학·기하학에 이르는 수학 전반을 정리하기도 했다.
2) 박제가
소년 시절부터 시·서·화에 뛰어나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등과 교류하였고, 1778년 사은사를 따라 이덕무와 함께 청나라에 갔다 오면서 청나라에서 보고들은 것을 정리해 〈북학의〉 내·외편을 저술하였다. 이 책의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 방안을 다루었다. 그는 주로 신분적인 차별을 타파하고 상공업을 장려해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국민 생활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3) 중농학파
성리학의 관념화, 예학의 의식화에 대한 반성을 하고, 민생문제에 주목하여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실학의 한 갈래. 유형원(1622~1673), 이익(1681~1763), 정약용(1762~1836)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민본주의를 지향하고 민의 토대인 토지제도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농민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모든 군역과 부세를 토지를 대상으로 하여 일률적으로 부과하되, 다만 사대부에게는 특권을 인정하여 더 많은 토지를 인정하자는 이론이었다. 이는 토호와 양반들의 토지집적으로 야기된 토지제도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토지의 국유화와 균전적 재분배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신분제를 극복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이익은 〈성호사설〉과 〈곽우록〉에서 한전론을 주장하였는데 원래 전지란 국가의 토지이므로 토지의 사적인 점유를 배격하고 토지에 대한 절대적 처분권 및 관리권이 국가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전론은 국가의 권력으로 강력한 법을 세워 중소전주들의 몰락을 방지하는데 그 중점을 두었는데, ① 국가에서 한 집에 소요되는 기준량을 작성해 토지 면적을 제한하고 그것으로 1가정의 영업전을 삼게 하고, ② 제한된 영업전을 제외한 전지에 대해서는 무제한 자유 매매를 허락해 어떠한 경우에도 강요하지 않으며, ③ 영업전으로 제한된 전지를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발견되는 대로 산 자는 남의 영업전을 빼앗은 죄로, 판 자는 몰래 판 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④ 일체의 토지 매매는 관에 보고한 뒤에 이루어지게 하고, 관에서는 전안을 살펴서 기록한 뒤 문권을 만들어 주되 관이 인정한 문권이 없는 자는 토지 매매를 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전제 개혁론은 현실적으로 부귀한 자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점진적인 개혁의 방안으로 내세운 것이다.
정약용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및 〈전론〉에서 여전론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지주-전호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당시의 사회경제체제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농민위주의 토지개혁론이었다. 여전제의 기본원리는 전국에 자연 촌락을 기초로 30호를 1단위로 하는 여(閭)를 설치하고, 3여=1리, 5리=1방, 5방=1읍으로 이루어지는 행정체계를 구축한 뒤, 각 여(閭)내의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공동소유로 만들어 공동경작 하도록 하고, 생산물은 여민이 그 동안 투입한 노동량에 따라 공평하게 분배하도록 하자는 주장이다. 이는 농사에 직접 참여하는 자가 전지를 소유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것으로 봉건지주층을 부정하고 농민층의 경제적 평등을 추구한 혁신적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여전제가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이 낮으므로 정전제라는 타협안도 제시하였는데 이는 국가가 공전을 매입하거나 지주로부터 사유지를 기증받아 가족의 노동량에 따라 재분배함으로써 점진적 토지의 균산화를 이룩하되, 이것이 여의치 못할 경우에는 토지 경작의 재분배를 실시하여 전호의 소작지 보유만이라도 균등하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4) 금석학
굳은 돌이나 단단한 물질에 기록된 금석문을 해석 분류하는 학문을 금석학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금석문은 기념대상이 되는 사건이 치루어진 직후 제작되기 때문에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이나 서체나 문체에 의한 고문서 분석 등을 통해 금석문의 제작연대를 파악하는 일은 고대의 역사적 사건의 연대를 아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또한 이미 사라져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언어로 기록된 금석문의 경우 고대 문화의 기원과 각 어족의 기원 등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우리 나라는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전통문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금석문의 열기도 높아졌다. 또 문인들이 서예를 위해서도 금석문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금석문의 탁본과 정리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이전의 서예 중심의 연구에서 내용 중심의 연구로 바뀌었는데 이는 청대 고증학과 실학의 영향이었다. 특히 김정희는 청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금석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는 중국의 금석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및 우리 금석에 대한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이 방면에 많은 후진을 배출했다.
5) 고증학
중국 청나라 때 유행한 학문 연구의 흐름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경제, 역사, 지리, 언어, 천문 등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다양한 분야를 광범위하게 연구한 학문 방법론이다.
원래 고증학이 일어나기 이전, 명나라 때에도 현실 연관성을 중시한 학문 연구가 양명학(陽明學)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한 바 있다. 그러나 양명학은 전통적인 성리학의 세계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학문으로, 유학의 두 축을 이루는 이(理)와 기(氣) 가운데 이를 우선시하여 경제나 사회 문제 이전에 개인의 앎(知)과 행동(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고증학은 여전히 성리학적 틀 속에 갇혀 있던 양명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고전 연구와 실증적 연구의 방법론으로 대두하게 된다.
고증학의 학문 연구 방법은 실사구시적 고전 연구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고증학자들은 관념적 경향이 짙은 송대 이후의 주자학을 비판하고 현실의 정치, 경제 문제에 관심을 두었던 고대의 유학 경전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이들 저서를 실증적, 귀납적 방법으로 연구하였던 것이다. 고증학의 연구 분야는 실로 다양한데 여기에는 경제학, 역사학, 지리학뿐만 아니라 예학, 음운학, 의학, 역산, 천문 등 현실과 관련된 거의 모든 영역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실증적 연구 방법은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고 연구하여 다양한 성과를 낳았지만 이들 연구의 결과들이 인간의 삶에 연관된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까지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고증학은 어디까지나 학문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이었으며 이전까지의 학문적·사상적 경향에 대한 반발과 극복이라는 의의를 지니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현실 연관성을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증학적 연구 방법론은 조선의 개혁적 지식인들에게 수용, 발전됨으로써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실용적 흐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흐름이 실학이었으며 정약용 등의 중농학파나 홍대용·박지원 등의 북학파 이외에도 추사 김정희의 여러 저술에서 고증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김정희는 청나라 고증학의 대가였던 옹방강이나 완원과 직접 교류한 바 있으며 이들의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 금석학에 큰 획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청나라의 고증학이 학문 연구의 방법론으로서 실증적 풍토를 이루는데 성공하였지만 그 지향하는 바가 현실 문제의 개선이 아닌 순수학문의 성격에 머물렀던 데 반해, 고증학을 적극 수용한 조선의 실학은 단순한 학문연구로서의 틀을 넘어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천적 흐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6) 이용후생(利用厚生)
글자 그대로의 뜻을 풀이하면 풍요로운 경제와 넉넉한 생활을 의미한다. 실학파 가운데서도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중심이 된 북학파에서 적극적으로 주장한 이념으로 관념적 사변이나 현실적 연관을 떠난 인륜만을 강조하던 주자학적 사고를 비판하고 현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천적 학문을 이루기 위한 기치로 사용되었다.
원래 이용후생이란 말은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을 합친 말인데 이는 고대의 경서인 〈상서〉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상서〉에서는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 유화(惟和)’라 하여 이용·후생 외에도 정덕과 유화를 함께 거론하고 있다. ‘정덕(正德)’이란 정의롭고 덕이 있음인데 이는 유교에서 강조하는 마음가짐, 관념적 지향점에 해당한다. 이는 곧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자학적 성리학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정덕’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았다. ‘정덕’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유교적 덕목들인 삼강오륜의 형태로 구체화되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유교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이념적 지표로 작용하였다.
북학파가 주장한 이용후생의 이념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서 더욱 부각된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복리를 주장한 현실론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윤리 우위의 정치를 비판하고 현실 문제, 경제 우위의 민생 정치를 주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의 정치가 성리학이라는 학문적 질서와 직결되는 것이었던 만큼 이용후생의 이념은 새로운 정치 이론이기도 했던 것이다.
7) 북벌론
박지원 등이 비판하였던 당대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북벌론의 허구성이다. 원래 북벌론은 박지원의 활동 시기보다 100여 년 전인 효종 때에 주창된 것으로 병자호란에서의 치욕을 갚기 위해 청을 배척하고 멸망한 명나라의 복수를 하자는 척화론(斥和論)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본격적인 북벌계획은 효종이 즉위한 1649년부터 시작되는데,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 귀국해 왕위에 오른 효종은 북벌을 단행하기 위해 척화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송시열 등을 등용하고 군비를 확충한다.
북벌계획은 표면적으로 척화론에 따라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꾀하는 것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 왕이 직접 관할하는 군사력의 확충을 꾀한 것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념적으로는 북벌에 찬성하면서도 실제 그 시행 계획에 있어서는 민생 불안과 지나친 왕권 강화를 우려하여 반대한 척화파 관리들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1659년 효종이 급사함에 따라 북벌계획은 중단되었지만 청나라를 배척하고 이미 멸망한 명을 숭상하며 소중화사상을 내세우는 사상적·이념적 풍토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박지원 등의 활동 시기인 정조 시대까지 이어져 개혁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대부 지배층은 이상적으로나마 북벌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4. 관련 작품
양반전
박지원의 저술은 모두 《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연암집》은 1900년에 김만식을 비롯한 23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중에서 〈양반전〉은 《방경각외전》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원도 정선에 학덕이 높은 양반이 살고 있었다. 어질고 독서를 좋아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해마다 관곡을 빌려 먹었는데 여러 해가 되어 1000석이나 빚을 지게 되었다. 순찰 중인 관찰사가 관곡이 부족한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여 군수에게 그 양반을 가두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양반이 도저히 그것을 갚을 수 없다는 소식을 들은 서민 부자가 양반을 찾아가 이 빚을 갚아주는 대신 양반 신분을 양도받기로 한다. 경위를 알게 된 군수는 양반권 매매 증서에 양반으로서 갖추어야 할 형식적 행동 절차 백 가지와 갖가지 권리를 넣고 그 부자 앞에서 읽게 하였다. 부자는 그 문권의 내용을 듣다 양반의 생활은 겉치레뿐이고 구속이 심하며, 갖가지 권리가 도둑들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여 결국 양반되기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 소설은 몰락하는 양반들의 위선적인 생활 모습을 풍자하고, 상공업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계급으로 성장한 부농·중인계층의 인간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독특한 풍자와 해학을 통해 태동하고 있던 근대 의식의 비판적 정신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사상을 문학작품 속에 반영하고 현실 생활 내에서 소재를 구하는 등 이전의 한문소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박지원은 양란을 겪고 난 이후 평민 의식이 성장하고 조선의 엄격한 사회가 붕괴되던 시기에, 당시 기득권층이 현실과 괴리된 관념적 명분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양반전〉은 밀린 환곡1)을 갚기 위해 양반이 자신의 권리를 서민에게 판다는 설정으로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들의 처지를 비아냥거리며,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양반들에게 새로운 각성을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 기출 논제
[네이버 지식백과] 박지원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한림학사)